퍼온글)천리포수목원, 민병갈원장

목련의 계절 4월이면 목련과 관련하여 특별히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태안반도의 한 모퉁이에 수목원을 차려 지구상의 모든 목련을 모으려 했던 귀화 미국인 민병갈(閔丙渴)이다. 일제 패망후 미군 장교로 한국에 첫 발을 디뎠던 그는 57년간 한국에서 살며 세계적인 자연동산을 꾸며 놓고 지난해 4월8일 81세로 숨을 거두고 이 땅에 묻혔다. 그의 1주기를 맞는 올 4월은 나무를 자신의 분신처럼 사랑하며 자연보호에 헌신했던 한 이방인에 대한 추모의 정이 남다른 달이다.

민병갈은 광복 직후 우리나라 현대사의 격동기를 겪으며 역사의 현장에 서 있었던 특이한 경력을 갖고 있다. 한반도에 진주한 미군 24군단의 선발대 장교로 서울에 들어와 조선총독부의 통신시설을 장악했고, 미국 군정청 관리로 일하며 정부 수립 때까지 미국 대한정책의 일선 집행관 노릇을 했다. 서양인으로는 최초로 한국에 귀화한 그는 해안국립공원 태안반도에 대단위 수목원을 세워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목련동산을 일궈 놓았다.

민병갈과 한국의 운명적 만남

민병갈이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된 경위는 매우 극적이고 운명적이었다. 1945년 9월8일. 그날의 서해 바다는 유례 없는 대규모 선단에 놀랐는지 풍파조차 일지 않았다. 오키나와를 출발하여 어둠의 바다를 뚫고 들어온 미군 함대가 월미도 근처에 닻을 내린 시간은 새벽 다섯 시. 1886년 대동강의 셔먼호 사건 이후 59년 만에 미국 배로서는 처음으로 한국 연안에 정박한 순간이었다. 이날은 한국을 지배하던 일본이 미국에 항복한 지 23일째 되는 날로 인천 앞바다는 전승국의 함대가 위압적으로 들어차 긴장감이 감돌았다.

날은 밝았지만 연안 주민들은 아직 잠을 덜 깬 시간이었다. 그런데 난데없는 배들이 쏟아내는 소음에 잠을 깬 주민들은 해안으로 나와 보고는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들이 본 것은 육지로 몰려오는 수많은 미군 상륙정들이었다. 얼굴에 검댕이 칠을 하고 완전무장한 미군들은 무섭기만 했다.

그런데 한 상륙정에서 내리는 13명은 다른 군인들처럼 민첩하지 못했고 지휘 장교마저 군인답지 않게 어리숙해 보였다. 더욱 신기한 것은 장교 한 사람만 키가 큰 백인일 뿐 나머지 대원들은 한국인과 비슷한 동양인이라는 점이었다. 부두의 구경꾼들에게 흥미를 끈 이 부대는 일본계 미국인으로 편성된 ‘씨그’(CCIG, Civil Censorship Intelligence Grou p)라는 정보대였고, 지휘장교는 칼 밀러(Carl F. Miller)라는 24세의 풋내기 해군 중위였다.

밀러 중위가 이날 함상에서 처음 본 한국 땅은 월미도였다. 그리고 얼마 후 상륙정에 올라 인천항 부두로 들어오면서 그는 한국의 상쾌한 아침을 맛보았다. 해풍을 타고 코끝에 닿는 갯내음이 약간 비릿했지만 얼굴을 스치는 새벽 공기는 차가우면서도 신선했다.

막상 말로만 듣던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왔다 싶으니 긴장감보다 호기심이 앞섰다. 뒷날 민병갈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에 귀화한 그는 1980년 영문잡지 ‘아리랑’과의 인터뷰에서 “전투훈련을 한 번도 받지 않은 통역장교였던 나는 무거운 M1 소총과 허리에 매단 수류탄이 거추장스럽기만 했다”고 상륙 당시를 회고했다.

미군이 상륙한 인천항 도크에는 뜻밖에도 일본의 고위 관료들이 미군을 마중나와 있었다. 키가 작은 일본인들이 높은 모자에 흰 장갑을 낀 서양 귀족형 정장을 하고 뻣뻣이 서 있는 모습은 어색하기만 했다. 일본어 통역장교이기도 했던 밀러는 이들과 악수를 나누고 부대원들과 함께 열차에 올랐다. 이날 인천항에 들어온 미군의 일부는 월미도에 남고 주력부대는 경인 철도를 이용하여 용산까지 들어왔다. 밀러가 지휘하는 CCIG 부대는 중앙우체국을 장악하는 선발대 임무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가장 먼저 서울 중심가로 들어가야 했다.

열차가 부두 하역장을 출발하여 용산 역까지 오는 동안 밀러는 한국의 대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맑은 하늘, 야트막한 산, 한가로운 촌락 등 한국의 자연과 풍물이 정겹기만 했다. 용산에 도착한 미군 수송 열차는 주력 부대를 하차시킨 다음 밀러 일행 13명만 태운 채 서울역으로 진입했다. 그런데 플랫폼에서 트럭에 옮겨 탄 밀러 부대는 역 구내를 벗어나는 순간 예기치 않은 인파에 휘말리는 사태가 벌어졌다. 미군이 기차를 타고 온다는 소문을 듣고 수많은 시민들이 환영나와 있었던 것이다.

뜻밖의 군중에 포위돼 트럭이 움직일 수 없게 되자 밀러는 지휘관으로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길을 뚫어 보려고 일단 차에서 내렸으나 이번에는 그가 집중적인 환영 인물로 포위돼 더욱 난처해졌다. 군중들은 밀러를 사령관쯤으로 생각했는지 집중적으로 그를 에워싸고 태극기를 흔들며 환성을 터뜨렸다. 힘겹게 군중을 벗어난 밀러 부대는 중앙우체국에 도착해 성조기를 게양한 후 가까운 곳에 있던 조선호텔(지금의 웨스틴 조선호텔) 마당에 군막을 쳤다.

그날로부터 정확히 50년 뒤인 1995년 9월8일 저녁. 밀러는 조선호텔측이 베푼 ‘민병갈 선생 한국생활 50주년 축하 모임’에서 인사말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본의 아니게 한국민들의 대규모 환영을 받는 최초의 미군 지휘관이 됐습니다. 하지 사령관에게는 대단히 미안한 일이었지요. 사람들이 자꾸 내게로 몰려 와 계급장을 보이며 ‘나는 장군이 아니다’라고 일본 말로 외쳤지만 군중들은 막무가내였습니다. 할 수 없이 나는 대원들을 하차시켜 도보 행군으로 길을 열었지요. 내가 졸지에 미군 대표가 된 것이 우습고 당혹스러웠습니다. 미국이 한국을 위해 일본과 싸운 것도 아닌데 한국인들이 미군을 환영해 주는 것도 미안했습니다. 50년 전의 오늘은 내 생애에서 가장 긴 날이었습니다.”

이날 파티는 밀러 부대가 조선호텔 마당에서 야영한 첫 날의 50돌을 기념하여 호텔측이 밀러를 위해 특별히 마련한 자리였다. 마고자 등 전통 한복차림으로 파티장에 나온 밀러는 패기 넘치는 미군의 청년 장교에서 어느덧 백발이 성성한 74세의 한국 노인으로 변해 있었다.

당시 그는 민병갈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에 귀화한 지 16년째를 맞고 있었는데, 외모만 서양인일 뿐 의식주의 습성은 한국인과 다름없었다. 김치와 깍두기를 즐기는 식성이 그렇고, 기와집과 온돌을 좋아하는 습성이 또한 그러했다.

img2R밀러가 한국 땅을 처음 밟은 날은 1945년 9월8일이지만 한국 사람을 처음 만난 때는 그보다 4∼5개월 전이었다. 오키나와 미군사령부에서 통역장교로 있을 때 일본군 포로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상당수의 한국인을 만났던 것이다. 그들은 강제로 일본군에 끌려온 사람들이었는데, 밀러는 이들에게서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친밀한 인상을 받았다.

특히 그의 시선을 끈 포로는 종군위안부로 부산 지역에서 끌려온 앳된 여성들이었다. 가냘픈 체구, 순박한 얼굴, 겁먹은 표정들은 청년 장교에게 깊은 연민을 갖게 했다. 밀러는 이때 강력한 코리아에 대한 유혹을 느끼고 한국행을 지원하게 됐다. 원래 그는 일본 파견 CCIG 대장으로 편성됐었으나 한국에 가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동료 장교와 자리를 바꿔 인천행 전함을 타게 됐던 것이다.

조선호텔 마당의 차가운 군막에서 한국의 첫 밤을 보낸 밀러는 이튿날 지프에 올라 소공동과 명동 그리고 태평로 일대를 돌아봤다. 사무실로 쓸 만한 건물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는 점령군의 선발대 장교로서 일본 재산이라면 차지하지 못할 것이 없었다. 처음에는 접수한 중앙우체국 건물을 쓰려 했으나 가까운 곳에 그보다 훨씬 좋은 건물이 있음을 발견하고 생각을 바꿨다. 명동에 있던 호사스러운 공연장인 시공관(전 명동예술극장)이었다. 밀러는 이곳에 CCIG 본부를 차리고 10개월간 일본인의 통신물을 검열하고 그들의 재산을 관리하는 업무를 수행했다.

밀러가 처음 본 한국은 서양에 알려진 말 그대로 조용한 아침의 나라였다. 그는 지도를 들고 전차 길이 난 서울의 중심가부터 돌아봤다. 이때 그를 사로잡은 것은 흰 옷을 입은 한국인들의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미군 차가 오면 슬슬 비켜서며 신기한 듯 바라보는 행인들의 순박한 모습에서 그는 오키나와에서 받았던 코리안의 이미지가 결코 틀리지 않았음을 재확인했다. 그의 눈에 비친 한국인은 자연에 순응하면서 꾸밈없이 살아가는, 지구상에서 가장 착한 사람들이었다.

한국에 살으리랐다

밀러 중위가 이끄는 CCIG 부대의 임무는 1946년 여름 10개월 만에 끝났다. 당초부터 군인 체질이 아니었던 밀러는 학업을 계속할 셈으로 이 해 8월 귀국하여 군복을 벗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에는 한국에 대한 미련이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고심 끝에 그는 대학원 진학을 포기하고 워싱턴에 있는 펜타곤(국방부)을 찾아가 서울 근무를 신청했다.

밀러는 주한 미군총사령부 사법부 정책고문관 발령을 받고 1947년 1월 다시 한국으로 왔다. 그의 한국 직장은 군정청 소속으로 주로 적산(敵産-일본인 재산)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그때 나이는 26세. 엄격한 군대 규율에서 벗어난 그는 자유로운 민간인 신분으로 본격적인 한국 수업에 들어갔다.

서울의 미 군정청에서 근무한 2년은 밀러에게 한국의 자연을 익히는 초등 과정의 수학 기간이었다. 그는 이미 군인 시절 10개월 간의 입문 과정을 마친 상태였다. 그가 군정청에서 일했던 1947∼48년은 극심한 경제난 속에 전승국의 신탁통치 여부를 놓고 국론이 분열되고, 좌우익이 첨예한 사상대립을 벌이는 등 사회 전체가 시끄러웠던 시기였다. 그런 혼란중에도 점령국 관리로서 거칠 것이 없었던 밀러는 여유만만하게 한국의 자연과 풍물을 즐겼다.

군인 시절 밀러가 최초로 즐긴 한국의 자연은 서울의 남산이었다. 근무지인 명동이나 숙소인 회현동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남산은 그에게는 알맞은 산책 코스였다. 틈만 나면 서울 시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남산에 올라 유서 깊은 고도(古都)의 전경을 조망했다. 그의 눈길에는 고궁보다 오밀조밀한 초가들에 더 호감이 갔다. 그를 최초로 사로잡은 한국의 자연은 북한산의 수려함이었다.

군정 시절에는 그의 산행 반경이 동쪽으로 치악산과 오대산까지, 남쪽으로는 속리산과 지리산까지 그리고 1948년 여름에는 멀리 한라산까지 이르렀다. 분단의 현장을 보고 싶었던 그는 38선을 두 차례나 찾아가 소련 보초병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는 러시아어를 할 줄 알았다.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군정청이 문을 닫게 되자 밀러는 다시 귀국해야 했다. 한동안 서울에 남아 있던 그는 적당한 일자리가 없어 일단 미국으로 돌아갔으나 마음은 여전히 한국에 있었다. 이번에는 국무부 관할의 해외원조 기관인 원조협조처(ECA:AID의 전신)에 취직해 1949년 7월, 세번째로 한국을 찾았다. 그러나 한국에서 살고 싶었던 그의 집념은 또 한번 제동이 걸렸다. 새 직장에서 근무한 지 1년도 안돼 6·25 전쟁이 터져 일본으로 피난을 떠났기 때문이다.

일본 체류 두 달 만에 전시 임시수도였던 부산으로 돌아온 밀러는 유엔군의 인천상륙 작전에 맞춰 위험한 북행(北行) 열차에 올랐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9월말,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열차 작전은 밀러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대장정이었다. 그것은 5년 전의 인천∼서울 열차작전과는 비교가 안 되는 전시 작전이었다. 영문잡지 ‘아리랑’에 실린 밀러의 2차 서울 장정 회고담은 그의 생애에서 1945년 9월의 인천 상륙에 이은 또 다른 하이라이트였다.

“1945년 인천에서의 서울 입성 작전은 한 시간 만에 끝났는데 1950년 부산에서의 서울 입성 작전은 나흘 반이 걸렸습니다. 일요일 아침 10시에 부산역을 출발해 목요일 오후 4시 영등포 역에 도착했으니까요. 열차 안에서는 야전식으로 끼니를 때우고 나무 의자에서 새우잠을 잤습니다. 영등포에서는 퇴각하지 못했던 북한군이 한밤중에 열차를 공격해 목숨을 잃을 뻔했지요. 그런데 전쟁 직후 한강 철교가 폭파돼 열차가 더 이상 갈 수 없었습니다. 나는 미군으로부터 지프 한 대를 구해 임시로 가설된 부교를 이용하여 간신히 한강을 건넜습니다.”

한국의 명산·명소를 모두 가 보고 싶었던 밀러의 집념은 6·25 전쟁중에도 멈추지 않았다. 1950년 11월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북진하자 그는 북한의 명산에 가 볼 욕심으로 눈보라를 맞으며 북쪽으로 차를 몰았으나 개성에서 더 이상 갈 수 없었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역전된 줄 몰랐던 그는 유엔군의 후퇴 행렬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에서 살고 싶었던 밀러에게는 시련이 끊이지 않았다. 간염 치료를 위해 일본과 미국을 오가는 동안 ECA가 대만으로 옮겨가 타이페이로 전근해야 할 형편에 놓이게 됐다. 1951년 두말 없이 사표를 던진 그는 유엔 군사원조단(UNCACK)으로 자리를 옮겨 한국생활을 계속했다. 얼마 후에는 한국은행의 미국인 고문을 보좌하는 임시직으로 있다 계약기간이 끝나 한국을 떠났다.

그리고 1953년 한국은행에 재취직하여 자리를 잡았다. 밀러는 한국에 머무르기 위해 7년 동안 여섯 군데의 근무처를 전전했던 것이다.

밀러는 1953년 한국은행에 취직하여 안정된 직장을 갖게 되면서부터 자연학습을 한국 친화 방식으로 바꾸었다. 미국 기관에서 근무한 7년은 대부분 자동차를 이용한 단독 답사였기 때문에 한국의 명소와 지리를 익히는 이상의 발전이 없었다. 한국의 자연과 풍물을 좀 더 알기 위해서는 여러 사람과 어울리면서 직접 몸으로 체험하는 현장주의가 바람직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한 장거리 탐사 여행이었다. 1950년대 중반 밀러는 혼자 배낭을 메고 청량리 버스정류장에 자주 나타났다.

한국은행 시절 초기에 밀러가 한국의 자연과 함께 탐닉한 또 하나는 한국의 풍물이었다. 일찍부터 한국적인 여유와 순박함에 심취했던 그의 눈에는 꾸밈없이 살아가는 한국인들이 이루어 놓은 생활문화가 또 다른 아름다움으로 떠올랐다. 토속적이며 인간적인 한국의 풍물들은 한국인에게서 그랬듯 친근하게 느껴졌다. 밀러와 50여 년간 친구로 지낸 서정호(徐正虎)는 그의 유별난 한국의 풍물 사랑을 이렇게 소개했다(서정호는 1945년 밀러가 부대장으로 있던 미군 CCIG 부대에서 일한 경력 때문에 밀러와 특별한 인연을 갖고 있다).

“한국전쟁이 휴전에 들어간 1953년 8월부터 한동안 미국에 가 있던 밀러가 이듬해 다시 나타났어요. 한국은행에서 다시 일하게 됐다며 북한에 소속돼 있던 설악산이 휴전선 이남으로 넘어왔다고 반가워하더군요. 그리고 강원도로 떠날 채비를 하는 것을 봤는데 며칠 후 한은 고문실을 방문한 나에게 대관령에서 서당 구경을 하고 왔다고 자랑했습니다. 망건 쓴 훈장과 댕기 딴 학생들의 모습을 한바탕 설명하며 대단한 발견을 한 듯한 표정이더군요.”

그러나 6·25 전쟁 직후의 대중교통은 극도로 열악하여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밀러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버스 여행의 문제는 화장실이었다. 밀러는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한 여행이 쉽지 않자 그가 오랫동안 관여했던 영국왕립 아세아학회(RAS:Royal Asiatic Society) 한국지부를 활용한 단체여행을 구상했다. RAS는 1823년 영국에서 발족한 유서 깊은 단체인데 한국지부(RAS-KB)는 구한말인 1900년 10월에 결성돼 있었으나 일제의 한국 병탄으로 소멸된 상태였다. 밀러는 군정청 근무 때 이 같은 사실을 알고 1947년 이 단체의 부활을 주도하여 회장직을 맡고 있었다. 회원들은 외교관·선교사 등 모두 외국인이었다.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한 한국의 자연과 풍물 탐사방법으로 밀러가 1950년대 중반에 기획한 ‘RAS투어’는 결과적으로 밀러 개인의 수익사업이 되고 말았다. 우리나라 단체관광의 시초가 된 RAS투어는 돈 많고 호기심 많은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수입이 짭짤했다. 초기의 교통편은 극도로 열악하여 열차를 개조해 쓰거나 미군 버스를 이용했다. 대사급이나 미군 장성이 끼어있는 제주도 관광 때는 해군에서 함정까지 지원했다. 1950년대말 울릉도에 갔을 때는 섬이 생긴 이래 처음으로 외국인 손님이 많이 왔다며 군수가 소를 잡아 주는 환대를 베풀었다.

RAS 관광단을 이끌고 전국의 명산대찰을 돌던 밀러는 사찰을 감싸고 자라는 다양한 나무들에게서 특별한 공식 하나를 발견했다. 그것은 아무리 헐벗은 산이라도 절이 있으면 그 주변에는 나무가 많다는 사실이었다.

‘절=숲의 법칙’은 밀러에게 중대한 암시로 떠올랐다. 그가 얼마 뒤 필생의 사업으로 시작한 수목원 사업은 이 공식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었다. 이때 그는 스님들로부터 사찰 주변에서 자라는 나무들에 대한 지식을 많이 얻었다. 뒷날 밀러는 우리나라의 산에 나무를 지켜주는 절이 많지 않았더라면 산림이 크게 황폐했을 것이라며 스님들의 자연 보전 공로를 높이 평가했다.

민병갈의 한국에 대한 열정

밀러는 직장을 옮겨다니면서도 한국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군정청 직원으로 있을 때 좀더 체계있는 학습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찾은 곳은 미 8군 도서관이었다. 그러나 그의 관심사였던 한국의 자연·문화·풍물에 관한 책은 드물고 역사·지리·정치에 관한 책이 대부분이어서 도움이 안 됐다. 대학 도서관을 몇 군데 찾아갔으나 읽을 만한 책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서울 뒷골목의 고서방을 찾는 일이었다.

군정청 시절 밀러가 한국에 관한 책을 많이 읽게 된 데는 서울 인사동에 있던 ‘통문관’의 역할이 컸다. 이 고서방의 주인 이겸로(李謙魯)와는 일본어 소통이 가능하여 큰 어려움 없이 책을 주문할 수 있었다. 인사동에서 산기(山氣) 선생으로 통하던 이겸로는 지금도 93세의 고령을 무릅쓰고 통문관 2층 사무실에 매일 출근하는 노익장을 보인다. 지난 1월 돋보기를 들고 고서와 서화를 정리하던 그는 56년 전에 본 밀러의 모습을 생생하게 이야기했다.

“군정 때 웬 젊은 미국인이 와서 더듬거리는 한국말로 영어로 쓴 한국 관련 책을 사겠다고 해요. 한국말이 잘 안 통하면 일본 말이 거침없이 나와 놀랐지요. 그때 나는 꽤 많은 책을 구해 주었지요. 그는 우리 가게의 단골이 됐는데, 나중에 하는 말이 6·25 전쟁 때 부산으로 옮겨 놨던 책들이 모두 불타 버렸대요. 역 창고에 불이 나 그랬다는데 참으로 아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밀러는 통문관을 통해 수집한 한국 관련 영문 책자를 빠짐없이 정독했다. 그 때 읽은 책 중 하나가 ‘하멜 표류기’였다. 이겸로에 따르면 밀러는 휴전 후에도 통문관에 자주 들러 고문서를 많이 사 갔다고 한다. 그가 수집한 책들 중에는 ‘조선 고지도’등 희귀본이 많았는데 식물 원예학에 관련된 서적을 제외한 5,000여 권의 장서는 모두 1986년 9월 이화여대 100주년기념도서관에 기증했다.

밀러가 서양인으로는 드물게 한자에 밝고 일본어를 잘 하게 된 데는 그럴 만한 교육적 배경이 있었다. 1921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에 있는 웨스트 피츠턴에서 태어난 그는 버크넬(Bucknell)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한 자연과학도였다. 외국어에 남다른 재능이 있던 그는 대학 시절 이미 러시아어와 독일어가 상당 수준에 올라 있었고 심심풀이로 한자를 익히기도 했다.

그런 그가 1944년 콜로라도 대학의 해군 정보학교 일본어 과정에 입교한 것은 징병에 걸리지 않으려는 편법이기도 했다. 그는 이곳에서 1년 동안 일본어만 사용해야 하는 밀폐교육을 마친 뒤 1945년 4월 오키나와 미군사령부의 통역장교로 배치됐다. 밀러의 한자 실력은 한자 투성이였던 1960년대의 한국 신문을 불편 없이 읽을 정도였다.

밀러가 한국 이름 민병갈을 갖게 된 시기는 1960년대 초반이었다. 한국 이름을 갖고 싶었던 그는 당시 가까이 지내던 민병도(閔丙燾) 한은 총재의 성이 자신의 성 ‘밀러’의 첫 발음과 비슷한 것에 착안하여 이를 따르기로 했다. 이름의 마지막 자 ‘갈’(渴)은 자신의 영어 이름 ‘칼’에서 따왔다.

그런데 그가 1979년 한국에 귀화하여 호적 신청을 할 때 본관(本貫)을 정해야 하는 서류상의 문제가 생겼다. 밀러는 자신의 미국 고향의 이름을 따 ‘펜실베이니아 민씨’로 하자고 제안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민병도의 본관인 여흥(驪興)을 따랐다. 그는 이듬해 문중 원로들을 천리포수목원에 초대하여 성대한 종친회를 베풀었다.

천리포와의 첫 인연

민병갈이 천리포에 수목원의 터전을 잡게 된 것은 지극히 우연이었다. 1950년대말 한국은행 고문직에 있었던 그는 여름철이 되면 직장 동료이자 한은 간부였던 송인상(宋仁相·전 재무부 장관)·장기영(張基榮·전 한국일보 사주) 등과 함께 만리포 해수욕장을 찾는 일이 많았다. 한국의 자연과 인심에 푹 빠져 있던 그에게는 해수욕보다 서해의 낙조가 더 큰 매력이었고, 현지 주민과 어울리는 것 또한 큰 즐거움이었다. 그때 이미 한국에 온 지 15년이 넘었던 그의 한국어 실력은 한국인 누구와도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없을 정도였다.

1962년 여름. 예년처럼 만리포 해수욕장을 찾은 민병갈은 이웃에 있는 천리포로 산책을 나섰다가 한 마을 노인으로부터 간절한 부탁 하나를 받았다. 전부터 안면이 있던 그는 과년한 딸의 혼수비용으로 돈이 필요하다며 자신의 야산 6,000평을 사달라고 조르는 것이었다. 민병갈은 처음에는 완곡하게 거절했으나 거듭 부탁하는 노인의 사정이 딱해 보여 돕는 셈치고 그의 야산을 사기로 했다. 만리포 근처에 별장을 갖고 싶었던 그에게는 당시의 화폐 단위로 평당 200환씩, 120만환은 큰 부담이 아니었다. 이렇듯 막연한 생각으로 산 이 땅은 뒷날 18만평 규모의 수목원으로 성장하는 바탕이 됐다.

미국인이 땅을 샀다는 소문이 돌자 많은 땅 주인들이 민병갈을 찾아와 자기 땅도 사달라고 졸랐다. 돈에 별로 구애받지 않던 민병갈은 이듬해부터 조금씩 땅을 사들여 1966년 말에는 소유지가 1만9,000평으로 늘어났다. 1970년에는 해안에서 300m쯤 떨어져 있는 ‘닭섬’이라는 무인도를 사들였다. 닭고기를 지독히 싫어했던 그는 섬 이름을 ‘낭새섬’으로 바꾸는 작명술도 발휘했다. 이 섬에 낭새라는 조류가 서식했던 점에 착안하여 이같이 이름을 지은 것이었다. 당시 국내법으로는 외국인이 땅을 살 수 없었기 때문에 양아들이나 한국인 친지 이름을 빌렸다.

img3L생각 밖으로 땅이 불어나자 민병갈은 천리포 땅에 본격적으로 나무를 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1960년대의 민병갈은 RAS투어와 증권 투자 등 돈벌이에 여념이 없었다. 1970년 식목철을 맞아 민병갈은 천리포에 아담한 자연동산을 꾸밀 생각으로 첫 작업에 들어갔다. 이때 심은 나무들은 재래종 중심의 방풍림과 정원수 정도였다. 그가 처음 사들인 땅은 해풍을 많이 탔기 때문에 바람막이로 천리포에서 많이 자생하는 곰솔을 심었다. 정원수는 주로 꽃나무를 택했다.

그로부터 9년 뒤 한국으로 귀화한 그는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천리포수목원의 초기 구상을 이렇게 회고했다.

“처음에는 2만평 정도의 자연농장을 꾸밀 생각이었습니다. 아담한 한옥을 짓고 주변에는 내가 좋아하는 꽃나무를 많이 심을 작정을 했지요.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나의 식물 지식은 거의 백지 상태여서 어떤 나무를 심어야 좋을지 몰라 사 둔 땅은 버려둔 채 나는 자연 답사에만 전념했습니다. 나무를 심기 시작한 초기에는 목련이나 장미 등 보기 좋은 꽃나무에 집착했는데, 내가 산 땅은 토질이 나빠 꽃나무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이때 민병갈이 천리포 전진기지로 삼은 천리포 집은 서울에서 실어온 낡은 기와집이었다. 남달리 한옥을 좋아했던 그는 서울에서도 기와집에 살고 있었는데 도시계획으로 헐리게 된 한옥 세 채를 천리포에 옮겨 놓았다. 당시 그의 소유지 안에 있던 초가는 지금까지 100년 넘게 보존돼 태안군의 명물로 남아 있다. 현재 천리포수목원에 있는 15채의 한옥은 민병갈의 취향에 따른 것으로, 다섯 채는 옮겨 지은 것이고 나머지는 직원용으로 신축한 것이다. 이들 한옥에는 후박집·목련집 등 나무 이름이 붙어 있다.

천리포에 일단 나무를 심기 시작했지만 난감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나무동산을 꾸밀 만한 조건이 못 되었다. 제대로 된 진입로도 없었고 전화는 물론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토양 조건이었다. 그가 사들인 야산은 척박한 토질에 일부는 황량한 모래밭이었다. 자갈밭을 헤치고 20cm 정도 파면 식목에 부적합한 모래흙이나 염분이 섞인 황토가 나오기 예사였다. 나무의 생장에 적합한 사질 양토가 부족했던 것이다.

강수량이 연평균 1,000mm밖에 안 되고 배수가 잘 안 되는 저지대라는 점도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 당장 급한 것은 식목용 용수 확보였는데 전기가 없으니 급수펌프를 가동시킬 수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울에서 발전기를 들여왔으나 지하수의 수맥을 제대로 찾아 파이프를 묻는 난제가 뒤따랐다. 천리포는 강수량이 적어 지하수 웅덩이가 많지 않았던 것이다. 농사 경험이 많은 인부들의 감각에 의존한 수맥 찾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중장비가 없던 시절이어서 삽과 괭이로 힘겹게 땅을 파내려가도 지하수가 나오지 않아 헛수고로 끝나기가 예사였다.

“절벽 위에 나무를 심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어요. 자갈 투성이의 땅을 파기도 힘들거니와 묘목에 줄 물이 있어야지요. 인부들이 물지게로 동네 우물에서 물을 퍼 날랐지만 쉽게 될 일이 아니었지요. 몇 십 그루를 심다 보면 해가 저물기 예사였어요. 그래도 민병갈 님은 그날 심을 나무의 수를 할당해 기어이 하루 분량을 채우도록 했습니다. 땅거미가 지면 광솔로 만든 횃불을 밝히며 나무를 심었지요.”

당시 인부로 일했던 박재길(朴在吉·천리포식당 주인)의 회고담이다. 천리포 토박이였던 그는 1971년 정식 직원으로 채용돼 11년간 재산관리인으로서 수목원 일을 도왔다. 그런데 천리포에 나무를 심은 첫 해 여름, 인부 몇 사람이 민병갈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 작은 사건이 일어났다. 근처의 학암포 앞바다에 있는 대뱅이섬에서 자생하는 야생 나무를 캐다 그가 거처하는 한옥 근처에 심은 것이다.

민병갈이 1970년 7월에 쓴 수목원 일지를 보면 인부들이 캐온 나무는 후박나무 일곱 그루, 동맥나무 다수(many), 참식나무 한 그루 등 세 가지로 적혀있다. 당시 민병갈은 후박나무 군락지를 훼손했다고 인부들을 크게 나무랐다.

그리고 자생목을 캐다 심는 것은 중대한 자연파괴라고 교육시키고 다시는 그런 일을 못하게 했다. 그런데 몇 해 후 대뱅이섬을 찾은 그는 후박나무들이 모두 목재나 한약재로 잘려 나간 것을 발견하고 더 많이 캐다 심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그가 역정을 냈던 일곱 그루는 그가 머물렀던 소나무집 옆에서 30년 넘게 자라며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1971년 7월 첫 주말. 만리포와 천리포를 잇는 해안에서 희한한 구경거리가 벌어졌다. 대형 미군 트럭 한 대가 물이 덜 빠진 바다를 헤쳐 나가는 보기 드문 장면이었다. 트럭에는 서울에서 가져온 묘목이 가득 실려 있었다. 당시 천리포에는 자동차 길이 나지 않았기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썰물로 수심이 낮아진 바다를 수송로로 이용한 것이다. 간만의 차가 심한 서해안은 썰물 때가 되면 물이 많이 빠져나가 갯벌을 육로로 활용할 수 있었다. 천리포 앞바다는 다행히 갯벌이 단단하여 트럭의 이동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천리포수목원에 대량의 묘목이 반입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미군 트럭에 실려온 나무들은 민병갈의 오랜 산행 친구였던 임업연구소 연구관 조무연(趙武衍·1987년 작고)의 배려로 서울 홍릉에 있던 임업연구소가 기증한 것이었고, 수송편은 민병갈의 교섭으로 미군 공병단에서 지원했다. 특히 이날 ‘나무 할아버지’로 이름났던 김이만(金二萬·1985년 작고)이 홍릉에서 내려와 직접 묘목의 자리를 잡아 주는 등 식목작업을 도와줬다. 이때 심은 재래종 나무들은 외국 수종이 대부분인 천리포수목원에서 ‘1세대 품목’으로 대접받으며 30여년간 잘 자라고 있다.

낭새섬 매입을 계기로 민병갈은 규모를 키워야겠다는 생각으로 주변 야산을 더 사들였다. 추가로 매입한 땅은 1975년까지 10만평이 넘어 소유지가 15만평으로 늘었다. 천리포수목원의 현재 규모 18만평은 1981년에 마무리된 것이다. 그후 불어난 땅은 2000년 2월에 매입한 4,800평뿐이다. 민병갈이 본격적으로 수목원을 구상한 시기는 10만평을 확보한 1970년대 초반이었다. 금요일 오후만 되면 어김없이 천리포로 내려왔던 그는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정자에서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담한 자연농원’을 꿈꾸며 나무를 심었던 민병갈은 나무 가족이 늘자 2년 만에 생각을 바꾸었다. 본격적인 수목원으로 규모를 키우기로 한 것이었다. 제대로 된 수목원 조성을 결심한 그는 전문가들과 함께 자연입지 조사를 한 결과 천리포 일대는 토양은 척박해도 기후 조건이 좋았다. 같은 위도보다 따뜻한 해양성 기후는 다양한 식물들이 자랄 수 있는 좋은 환경이었다. 촌로의 간청에 못 이겨 우연히 산 땅이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췄던 것은 민병갈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운명의 신은 그에게 일찍부터 수목원을 차리도록 점지해 주었던 셈이다.

끝없는 자연학습, 나무 공부

민병갈은 자연탐사와 RAS 관광여행을 하면서 어느 정도 나무에 관한 기초지식을 쌓았다. 미국에 잠시 가 있던 기간을 빼면 천리포에 땅을 마련할 때까지 그는 15년 넘게 한국의 자연을 익혔다. 그러나 그때까지 그가 갖고 있던 나무 지식은 사찰의 스님들로부터 배운 단편적인 것이어서 성에 차지 않았다.

좀더 나무를 알기 위해서는 믿을 만한 지도교사가 필요했다. 이때 그를 도와준 청년이 당시 서울대 임학과에 재학중이던 홍성각(洪性珏·건국대 교수)이었다. 1963년 가을 강원도 오대산에서 밀러를 만난 그는 이창복(李昌福) 서울대 임학과 교수와 조무연 홍릉 임업시험장 연구관을 소개했다. 사제 관계인 이들 세 사람은 그후 민병갈의 단골 산행 파트너이자 나무 선생님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민병갈은 이창복·조무연 등과 어울리면서 막연한 자연공부를 벗어나 확실한 나무공부를 하는 단계로 올라섰다. 그는 이때부터 대학이나 연구기관의 야생식물 탐사에 참여하는 등 현장학습을 하며 국내 식물학계와 지면을 넓혔다. 그러나 한국은행 근무, RAS 사업, 증권 투자 등 세 가지를 한꺼번에 하다 보니 그의 학습에는 큰 진전이 없었다. 실제로 민병갈의 본격적인 나무 공부는 RAS 사업에서 손을 떼고 수목원 조성을 결심한 1970년대 초반에 시작됐다.

민병갈은 천리포 땅이 15만평에 이르던 1975년께 나무공부 수준을 한 단계 더 높였다. 이때는 농원 수준이 아닌 본격적인 수목원으로 규모를 키우기로 결심한 시점이다. 이를 계기로 그가 해오던 현장학습 방법을 수목원 중심의 실용주의로 바꿨다. 식물 탐사에 나설 때는 수목원 직원과 동행했고, 나무를 관찰할 때도 생장환경 등 실제적인 것으로 관점을 모았다. 탐사 지역도 천리포와 자연환경이 비슷한 서해 남부나 남해안 지방을 우선 대상으로 삼고 씨앗 채집이 가능한 가을철을 많이 이용했다.

민병갈 생애에서 가장 기념비적인 식물 탐사는 수목원이 재단으로 출발하기 1년 전인 1978년 봄의 서부 남해안 야생식물 답사 여행이었다. 수목원 직원들과 함께 나선 이 탐사에서 그는 국내외 학계에 보고되지 않았던 감탕나무(Ilex)과의 새로운 식물을 발견하는 획기적 성과를 올렸다.

그가 발견한 신종(新種)은 감탕나무와 호랑가시나무의 자연 교잡(交雜)으로 생긴 것으로 몇 단계의 검증을 거친 결과 전세계적으로 완도에서만 자라는 희귀종이었다. 민병갈은 이 식물의 학명을 ‘Ilex x Wandoensis C. F. Miller’로 정하고 국제학회에 등록했다. 학명에 발견자와 서식지 이름이 들어간 것은 국제규약에 따른 것이다. 한국어 이름은 ‘완도호랑가시’로 정했다.

그후 완도호랑가시는 천리포수목원에서 배양돼 국제 종자교환 프로그램에 따라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완도호랑가시 발견에 크게 고무된 민병갈은 1979년 7월 천리포수목원 원장에 취임한 뒤 해외 학계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수목원의 국제화를 겨냥한 식물원예학 수업에 들어갔다. 수목원이 재단법인으로 출범한 1979년부터 시작된 그의 해외교류 학습은 89년 영국 왕립 원예협회(RHS) 공로메달을 받기까지 11년간 계속됐다. 이 시기는 그에게 나무 전문가로서 명망을 누리면서 수목원을 국제적 수준으로 끌어 올린 성공시대이기도 했다.

민병갈은 한서대·원광대에서 명예 원예학 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식물학자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식물 애호가 정도의 아마추어 수준은 아니며 적어도 원예 전문가 수준은 넘는다. 그가 식물 공부에 쏟은 시간과 정열 그리고 지식의 수준으로 보면 박사라고 해도 모자라지 않았다. 단지 정규 과정을 밟지 않았을 뿐이다. 특히 목련·호랑가시과 등 일부 수종에 관한 연구의 깊이와 독서량은 박사급 수준이라는 것이 주변 학자들의 이야기다.

민병갈은 생전에 입버릇처럼 ‘수목원은 영원한 미완성’이라는 말을 많이 했다. 그의 표현대로 그는 중병이 들어서도 수목원 육성에 정열을 쏟았다. 그의 집착은 배움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타고난 독서광이었던 민병갈은 전문서적 탐독에도 남다른 열성과 이해력을 보였다. 다년간 그의 나무 공부를 지도했던 이창복은 2001년 4월 한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그의 학습열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수많은 제자들을 가르쳤지만 민(閔)원장처럼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나의 저서 ‘대한식물도감’을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 책이 닳아 더 이상 글씨를 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화장실에 갈 때도 책을 들고 가는 것을 봤어요. 당시 40대인데도 젊은 학생들에 못지않은 학습 진도를 보이더군요. 전문서적인데도 읽는 속도와 이해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빨랐어요. 특히 기억력이 뛰어나 까다로운 식물 이름들을 거의 다 외우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민병갈의 비상한 기억력은 2002년 4월13일 그의 장례식에서 공식적으로 화제가 됐다. 그의 오랜 친구였던 미국인 도로 (루터교)목사는 추도사에서 “민 원장은 자신이 키우는 수천여 종의 식물 이름을 거의 다 기억했다. 그것도 한국어 속명, 영어 이름, 라틴어 학명 등 세 가지를 한꺼번에 줄줄 외웠다”고 밝혔다. 일본어 학습 1년만에 통역장교로 발탁될 만큼 어학의 귀재이기도 했던 그는 칠순이 넘어서도 새벽에 일어나 중국어 학습에 열을 올렸다.

국제화로 승부를 걸다

민병갈은 항상 책 속에서 살았다. 그의 서울 연희동 집 서재나 집무실 서가 그리고 수목원 서고에 쌓여 있는 수많은 책들은 그가 얼마나 열심히 식물원예학 관련 서적을 수집하고 읽었는지 잘 설명해 준다. 그는 외국 잡지나 학회지를 통해 항상 해외 식물학계의 출판 정보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영국 신문 ‘파이내셜타임스’의 원예(Gardening) 페이지를 통해 주간 단위로 해외 원예계 동향을 점검하기도 했다. 그는 생전에 세계 최고의 식물학 도서관을 천리포수목원 안에 설립하는 것이 꿈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천리포수목원 본부 건물 2층 사무실로 통하는 계단 입구 벽에는 국제 수목단체로부터 받은 두 개의 명예훈장이 걸려 있다. 하나는 국제수목학회(IDS, International Dendrology Society)가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Arboritum Distinguished for Merit)으로 지정한 기념패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호랑가시학회(HSA, Holly Society of America)가 공인 호랑가시수목원(Official Holly Arboritum)으로 지정한 인증패다.

IDS 기념패는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2000년 4월에 받은 것이고, HSA 인증패는 그보다 1년 전에 미국 이외의 수목원으로는 프랑스에 이어 두번째로 받은 것이다. 국제적 명망을 가진 이 두 개의 상패는 민병갈이 혼신의 힘을 쏟은 국제화 노력의 소산이다.

img4R민병갈은 일찍부터 ‘한국산 나무만으로는 안 된다’ 는 생각에서 해외로 눈을 돌렸다. 1970년대 초부터 그는 해마다 두세 차례 외국으로 나가 선진국 수목원을 견학하며 새 품종과 학술 정보를 수집했다. 유명 식물학자를 찾아가 자문을 구하고 때로는 학술단체의 식물 탐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수목원 직원을 외국 수목원에 파견하여 연수시킨 것도 해외교류 사업의 하나였다. 외국의 단골 교류 상대는 영국의 힐리어수목원과 미국의 롱우드가든이었다.

외국산 묘목과 종자는 1972년부터 들여왔다. 그 이듬해에는 유럽호랑가시 등 10여 종을 추가로 구입하여 외국산 나무의 적응력 키우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민병갈은 끊임없이 해외산 종자를 들여와 천리포수목원의 보유 수종을 늘렸다. 1982년까지 10년 동안 도입한 해외 식물은 60개국 1만1,600여 종에 이르렀다. 천리포수목원이 현재 보유한 수종이 국내산을 포함하여 모두 1만여 종임을 감안하면 수종 확대를 위한 그의 집념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이들 해외산 묘목과 씨앗 중 천리포의 기후와 토양에 적응하여 살아 남은 것은 그 절반도 되지 않았다.

천리포수목원의 야생식물 탐사는 1980년대 후반부터 국제적 수준으로 발전했다. 해외의 유명 수목원과 제휴해 국내 자생식물 합동탐사를 했는가 하면 외국 식물학자와 함께 해외식물 원정 탐사도 했다. 1984∼89년 세 차례 실시한 국내 자생 식물 합동탐사에는 미국 국립 수목원을 비롯하여 홀덴수목원·롱우드가든·모리스수목원 등 미국의 쟁쟁한 수목원 탐사팀이 참여했다.

1977년 초에는 강추위를 무릅쓰고 영국 학자와 일본 큐슈(九州) 남쪽에 있는 섬 아마미오시마(奄美大島)를 찾아 희귀 자생목 다이모포필라(Ilex daimorphophylla, 감탕나무과) 씨앗을 채집했다. 이때 가져온 몇 줌의 씨앗은 그후 영국에서 번식돼 전 세계적으로 보급돼 멸종을 면했다.

민병갈은 국내 자생식물 탐사에 해외 석학과 동행하기도 했다. 그 중 또 한 사람이 스웨덴의 세계적 육종학자 나첼루에스 토르(Natzelues Tor)다. 그는 예테보리대학 교수로 있던 1966년 한국의 자생식물 탐사를 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한국 식물을 많이 알았다. 민병갈은 1997년 그를 초청하여 울릉도 식물탐사를 했다.

이때 토르 교수는 자신이 배양한 희귀종 목련(Magnolia x Gotoeburgensis) 한 그루를 가져와 천리포수목원에 기증했다. 중국의 함박꽃과 일본의 목련을 교배시킨 이 목련은 전 세계적으로 스웨덴·영국·한국 등 세 나라에 각각 한 그루씩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민병갈은 1970년대 초반 한국과 국교가 없던 중공(中共)에서 중국의 자생식물 30여 종의 씨앗을 들여오는 모험까지 했다. 외형상으로는 미국을 경유한 간접수입이었지만 밀수와 다름없었다. 당시의 한 수목원 직원은 미국인 신분이었던 민원장이 미국 중앙정보국(CIA) 요원과의 친분을 이용해 비정상 루트를 통해 씨앗을 극비리에 도입한 것 같다고 추측했다.

서슬 퍼런 군사정권 시대에도 천리포에는 북한 나무 종자가 들어왔다. 1980년대 민병갈의 친구인 영국인 학자 한 사람이 북한 방문길에 가져온 것이었다. 그는 백두산 진달래의 씨앗을 받아와 그 일부를 민병갈에게 선물했다. 정보기관이 이 사실을 알고 수사 대상으로 삼았지만 크게 문제삼지는 않았다.

민병갈은 1990년대 중반부터 해외 수목원과의 개인적 친분 관계를 활용해 수목 관련 국제회의를 여러 차례 유치했다. 1997년 4월에는 88개 회원국 809개 수목원이 가입된 국제목련학회(MSI, Magnolia Society International) 연차총회를 서울에서 개최했고, 98년 5월에는 HSA 총회를 천리포수목원에서 개최하여 세계의 유력 수목원 관리자들에게 한국의 자연과 식물을 소개했다. HSA는 미국 수목원이 주축을 이룬 범세계적 학술친목 단체다. 민병갈은 1998년 4월 IDS 연차총회를 유치한 것을 매우 자랑스러워했다.

img5L민병갈이 수목원의 국제화를 위해 마지막 정열을 쏟은 사업은 종자목록(Index Seminum) 발행을 통한 다국간 종자 교류 프로그램에 적극 참여하는 일이었다. 천리포수목원은 1978년부터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98년까지 36개국 140개 기관과 교류 관계를 맺고 다양한 품종의 나무를 수집하는 성과를 거뒀다.

그런데 해외 학술팀과의 제휴나 종자 교환 사업 등 민병갈의 국제화 노력에 대해 곱지 않게 보는 시선도 있었다. 한국의 귀중한 토종식물을 해외로 유출한다는 문제가 있는가 하면, 그 일부는 변종으로 배양돼 한국으로 역수출돼 국익을 해친다는 것이었다. 1997년 한 공영 TV가 천리포수목원의 종자 교환 사업을 유전자원 유출이라고 문제삼자 민병갈은 ‘우물안 개구리’라는 말로 불쾌감을 나타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원로 식물학자 이창복은 2000년 4월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의 토종 식물 씨앗을 외국에 보내 번식시키는 일은 격려의 대상이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식물학자 입장에서도 종자 유출 논리에 찬성할 수 없습니다. 더 많은 토종 식물을 내보내야 하고 더 많은 외국 희귀 식물을 들여와야 해요. 그래야 우리나라도 식물 선진국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자생식물을 세계에 가장 많이 소개한 사람은 바로 민병갈입니다. 세계 식물지도에 한국이 편입된 것은 전적으로 민원장의 공로입니다. 국가간 종자 교환은 멸종 위기에 처한 자생식물 보존을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내가 좋아” 평생을 나무에 바친 집념과 열정

천리포수목원에는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두 개의 간판 수종(樹種)이 있다. 450여 종의 목련(mag nolia)과 370여 종의 호랑가시(Ilex)가 그것이다. 수집된 종류는 둘 다 세계 최대 규모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천리포수목원에서는 목련이 4월의 꽃이 아니다. 그 찬란한 빛의 향연은 4월에 절정을 이루지만, 봄이 지나고 겨울이 와도 이곳에서는 목련의 우아한 꽃무리가 질 날이 없다. 세계 각지에서 들여온 온갖 진귀한 품종들이 교대로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태산목의 교배종인 리틀 잼은 여름부터 초겨울까지 꽃이 핀다.

크리스마스 장식용으로 인기 있는 호랑가시 또한 천리포의 명물이다. 전 세계적으로 400여 종이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민병갈은 그 중 90%이상을 천리포에 모아 놓았다. 호랑가시는 4속(屬)으로 이뤄진 감탕나무과의 대표적인 속이다. 주로 난대성 기후에서 자라며 상록 및 낙엽성 두 가지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종은 대팻집나무·꽝꽝나무·호랑가시나무·먼나무·감탕나무 등 5가지로 알려졌으나 민병갈이 1978년 완도호랑가시를 발견하여 그 종류가 늘었다.

민병갈이 80세의 고령으로 중환이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정부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국가 차원의 서훈이 있어야 한다는 의견이 청와대와 산림청 일각에서 제기됐다. 그런데 정부가 중량급 훈장을 수여하기로 결정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그 상훈의 성격이 문제였다. 그가 받은 것은 뜻밖에도 금탑산업훈장이었다. 서양인으로는 최초로 귀화하여 한국의 자연보호에 헌신했고, 국제적 수목원을 육성한 공로만으로도 민병갈은 문화훈장의 대상이었다. 더구나 그는 한국의 식물을 세계에 알려 세계 식물지도에 한국을 편입시키는 학술적 공헌도 했다. 그런데 정부는 그를 조림사업가로 착각했던 모양이다.

2002년 3월11일 민병갈은 병약한 몸으로 청와대를 찾아가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금탑훈장을 목에 걸어준 김대통령은 잠시 민병갈과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당시 김대통령은 차남 김홍업의 비리 문제로 심기가 매우 불편한 때문이었는지 별 말이 없었다.

훈장 수여식에 배석했던 미국인 의사 인요한의 말에 따르면 김대통령이 수목원을 차린 동기를 묻자 민병갈의 답변은 “내가 좋아서”라는 한 마디였다고 한다. 그는 그 이상 할 말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의 짧은 말은 평생을 바쳐 나무를 사랑하고 키운 그의 집념과 열정을 가장 의미심장하게 함축한 말이었다.

민병갈은 2002년 3월 미국 프리덤 재단(Freedo ms Foundation)으로부터 평화와 자유 그리고 민주주의 실현에 헌신한 공로로 2002년도 미국 우정의 메달 수상자로 결정됐다. 그러나 그는 시상일을 19일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프리덤 재단은 4월27일 필라델피아의 래디슨 호텔에서 개최된 시상식에 고인의 여동생 준 맥데이드(June MacDade)를 초청하여 대리 수상하도록 했다.

나무는 민병갈에게 하나의 신앙이었다. 나무를 하나의 생명체로 보고 그 자체를 존엄의 대상으로 삼았다. 만년에 그는 원불교 신도가 됐지만 그의 마음 속에 신앙처럼 항상 자리잡고 있는 것은 나무였다. 그는 꿈을 꾸어도 나무 꿈을 꾸는 희귀한 나무광이었다. 1980년대 수목원 직원으로 일했던 노일승은 천리포수목원의 원장 숙소에서 한밤중에 민원장이 우는 목소리로 잠을 깨우는 바람에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빨리 정자집에 가 봐. 회화나무가 상처를 입었대.”
“회화나무가 밤중에 왜 다치죠?”
“꿈에 나타나 아프다고 울었어.”

자연은 생산자, 인간은 파괴자, 동물은 소비자

어처구니 없던 노일승은 민원장을 달래 잠자리에 들게 했다. 그런데 문제의 회화나무는 그로부터 10여 년 후 두 차례 큰 재난을 당했다. 2001년 여름 태풍 프라피룬을 맞아 뿌리가 드러날 만큼 몸통이 휘는 피해를 입더니 얼마 뒤에는 정자집의 화재로 불에 그슬렸다. 집안에 심으면 고명한 선비가 나온다 하여 우리나라에서는 물론 서양에서도 학자나무(Scholar Tree)로 사랑받는 이 나무는 민병갈에게 특별한 사연이 있었다. 그가 한국은행 재직 때 은행 뜰에서 자라고 있던 회화나무의 작은 가지 하나를 가져와 접붙여 키운 것이기 때문이다. 천리포수목원에서 하나뿐인 이 나무는 민원장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민원장은 나무가 아프다는 꿈을 꾸고 눈물을 흘릴 만큼 마음이 여렸지만 나무를 보호하는 데는 무섭게 엄격했다. 그는 사무실 안에서 두 사람만 눈에 띄어도 수목원 직원은 항상 나무와 함께 있어야 한다고 소리치며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어떤 구실로든 나무를 훼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수목원 직원들은 나무의 모양을 위해 가지를 친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한번은 한 직원이 지나는 사람을 거추장스럽게 하는 통행로의 나뭇가지 하나를 잘라 냈다가 현장에서 해고당했다. 이튿날 민원장은 가지를 잃은 나무를 찾아가 “나무야,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천리포수목원에서는 조경이라는 정원 개념이 통하지 않는다. 어떤 나무든 있는 그대로, 자라는 그대로 놔둬야 한다는 것이 민병갈의 지론이었다. 그래서 수목원 조성 초기에 무계획적으로 심어진 나무들은 옮겨지는 일이 없이 비좁게 자라는 경우가 많다. 나무가 무성해지면 간벌해야 하는 데도 민원장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가위질로 나무의 모양을 내는 일본식 정원 가꾸기를 아주 싫어했다. 그가 해외 학회지에 기고한 글을 보면 자연상태로 나무를 키우는 한국식 정원이 가장 이상적이라는 주장이 자주 눈에 띈다. 나무는 나무(Tree is Tree)라는 것이다. 그는 “천리포수목원은 나무를 위한 수목원이지 사람을 위한 수목원이 아니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그래서 18만평의 수목원에 철책을 치고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했다.

민병갈의 나무지상주의는 천리포수목원의 비인간화 문제를 낳기도 했다. 일곱 군데로 흩어진 경내를 철망으로 에워싸는 바람에 마을 사람들의 통행을 어렵게 했다. 말년에는 본원 옆으로 지나는 도로 포장을 반대하여 주민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개발이라는 말을 가장 싫어했던 그는 ‘자연은 생산자, 인간은 파괴자, 동물은 소비자’라는 독특한 철학을 갖고 있었다.

민병갈은 나무뿐만 아니라 생태계 보호에도 각별히 신경썼다. 수목원의 본원 안에는 2,000여 평의 연못과 1,000여 평의 논이 있는데 민원장이 정성을 다해 생태계를 보존한 곳이다. 나무에 줄 물을 담아두기 위해 만든 이 연못은 시간이 흐르면서 철새들의 낙원으로 바뀌었다. 민병갈은 뜻밖에 이곳을 찾아든 흰뺨검둥오리·청호반새·해오라기 등 물새 보호에 어버이 같은 정성을 쏟았다. 특히 흰뺨검둥오리가 새끼를 치면 수목원 직원들에게 연못 금족령을 내리고 큰 소리도 내지 못하게 했다. 어미가 새끼들을 데리고 나들이를 나설 때면 망원경으로 오리 가족을 관찰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수련과 창포가 아름답게 떠 있는 연못은 철새들만의 낙원이 아니다. 그 밑에는 온갖 민물고기들이 서식한다. 이들 물고기는 철새들의 먹이만 안 된다면 천수를 다할 때까지 살 수 있다. 사람의 손을 타지 않기 때문이다. 몇 해 전에는 홍수가 나서 물이 넘치는 바람에 수많은 민물장어들이 논으로 흘러들어갔다. 수목원 직원들은 탐스럽게 자란 이들 장어를 보고 군침을 삼켰지만 민원장의 엄명에 따라 모두 연못으로 되돌려보냈다.

본부 건물과 큰 연못 사이에는 대여섯 마지기의 논이 있는데, 민병갈은 이 논을 문접옥답으로 생각하고 1970년대부터 농부 출신을 고용하여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짓도록 했다. 이곳에 농약이나 비료를 쓰는 것은 상상도 못한다. 그래서 소출은 많지 않지만 민병갈은 그 이상의 소득을 챙겼다. 여름이면 그가 좋아하는 개구리 울음 소리를 즐길 수 있고, 수확기에 들어서면 메뚜기 떼를 구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못과 논 사이의 작은 농로에는 민병갈이 만들어 놓은 두 개의 명물이 지금도 남아 있다. 하나는 돌로 조각한 개구리상이고, 또 하나는 연못의 오리들이 새끼와 함께 논으로 나들이하도록 만들어준 오리길이다. 민병갈은 여름 밤에 혼자 논두렁에 나와 개구리 울음 소리를 듣는 것을 즐겼다. 그는 “죽으면 개구리가 되고 싶다”고 할 만큼 개구리를 좋아했다.

천리포수목원에서는 송충이도 해충 취급을 받지 않는다. 민원장이 산새들의 먹이라고 잡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경내의 오솔길 산책중 어쩌다 거미줄이라도 건드리게 되면 민병갈은 깜짝 놀라 ‘미안하다’는 사과의 말을 하고 길을 돌아갔다. 그가 거처하는 수목원의 후박집 추녀에는 작은 새장 하나가 걸려 있다. 집 주인이 해외여행길에 사와 달아놓은 것이다. 민병갈은 서울에서 내려올 때마다 새장에 먹이를 넣어주는 일을 잊지 않았다.

죽어서는 나무의 거름이 되고파

민병갈은 인간과 인간이 꾸민 생활양식도 생태계의 한 부분으로 생각한 것 같다. 촌로(村老) 등 한국인의 원초적인 모습을 좋아하고 초가 등 한국의 옛스러운 풍물을 사랑하는 것이 이를 말해 준다. 한번은 충남 주포에 ‘ ’씨라는 희귀한 성(姓)을 가진 문중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직접 찾아가 집안 내력을 묻는 등 큰 관심을 보였다. 그가 남달리 초가를 좋아하여 수목원 경내에 있던 폐가를 보존하고 해마다 지붕을 가는 이유도 알고 보면 인간의 생활 양식을 생태계의 한 부분으로 보는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민병갈은 자신이 죽어서도 생태계의 한 부분으로 남기를 바랐다. 1991년 가을 필자는 ‘중앙경제신문’을 위한 인터뷰에서 그와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당시 그는 70세였다.

― 돌아가시면 한국에 묻히시겠습니까.
“묻히다니요? 땅이 아까워요. 그럴 땅이 있으면 나무를 심어야지요.”
― 아니면 화장을 원하시나요?
“물론이죠. 그러나 뼈도 묻어서는 안 돼요.”
― 그러면 뼛가루가 천리포 앞바다에 뿌려지기를 바라시겠네요?
“그것도 안 돼요. 나무의 거름으로 써야지요.”

농담인 줄 알았으나 민병갈은 웃지도 않고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11년 뒤 세상을 떠난 그는 자신의 뜻대로 화장이 안 되고 천리포수목원 경내에 매장됐다. 그의 양자 등 주변사람들이 원했기 때문이다.

민병갈은 말년에 들어 “한국과 한국인이 변했다”고 씁쓸해했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가 ‘소란한 대낮의 나라’로 바뀐 것이 서글펐던 것이다. 공손하고 어질기만 했던 한국 남성은 공공장소에서 무례하고 시끄러운 언행을 일삼는가 하면, 차분하고 다소곳했던 한국 여성은 대중 앞에서 수다를 떨고 흐트러진 자세를 보이는 것이 그에게는 실망스럽기만 했다. 어쩌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젊은 여성이 단정하지 못한 차림으로 껌을 씹는 모습을 보면 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img6R팔순에 접어든 민병갈은 심신이 쇠약해졌는지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애정이 옛날 같지 않았다. 타고난 보수적 기질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그의 의식 세계는 변하는 시대의 흐름을 타지 않고 항상 멈춰 있었다. 1950∼60년대 칼 밀러의 가슴에 새겨진 순박한 한국인의 인상이 2000년대 민병갈의 뇌리에 그대로 이어진 것은 그를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민병갈이라면 돈 많은 서양인으로 해안에 거대한 정원을 꾸며 놓고 자연을 즐기며 유유자적하게 살다 간 행복한 부르주아로 생각한다. 그러나 10년 넘게 그를 가까이에서 보며 그의 주변사람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그는 마지막까지 치열한 인생을 살았던 의지의 인간이었다. 그는 당초부터 자기 생전에 이룰 수 없는 ‘영원한 미완성’을 시작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고, 그 미완성 작품을 이 땅에 남겨 놓았다. 화가 전창운(全昌雲)은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이 좋다고 눌러앉아 살다 말년에 이르면 수집품들을 고스란히 본국으로 챙겨간다면서 ‘민선생은 가져갈 수 없는 것만 수집한 큰어른’이었다고 고인을 추모했다.

재단법인 천리포수목원은 민병갈 사망후 후임 이사장에 문국현(文國鉉) 유한킴벌리 사장을 추대하고 후원회와 산림청의 도움을 받아 고인의 ‘영원한 미완성 사업’을 잇는 삽질을 오늘도 계속하고 있다. 
 

by 하야니 | 2009/02/26 23:31 | Eye to the realty | 트랙백 | 덧글(0)

퍼온글)이라크 전 어떻게 볼 것인가?

장기화된 이라크 전에 따른 미군의 변화


0. 들어가기에 앞서


최근 미군이 치루고 있는 이라크전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지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2008년 4월 초, 이라크 남부의 바스라에서 이라크 정부군과 마흐디 민병대가 정면충돌한 것이죠. 마흐디 민병대는 친미 정부에 반대하는 저항 세력 중 하나로 시아파 종교 지도자인 알 사드르를 리더로 하는 무장 단체입니다. 이들 병력은 무려 1만 6천명으로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니죠. 이에 이라크 정규군은 3만 명을 동원하여 이들의 주둔지인 바스라를 공격한 겁니다.




[바스라 시내를 행군하고 있는 마흐디 민병대]



사실 이 공격은 미국이 깔아 놓은 멍석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라크 군이 성공적으로 저항 세력을 분쇄할 수 있다는 것을 만천하에 알린 다음, ‘자, 우리 애가 이렇게 많이 컸어요. 그러니 전 집으로 돌아갈 거예요. 그럼 여러분 안녕’ 하려는 속셈이었죠. 이라크 철군을 위한 하나의 포석이었던  겁니다. 이런 명분을 위해 미군은 항공지원을 제외한 일체의 도움을 주지 않을 작정이었습니다.



      
[승리의 알 사드르]                [지못미 탈라바니(이라크 대통령)]



결과는? 대실패. 정부군은 민병대를 제압하지 못한 체 휴전 협정을 맺어야 했습니다. 마흐디 민병대는 별다른 피해도 입지도 않았으며 무기 등 장비도 대부분 보전한 체 성공적으로 바스라를 빠져나갔습니다. 심지어 일이 영 아니게 돌아가자 미군이 직접 개입했음에도 대세를 뒤집진 못했죠. 이 사건은 이라크 정부의 위신을 맨틀 층까지 파고들게 만들었으며 알 사드르를 일약 스타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덤으로 미국은 발을 빼기가 더더욱 뻘줌해져 버렸고요.



      
[미군도 나름대론 열심히 했지만....: 마흐디 민병대 용의자들을 구속하고 있는 미군]



2003년 3월 20일 시작된 이라크전은 공식적으론 2003년 5월 1일 끝났습니다. 중동에선 그래도 한 딱가리 한다는 이라크 정도의 군사적 강국을 상대로 불과 두 달도 안 돼 수도까지 쓸어버리곤 통치권을 꿀꺽 해버린 것이죠. 이때만 해도 미국은 장밋빛 꿈을 꿀 수 있었습니다. 이제 뒤처리만 적절히 하면 중동은 팍스 아메리카나의 기치 아래에서 재편성 될 것이며 이는 미국에게 정치, 경제, 군사 면에서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후 이라크 장악에 있어 미국은 두면 안 될 거의 모든 악수를 두어 버렸고, 끝없는 게릴라전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그리곤 5년 뒤, 여전히 미국은 ‘뒤처리’ 중이며 앞이 보이지 않은 상황에서 힘겹게 버티고 있는 중입니다.




[항공모함 에이브럼 링컨에 착함한 부시 대통령. 이때만 해도 길어봤자 3년 정도면 뒤처리가 끝날 것이라 여겼음]



이런 장기간의 전쟁이 미국에게 여러 가지(그것도 별로 좋지 않은 면으로) 영향을 끼쳤음은 분명합니다. 이 글에서는 그 중에서도 특히 군사적인 면, 즉 미군 자체와 그 시스템이 어떤 영향을 받아 어떻게 변모했는지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인명 피해의 증가와 그에 따른 병력운용의 심난함


2008년 4월, 이라크의 미군 전사자는 4000명을 넘겼습니다. 2차 걸프전에서의 전사자가 105명(그 중 1/3은 사고나 아군 오발이었습니다)이라는 것을 고려해보면 전사자들은 거의 대부분이 정식 전쟁이 아닌 종전 선언 후  비정규전 와중에 희생된 이들 입니다. 여기다 부상자수는 29만 여명. 그 중 절반이 불구 등 중상입니다.




[도버 공군기지에 운구 된 이라크 전 전사자들]



이런 숫자로만 보면 어느 정도 피해인지 잘 감이 안 올 수가 있습니다. 막연히 많다....라고는 해도 이 정도 피해가 미군에겐 어느 정도로 부담을 주고 있을까요? 우선 다음 표를 보세요. 베트남전에서 미군의 인명 피해와 종전 후 이라크에서 미군의 피해를 비교해 놓은 것입니다.







일단 전사자 숫자만 보면 이라크 전은 베트남전에 비해선 피해가 훨씬 적은 듯합니다. 하지만  주둔군의 숫자와 주둔 기간을 볼 때 그렇게 단정 지을 순 없죠. 병력이나 기간 모두 이라크전이 베트남에 비해 1/3에 불과하니까요. 거기다 베트남은 이라크에 비교하면 정규전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이라크전은 거의 대부분 게릴라에 의해 당한 겁니다.

진짜 주목해야 할 것은 부상자 숫자입니다. 훨씬 적은 기간과 병력에 저 강도 전투에도 불구하고 부상병 숫자가 베트남전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전 같으면 전사했을 경우도 방탄복이나 의료장비 등의 발달로 부상에 그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베트남 전 같으면 전사자로 들어갔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것들을 종합해서 볼 때, 이라크의 인명 손실은 베트남에 미치지 못한다고 보긴 힘듭니다.




[베트남전 전사자들]



베트남전과의 비교를 떠나서 4천명의 전사자와 29만 명의 부상자라는 손실은 미군에게 병력 부족이라는 압박을 가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대단히 심각하게요. 현재 미군의 현역병 숫자는 52만 명입니다. 주 방위군과 예비군까지 합해도 100만 밖엔 되질 않아요. 그런데 작년에 부시 행정부가 무리에 무리를 거듭해서 이라크 주둔 병력을 나름대로는 크게 늘렸습니다. 그게 16만 명입니다. 이 숫자는 말아먹고 있는 전황을 호전시키기에는 대단히 부족한 병력이면서 동시에 미군에겐 감당하기 힘든 병력편중이기도 합니다. 미군이 운영해야 할 해외 기지가 한두 군데가 아니며 아프가니스탄전도 수행하고 있는 데다 북한이나 이란 등을 상대로 한 전면전의 가능성을 대비해 가용병력을 확보해 두어야 하는데 현역병 중 1/3을 하나의 전장에 때려 박아 놓고 있으니 곤란하다는 것이죠. 장래 있을지도 모르는 돌발 상황에 미국이 대처할 수 있는 여지를 군사적 면에서 크게 까먹고 들어가는 겁니다.




[한국에서 이라크로 차출된 2사단 2여단 소속 미군들]



더 나쁜 것은 장기간의 해외 파병이 전력부족을 가져오며 그대로 군의 사기와 인력운영의 건전성을 말아먹고 있다는 점입니다. 16만 명의 이라크 주둔병 중 실 전투 병력은 몇이나 될까요? 놀라지 마세요. 불과 2만 여명입니다. 나머지 병력은 이들이 싸울 수 있도록  행정, 군수, 보급 등 후방 지원을 하는 병력입니다. 물론 그들도 수송 중 공격을 당하는 등 전투를 완전히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비전투병과도 안심할 수는 없다 : RPG-7에 한방 먹은 수송트럭]



그래도 정면으로 이라크 민병대와 싸우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2만 여명의 전투병과 병력입니다. 그리고 미군이 입는 피해의 대부분은 전투병과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즉, 이라크 전은 사실상 2 만 명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 피해도 이들이 다 뒤집어쓰고 있다는 것이죠. 덕분에 미군은 현재 이들 전투병력을 충원 하느라 머리에 쥐가 날 지경입니다. 그렇다고 행정병을 전투병과로 차출할 수는 없습니다. 군에 행정 병력은 장식이 아닙니다. 이들이 없으면 미군은 총도 한방 못 쏘고 전멸입니다. 행정병을 전투병으로 만든다 해도 어차피 다시 행정병을 뽑아야 합니다. 거기다 애시 당초 행정 쪽으로 지원한 병력이 전투병으로서 얼마나 잘 싸울 수 있을 까요? 새로 신병을 받는 것도 문제입니다. 장기간의 이라크 전 때문에 미군의 인기가 바닥에 떨어져, 안 그래도 부족한 신병이 더더욱 가물어버렸습니다. 이라크에 보내기 위한 신병 모집률은 목표치의 30%를 밑도는 것이 현실입니다.




[간지 작살! 미 공군 모병 광고]



이런 상황에서 미군이 택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병력 돌려쓰기죠. 윗돌 빼서 밑에 돌 괴는 겁니다. 이라크 전 초기만 해도 대부분의 전투 병과는 1년간 이라크에서 복무하면 그 이후로는 다시 이라크에 가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지금은 사정이 다릅니다. 1년간 복무한 후 그 다음 1년은 비전투지역에서 확실히 복무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엔? 십중팔구 이라크에 갑니다. 대부분 2번은 파견되며 심지어 3번째로 파견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아요. 용케 이라크를 피했다 쳐도 마찬가지로 짜증나는 곳인 아프가니스탄이 환영해 줍니다.




[Welcome to Afghanistan!]



생각해 보세요. 4년, 혹은 5년간의 의무 복무 기간 중 전사나 불구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이라크에서 적어도 2년, 재수 없으면 3년간 목숨 걸고 전투를 해야 한다니, 이처럼 밥맛 떨어지는 시츄에이션이 어디 또 있을까요? 당연히 이들의 사기는 바닥을 쳤습니다. 그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예가 바로 탈영병의 증가입니다. 현재 이라크 전 이후 미군의 탈영병은 4700 여명에 달하고 있습니다. 베트남 전의 9만 명을 생각하면 비교적 적은 숫자이긴 합니다. 아무래도 지원병인 만큼 징집병 보다 훨씬 탈영을 덜하지요. 하지만 2003년 당시 미군의 탈영병 숫자가 1000명도 체 안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불과 몇 년 만에 5배 가까이 숫자가 늘어난 것이니까요. 모병제 국가에서 이런 현상은 굉장히 심각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쓴 웃음을 지을 수밖엔 없는 것이 미군도 이런 탈영병들을 매몰차게 혼내 줄 순 없다는 겁니다. 안 그래도 병력이 부족한 판에 이런 친구들이라도 얼레고 달래서 다시 군으로 돌려보내야 하는 겁니다. 체포된 탈영병이 실형을 사는 비율은 고작 6%, 나머지는 징계 정도만 받고 다시 군에 복귀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미군은 전통적으로 타군에 비해 탈영에 관대했음 : 2차 대전 중 미군에서 탈영을 이유로 유일하게 군법재판으로 사형에 처해진 슬로빅 일병]



정리하면, 미군은 현재 병력의 상당 부분을 이라크에 주둔시키고 있으며 전투가 장기화되면서 병력의 피해가 커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최전선을 담당하는 전투병과의 인력부족이 감당하기 힘들만큼 커져 운용에 무리가 발생했으며 그로 인해 전투원의 사기가 바닥에 떨어지고 있지요. 거기다 이런 사정이 밖으로 전부 알려지면서 군 지원자(특히 전투병과지원자)는 점점 줄어만 들고 있으니 새로운 병력 충원도 여의치 않은 상황입니다. 아직까진 간신히 버티고 있지만 전쟁이 더욱 장기화되고 지금과 같은 문제가 감당할 수 있는 선을 넘을 경우 미군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2. 돈 문제, 그리고 프로젝트 학살


전쟁 시작 전 럼스펠드 국방부 장관은 전쟁 비용이 600억 달러를 넘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백악관 경제담당 보좌관 래리 린지는 적어도 2000억 달러는 들 것이라고 추정했고 이런 ‘헛소리’를 한 대가로 린지 보좌관은 내쫓겼습니다.




[뭐,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



‘불필요하게 비관적인’ 린지 보좌관의 의견보다도 상황은 훨씬 비관적입니다. 2007년도 말까지 미국이 이라크에 꼴아 박은 돈은 총 4천 7백억 달러입니다. 2007년도 미국의 국방비가 4500억 달러이며 1700억 달러가 이라크 와 아프가니스탄에 투입되었죠(기본예산에 700억 달러, 추경 예산으로 1000억 달러). 2008년도 미국의 국방 예산은 기본 예산이 5177억 달러입니다. 작년보다 10% 이상 증가했으며 여기에 부시 대통령이 추경 예산으로 전쟁비용 1900억 달러를 요구했지만 의회는 우선 700억 달러만 승인하고 나머지 액수에 대해선 전쟁 진행 상황을 보아 그때그때 승인한다는 조건을 달았습니다(그리고 5월 17일, 1625억 달러의 이라크 전비 지출을 내용으로 하는 법안이 하원에서 부결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다 돈 : 대당 30만 달러로 한번 계산해 보시라]



이러한 미국의 국방 예산은 물가 상승률을 고려해 봐도 1951년 이후 최대 규모이며 911 이후 매년 10%씩 꾸준히 증가해 온 결과입니다. GDP의 4%를 훌쩍 뛰어 넘은 것이죠(4% 돌파 자체는 2006년도). 거기다 이라크 전과 아프가니스탄 전을 합한 전비가 (물가 상승률을 고려한)베트남 전을 능가하게 되었습니다.




[베트남 하늘을 수놓는 돈 덩어리들 : 사진은 기관포가 없는 전투기로 유명한 F-4J 팬텀]



미국의 1년 예산은 3조 달러. 전쟁 비용을 1500억 달러라고 놓고 봐도 예산의 5%에 기본 국방 예산에 대비하면 1/3입니다. 현재 미 연방정부의 재정 적자가  2008년도 상반기에만 3천110억 달러로 사상 최대치를 찍은 상태입니다. 이라크 전을 비롯한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하는 비용이 미국에 쎄리는 압박이 능히 상상이 되실 겁니다.




[경기를 부양한답시고 고소득층에 대한 감세로 세수를 축소한 주제에 전비를 흩뿌리고 다니는 얼간이]



이렇게 전쟁이 장기화되고 그에 따른 전비가 미친 듯이 증가한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예산 투입의 우선순위가 평상시와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당장 전쟁에 필요한 부분은 크게 증액시키는 반면, 전쟁에 별 도움이 안 될 것 같은 곳은 과감하게 잘라 버리는 것이죠.




[OICW : 20mm 지능형 고폭탄 발사기와 5.56mm 소총을 합친다는 야심찬 삽질. 대당 가격은 5만 달러를 까마득히 넘어갔고 결국 취소됨]


<코만치 : 스텔스 헬기로 2004년에 양산될 계획이었으나 예산 문제로 취소]


[크루세이더 자주포 : 그냥 팔라딘 쓰자며 취소]


[차세대 보병 계획 : 전장에서 각 보병이 수집한 데이터를 다른 병사 및 지휘부에 디지털로 상호 실시간 피드백 시킨다는 야심찬 계획. 일단 보류 판정이지만 사실상 취소]
----> 정정 : 랜드 워리어 시스템 프로젝트는 재개되어 2007년 초 실전 테스트에 들어감. 지금까지 일선 병사들의 사용 소감은 '별로'라고



[차세대 소총으로 채용이 거의 결정되었던 XM-8. ‘돈 없다능. 그냥 M4 쓰자능’ 하며 취소]


[차세대 지원화기인 XM-307 자동 유탄 발사기. 이게 취소됨으로서 중기관총과 유탄 기관총을 대체하려는 계획이 어그러진 데다 차기 전투차량 시스템인 FCS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음]



문제는 당장 전쟁에 도움이 되지 않는 부분의 상당수가 미군의 미래에 치르게 될 지도 모르는 전쟁에 도움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입니다. 2003년 이후 미군은 예산상의 이유를 들어 수많은 프로젝트들을 취소해 버렸습니다. 그 중엔 솔직히 진작 돈줄을 끊어 버렸어야 했던 것들도 제법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만 적지 않은 숫자가 ‘괜찮을까? 괜찮을까?’ 하는 읊조림이 튀어 나오게 만듭니다. 어떤 면에서 미군은 미래의 강군을 현재의 이라크 전 수행(그것도 열매도 알맹이도 없는 무익한)과 바꾸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나는 살아 남았다능 ㅋㅋㅋ]



3. 전쟁 교리의 변화


대부분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미군은 기본적으로 정규전을 중심으로 편성되어 있습니다. 특히 육군의 경우 대규모의 야전에서 승리하는 것을 목표로 상정해 놓고 있지요. 즉, 상대도 이쪽과 마찬가지로 정규군이고 적과 아군의 구분이 비교적 명확한 상황에서 대규모 병력을 투입하며, 전술, 전략적으로 유리한 지점을 적으로부터 빼앗거나 지키기 위해 싸웁니다. 미국 입장에선 러시아나 중국 등 자신과 동등한 국가와 정면으로 맞붙어 싸우는데 최적화 되어 있다는 겁니다. 흔히 미군의 상징처럼 되어 있는 첨단 무기와 압도적인 화력은 이러한 전면전에서 빛을 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 화려한 궤적을 1차, 2차 걸프전에서 유감없이 보았습니다.




[이것이 정진정명 미국의 힘이다! : 키티호크 항공모함과 미 제 7 함대]



이라크 전에서 미군이 겪고 있는 상황은 정규전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게릴라전! 적은 정규군도 아니고 정면에서 덤벼오지도 않습니다. 싸움도 야전에서 있는 병력을 총 동원하는 전투가 아니라 소수의 병력을 통해 미군의 취약한 부분을 기습한 다음 재빨리 도망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점입가경으로 적 게릴라와 이라크 민간인을 쉽사리 구분할 수도 있는 상황도 못됩니다. 미군이 기지를 거점으로 삼아 패트롤을 나가면 그 순간은 이라크 정부의 실효적 지배하라고 할 순 있지만 미군이 떠나는 순간 다시 게릴라가 날뜁니다. 더더구나 미국의 정치적 삽질로 이라크 민중이 친미 정권에 마음이 완전히 떠나 있는 상황에서 말 그대로 미국은 ‘인민의 바다’ 한 가운데에서 허우적 거리는 지경입니다.




[숨진 전우를 위해 기도하다]



이지경이면 미국의 압도적인 무력은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미군은 이라크 민중을 돕기 위해 왔습니다. 그런데 게릴라 몇 명 잡는답시고 막강한 공군력으로 민가를 쓸어  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미군은 스스로가 가진 정밀 폭탄의 위력을 너무 믿었고 자주 오폭을 일으켰으며 그 때마다 정치적으로 계속 곤란한 상황에 몰려갔습니다. 소련하고 싸움을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온갖 병기로 소련군을 도륙해도, 그 와중에 민간인 피해가 발생한다 할  지라도 정치적 입장은 훨씬 낫습니다. 막강한 적대국과 국운을 걸고 싸우는 것과 석유 때문에 꼭두각시 정부 놀이 하느라 벌이는 게릴라전은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겁니다. 이런 이유로 그렇게 좋아하는 공군도 마음대로 못 부르고 스스로의 능력을 크게 억제하면서 싸우게 되었습니다. 숫제 포 차 떼고 장기 두는 꼴이죠.




[스마트 폭탄의 하나인 JDAM BLU-109]



결국 미군의 힘의 원천인 공군력과 해군력을 충분히 활용할 수 없는 상황에선 육군의 역할이 클 수밖에는 없습니다. 근데, 아뿔싸. 육군도 게릴라전에는 별 준비가 안 되어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 좀 죽어도 대범하게 무시할 수 있는 정치적 상황에서 싸우는데 적합하다고나 할까요. 이게 무슨 소리냐면 2차 대전처럼 막대한 인명 피해가 나도 반전 여론 등에 크게 시달리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개인의 인명을 보호하는 장비 확충에 신경을 덜 썼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완전히 손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라크 전 이전에도 미군은 전투 병력에게 전원 방탄조끼가 지급되었으며 짚차의 일종인 험비도 나름 수류탄이나 권총탄은 막을 수 있을 정도의 장갑을 두르고 있었습니다.




[전쟁 초기 험비. 머지않아 AK 소총한테 장갑이 치즈처럼 무력하다는 것이 드러남. 강화형 험비가 지급되기까지 한동안 일선 병사들은 고철더미를 뒤져가며 차체를 보강해야 했음]



근데, 이라크 전에선 그 정도론 어림도 없었습니다. 집집마다 AK 소총이 갖추어져 있는 이라크에서 미군은 어디서 날아오는지도 모르는 총탄에 맞아 하나 둘 씩 쓰러져 갔습니다. 방탄조끼가 비록 몸통은 보호하지만 머리는 보호하지 못하며 어깨나 허벅지 팔 등에 맞아도 출혈 과다로 죽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게다가 RPG-7등의 로켓에다 IED(Improvised Explosive Device - 사제폭탄)같은 폭발물이 횡횡하니 하루가 다르게 전사자와 부상자가 속출했고 애시 당초 정치적 명분이 시원치 않았던 이라크 전에 대한 반전 여론이 크게 들고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IED로 박살이 난 험비]



이런 사정으로 미군도 개인의 생존율을 높이기 위한 여러 가지 방안을 강구합니다. 방탄조끼 안엔 AK를 막을 수 있는 방탄 패널을 반드시 집어넣도록 하며, 사타구니나 허벅지, 목, 어깨까지 커버할 수 있도록 개조했습니다. 험비도 장갑과 공격력을 크게 증가 시켰죠. 럼스펠드 장관이 잘난 척 하면서 도입한 Midium Army 개념도 수정하여, 진작 퇴출시키려 했던, 크고 무거운 브래들리 보병 전투차량(IFV)도 다시 불러 들였고, 장갑이 약한 스트라이커 같은 IFV는 RPG를 막기 위해 닭장차로 개조해야 했습니다. 거기다 IED나 지뢰 등살에 못 견뎌 MRAP(Mine Resistant Ambush Protected) 장갑차를 대량으로 도입했죠.




[이라크전에 도입된 인터셉터 방탄복]


[시가전에 특화된 중장갑 험비. AK를 막을 수 있으며 특히 전사율이 높은 기관총 사수를 보호하기 위해 방탄 총탑을 설치. 위에 덮은 철사그물은 수류탄을 밖으로 흘러내리게 하기 위한 것]


[M2A2 브래들리 보병 전투차 : RPG가 동네 참새마냥 날아다니는 상황에선 중장갑의 보병 전투차는 필수]


[언론의 발표와는 달리 C-130 수송기를 통한 수송성을 강화 시켰을 뿐 첨단하고는 거리가 먼 스트라이커 IFV, 외부 패널이 없으면 RPG 한방에 날아감]



여기에 보병들의 무기도 시가전에 걸맞게 여러 가지 변화를 겪었습니다. 사방이 트인 사막이나 초원과는 달리 시야가 제한되며 어디서 적이 튀어 나올지 모르는 시가전에서 M4로만 버티는 것은 버거웠던 겁니다. 이는 산탄총의 도입 확대와 유탄발사기의 강화, 저격전에 대비한 분대내 저격수 도입(Designated Marksman)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6연발 반자동 산탄총 비넬리 M4. 여기에 폭발 탄두를 집어넣은 산탄의 도입으로 시가전에서 톡톡히 효과를 보고 있다고 함]


[M4 등 소총에 장착하는 단축형 산탄총, XM-26. 탄창에는 5발이 들어가며 외양과는 다르게 반자동이 아닌 수동식임. 총에서 분리해 따로 사용할 수도 있음]


[M203을 대체하고 있는 유탄 발사기, XM-320. 마찬가지로 총에서 분리, 따로 사용 가능]


[남아프리카 공화국 MGL-140을 개량한 M-32 6연장 유탄발사기. 미 해병대 채용]


[M14을 들고 있는 분대 내 저격수(DM)]



이렇듯 첨단 무기의 활용이 정치적 이유로 제한된 상황에서 미군은 군의 운영을 대게릴라전에 맞게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변화가 사실 처음은 아닙니다. 바로 베트남 전에서 똑같이 벌어졌습니다. 게릴라 병력을 상대로 정규군으로 밀고 나가다가 큰 피해를 입은 뒤 뒤늦게 게릴라전에 맞게 교리와 장비를 변화시키는 것 말입니다. 근데 베트남 전이 끝나고 미군은 그러한 교훈을 까맣게 잊어버린 다음 이라크 전에서 부랴부랴 다시 되살리고 있는 형편입니다. 뭐, 원래 삽질은 반복되는 법입니다만.....




[베트남 전에서 운용되었던 강화형 M113 APC. 사방의 공격에 대응할 수 있도록 기관총 숫자를 늘렸으며 사수 보호를 위해 방탄패널 등을 추가로 설치]



4. 장비 도입 절차의 변화


미군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 있으신 분들은 종종 이런 설명에 익숙하실 겁니다. ‘이 레이저 사이트는 병사가 자비로 구입한 것이다’ ‘저격용 스코프는 지급된 물건이 시원치 않아서 제가 직접 구입했죠’. ‘특수부대원이 들고 있는 권총은 직접 구입한 것임’ 아니 세상에 군대 장비를 지급받는 것을 써야지 어떻게 자기 돈 주고 사서 쓰남?  군대 개그로 유명한 부모님께 총 값 부처 달라는 편지가 현실이 되는 요지경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병사들에게 인기 있는 스트라이크 나이프. 물론 자기 돈 주고 사서 써야 한다]



사실 미군은, 특히 특수부대의 경우 장비를 자기 돈으로 직접 사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려저 있습니다. 권총, 방탄조끼, 파우치, 도트 사이트, 조준경, 나이프, 개머리판, 전투화, 장갑, 군복, 라이트, 포어그립, 보호경 등등..... 하지만 이러한 ‘상식’과는 다르게 미군의 장비 규정은 의외로 까다롭습니다. 군대는 군대인지라 함부로 개인이 돈 주고 사서 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특수부대는 그나마 재량권이 부여되지만 정규병의 경우엔 짤 없습니다. 규정상 자비로 구입이 허가된 것만 구입이 가능하며 그것도 중대장 등 일선 지휘관의 승인을 일일이 받아야 합니다.




[야전 군인들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슈어파이어제 라이트. 매우 뛰어난 성능을 자랑하는 대신 무지 비쌈]



그런데 2001년 아프가니스탄 전이 시작되면서 이러한 장비 규정이 완화되기 시작했으며 이라크전을 겪으면서 그 정도가 심화되고 있습니다. 전쟁이 격화되고 정규전 중심 부대가 대 게릴라전에 적합하도록 빠르게 변화하는 상황에서 일선에서 이거 사 주세요, 저거 사 주세요 하고 닦달하는 장비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정통적인 방식대로 업자들의 입찰을 받아 심사한 후 선정하고 어쩌고 했다가는 1년 가까이 지나야 병사들 손에 들어갑니다. 이러면 전쟁 못하죠. 따라서 일선 병사들의 장비 구입의 재량권을  확대시켜 주고, 중대나 대대에 자체 예산을 배정해 독자적으로 장비를 구입할 수 있도록 방침이 바뀐 것이죠. 방탄복 같은 경우 개인이 자비로 구입했으면 군에서 비용을 보상해주는 경우도 있고요.




[근데 인수 받은 총에 달려 있으니 신경 안 쓰고 그냥 쓰는 사람도 많음 : 사진은 본문과 상관없는 여군들]



이렇듯 급변하는 전쟁 양상에 대응하기 위해 보병의 장비 도입 절차가 대단히 간소화되었고 일선 부대에 많은 재량권이 주어졌습니다. 덕분에 최전방에서 빠르고 간편하게 필요한 장비를 확충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비판도 있는 것이 입찰을 통한 것이 아니기에 비용이 너무 많이 들고, 충분한 성능 검토가 없기에 구입한 장비가 문제를 일으키는 등의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 상황에서 미군은 이런 ‘사소한’ 문제에 신경을 쓰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5. 기갑 전력의 왜곡


현재 미군에게 있어 가장 골치 아픈 것은 IED(사제폭탄)입니다. 지뢰, 로켓탄, 포탄, 수류탄, 다이나마이트 등등 이라크에서 소똥처럼 흔한 폭발물을 핸드폰이나 리모콘 등과 결합해서 매우 간단(진짜 간단한가요? 최소한 전 못 만듭니다)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 특징이죠. 미군이나 상대 파벌이 자주 다니는 길목에 쟁여 놓았다가 목표가 접근하면 멀리서 원격 조작으로 꽝!




[바그다드에서 발견된 IED]


  
미군의 인명 피해 중 낮게 잡아도 40% 이상이 IED에 당한 것일 정도이며 명실 공히 전사 원인 NO.1을 찍고 있습니다. 사제폭단이라고 하니 위력이 허접할 것 같지만 폭약무게가 40킬로그램인 것은 기본이고 400킬로에 육박하는 IED도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판국입니다. 이러니 맨 몸으로 접근할 때는 물론이고 험비나 심지어 장갑차 안에 있어도 안전을 장담하지 못하는 판국이 되어버린 겁니다.  




[IED에 당한 험비]



IED의 심각성을 잘 알고 있는 미군은 대처 방안을 강구합니다. 처음에는 IED의 폭발력을 단단한 장갑으로 때우려 들었습니다. 험비나 장갑차의 바닥 장갑을 강화시킨 것이죠. 그 결과는? 직접 보시죠.




[현실은 시궁창]



밑 부분이 단단해지니 폭발이 장갑차 안으로 파고들지는 못하지만 그 충격으로 차체가 뒤집어져 버린 겁니다.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 쇼크로 사망하거나 목이 부러져 버리고요. 이렇게 IED에 대한 피해는 커지는데 마땅한 답이 없는 미군에게 구원의 손길을 보내온 곳이 있었습니다. 그 주인공은 바로 남아프리카 공화국! 이들은 오랫동안 반정부 게릴라들을 상대하다보니 1980년대에 이미 지뢰나 IED 등의 폭발물에 잘 버티는 장갑차를 개발해 놓았습니다. 바로 MRAP(Mine Resistant Ambush Protected), 대 지뢰 매복 차량이 그것입니다.




[미군이 운용중인 남아프리카공화국제 MRAP, RG-33]



MRAP의 원리는 간단합니다. 지뢰를 막는 데에는 장갑의 두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폭발력을 어떤 방향으로 흘려보낼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병사들이 들어가는 차체는 높게 유지하고 바닥은 V자로 뾰족하게 만듭니다. 그러면 폭발력이 양옆으로 빠져나가 위력이 크게 줄어드는 것입니다. 비록 바퀴나 서스펜션은 파괴되어도 병사들은 무사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IED에 공격당한 MRAP. 일단 병사들이 탑승한 부분은 무사함]



실제로 MRAP가 IED에 상당히 쓸모가 있다는 것이 밝혀지자 미군은 매우 적극적으로 MRAP를 사들이기 시작합니다. 2007년 한해 동안 무려 6400대를 조달했으며 그것으로도 부족하며 끊임없이 추가 주문을 하고 있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자체의 조달량으론 진작에 택도 없어지자 미국 내에서 라이센스 생산을 하고 있으며 다른 미국 병기회사들도 앞 다투어 뛰어들고 있는 판국입니다. 현재 2010년까지 약 17000대의 MRAP를 도입할 예정인데 한 대에 50만 달러짜리니 매년 30억 달러를 MRAP에만 때려 박는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이러니 FCS(차세대 전투차량 프로젝트)는 말 할것도 없고 다른 비MRAP 차량의 생산배치 순위도 뒤로 밀려버리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돈이 없거든요.




[폭발 테스트 중인 미국 포스 프로텍션사의 쿠거]



문제는 MRAP가 대IED 성능을 제외하곤 전체적으로 시원치 않은 장갑차라는 점입니다. 폭발물 대응에 특화시킨 터라 애당초 장갑이나 무장이 빈약한데다 차체가 높아 기동력도 떨어집니다. 장갑이나 무장을 추가시키려 해도 무게 중심이 높아 쉽사리 무게를 증가시킬 수도 없지요. 즉, 무장이나 숫자가 빈약한 게릴라를 상대하는데 적합하지 정규군을 상대로 전면전을 벌이기엔 애로사항이 꽃피는 물건이란 소리입니다. 지금이야 쓸모 있지만 향후 이라크 전이 종료된 다음엔 애물단지가 될 공산이 커요.




[트랜스포머에도 출연했던 미 포스 프로텍션사의 버팔로 H]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니 많은 이들이 MRAP에 올인하는 미군의 행태에 우려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에 대한 마땅한 해법이 없다는 겁니다. 당장 병사들이 IED에 무더기로 죽어나가고 있는 판에 미군 입장에선 MRAP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거든요(IED를 탐지하는 꿀벌 개발에 천만 달러를 쏟아 부었지만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10년 후 기갑편제가 어떻게 망가지던 당장 이라크 전부터 해쳐 나가고 봐야 하니까요. 이는 미군이 게릴라전에 대응하느라 구조가 변화되는 과정에서 생기는 부작용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6. 아웃소싱의 확대


미군은 전통적으로 아웃소싱을 활발히 하는 부대입니다.  급식이나, 수송, 군수, 보급품 관리, 건설 등등을 민간에 맡기고 있는 것이죠.  다만 직접 전투와 관련된 부분은 어디까지나 직접 군이 하며 이를 뒤받쳐 줄 병참 부분에만 아웃소싱을 해 왔습니다.




[남북전쟁 당시 군마의 관리도 민간업체가 했음]



그런데 1차 걸프전과 보스니아 사태 파병 이후 이러한 아웃소싱의 규모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쿠웨이트에 설치한 미군의 대규모 물류기지에 있는 무기나 보급품 관리에 민간업체와 수억 달러의 계약을 체결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발칸반도 같은 경우 군인 9000명을 지원하기 위해 민간업체 직원 12000명이 고용되었을 뿐 아니라 군비의 10%를 민간업체가 가져갔습니다. 2차 걸프전의 경우 5200명의 직원이 미군을 지원했죠. 아웃소싱 영역도 신병훈련에 모병, 공항이나 관제탑 관리, 공중급유까지 확장되어 왔습니다.




[비교적 신생 PMC인 미국 KBR의 로고. 이 회사의 모회사는 딕 체니 부통령이 한 때 CEO 였던 곳으로 당시 발칸에 주둔중인 미군 기지의 병참 업무를 독점 30억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음]



군의 아웃소싱은 사실 장점이 많습니다. 미군처럼 모병제인 상황에선 병사들의 인건비가 비싸며, 일일이 모든 영역을 다 커버하기 위해 하나하나 부서를 만들고 인력과 장비를 배치하는 것은 시간과 돈이 많이 들 뿐만 아니라 이들을 관리하는 것도 보통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미국은 세계 방방 곳곳에 기지를 두고 있는데 그 중 규모가 작은 부대의 경우에는 아무래도 외주를 주는 것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이런 이유로 아웃소싱의 영역은 여러 방면으로 확장되고 규모도 매우 커졌습니다. 현재 미군은 병사 10명당 1명꼴로 민간직원과 계약하고 있죠.




[전통적인 PMC인 MPRI 소속 직원이 보스니아 군인들을 훈련시키는 모습]



그리고 2차 이라크 전이 종전되고 미군의 이라크 주둔이 장기화되자, 이라크는 곧 전쟁관련 민간업체의 천국으로 변합니다. 여기서는 기존 미군에선 쉽게 찾아 볼 수 없었던 아웃소싱이 눈에 띄게 되었습니다. 바로 전투요원입니다. 노골적으로 말하지만 ‘용병’이죠. PMC(Personal Military Company)에 소속된 전투요원들은 많은 경우 특수부대 등의 군 경력자고 현지 진출한 민간 업체에서 경호 목적으로 고용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미군과도 직접 계약하여 전투 활동도 하는 모양입니다. 그린존 방어나 공병대의 보호에 PMC가 직접 관여하고 있으며 이라크 요인 경호나 이라크 치안 유지에 투입되고 있습니다.




[PMC 소속 전투요원들의 보편적 군장. 미 특수부대 출신의 경우 연봉이 10만 달러가 넘어간다고]



흔히 PMC 하면 용병회사 쯤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 전투업무는 PMC의 영역 중 일부에 불과하며 수송, 보급, 급식, 훈련 등 다양한 군 관련 업무를 맡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전투업무 중 군사훈련 분야에서는 일찍부터 PMC가 미 정부에 고용되어 왔습니다. 특히 특수부대 같은 경우는 민간이 운용하는 군사 훈련소에 파견되어 훈련을 받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죠. 하지만 이라크 전에서 이들은 민간회사 뿐 아니라 미 정부에도 고용되어 각종 전투 활동에 직접 종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현재 이라크 내에서 직간접적으로 PMC에 고용되어 있는 직원의 숫자는 10만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PMC는 어디까지나 민간업체이기에 여기에 소속된 직원들도 모두 민간인입니다. 따라서 이라크 전에 있어서 미군법의 적용을 받지 않습니다. 거기다 이라크 정부와 미 정부간의 조약상 이들은 이라크 법률에도 치외 법권의 지위를 누리고 있습니다. 이 덕에 현재 이라크에서 PMC에 소속된 전투요원들의 민간인에 대한 불법행위가 빈번하게 자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중 유명한 것으로 2007년 블랙워터사 소속 직원들이 바그다드 시내에서 민간인 17명을 무차별 사살한 것을 들 수 있죠.




[아마도 가장 유명할 PMC, 블랙워터사의 직원들]



이런 저런 사건이 빈발하자 ‘미 정부는 PMC에 대한 관리를 하긴 하는 거냐’하는 비난 여론이 거세졌습니다. 거기다 PMC가 엄청난 돈을 받아먹지만 돈값만큼 제구실을 못한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고요. 하지만 미 정부로서는 PMC를 관리하는 것도 쉽지는 않습니다. 우선 수많은 업체가 우후죽순처럼 이라크 현지에 고용되어 일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제대로 장악하지도 못한 이라크 현지에서 이들을 감시하고 재제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죠. 그렇다고 PMC의 군사 활동을 금지했다가는 현지 민간기업체의 경호를 이라크 정부군이나 미군이 떠맡아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노릇입니다. 이런 가운데 당장의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각종 문제점들은 애써 무시하고 있는 것이 현재 미 정부의 태도입니다.


7. 정리


지금까지 이라크 사태에 의해 미군이 받은 영향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았습니다. 조금 뻥을 치자면 2차 이라크 전은 미국의 세계정복 계획의 일환이었습니다. 이라크에 안정적인 친미 정권을 세워 중동을 미국의 영향력 아래 놓는데 성공할 경우 이라크 자체의 석유 뿐 아니라 흑해의 석유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습니다. 거기다 이를 바탕으로 카스피 해나 카자흐스탄까지 미국의 영향력이 미칠 경우 중국과 러시아, 양 대국의 턱밑에 비수를 들이밀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중동과 흑해 바로 위가 러시아이며 동쪽 카자흐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을 넘어가면 중국이 있음]



그러나 흑해의 석유는 생각보다 경제적 가치가 크지 않은 것이 드러났으며 이라크 자체 유전도 북쪽은 쿠르드 족, 남부는 시아파 민병대 때문에 시원치 않은 상황입니다. 이라크에 안정적인 친미정권은 커녕 그 반동으로 이슬람 원리주의가 중동을 휩쓸 빌미만 주었죠. 설상가상으로 게릴라전에 발목이 잡혀 매년 막대한 돈과 인력을 낭비하고 있고요.




[이라크전 반대 시위]



이런 문제로 미군이 여러모로 한계에 온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아직까진 결정적으로 망가진 지경은 아니며 조속한 시일 내에 이라크에서 철군할 경우 충분히 만회할 수 있는 상황으로 보입니다. 물론 정치권이 이라크 전을 어떻게 끌고 갈지는 별개의 문제이긴 합니다만. 중요한 것은 한미군사동맹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 상황에서 미군이 겪는 어려움이 우리나라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 문제가 장래 한국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그 점은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의 몫으로 남겨 두겠습니다.




[전쟁이 악인 이유 : 미군에게 살해당한 이라크 민간인. 2005년 11월 어느 날, 미 해병대 소속 병사들이 비무장 이라크 민간인 15명을 일방적으로 쏴 죽임. 이 중 7명은 여성, 3명은 아동이었음]

by 하야니 | 2009/02/26 23:12 | 트랙백 | 덧글(0)

퍼온글)애플신화

아이팟, 맥북, 아이맥으로 대변되는 애플컴퓨터사는 다른 글로벌 IT기업들과 마찬가지로 국내 소비자들 사이에 크게 알려지지 못한 기업 중 하나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애플에 대해 아이팟을 제작하는 MP3전문 기업으로 오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윈도를 만든 빌게이츠의 마이크로소프트와 함께 해온 PC 산업의 중심 기업인 것에 대해 좀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스티브 워즈니악과 스티브 잡스, 이 두 사람의 이름으로 시작돼는 애플의 역사는 MS의 역사만큼이나 PC산업에 많은 영향을 끼쳤고 굉장한 변화를 이끌어 왔다. 혹자는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PC의 기본 개념을 정립한 기업으로 애플을 언급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애플이라는 기업이 과거의 PC산업에 끼친 영향은 무엇이었으며 미래의 PC산업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애플의 시작
애플은 1976년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 로널드 웨인의 세 사람에 의해 창립되었다. 서로의 생각과 기술을 바탕으로 새로운 컴퓨터 시스템을 만들기를 원했었고 결국 애플 1 을 탄생시키게 되었다.

그들이 만들어낸 애플 1은 산업계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고 시장에서의 반응도 냉담했었다. 주변의 지인들과 상인들을 설득하여 조금씩 판매량을 늘려가던 애플 1은 미국의 유력한 전자 부품 판매 회사인 ‘크래머 일렉트로닉스(Cramer Electronics)’의 눈에 띄게 되어 주문 판매를 시작하게 되었다.


최초의 애플 컴퓨터인 애플 1의 시장 진입이 이루어진 후 그들은 바로 신제품 개발에 착수했고 보다 향상된 성능과 키보드 일체형의 모습을 가진 좀 더 완전한 형태의 애플 II를 개발하게 되었다.

개발 직후인 1977년 3월, 미 서부 해안 컴퓨터 전시회(West Coast Computer Faire)에서 처음 소개된 애플 II는 다른 경쟁사의 PC들 보다 고가였지만 곧 시장을 선도하는 상품이 되었으며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 붐을 이루어 이후 컴퓨터 시대를 본격적으로 여는 시발점이 되었다.


애플 II는 흑백의 문자로만 이루어져 있던 PC사용 환경을 컬러 그래픽으로 장식하기 시작했으며 오픈 아키텍처의 적용으로 높은 완성도를 통해 사용자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게 되었다. 당시 개발된 스프레드시트 등의 프로그램들이 애플 II의 활용도를 높여주는 역할을 했고 개인용 PC로 개발되었던 애플 II가 업무용 시장으로 그 영역을 확대하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애플 II의 성공과 함께 다양한 후속기종을 내놓게 되었고 이와 함께 더욱 완성도 높은 소프트웨어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PC산업의 규모는 점차 확대되며 유능한 소프트웨어 및 하드웨어 개발자들의 등장에 촉진제가 되었다.


80년대 초반 애플은 교육용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어린이도 쉽게 다룰수 있는 컴퓨터 언어인 로고(LOGO)와 같은 소프트웨어와 교육용 콘텐츠로 세계의 여러 학교에서 환영 받았다. 이러한 교육 시장으로의 진출은 캘리포니아 주 소재의 학교마다 하나씩 애플 II 컴퓨터와 소프트웨어를 지원한 데에서 시작되었다. 교육 시장에서 애플의 확고한 선점은 가정용 시장에서도 큰 힘이 되었고 개인용 컴퓨터 시장을 선도하는 위치에 이르렀다.

하지만 당시 업무용 컴퓨터 시장이 큰 수익성을 가질 거라 예상했던 IBM과 MS는 서로간의 공조체제를 구축하여 새로운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데 막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경쟁 속에서 애플은 고전을 면치 못했고 결국 1980년 5월 애플 Ⅲ를 선보였지만 냉각팬 과열과 같은 기기적 결함 등의 문제로 수천 대의 컴퓨터를 리콜해야 하는 상황이 오는 등 시장에서의 상황이 계속 악화 되어갔다.

이 상황에서 IBM은 중대형 컴퓨터로 쌓아 올린 역사와 전통에 의한 신뢰감을 배경으로 한 IBM PC의 기치 아래 다른 협력사들에게 개방적인 하드웨어를 생산했고 MS의 MS-DOS를 번들로 제공한 16비트 개인용 컴퓨터를 시장에 선보였다.

결국 개인용 컴퓨터 시장에서 애플의 시장 점유율은 급속도로 떨어지게 되었고 시장공략에 실패하기에 이른다. 결국 MS와의 경쟁에서 밀려난 애플은 다른 전술을 구사했는데 독자적 시스템을 통해 새로운 PC 환경을 구축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폐쇄적인 하드웨어 정책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당시 스티브 잡스는 제록스사와 함께 진행된 프로젝트를 통해 미래의 컴퓨터에는 GUI (Graphic User Interface :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애플의 차세대 PC 프로젝트였던 애플 LISA에 이를 적용하기로 했다. 애플 LISA는 1983년 GUI가 적용된 최초의 개인 컴퓨터로 시장에 등장했지만 9,995달러에 달하는 높은 가격과 제한적인 소프트웨어 때문에 상업적인 실패를 맛봐야만 했고 이로 인해 스티브 잡스는 경영 내분으로 그룹에서 밀려났고 제프 라스킨이 추진하던 보다 저가의 컴퓨터 프로젝트인 매킨토시로 대체되었다.


■애플의 중심 프로젝트 매킨토시
1984년 애플은 매킨토시(Macintosh : 이하 MAC)를 발표했다. 매킨토시는 슈퍼볼 경기 중계방송에서 방영된 유명한 텔레비전 광고를 통해 알려졌다. ‘1984’로 알려진 이 광고는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것이다. 150여만 달러를 들인 이 광고는 리들리 스콧이 감독을 맡았고 슈퍼 볼 XVIII 기간이던 1984년 1월 22일에 방송되었다.

광고를 통해 애플은 IBM PC가 빅브라더이고 매킨토시는 바로 그 빅 브라더를 타도하는 영웅이라는 것을 말하려고 했다. 사실상 이때부터 IBM계열의 PC와 애플 MAC의 대립적 경쟁 구도가 시작 되었다.

1985년 스티브 잡스가 영입했던 존 스컬리는 스티브 잡스와의 내분 끝에 잡스를 애플에서 몰아내고 최고경영자에 취임한다. 1985년, 친 스컬리 경향을 갖게된 애플의 이사회는 스티브 잡스로부터 주요 업무를 박탈했다. 잡스는 후에 애플에서 퇴사하고 넥스트 사를 창업하게 된다.

이후 매킨토시는 인쇄프로세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성공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훌륭한 인쇄 품질의 레이저라이터와 페이지메이커의 출시는 매킨토시의 구세주 역할을 한 것이다. 레이저라이터는 합리적인 가격으로 출시된 최초의 레이저 프린터여서 훌륭한 출력 품질을 만들 수 있었고 WYSIWYG형 전자 출판 소프트웨어인 페이지메이커는 본격적인 전자 출판용 솔루션이었다.

이런 시스템의 등장과 함께 매킨토시는 본격적인 전자출판의 시대를 열었다. 이후 전자출판 시장이 확장됨에 따라 애플의 매킨토시는 DTP(DeskTop Publishing)의 주축을 담당하게 되었고 인쇄 및 디자인 관련 업무의 80%이상을 매킨토시가 점유하기에 이른다. 이 시스템은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으며 Quark Xpress와 어도비의 그래픽 소프트웨어를 통한 DTP 솔루션이 인기를 끌고 있다.

동시대인 1985년 MS는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기반으로 하는 윈도 1.0을 발표했지만 매킨토시의 OS 시스템에는 위협적인 대상이 못되었다. 하지만 이후 윈도 3.1와 95의 등장으로 상대적으로 고가였던 매킨토시의 저렴한 대안으로 떠오르며 PC 시장에서 패권을 쥐게 되며 그래픽 솔루션 및 전문작업에는 매킨토시가, 일반 개인 사용자들에게는 IBM호환 PC가 자리를 잡는 모양새를 갖춰가기 시작했다.

1991년에 애플은 MAC OS에 대한 대대적인 개선 작업을 벌여 시스템 7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다. 속도가 느리고 많은 컴퓨터 자원이 필요하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컬러 인터페이스 기반의 다양하고 강력한 네트워크 호환성등 차세대 컴퓨터 운영체제의 발전에 큰 전기를 마련했다.

당시의 경쟁제품인 OS/2나 윈도, 아미가 등에 비해 훨씬 발전된 형태인 시스템 7은 애플이 2001년 후속 운영체제인 MAC OS X를 내놓기 전까지 애플이 발매한 모든 컴퓨터의 기반이 되었다.

한편 MS 윈도의 지속적인 발전으로 사람들은 더 저렴하고 보편적이며 실용적이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고, 운영체제 시장에서의 점유율 차이가 점점 벌어졌다. 특히 업무용 시장에서의 MS 제품의 성공과 저렴한 가격의 컴퓨터와 주변기기, 그리고 점점 더 늘어나는 지원 소프트웨어들로 인해 많은 고객들이 ‘윈텔(윈도+인텔)’ 진영으로 돌아섰고 MS에 대한 시장 점유율 싸움에서 다시 우위를 찾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1990년대 후반 애플은 자사의 운영체제의 멀티태스킹 능력과 메모리 점유에 대한 개선을 추진했지만 내린 결론은 차라리 새로운 운영체제를 채택하여 매킨토시에 맞게 만드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었다. 결국 애플은 Be의 BeOS, 넥스트의 넥스트스텝, MS의 윈도 NT를 고려하기 시작했다. 최종적으로 애플은 넥스트스텝을 채택했고 이는 훗날 맥 오에스 텐의 기반이 된다.

이런 결정에 따라 1997년 2월 7일 애플은 넥스트 사와 넥스트스텝 운영 체제에 대한 인수를 마쳤다. 덕분에 스티브 잡스는 다시 애플로 돌아오고 CEO였던 길 아멜리오는 저조한 실적과 위기 상황으로 경영을 몰아간 책임을 지고 최고 경영자에서 물러났다. 이 때 스티브 잡스는 임시 최고경영자의 자격으로 다시 애플의 경영을 맡게 되었고 다시 재정비와 부흥을 이끌게 되었다.

스티브 잡스는 먼저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1997년 맥월드 엑스포에서 MS와 파트너십을 체결한다고 발표했다. MS는 향후 5년간 계약 관계를 유지하며 매킨토시용 MS 오피스를 발매하고 애플에 대하여 1억 5,000만 달러의 투자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MS의 웹브라우저인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매킨토시에 번들로 탑재한다고 밝혔다.

MS 회장 빌 게이츠는 스크린상으로 밝힌 메시지에서, MS가 향후 매킨토시용으로 발매할 소프트웨어의 로드맵을 밝히고 애플의 성공을 위해서 도움이 될 것에 대해 기쁘게 생각한다는 요지의 메시지를 보냈다. 스크린을 통해 화상이 나온 뒤 스티브 잡스는 MS와의 필요 없는 경쟁보다는 애플을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을 주장했다. (당시 MS는 반독점 소송 진행 중이었다.)

1997년 11월 10일 애플은 새로운 인터넷 시대에 맞추어 온라인 스토어를 발표했다. 이 사이트는 넥스트를 인수하면서 같이 가지고 온 웹오브젝트 응용 프로그램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이 새로운 온라인 직거래 상점은 애플의 새로운 생산 전략에 따라 새롭게 개편되었고 파워피씨 G3을 탑재한 새로운 컴퓨터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Think Different, Apple's Design

1998년 애플은 초창기 매킨토시 128K의 디자인으로 회귀하여 모니터와 본체를 일체화한 디자인의 새로운 컴퓨터 아이맥을 선보였다. 아이맥을 디자인한 팀은 훗날 아이팟을 디자인한 조나단 아이브가 이끌고 있었다.

투명한 플라스틱 소재를 베이스로 채택하여 매우 혁신적인 디자인을 선보였다. 아이맥은 시장에서 대단히 새로운 평가를 받으며 발매 첫달에만 거의 80만 대가 판매되어 애플 위기 회복의 전기가 되었다. 아이맥 덕분에 애플은 1993년 이래 처음으로 흑자를 기록하게 된다.

애플은 데스크톱 PC에서의 성공을 기반으로 제품 디자인에 대한 전략을 꾸준히 수립해 왔다. 애플은 보다 나은 디자인의 제품을 만들기 위해 폴리카보네이트 재질의 흰색 일반사용자용 아이맥과 아이북을 출시하고 교육 시장을 겨냥한 일체형 컴퓨터인 이맥(eMac)을 출시했다.

당시 조개북으로 불리던 아이북의 초기 모델은 아이맥과 패밀리룩을 형성하며 새로운 PC 디자인의 이정표를 제시했다. 한편 전문가용 매킨토시 컴퓨터들은 금속 재질의 외장을 사용했다. 이후 2001년 티타늄 파워북을 시작 금속 재질의 제품들이 대거 등장하며 2003년에는 파워맥 G5가, 2004년에는 시네마 디스플레이가 출시되었다.

아이맥을 비롯한 새로운 애플 제품이 성공을 거둠에 따라 수익 또한 상승했다. 컴퓨터 관련 언론들은 애플의 발표에 대하여 귀를 기울였고 애플의 기술진이 다음에는 어떤 프로젝트를 내어 놓을지에 대한 공론이 활성화되었다. 애플이 어떤 새로운 것을 선보이면 사람들은 이것을 ‘새로운 표준’이라고 불렀다.

■OS X의 등장

2001년 애플은 차세대 매킨토시용 운영 체제인 맥 오에스 텐을 발표했다. 넥스트의 오픈스텝과 BSD 유닉스에 기반을 두어서 매킨토시 운영체제를 다시 재설계한 운영체제이다. 일반 사용자와 전문 사용자 모두를 위해 유닉스의 장점인 안정성과 신뢰성 그리고 높은 보안성을 가지는 한편 매킨토시의 전통적인 사용하기 쉽고 간편한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결합하였다.

또한 애플은 클래식 운영 체제에서 쉽게 오에스 텐으로 이주할 수 있도록 에뮬레이션을 통해 클래식 운영 체제 환경에서 사용하던 응용 프로그램을 계속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개발자들은 카본 API을 이용하여 기존의 클래식 운영 체제용 소프트웨어를 맥 오에스 텐에 맞게 재컴파일하여 쉽게 맥 오에스 텐용 소프트웨어를 개발할 수 있었다.

2002년 애플은 낫씽리얼(Nothing Real)과 그 회사의 디지털 콤포지트 프로그램인 셰이크(Shake)를 인수했다. 같은 해에 애플은 Emagic을 사들여서 전문가급 음악 제작 프로그램인 로직(Logic)으로 발매했다. 이로 인해 애플의 전문 음악가용 소프트웨어에 대한 지원이 강화되었다.

한편 일반 사용자용 음악 제작 프로그램인 개러지밴드(Garage Band)를 개발해 발매했다. 이 소프트웨어는 2002년 아이포토가 출시됨에 따라 애플의 전문가용 패키지와 일반사용자용 솔루션인 아이라이프에 합쳐져서 매킨토시 컴퓨터의 소프트웨어 지원에 큰 힘이 되었다.

여기에 오피스 사용자들을 위한 아이워크의 등장은 업무용 PC로써의 매킨토시의 역할을 확대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기존 MS진영의 오피스 프로그램군인 MS 워드, 엑셀, 파워포인트를 사용하기 위해 많은 오픈오피스 프로젝트에 기대왔던 매킨토시 유저들은 아이워크의 등장에 환호했다.

먼저 발매했던 MS의 MAC용 오피스의 완성도도 훌륭했지만 OS X를 기반으로 새롭게 등장한 오피스 프로그램인 아이워크의 유저들은 점차 늘어만 갔다. 특히 파워포인트와 같은 역할을 하던 키노트는 프레젠테이션의 집중도를 높이는 다양한 이펙트로 더욱 큰 사랑을 받았다.

한편 애플은 매크로미디어로부터 동영상 편집 소프트웨어인 파이널 컷 프로를 구매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일반 가정용 시장을 겨냥한 아이무비, 전문가를 위한 파이널 컷 프로가 1999년에 출시되었다. 파이널 컷 프로는 현재 가장 성공적인 비디오 편집 프로그램의 하나가 되었다.

또한 애플은 Astarte 사의 DVDirector 프로그램을 구매하여 일반용과 전문가용으로 각각 iDVD와 DVD 스튜디오 프로를 출시해 영상 편집 분야에도 진출하는 등 멀티미디어 전문 하드웨어로써의 입지를 더욱 두텁게 했다.

■최초의 인텔 베이스 맥 컴퓨터, 아이맥

애플 CEO 스티브 잡스는 2005년 6월 6일 키노트에서 애플이 2006년부터 인텔 프로세서를 탑재한 매킨토시를 만들 것이라고 공식적으로 밝혔고 2006년 1월 10일 애플은 인텔 프로세서를 장착한 최초의 매킨토시를 선보였다. 이 때 선보인 기종은 맥북 프로와 아이맥이었다. 두 컴퓨터 모두 인텔 코어 듀오 칩셋을 탑재하고 있었으며 더 빠른 속도와 향상된 성능을 선보였다.

2월 이후, 애플은 인텔 프로세서를 탑재한 맥 미니를 출시했다. 맥 미니는 코어 듀오 프로세서와 코어 솔로 프로세서(싱글 코어)를 장착하고 미디어 솔루션인 프론트로(DVD, 음악 파일, 동영상 파일, 이미지 파일을 손쉽게 볼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소개하여 가전시장으로의 진출의도를 내보였다.

2006년 8월 7일 WWDC에서 파워맥을 대체하는 맥 프로, 인텔 프로세서를 탑재한 Xserve를 발표함으로써 애플은 종전에 예고했던 것 보다 더 빨리 인텔 CPU기반으로의 이전을 완료했다. 4월 5일에는 애플에서 인텔맥에 윈도 XP 등 다른 운영체제을 설치할 수 있게 도와주는 부트캠프 소프트웨어를 발표하였다.

현재 인텔 프로세서 기반 매킨토시는 공식적으로 맥 오에스 텐, MS 윈도와 리눅스를 가상 환경을 거치지 않고 모두 구동할 수 있는 유일한 컴퓨터이다. 맥 오에스 텐인 10.5 버전 레오파드(Leopard)에는 부트캠프를 패키지로 기본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인텔 칩셋을 적용한 애플의 전략은 성공적이었고 PC시장에서의 점유율을 높이는데 큰 기여를 했다. 특히 윈도 시스템에 젖어있던 수많은 PC유저들이 MAC으로 좀 더 쉽게 스위칭 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을 정도로 부트캠프의 역할은 굉장했다. 실제로 MAX OS X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애플의 하드웨어 디자인에 매료돼 제품을 구매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결과적으로 MAC OS의 매력에 대한 호기심에 스위칭하는 유저들도 늘어가고 있다.

애플은 인텔 칩셋을 적용한 포터블 라인업을 강화하며 맥북 시리즈의 출시와 함께 시장에서 좋은 위치를 선점하게 된다. 맥북의 판매량은 이전 아이북과 파워북의 판매량을 갈아치우며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고 전문가급의 맥북 프로 시리즈의 판매량도 늘어났다. 스티브 잡스는 2008년 맥월드에서 세계에게 가장 얇은 노트북인 맥북 에어를 공개하며 하드웨어 개발 능력을 과시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아이팟, 세계 MP3시장을 장악

2001년 9월 23일 애플은 휴대용 음악 재생기인 아이팟을 발표했고 11월 10일에 정식 발매했다. 곧이어 온라인 음악 판매 서비스인 아이튠즈 뮤직 스토어(iTunes Music Store)가 열렸고 아이팟과 연동되는 음악 파일들을 한곡당 99센트에 판매했다. 이 서비스는 정식으로 음반사와의 계약을 통해 합법적인 디지털 음악을 공급하는 시장의 1인자가 되었고 2006년 9월에는 15억 곡 다운로드라는 기록을 세웠다.

아이팟은 액정표시장치, 내장 배터리, 대용량 메모리와 클릭휠 방식의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매킨토시와 같은 편리하면서도 간결하게끔 만들고 이를 컴퓨터에 설치한 소프트웨어인 아이튠즈을 통해 음악과 기타 데이터들을 관리하고 동기화시키는 제품이다.

애플은 이를 기반으로 점점 사용자 경험을 더욱더 확장하여 컬러 디스플레이를 채용하고 사진 및 비디오를 플레이할 수 있도록 하였다. 특히 음반회사들과 할리우드 영화사, 방송사들과의 관계를 통하여 음반, 영화, 텔레비전 쇼 등을 아이튠즈 뮤직 스토어를 통해 판매하고 있다. 또한 팟캐스팅라 불리는 손수제작물(UCC)인 개인 방송들을 쉽게 구독할 수 있는데 대부분 무료이어서 사용자들의 편의를 대폭적으로 향상 시키고 있다.

■아이팟의 최종 진화, 아이폰/아이팟 터치

2007년 1월 9일 최고경영자인 스티브 잡스는 맥월드 샌프란시스코에서 사호를 애플컴퓨터에서 애플로 개명한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동시에 아이팟의 최종 진화 형태인 아이폰과 아이팟 터치를 선보였다. 모든 기능을 터치스크린으로 작동하는 스마트 폰의 형태를 띤 아이폰의 등장은 모바일 폰 시장의 흐름을 뒤흔든 일대 사건이었다.

아이폰은 맥 오에스 텐 기반으로 기본적인 음성 통화에 2세대 무선통신 기술인 GSM 방식, 무선 데이터 통신에 2.5세대 무선통신 방식인 GPRS/EDGE와 Wi-Fi를 사용하여 통신이 가능하고  PUSH 방식의 IMAP 이메일, 인스턴트 메신저 형식의 SMS, 사파리, 향상된 음성메시지, Wi-Fi (IEEE802.11b/g), 블루투스 등의 기능을 탑재한 손안의 컴퓨터를 표방하고 나섰다.

또한 구글과 제휴하여 아이폰에 맞춰 특별히 제작된 구글 맵 기능을 사용하면 지도와, 지역 정보, 위성사진들을 아이폰에서 볼 수 있다. 자신의 위치를 찾을 수도 있는데 GPS와는 달리 근처의 무선 기지국과 무선랜 시설을 인식하여 자기 위치를 추적할 수 있다.

스티브 잡스는 이 기능을 설명하면서 근처의 스타벅스 커피점을 검색해 커피를 주문하는 전화를 하기도 했다. 그 외 유튜브 동영상을 아이팟에서 볼 수 있는 H.264 포맷으로 변환하여 볼 수 있다. 이처럼 차세대 PDA또는 스마트 폰이라 불리우는 아이폰/아이팟 터치는 2세대 제품을 출시하며 더욱 큰 인기를 얻고 있으며 전 세계의 모바일 폰, MP4플레이어 제조사들의 경쟁과 도전을 끊임없이 받고 있다.

■iTMS의 컨텐츠 시장 장악능력

애플은 하드웨어 제조에서 그치지 않고 더욱 발전적인 형태의 소프트웨어와 콘텐츠 사업을 이어나갔다. 2007년 WWDC에서 아이폰과 함께 발표한 TV와 컴퓨터, 아이팟을 연결하는 셋톱박스인 애플 TV를 시장에 내놓으며 또 다른 도전을 예고했다. 이는 애플이 앞으로 컴퓨터시장이나 휴대용 음악기기와 판매시장 뿐 아니라 가정용 전자기기와 휴대폰 시장으로 그 사업영역을 대폭 확장하는 비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미 음원 콘텐츠를 서비스하던 아이튠즈 뮤직스토어(iTMS)에서는 애플 TV 및 MAC에서 감상할 수 있는 유료 영상 콘텐츠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비디오와 DVD대여점의 역할을 온라인으로 옮겨온 것이다. 훨씬 이전부터 온라인 콘텐츠 제공 업체들이 이러한 방식의 서비스를 기획하고 시도해 왔으나 성공을 이루지 못한데 반해 애플은 전용 하드웨어의 공급으로 기반을 다지고 통합 소프트웨어인 iTMS의 도입으로 성공적인 서비스를 시작할 수 있었다.

iTMS의 확대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아이폰과 아이팟 터치 어플리케이션의 공급 창구로써 역할을 추가하기 위해 어플리케이션 스토어(AppStore : Application Store)를 오픈하기에 이른다. 관련 SDK를 통해 누구든 어플리케이션을 제작하여 판매할 수 있는 역할을 하는 AppStore는 수백만건에 달하는 전무후무한 콘텐츠 다운로드 기록을 세우며 새로운 온라인 사업 아이템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by 하야니 | 2009/02/22 09:50 | 트랙백 | 덧글(0)

언제 살것인가(부동산뱅크 퍼온글)

언제나 부동산 신중론과 부동산 옹호론이 맞붙곤 했지요.

신중론자는 대부분 국채나 CD 등 금리와 유동성, 주택수 등의 거시경제적인 접근을 통해 하락을 점쳤고,
옹호론자는 대부분 부동산소유라는 심리적인 접근을 통해 상승을 점쳤지요.

당시 논쟁에서 대부분 신중론자들이 이겼습니다.
논리적으로 접근하므로 당연한 수순이었겠지요.
하지만 이제껏 결과만을 가지고 보았을 때 한번도 신중론자가 이긴 적 없습니다.
논쟁에서는 이겼지만 실제에서는 손가락만 빨았던 거지요.
실제 이면을 보아도 신중론자는 대부분 젊고, 서민들이 대부분인 반면, 옹호론자는 대부분 수많은 경험을 축척하여 재산도 어느 정도 불린 나이가 든 중산층 이상이 많았습니다.

중산층 이상의 대부분이
마음 한 켠

’니들이 아무리 그래 보아라.
결국은 내 말이 맞을 걸?
저지르지도 못하면서 말만 많으면 뭘해’..

라는 비아냥거리는 시각
이제까지의 대세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이제껏 유지되던 상황과는 다른 듯 합니다.
실제 부동산이 떨어지고 있거든요.

IMF 이후 처음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IMF 당시는 사실 폭탄 돌리기의 상황이었습니다.
대출을 많이 받아서 사업이든, 부동산이든 벌리는 것이 대세인 무렵.

가만히 있는 사람들이 바보인 시절이었죠.
그 극단의 폭탄이 언젠가 터질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결국 기아와 대우라는 거대한 함선이 침몰되면서 우리나라는 거대한 소용돌이에 직면하게 됩니다.

주가와 부동산은 반토막났습니다.

기업은 대출을 통해 투자와 투기에 열을 올렸고, 서민들은 신용카드 대출을 통한 소비와 투기에 맛을 들였습니다.
어느 순간 외국투기세력의 환투기에 의해 촉발되었지만 그 시기가 언제가 될지언정 무너지는 것은 언제고 터질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었습니다.

당시 투자금융회사는 외국에서 저금리로 외화를 대출받아 고금리의 우리나라에서 이자놀이를 했습니다.
카드사는 저리로 카드채를 발행하여 비싼 신용카드 대출이자로 마진을 챙기고 있었으나 무분별한 신용카드 발급은 결국 대출회수가 어려워지면서 고립을 자초했지요.

LG카드가 무너지면서 카드채는 말도 안되는 가격으로 돌아다녔습니다.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부도난 카드사의 카드채를 아무도 구입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동아건설의 지급보증으로 같이 무너졌던 대한통운, 외환은행이 보유하던 부도회사의 회사채와 은행채 등 수많은 사채들이 헐값으로 시장에 나왔습니다.

이러한 사채들을 왜 우리나라 사람들과 기업들은 구입하지 않았을까요?

당시 외환은행, 진로, LG카드, 대우, 기아 모두 굳건하게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당시에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던 그 회사채,은행채,카드채들은 정상이자까지 모두 지급받고 정상가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아마 대부분 그리 말할 것입니다.
지금이니까 가능하지 그 때 어떻게 그런 것을 예측할 수 있었겠냐고.

하지만 세계 전체적으로 돈을 굴리는 세계적인 투기세력들의 눈에는 당연히 그 이후의 상황들도 예측가능했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인수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국가에서 어떻게든 살려놓기 때문에 그런 큰 기업들이 사라지진 않을 거라는 것을요.
그렇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경제에 대한 눈이 있었다면 그런 채권들을 구입하여 놓으면 나중에 어마어마한 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선례를 본 사람들, 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사람들은 그 이후의 모습을 보기 때문에 당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선례를 보지 않은 사람들, 눈 앞에 것만 집착하는 사람들은 당황하지요.
경험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당황하고 그래서 어리석은 판단을 하게 되지요.

과거의 경험을 체화해 내고 거기서 미래의 해법을 찾는 일 반드시 필요한 이유입니다.

지금으로 돌아옵니다.
사실 IMF와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다릅니다.

그럼 무엇이 다를까요?
일단 우리나라가 위기를 한번 경험했다는 것이 다릅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우리나라만 위기였지만, 지금은 세계적으로 위기가 공유되고 있는 것이 다릅니다.

사실 우리가 IMF를 겪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세계적인 경기불황이 왔다면 정말 대책이 없었을 겁니다.
일본의 10년 불황 이상의 고통이 우리를 엄습했겟죠.

다행히 그 때 망할 기업 망하고, 흥한 기업도 부채비율 등에서 각고의 노력 끝에 건전성을 유지하게 되어 지금 그나마 잘 버티고 있습니다.
부동산 버블 역시 DTI나 LTD 등 여러 가지 금융적인 제도를 통해 그 위험성을 미리 차단한 결과 선방하고 있는 것이구요.
학습효과이죠.

지금 위기에서 내가 보기에 우리나라는 상당히 선방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조금 더 지나면 다른 나라보다 더 빨리 회복되겠죠.
물론 수출이 주력인 우리나라 산업의 특성상 우리나라만 잘 될 수는 없겠지만 국제경기가 회복될 경우 제일 빨리 치고 나갈 확률이 높아 보입니다.
미국과 중국이 불황으로 넘어가자 동유럽, 중동, 중남미와 동남아 등 새로운 시장을 뚫어내고 있는 우리나라 기업들 보면 대단합니다.
존경스럽기까지 합니다.

이제 이런 거시적인 외적 상황을 뒤로 하고
지금 직면하고 있는 부동산 시장을 한번 보죠.

수많은 언론과 전문가들은 부동산의 회복 역시도 경기가 살아나야 회복될 수 있는 후행지표의 성격을 강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말이 맞습니다.

하지만 꼭 그렇게만 보지는 않는데요.
건설경기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부동산이 경기를 선행할 수도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뉴딜 정책과 지금 우리나라가 행하는 녹색뉴딜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요?

이제 투자의 기준으로 한번 상황을 체크해 봅니다.
1년 전을 기준으로 지금 되돌아 볼 때 가장 많이 떨어진 게 무엇입니까?

2000을 상회하던 주식이 1200선까지 후퇴했습니다.
사실 실물경제 자체적으로 우리나라가 흔들린 것은 거의 없는 데 말이죠.

그리고 강남의 재건축 아파트들 역시 최고시세 대비 20~30% 후퇴했습니다.
지금 용적률 상향과 조합원입주권 전매, 재건축 일반분양가 규제 폐지 등 재건축 관련되는 완화가 점차 가시화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지금 유동성 자금이 점차 늘어나고 있습니다.
한국은행은 돈을 계속 풀어내고 있지만, 그 돈들은 기업이나 가계의 대출로 연결되지 않고 MMF 등과 단기채권 등 단기수익을 쫗아 다니면서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한국은행에서 각 은행에 푼 돈이 환매조건부채권을 통해 다시 한국은행으로 들어가기도 하니까요.
기업에 대출하라고 한 돈을 다시 한국은행에 예치하면서 이자를 받을 정도로 은행 등 금융권은 현 경제상황을 보수적으로 운용하고 있습니다.

일단 가장 먼저 유동자금은 주식시장에 들어갈 겁니다.
차라리 유동성을 유지하면서 바로바로 현금화할 수 있는 곳에 돈을 넣어둔 상태에서 장기투자처를 찾고 있는 것이 현재의 자금시장 상태입니다.

상반기에만 20조원의 토지 보상금이 풀릴 예정입니다.
이 역시도 유동자금을 증가시키겠죠.
이 자금들은 일단 대기하고 있겠지만 무언가 상황이 호전되면 순식간에 주식과 채권, 부동산 등으로 쏠릴 것입니다.

외국자본은 요즘 너나 할 것 없이 아시아에서 한국의 증시가 가장 저평가되어 있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미국과 유럽 등 자국의 금융불안으로 인해 빠져나갔던 대부분의 자금들이 다시 들어오고 있구요.
외국인 순매수가 5일 연속 이루어졌다는 보도도 아마 접하신 분은 접했을 것입니다.
물론 아직까지 대세는 아닙니다.
하지만 한꺼번에 빠져 나갔던 외국자본이 본격적으로 우리나라로 들어오면 우리나라의 주식시장이 저평가되었다는 것을 증명할 뿐 아니라 구미각국의 경제위기도 어느 정도 자리잡았다는 반증이 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가장 먼저 투자자금은 주식으로 갈 겁니다.
부동산보다는 현금화가 빠르고, 더 저평가되어 있기 때문에 제1순위는 주식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강남 재건축 아파트로 가겠죠.
투자와 내 집마련이라는 두 가지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영원한 블루칩입니다.
즉 강남 재건축의 저평가 역시 주식시장 못지 않겠지요..
하지만 돈이 장기간 묶이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단기수익처인 MMF 등에 현금성 자산을 불리면서 들어갈 때를 수많은 주체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개의 시장에서 어느 정도 포화가 되었을 때 그 다음 수익처로 일반 부동산이 관심을 받게 되겠죠.

제가 보기에는 3순위가 되어야 일반부동산이 눈에 보일 거라는 말입니다.
제1시장인 주식, 제2시장인 강남 재건축이 포화되면 그 다음에 들어가는 자금이 진짜 경기회복과 궤를 같이 할 것으로 보입니다.

금리가 떨어지고 있기 때문에 현금자산의 가치가 점차 떨어지고 있습니다.
금리가 떨어질 거라고 예상할 때 가장 좋은 투자상품이 채권이지요.
떨어질 때까지 떨어져 채권의 매력이 줄어들 즈음이면,
실물자산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보이겠죠.
더군다나 투기지역 해제 등 목돈이 없는 사람들이 지렛대로 사용할 수 있는 대출 등을 통한 수요자들이 늘어나면서 부동산으로 관심이 옮겨갈 것입니다.

조금만 주택구입 수요가 생기면 건설사들은 분양을 시작할 것입니다.
건설사들이 땅만 사 둔 상태에서 비싼 택지이자를 내면서 버티기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분양이 되기 시작하면 건설경기가 고용 등을 창출하고, 도급, 재도급으로 이루어진 우리나라 건설현장에서 그 파급효과는 큽니다.
고용된 자들의 소비 등으로 인해 돈이 돌기 시작하면 경제회생의 가능성이 꿈틀대기 시작하겠죠.
분양가 상승으로 인해 기존 집값이 대출이자 이상으로 제 가치를 찾아나가면 심리적인 소비저해요인도 점차 사그러질 것입니다.
미실현이익이지만 이 역시도 심리적인 소비촉진의 큰 원인이 됩니다.

요는 미국의 뉴딜정책에서도 보았듯이 건설경기가 후행지표가 아닌 선행지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금융시스템의 혼란으로 인한 카오스적 상황일 확률이 큽니다..
세계 최대의 소비시장인 미국이 주택버블로 인해 실물고리와 금융고리가 끊기면서 연쇄적인 대규모 혼란이 시작되었고, 이로 인해 세계 최대의 공장인 중국을 비롯한 각국의 공장들이 가동을 멈추고 있습니다.
시스템이 재정비되고 다시 재작동되면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돌아갈 수 있습니다.
물론 그 때가 언제가 될런지는 신만 아는 것이겠지만,

최소한 부동산과 관련된 흐름은 주식시장의 어느 정도 반등, 재건축 아파트의 본격적인 꿈틀거림 시작,

이 두 개의 신호가 본격적으로 내달을 즈음 부동산 구매에 나서는 것이 옳을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강남 재건축 아파트가 9개월만에 반등에 성공했고, 제2 롯데월드로 인해 송파구 역시 들썩거리기 시작합니다.
어쩌면 지금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주식시장은 여전히 횡보 중이네요.
주식시장과 강남재건축에 충분한 자금이 들어오고 지나친 저평가라는 생각이 접어들 즈음


그 때가 부동산에 자금이 들어올 시기일 것입니다.
전문가들은 하반기 이후가 바닥이라고 하는데 저는 조금 더 일찍 봅니다.
카드매출율,재고자산율,백화점매출율 등 여러 가지 경제지표가 급속히 얼어붙는 등 외적인 환경이 좋지 않은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올해 초 부동산 시장은 금리하락과 재건축관련 법개정확정 등이 이루어지면 그 자체의 호재적인 힘으로 경제외적인 악재를 극복하고 독자적인 반등의 길을 모색할 것 같습니다.

아직도 많은 유동자금이 움직이지 않은 현 시점에서 이 두 개 시장의 큰 자금의 흐름을 참고하면서 내 집마련의 시기를 저울질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by 하야니 | 2009/01/12 23:01 | Eye to the realty | 트랙백 | 덧글(0)

아프가니스탄은 지금(퍼온글)

 
UN의 지원 아래 나토는 6년 째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하고 있다. 이 점령은 미국과 유럽연합의 합동작전이다.
지난 2월 26일[한국시간 27일] 딕 체니 미 부통령이 ‘안전하다’는 바그람 미 공군기지(한 때 소련의 공군 기지가 있었던 곳이다)를 방문하는 동안 탈레반 병사의 자살폭탄 공격 시도가 있었다. 이 공격으로 두 명의 미군 병사와 한 명의 용병(이른바 “청부업자”)이 죽었고, 기지에서 일하던 다른 20명도 사망했다.
 
이 사건 하나만으로도 미 부통령은 아프가니스탄 위기의 심각성에 주의를 기울였어야 마땅했다. 2006년에 사망자 수는 크게 늘었고 46명의 나토군 병사들이 이슬람 저항단체와의 교전이나 헬기 격추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현재 저항세력은 나토군이 미군을 대체한 칸다하르, 헬만드, 우루즈간 등의 주(州)에서 적어도 21개 지역을 통제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지역들의 많은 관리들이 게릴라 저항세력의 은밀한 지지자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상황은 통제가 불가능하다.
 
이 전쟁이 시작될 때 부시 대통령의 부인과 토니 블레어 총리의 부인은 수많은 TV와 라디오 쇼에 출연해 아프가니스탄 여성 해방이 이 전쟁의 목표라고 주장했다. 오늘날 누군가 이런 주장을 되풀이한다면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은 그의 면전에 침을 뱉을 것이다.
 
대체 누가 이 재앙에 책임을 져야 하는가? 아프가니스탄은 왜 아직도 점령 상태에 있는가? 미국이 이 지역에서 추구하는 전략적 목표는 무엇인가? 나토는 어떤 구실을 하는가? 그리고 대체 얼마나 오래 동안 한 나라가 국민 대다수의 뜻을 거슬러 계속 점령 상태에 놓여 있어야만 하는가?
 
탈레반 정권이 무너졌을 때 이를 슬퍼하는 사람은 아프가니스탄이나 다른 곳에서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서방의 선전 공세에 의해 조성된 희망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서방에 의해] 새로 임명된 엘리트들이 막대한 양의 해외 지원 자금을 빼돌리고 뇌물수수와 매관매직을 위해 그들 나름의 범죄 네트워크를 만들어 낼 것이라는 사실이 금새 분명해졌다.
 
고통은 민중들의 몫이었다. 집 없는 난민 가족의 수용을 위한 풀로 지붕을 얹은 진흙집의 [건설] 가격이 거의 5천 달러로 책정됐다. 이런 집들이 몇 채나 지어졌을까? 거의 지어진 게 없다. 매년 겨울 수백 명의 아프가니스탄인들이 집이 없어 얼어 죽는다는 보고들이 해마다 발표되고 있다.
 
대신에 서방 홍보업체들을 앞세워 엉터리 선거를 치르는 데 엄청난 돈이 쓰였다. 이 선거의 목적은 서방의 여론을 달래는 것이었다.
선거 결과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나토에 대한 지지를 만들어내는 데 실패했다. 꼭두각시 대통령인 하미드 카르자이는 [심지어] 자기 부족인 파슈툰족으로 이뤄진 보안 부대가 경호를 맡는 것조차 거부함으로써 자신이 얼마나 고립돼 있고 살아남으려 절치부심인지를 드러냈다. 그는 터미네이터 스타일의 강력한 미군 해병대를 원했고, [결국 미국의] 약속을 받아냈다.
 
제한된 마샬 플랜 식 개입이 아프가니스탄을 더 안정시킬 수 있었을까? 물론, 공짜 학교와 병원, 보조금 지원을 받는 빈민용 주택, 1989년 소련 군대의 철수 뒤 파괴된 사회기반시설의 재건 등을 통해 아프가니스탄을 안정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 양귀비 재배에 대한 의존을 줄이기 위해 국가가 농업과 주택 산업을 지원하는 일도 필요했을 것이다.
 
전 세계 아편 생산의 90퍼센트가 아프가니스탄에 기반을 두고 있다. UN의 추산에 따르면, 헤로인이 아프가니스탄 국내총생산의 52퍼센트를 차지하고, 농업에서 아편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급속히 커지고 있다.
 
이 모든 일에는 강력한 국가와 상이한 세계 질서가 필요했을 것이다. 오직 살짝 맛이 간 공상가만이 나토 국가들 ― 그들 자신의 나라에서 사유화와 규제 해체에 열을 올리고 있는 ― 이 해외에서 계몽된 사회적 실험에 착수하리라고 기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엘리트층의 부패가 흡사 치료불능의 종양처럼 만연했다. 몇 몇 재건 활동 지원을 위해 책정된 서방의 기금이 [재건 활동을 집행하는] 현지 관리들을 위한 초호화 주택을 짓는 데 유용됐다.
 
점령 2년째에 엄청난 규모의 주택 관련 부패 사건이 있었다. 정부 각료들은 스스로에게 포상을 내리고 친구들에게 카불 시내의 알짜 부동산들을 넘겨줬다. 카불의 땅값은 점령 이후 엄청나게 뛰었는데, 이는 점령군과 그들을 따라 온 수행 직원들이 전에 살던 스타일로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카르자이의 동료들은 빈민가가 한 눈에 들어오는 곳에 대형 저택을 짓고는 나토군의 보호를 받으며 지냈다.
 
여기에 더해 카르자이의 남동생 아마드 왈리 카르자이는 아프가니스탄의 가장 큰 마약 재벌이 됐다. 최근 파키스탄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카르자이가 국경 지역 [마약] 밀반입에 대한 파키스탄 측의 단속이 소홀하다고 지적하자 무샤라프 장군은 카르자이에게 자기 가족이나 잘 단속하라고 충고했다.
 
경제적 상황의 개선에 실패한 데 더해, 나토의 군사적 공격은 흔히 무고한 시민들을 희생시켰고, 이것은 지난해 아프가니스탄의 수도에서 격렬한 반미 시위들을 촉발해 왔다.
 
처음에 일부 현지인들에게 9·11 공격 이후 알 카에다 소탕을 위한 불가피한 치안 활동으로 여겨지던 일들이 이제는 지역 전체의 갈수록 많은 사람들에게 완벽한 제국주의 점령으로 여겨지고 있다.
 
탈레반이 성장하고 새 동맹들을 얻는 것은 그들의 종파적인 종교적 실천이 지지를 받아서가 아니라 그들이 민족해방을 위해 의탁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기 때문이다. 영국과 러시아가 두 세기 동안 나름의 대가를 치르며 깨달았듯, 아프가니스탄인들은 점령 상태에 있는 것을 결코 용인하지 않는다.
 
현재 나토가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더 많은 군대를 보내는 것은 더 많은 죽음을 가져올 뿐이다. 그리고 전면전은 인접 국가인 파키스탄을 불안정에 빠뜨릴 것이다.
 
무샤라프는 이미 파키스탄 내 무슬림 학교 공습 때문에 비난을 받아 왔다. 수십 명의 어린이들이 살해됐고 파키스탄의 이슬람주의자들은 거리에서 대중 시위를 조직했다.
 
파키스탄 정부 내 소식통들은 사실 이 ‘선제’ 공습이 미군 전투기들이 소위 테러리스트 기지를 공격한다며 저지른 일이라고 암시한다. 그러나 파키스탄 정부는 미국에 대한 분노가 폭발하는 걸 보느니 차라리 자신이 비난을 뒤집어쓰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나토의 실패는 파키스탄 정부 탓이 아니다. 도리어,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파키스탄의 두 개 주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했다.
 
아프가니스탄 내 최대 부족인 파슈툰족은 파키스탄 내에 있는 같은 파슈툰 형제들과 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사이의] 국경은 영국 제국이 그어 놓은 것이고 언제나 국경을 넘나드는 교류를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 나는 1973년에 파슈툰 부족의 복장을 입은 채 아무 제재도 받지 않고 국경을 넘었다.
 
텍사스 식 울타리[멕시코인들의 불법 이민을 막기 위해 설치한 울타리 ― 역자]나 이스라엘 식 장벽[팔레스타인 지역을 고립·봉쇄하기 위해 이스라엘이 지은 장벽 ― 역자]을 산악 지역을 가로질러 두 나라를 나누고 있는, 대부분 표지조차 없는 2천5백 킬로미터의 국경에 설치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라크에서 미국을 배신한 유럽 동맹국들의 군기를 잡기 위한 전쟁이 필요한 게 아니라면 아프가니스탄에서 워싱턴의 전략적 목표라 할 만 한 것은 없는 듯하다.
물론, 알 카에다 지도자들은 아직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체포는 전쟁과 점령이 아니라 효과적인 치안 활동을 통해서 이뤄질 수 있을 것이다.
 
나토가 철수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란, 파키스탄,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민족적·종교적 다양성을 존중하는 연방 헌법을 보장하는 데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할 것이다. 나토 점령은 이런 과제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토의 실패는 탈레반이 부활하도록 만들었고 점점 더 파슈툰족이 탈레반을 중심으로 단결하도록 만들고 있다.
 
여기서 교훈은 ― 이라크에서와 마찬가지로 ― 간단하다. 남아프리카, 인도네시아, 칠레에서 그랬듯이 정권 교체란 비록 시간이 좀 더 걸리더라도 아래로부터 이뤄지는 편이 훨씬 낫다는 것이다. 점령은 근본적인 변화의 가능성을 파괴하고 전보다 훨씬 더 큰 혼란을 가져올 뿐이다. 아프가니스탄은 그런 사례 중 하나일 뿐이다.

by 하야니 | 2009/01/10 08:02 | Eye to the world | 트랙백 | 덧글(0)

아프간과 한국: 국제정치사의 아이러니 (김경수 명지대교수)-퍼온글

한국과 아프가니스탄은 일견 서로 간의 연관성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같은 ‘아시아’에 속한다는 것 빼고는 각기 동북아와 서남아지역에 위치한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정 반대방향의 위치에 종교와 문화, 언어, 민족 등 공통분모가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근·현대사에서 두 나라는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는 역사적 이벤트를 공유하고 있다. 특히 아프간은 여러 의미에서 현대 정치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는데 있어 ‘태풍의 눈’ 역할을 해온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거문도 사건, 영·러간 아프간 세력다툼의 여파

지금으로부터 120여년 전 1885년 4월 영국의 동양함대가 남해의 거문도를 점령한 사건을 우리는 ‘거문도사건’으로 중고등학교 시절 역사에서 배웠다. 하지만 왜 거문도 사건이 일어났는지 그 배경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요컨대, 당시 약소국인 한국의 영토가 대영제국의 함대에 의해 강제점령 당하는 비운을 맞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아프간에서의 영국과 러시아간의 세력다툼의 불똥이 이역만리 한반도에 튄 까닭이다.

19세기 5대양 6대주에서 ‘해가지지 않는 나라’로 불리던 해양세력 대영제국은 나폴레옹 전쟁에서 그 위력을 발휘한 대륙세력의 강국 러시아의 도전을 받는다. 부동항을 찾아 ‘흑해’로 진출하려는 첫 번째 러시아의 도전은 나이팅게일로 유명한 크리미아 전쟁(1853년)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세력의 견제로 좌절되었다.

그후 1885년 러시아가 ‘페르샤만’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로 중앙아시아의 실크로드(교통) 요충지인 아프간 접경 ‘머브 오아시스’(Merve Oasis)와 아프간의 ‘판즈데 오아시스’(Panjdeh Oasis)를 강제 점령하자 당시 인도식민지 경영에 여념이 없던 영국은 양국 간 국경위원회 구성을 제의하며 타협하는 한편 극동에서 부동항을 찾아 한반도로 러시아세력이 남하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할 목적으로 거문도를 불시에 점거하게 된 것이다.

당시 한국(조선)은 갑신정변(1884년)으로 국내 정치가 혼미상황이었기에 영국의 거문도 점거도 손쉽게 이루어 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청국의 이홍장의 중재로 러시아가 한국 영토에 야심이 없다는 다짐을 받고 2년 뒤 영국 함대가 철수하기는 했으나 우리 주권국가 역사의 오점으로 기록되는 사건이다.

이로부터 바로 10여년 뒤 영국이 우려했던 대로 러시아세가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손을 뻗치게 된다. 자의반 타의반이기는 하나 고종의 아관파천(1896년)은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하여 국사를 보았다는 데서 다른 열강의 질시를 받았던 것도 사실이다.

영국의 거문도 점령이 러시아세의 남하를 저지하려던 제스처였다면 1902년의 영·일 비밀동맹은 영국이 일본을 내세워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려고 한 또 다른 견제구였다. 2년 뒤 일본은 막강한 영국을 뒤에 엎고 노·일전쟁(1904~5년)을 일으켜 승리한 후 급기야 한국(조선) 병탄의 수순을 밟게 된다.

즉, 거문도사건은 영·일동맹의 전조이고 영·일동맹은 일본이 당시 대륙의 최대강국 러시아에 도전하는 빌미를 제공하였으며 그 결과 한국(조선)은 독립을 잃게 되는 수순을 밟아가게 되는 것이다.

아프간 2차대전 후 구소련과 밀접한 관계 지속

한편 아프간에 대한 러시아의 야심은 영국이 인도와 인도양에서의 제해권 보호를 명분으로 강력 견제함에 따라 일단 아프간을 완충국(buffer state)으로 놔두고 두 나라가 사이좋게 영향권을 반분하기로 타협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아프간은 1차 세계대전 이후 1919년 지역거점의 여러 토후국에서 통합된 왕국으로 거듭 나면서 러시아는 제일 먼저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1921년에는 양국 간 우호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르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프간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중립정책을 고수했다.

그러나 인도대륙이 1947년 영국으로부터 해방 독립되면서 파키스탄이라는 신생국가가 아프간에 이웃하는 국가로 태어나고부터 이 같은 중립정책에 변질을 가져오게 된다.

신생국 파키스탄의 서북접경지역에는 약 500만으로 추산되는 파탄족(Pathans, 파쉬툰(Pashtun)족이라고도 함)이라는 아프간 민족이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어 아프간 정부는 민족자결의 명분하에 파탄민족의 분리독립을 부추겨 왔다.

파탄족이 아프간과 파키스탄에 걸쳐 나뉘어져 살게 된 것은 1893년 ‘듀런드 라인’(Durand Line)이라 하여 영국의 인도 식민지 행정부가 인도(파기스탄 분리독립 이전)와 아프간사이의 국경을 임의로 획정하여 합의한데 따른 것이다.

이 무렵 파키스탄은 중국, 인도와의 관계에서 독립을 지키고자 1954년 미국과 동맹조약을 체결하게 되고 아프간정부는 파키스탄에 파탄종족의 독립을 위한 보다 실질적인 압력을 넣기 위해 소련으로부터 군사·경제적인 원조를 구하게 된다.

그로부터 25년간 소련과 아프간은 정치 군사 경제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다. 예컨대, 군대조직만 하더라도 1956년 이후에는 소련의 군제를 모방하고 장교들은 소련에 파견교육을 받으며 소련제장비로 무장되었다.

10년전 왕에 의해 실각되었던 다우드(Daoud) 수상이 1973년 일부 군부세력의 지지를 받아 쿠데타를 성공적으로 수행, 왕을 폐위하고 공화국을 만들어 탈소련 정책을 추구하다 실패하게 되면서 1979년 소련의 본격적인 개입이 이루어진다.

구소련 아프간 침공, 신냉전시대 계기

동·서 양 진영으로 갈라진 양극 체제하에서 아프간 국내정치가 혼미양상을 보이는 가운데 집권 좌경세력 보호를 구실로 한 구소련의 아프간 침공(1979년 12월)은 ‘70년대의 ‘미·소 데탕트’ 시대를 종식시키고 이른바 ‘신냉전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10년간 미국은 구 소련군과 정부군에 대항하여 싸우는 탈레반 등 회교 반정부군에 연간 1억달러 이상의 원조를 제공하며 좌경정부와 소련군의 축출을 도왔다. 예컨대 1985 회계연도 한해에는 미국 의회가 2억5000만달러의 ‘아프간 지원계획’을 통과시키기도 하였다.

그 결과 반군의 집요한 공격에 시달리던 소련군은 결국 1989년 아프간으로부터 철수하게 되고 그로부터 몇 년 뒤 내전을 거쳐 정권은 1996년 탈레반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국제정치학자들은 1989년 12월 미·소간 몰타(Malta) 정상회담에서 양국 대통령이 동·서 냉전체제의 해체를 공식 선언함으로써 이를 탈냉전의 기원으로 보지만 기실 내막적으로는 1989년 초 소련군의 아프간 철수가 촉매제 역할을 한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아프간은 국제정치사의 중요한 시대적 전환기마다 태풍의 ‘핵’ 역할을 해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가운데 미국은 2001년 10월 9·11 테러를 사주한 오사마 빈 라덴과 알카에다에 은신처를 제공한 탈레반정권을 무력으로 강제 축출하였던 것이다. 결국 미국은 반정부 민병대인 탈레반을 지원하여 아프간의 친소 정권을 축출한 후 탈레반이 정권을 잡은 지 5년 만에 다시 같은 정권을 다른 이유로 갈아 치우는 비극적 현실을 맞게 되었다. 이제 다시 미국을 위시한 나토 동맹국 등 다국적군과 탈레반과의 지리한 싸움이 전개되는 가운데 애꿎은 한국인 피랍사건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1885년 아프간에서의 강대국간 세력다툼 결과의 하나로 한국(조선)의 ‘땅’(거문도)이 볼모로 잡힌 지 꼭 122년 만에 이제 다시 아프간 현지에서 는 강대국(미국)의 대테러전 와중에 한국 ‘사람’이 인질로 잡히는 비운을 맞게 된바 그야말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by 하야니 | 2009/01/06 23:59 | Eye to the world | 트랙백 | 덧글(0)

부동산 저점판단(퍼온글)

 

경기 저점에 대한 판단은 시장 참여자 모두에게 중요한 기준이 된다

침체된 경제 상황에서 경기 저점이 지나야 회복이 오고 상승이 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기 저점에 대한 판단이 되야만  우리는 시장 참여 여부를 쉽게 결정할수 있다

 

2009년 부동산 시장에 관하여 경기 저점을 생각해보았다 .먼저 부동산 경기 저점 파악에 앞서

현재의 대한민국 부동산 시장이  침체된 원인을 파악해야만 한다

침체된 원인을 알수 있을때 그 결과와 변화도 어느정도는 예측가능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부동산 시장의 침체원인은 3가지로 볼수 있다

 

첫번째 원인은 과거 참여정부 시절 징벌적 부동산 규제제도라 할수 있는 각종 부동산 규제가 있다

부동산 담보대출 규제,분양가 상한제,전매제한,양도세 중과,종부세 부과등이 참여정부의 부동산

규제이며 이들 규제를 통하여 대한민국 부동산 시장은 2006년 10월 고점을 기준으로 하락추세로

전환하였다

 

두번째 원인은 미국 서브프라임위기에서 출발된 세계 경제 금융시스템의 위기다

부동산은 매수인들이 보유한 현금으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래금액이 크다는 점에서

금융을 이용한 대출이 보편화되어 있기에 서브프라임에서 출발된 세계 금융시스템의 위기는

대한민국 금융시스템에도  위기 이며 이는 곧 국내 부동산 시장의 침체로 이어지고 있다

 

세번째 원인은 세계 경제의 침체에 따른 국내 경제의 침체라고 본다

국내 경제가 침체되어 있는 상황에서 직간접적으로 경제 침체에 영향을 받고있는

부동산 시장의 참여자는 구매능력이 감소하기 때문에 부동산 시장은 침체가 가속화되고 있다

 

보통 일반적으로 부동산 가격이 높기에 침체가 왔다고 하나 가격이 수요와 공급의 균형점이라는

단순 상식선의 경제학을 믿는 사람들로 무시하며 필자의 견해는 투자의 대가였던 코스톨라니 말처럼 가격은 심리 + 자금에서 결정된다는 생각하에서 부동산 가격은 시장의 침체의 원인에서 제외한다

 

그 이유중 하나로 들수 있는것는 최근 여러번 있었던 부동산 규제완화의 시그널에 시장 참여자들의 심리가 순간적으로 개선되면서 강남 재건축 아파트 및 목동 아파트등이 거래된것을 볼때 가격 결정요인은 수요와 공급도 중요하지만 심리와 유동성 자금이 더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위의 3가지 원인에 대하여 2009년 예상되는 변화를 생각하면서 부동산 시장의 저점을 예측하여 본다

 

부동산 시장 침체의 첫번째 원인이었던 각종 부동산 규제조치는 자산 디플레이션이라는 공포속에

정부가 전부 해제 및 완화로 가고 있기에 부동산 시장에서 정부의 규제가 모두 풀리는 시점이

부동산 시장의 저점이 나온다고 볼수 있다

 

지금 남아있는 부동산 규제는 분양가 상한제,양도세 중과,전매제한등이며

이들 규제는 부동산 시장이 회복될때까지 점진적으로 규제완화 및 폐지가 예상된다

 

2009년 상반기에는 마이너스 성장까지 예상할수 있는  상황이기때문에 imf시절

김대중 정부가 시행하였던 한시적 양도세 면제조치등 부동산 활성화 대책도 나올수 있다고 본다

이미 지방 미분양 아파트와 함께 수도권 미분양 아파트까지 양도세 일시적 완화가 언급되는것을

볼때 부동산 관련규제는 모두 없어지고 활성화 대책까지 나올것으로 보인다

 

따라서,건설회사의 고가 미분양 아파트 책임을 물을수 있는 건설회사 구조조정이 끝나는

2009년 1/4분기 안에 모든 부동산 규제는 완화되고 부동산 활성화 대책이 나오리라 본다

 

결국, 부동산 규제측면에서 볼때 부동산 시장의 저점은 2009년 1/4분기가 된다

 

두번째 원인측면에서 보면 서브프라임 위기에서 출발된  세계 금융시스템의 위기에 따른 국내 금융시스템의 위기에 관해서 생각해봐야 한다

 

미국과 일본은 제로금리와 양적완화 정책을 동시에 진행한다고 발표하였다

금리를 통한 경기 부양책이 제로금리로 한계에 도달하고 중앙은행이 금리를 통한 화폐 통화량 조절이 어려울때 자금이 필요한곳에  중앙은행이 발권력을 동원하여 직접 통화를 공급한다는 것이 양적완화 정책이다

 

양적완화 정책의 과거의 예로는 일본이 2001년 3월~ 2006년3월까지 시행한 전례가 있지만

일본이 경험하였던 과거 양적완화 정책은 은행에 대출이 필요한 곳에 충분한 자금이 공급될수 있도록 은행에 유동성을 공급한것이지만 은행이 보수적으로 자금을 운용하게 됨에 따라 통화 팽창 효과는 작았다

 

하지만, 이번에 시행되는 미국과 일본의 양적완화 정책은 언제든지 자금 회수가 불가능한

곳에 직접 통화를 공급한다는 점에서 일본처럼 은행에 통화를 공급하였던 양적완화 정책과는

그 성격이 틀리다

 

미국의 중앙은행이 모기지 채권,장단기 국채까지 사들임으로서 풀린 자금을 회수

할수 없는 곳에 자금을 공급하거나 일본의 중앙은행이 은행의 주식을 사들이기로 했다는 것이

양적완화 정책의 사례가 된다

 

제로금리상태에서 양적완화 정책을 통하여 시중에 직접 자금을 공급하면 현금 유동성은 증가하고

신용경색은 풀리게 된다

하지만 그 부작용이자 목표라 할수 밖에 없는 인플레이션은 필연적으로 발생할수 밖에 없다

목표한 인플레이션을 통하여 부동산 관련 부채가 자연스럽게 탕감되면서 부동산 담보대출이 정상화 되고 디플레이션 우려가 말소됨과 동시에 전세계 금융시스템은 정상적으로 회복하게 된다

 

따라서,시장에서 제로금리와 양적완화 정책이 시장에 영향을 줄때가 세계 금융시장이

안정될때이고 그 때는 12월 미국과 일본의 발빠른 제로금리 정책 및 양적완화 정책 시행에 따른 영향이 나오면서 미국 버락오바마 대통령의 새로운 정책이 가시화 되는 내년 1/4분기이후 또는 정책이 시행되는 2/4분기가 경기 저점이 나오는 시기로 볼수 있다

 

국내요인을 살펴보면

한국은행은 지난번 금융통화위원회에서 1%의 대폭적인 금리인하를 단행하였고,현재 cd금리가

지속적인 하락세를 보이는 것을 볼때 기준 금리는 2009년 1월이후에도 상당폭의 금리인하가 예측된다

 

상황에 따라서는 내년 상반기 경제성장률이 한국은행 예상치인 2%대부터 더 낮게  나오게된다면

금리인하에 보수적인 한국은행 조차도 미국,일본처럼 제로 금리에 근접하는 2%이하의 기준금리도 시행할수 밖에 없는 상황이 나올수 있다

금리가 제로금리에 근접하게 되면 한국은행도 양적완화 정책을 고려할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지난 4개월간 한국은행의 원화유동성 공급량과 그 결과 측면에서 생각하여

보면 앞으로의 통화정책 방향에 관한 흐름을 알수 있다

 

한국은행은 9월 3.5조원,10월 5.5조원,11월 3조원 ,12월 11.8조원의 원화 유동성 공급을

rp(환매조건부 채권) 매도 축소 및 매입을 통하여 막대한 원화 유동성을 공급하였는데

시중의 자금사정은 돈이 필요한곳에 가지 못하는 돈맥경화 현상이  지속되고 있다

 

국내은행의 연말 기준 bis 비율을 충족하기 위하여 그렇다고 하지만,내년에 한국은행이

거대규모의 원화를 공급하여도 시중의 신용경색으로 인한자금 공급이 한계가 오고,

금리마져 제로금리에 가깝게 떨어진다면 한국은행의 양적완화 정책 시행 여부는  그 다음

수순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직까지의 한국은행의 통화 공급정책은 과거 일본의 예처럼 은행에 자금을 공급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지만, 건설사,조선사를 필두로 시작된 구조조정이 은행까지 끝나고 나면  영국이 선두였던

핵심은행의 국유화를 통하여 시중에 통화량을 증가시키는 유동성 확대 정책을 시행할 가능성도 다분히 있을수 있다

 

한국은행이 루비니 교수의 말처럼 최후의 대부자에서 최우선이며 유일한 대부자가 되게 하거나

중앙정부가 주요 핵심은행을 직접 국유화 하여 직접 시중에 자금 공급을 결정하거나

은행에 지금보다 더 과감한 원화 유동성 공급을 하여 원화 유동자금흘 흘러 넘치는 상황을 만들어

2009년 상반기에는 지금과 같은 신용경색과 자금 경색을 풀수 밖에 없다고 본다

 

이러한 과정은  건설,조선을 필두로 한 산업계의 구조조정에 이어 자본시장 통합법이 시행되는 2009년 2월이후 금융권의 구조조정이 시행되어 질것이고 국내 금융시스템이 안정되는 내년 1/4분기~2/4분기는 실물 경기침체의 기저효과(base effect)를 동반하면서 현재의 극심한 경기 침체의 경기저점을 형성한다고 본다

(기저효과 :전분기 대비,전년 대비등 통계상 비교대상 기간의 경기침체와 호황등으로 인하여

경제지표가 위축되거나 호황으로 보이는 효과)

 

따라서, 부동산 경기 저점은 세계 금융시스템과 국내 금융시스템과 관련지어 볼때 내년 1/4~2/4분기를 예측해볼수 있다

 

 

세번째 원인 국내 경기저점에 관하여 생각하여 보면 국내외 권위있는 단체의 발표를 인용하여 보면

내년 경기는 상저하고의 형태로 상반기 침체, 하반기 회복으로 보고 있다

 

2008년 12월 3일 여의도에서 만난 국책연구원(kdi,kiep,에네지 경제연구원등) 대표들은

상반기 경기 저점과 하반기 경기 상승을 예측하였다

 

정부측에서도 노대래 기획재정부 차관보는 12월 2일 라디오 방송에서 "경기가 내년 상반기에 저점을 통과하여 하반기에 개선될것"으로 말하였다

 

증권계에서도 한국투자신탁운용 서정두 글로벌운용본부장,대신증권 성진경 전략팀장,주상철 교보증권 연구원등 다수의 전문가들이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하여 상반기 저점 하반기 회복을 예고하고 있다

 

국내 경기가 상반기 저점 하반기 회복이라고 볼때 주가의 저점은 예상되는 상반기 경기 저점에서

볼때 통상 3~6개월 선행되는 1/4~2/4분기에 저점이 확인될것이고 주가보다 다소 움직임이 늦은 부동산 경기 동향은 2/4~3/4분기에 부동산 시장 저점을 형성한다고 볼수 있다

 

 

위의 3가지 부동산 시장 침체 원인 및 그 해결방법으로 본 부동산 저점 예측을 종합하여

판단하여 보면

 

이번 경기 침체의 원인이 서브프라임 대출에 따른 부동산 가격 하락에 그 원인이 있기에 실물 경기가 앞서서 회복되고 부동산 시장이 회복되는게 정상적인 수준이겠지만 그 해법으로 제시된 제로금리에 양적완화를 통한  유동성 확대 통화팽창정책은 부동산 시장이 회복되고 실물경기가 회복되는 역순서가 나올것으로 생각되어 진다

 

따라서, 부동산 경기저점은 실물경기 저점보다 먼저 올수 밖에 없다

실물경기 저점이 상반기에 확인된다면 부동산 경기 저점은 실물경기의 저점보다 빠른

시점에서 부동산 경기저점을 확인할것으로 본다

 

즉,부동산 경기의 저점은 부동산 관련 규제중 남아있는 양도세 중과,분양가 상한제,전매제한이 풀리는2009년 1/4분기에서 실물경기 저점이 예측되는 2/4분기이내에  부동산의 저점이 형성된다고 결론지을수 있다

 

부동산 저점이 1/4분기와 2/4분기 이내로 파악될때 부동산 관련 매수시기는 정부가 부동산 관련

규제를 푸는 시점이 가장 빠른 유효한 매수시기가 된다

 

이 시기에 부동산을 매수한다는 것은 중,장기적으로 지속될수 있는 저금리와 원화  유동성 공급

팽창에 따른 인플레이션 때문에 지금까지의 사례보다 더 높은 투자 수익률을 얻을수 있다

 

인플레이션 상태에서 금리가 제로 금리로 간다면 실물자산은 상승할수 밖에 없는데다가

대출 받고 구입한 부동산이 시간이 갈수록 인플레이션에 의하여 부채가 탕감되는 효과가 나오기

때문이다

 

실물경기 침체가 사상최악,최저로 표현될수 밖에는 통계가 나오는 최악의 분위기인 1/4분기에

현 정부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부동산 관련 활성화 대책이 여론의 동조를 얻어 시행될것이고

그 때가 부동산의 매입시기다

 

준비하는 자 기회가 온다,,,지금은 부동산 시장에서 손을 놓을때가 아니다

부동산 시장의 움직임을 끝까지 지켜봐야 한다

 

가장 화려하면서도 마지막이라 예측되는 인플레이션하의 유동성 장세의 출발점이

내년 1/4분기에 있기 때문이다

 

부동산 시장에 태양이 떠오르는 날을 기다려 본다

by 하야니 | 2008/12/28 20:03 | Eye to the realty | 트랙백 | 덧글(0)

12.22 Selon의 현대차 분석(퍼온글)

기대와 우려의 힘겨루기 속에 변동성이 클 전망  
 
실물경제 악화, 실적감소의 우려와 정책적 지원과 코스피 반등 기대감이 맞서는 한 주
기관 외인의 선택 주목 필요
 
1. 금요일 장이 끝나기 전에 외출을 했다가 새벽에야 뉴욕증시 상황을 알게 되었다.
필자는 이미 부시가 빅3를 구제할 수 밖에 없음을 여러번 피력한 바 있다.
 
목요일 밤 - 부시의 <질서있는 파산> 운운에 GM과 포드는 폭락했었다.
이 때문에 금요일 아시아 자동차주들은 약세를 면치 못했다.
그러나 GM 포드처럼 폭락하지 않았던 것은 일본의 금리인하 기대감으로 일본자동차들이 버텨준 점,
<질서있는 파산>이 결국 공적자금 투입을 전제로 한 점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19일 일본증시     뉴욕증시(ADR)  시간외
도요타  -2.20%                 -1.77%            -1.95%  <== GM급등에도 전혀 동참하지 않음   
혼다     -0.98%                 +1.88%            +1.70%
닛산     -2.63%                 -1.80%            -1.80%
 
덴웨이 -8.56%(홍콩)
 
일본의 금리인하 재료가 나온후 일본 차들의 주가는 보합에서 -1 ~ -2%로 낙폭을 키웠다.
현대차나 모비스가 보인 패턴이다.
골드만삭스가 동시호가에 11만주를 던진 것도 일본차들의 상황을 념두에 둔 것일 것이다.
근본적으로는 골드만 애들도 부시의 <질서있는 파산>을 사실로 믿었다는 얘기.
그만큼 부시와 그의 참모들도 고민을 많이 했을 것이다. 
 
2. 부시 - 결국은 줄 거면서 이 카우보이는 목요일 밤엔 왜 <합의파산>운운 했을까?
아무튼 빅3 지원으로  큰 고비는 넘긴 것 같다.
 
그러나 구제안이 발표된 한국시간 밤 11시이면 유럽증시는 개장중이었는데도 유럽 자동차주들은 모조리 하락을 했다. 빅3의 구제금융 투입 소식을 알고도 유럽차 주식이 낙폭을 키운 것은 경기악화 공포감이 작용한 것같다.
 
폭스바겐  -7.83%    <== GM급등에도 전혀 동참하지 않음 (이하 동일)  
르노        -4.49%
피아트     -3.37%
푸조        -4.14%
BMW       -1.31%
 
<GM/ 포드 주가 추이>
 
Chart for General Motors Corporation (GM)
Chart for General Motors Corporation (GM)
 
구제금융 제공시 AIG나 패니메, 프래디맥, 시티은행 등이 그랬듯이 구제금융 지원으로 GM의 주가가 +50% 정도 폭등할 줄 알았다(AIG나 패니메, 프래디맥...등은 구제금융 지원을 받자 단기 100%이상 급등했었다...물론 이후 구제금융 받기 전 대비 반토막 이상 났지만.....)
 
미국이 콰드러플 위칭데이 인 점을 감안하더라도 GM의 상승폭이 예상보다 적다.
어제 GM은 -18%, 포드는 -14% 빠졌었는데 금요일 각각 +23.98%(시간외 -5%), 3.87%(시간외-1.7) 상승에 그치고 말았다.
 
GM과 포드는 살아날 것이다. 다만 과정은 험란해 보인다.
 
1)12월 미국 자동차 판매실적이 11월보다는 소폭 개선되지만 매우 저조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2)신용평가사 피치는 12/19일, 정부로부터 구제자금을 지원받게 된 미 자동차 회사 제너럴 모터스(GM)와 크라이슬러의 신용등급을 "CCC"에서 부도직전 단계인 "C"로 하향했다. 피치는 정부의 지원결정에도 불구하고 GM과 크라이슬러의 파산 가능성은 여전하다고 평가했다.
 
3)하원 청문회 때 출석한 무디스의 마크 잰디 애널리스트는 <빅3가 생존하는데 필요한 자금 규모는 최소 750억 달러, 최대 1,250억 달러에 이를 것>이라고 전망한 바 있다. 
 
하지만 죽여야 하나 죽이지 못하는 게 빅3인 것 같다.
파산시 실업대란 경제충격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쿵 저러쿵 해도 미국은 자동차 산업을 절대로 포기 안한다.
빅3를 빅2 혹은 빅1으로 만드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이러저러한 공포감은 나타날 수 있다.
 
#포드는 몰라도 GM은 지금 주가가 (잠깐 오르다가) 추가로 폭락할 가능성이 있다(공적자금 투입은 기존주주가치 희석)
 
시티그룹 주가 추이: 10월 중순 공적자금 투입이 결정되자 회생기대감으로 대양봉후 갭상승 2회로 시세폭발
하지만 공적자금 투입은 기존 주식의 가치 회석을 유발하는데다가 추가부실 우려감으로 폭락지속 
공적 자금 투입주식은  매수하면 안된다는 진리을 유감없이 말해준다.
 
Chart for Citigroup, Inc. (C)
 
AIG 주가 추이: 리만브러더스 파산 쇼크로 자본시장이 요동치자 대규모 공적자금 투입. 공적자금 투입은 기존 주식의 가치 회석을 유발하는데다가 추가부실 우려감으로 공적자금 투입 이후 오히려 추가로 반토막.  
Chart for American International Group, Inc. (AIG)
Chart for American International Group, Inc. (AIG)
 
 
3. GM의 미래는 하이닉스의 과거 
 
하루전 부시가 왜 <Orderly Bankrupcy> 운운 했는 지 짐작이 간다. 재무상황을 보아서는 질서있는 파산을 시켜야 하는데 경제에 미칠 파장때문에 주기는 준다....굳이 민주당도 애원하는데 내가(부시) 굳이 나쁜 놈 소리 들을 필요 있나....하는 심사가 녹아 있다.
 
GM과 크라이슬러에는 공적자금이 투입된다.
1) 부채 출자전환을 통해 채무를 3분의2를 축소한다.
2)자동차노조 퇴직연금의 절반을 주식으로 지원해야 한다. 
3)정부는 특정한 가격에 두회사 주식을 살수 있는 무의결권 주식 매입권(워런트)를 받게 된다.
4)배당이 중지된다
 
출자전환 우선주 워런트 등으로 기존주주들의 주식가치는 엄청나게 희석된다. 배당은 중지된다. 
예컨데 하이닉스는 2차례 공적자금 투여후 200원까지 갔었다.
각고의 노력끝에 하이닉스가 회생했듯이 빅3 역시 각고의 노력을 해야 살 수 있다.
GM의 노조의 처신이 매우 중요한데 이들의 행보가 주목된다.
 
4. 빅3는 실물경기 악화라는 거대한 강을 건너야 한다.
  
공적자금 투여액만큼 무의결 우선주를 정부가 확보하게 되므로 기존주주들의 가치는 희석된다.   
크라이슬러의 최대주주 서버런스는 20억$ 투입 결정으로 지배권 상실에 대비하는 형국이다.
 
포드가 공적자금 받기를 거절 하는 것도 그랬다가는 포드 가문의 지배권 상실이 발생하가 때문에 운영자금을 브릿지 론으로 차입하는 선에서 꾸려나가려고 한다. 포드는 볼보를 매물로 내 놓아 한결 생존여력이 높다.
 
그렇다면GM보다 포드의 주가 상승폭이 더 커야 하건만 (결국 빅3는 살 확율이 높아진 것이므로) 상승폭이 시원치 않았다. 실물의 악화가 공포감을 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5. 기회와 위험의 한주
 
1)빅3 악재의 진화로  반등 전망 그러나 실물경제 악화 우려감으로 상승폭은 제한적일 듯  
 
미 상원에서 빅3 구제안이 부결된 지 만 8일만에 부시가 지원결정을 내렸는데  그 사이 노조를 압박하여 임금삭감, 채무 출자전환  등의 양보안을 얻어낼 줄 알았더니만 얻어낸 것 없이 결국 시간만 낭비한 셈이다.
그럴 거면 왜 뜸을 들인 것인지? 질서있는 파산 운운은 왜 한 것인지?
 
어쨌거나 빅3문제는 큰 고비를 넘겼다.
죽을 고비는 넘겼지만 피치가 지적했듯이 생존의 영역으로 들어선 것도 아니다.
삐딱한 미국 자동차 노조는 사태파악을 아직도 못한 듯 하다.
 
오바마는 12/19일 오바마는 시카고에서 가진 기자회견을 통해 “자동차 업체들이 향후 몇 주, 몇 달 동안 매우 어려운 선택을 해야만 할 것”이라며 “지속 가능한 계획을 들고 나와야만 한다”고 말해, 취임 시 자동차 업계의 혹독한 자구 노력을 주문할 것임을 시사했다. 
 
빅3에게 남은 문제는 급랭한 자동차 실물 경기 속에서  시장의 우려감감을  어느 정도 불식키느냐이다.
이 점은 한국과 일본의 자동차 회사들에게도 공통으로 제기되는 질문이다.
 
2)정책카드 소진 속  코스피 1200선 돌파여부 관심
미국 금리 인하, 빅3 구제안 발표로 미국 정부의 중요한 카드패가 다 나왔다.
오바마의 8500억$ 경기부양책은  1월 혹은 취임식에 임박하여 나올 것이다.
 
한국의 경우엔 자동차 개별소비세 카드가 사용되었다.
자동차 산업 지원 종합대책만 남은 셈이다(국회에서 여야가 쌈박질 하고 있으니 정부가 안을 제시해도  당장 적용되기 어려울 둣하다)
 
일본자동차 회사들은 2009년 대규모 감산을 결정했다.
GM대우 공장 전면 생산 중단 돌입했다. 인천, 군산, 창원 공장 올스톱.
 
하지만 현대차는 아직 2009년 생산계획을 공표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니카이 도시히로(二階俊博) 일본 경제산업상은 12/19일 경기 후퇴에 따른 판매 감소로 일본 자동차 업계가 고전하고 있는 것과 관련, <미국의 대응을 충분히 염두에 두고 일본 자동차 산업에 대해서도 앞으로 어떤 것이 필요한지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역시 당장 지원책이 나올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3)현대차 실적 점검
 
현대차는 08년 1월 2일 2008년 영업계획을 발표했었다. 11월까지의 판매실적과 목표치 간에는 54.5만대.
11월 판대댓수는 23만대여서 올 판매량은 280만대 정도로 추정된다.
즉, 목표량 311만대에서 30만대 정도 감소가 예상된다.
 
구분          2007년(추정) 2008년(계획)     증가율     1-11월누적   08년예상
판매대수    260만 1천대     311만대          19.6%       256.5만대    280만대 (YoY +7.7%)  08년은 준수
매출액          41조              46조              12.2%
 
이 정도면 판매 댓수상으로는 선방이라고 할 수 있다(순익은 별개, 아래 4분기 순익전망 참조). 
 
4) 4가지 논점.
 
(1)현대차의 판매는 선진국 중심의 고가차량 판매댓수는 감소하고 후진국 중심의 저가차량이 이를 메꾸는 형국.
이익의 질이 나빠졌다. 
마진이 큰 차가 덜팔리고 마진이 적은 차(소형차)가 선전하여  판매량은 YoY +7.7% 증가하나 
판매이익은 감소...그러나 2008년은 고환율덕에  영업이익은 견조한 모습.  
 
(2)보다 우려하는 것은 2009년 상황. 특히 상반기.
2009년 상반기에 세계경제와 자동차 시장은 어떤 조건에 놓이게 되는 가에 대핸 불확실성이 큰 상태.
 
미국 자동차 판매댓수(시티은행 추정)
                 2007     2008          2009년       
판매대수    1600     1350          1090만대     <===1982년 1032만대 래 최대 감소 
   YoY                  -15.6%       -19.3% 
  
일본 자동차 8개사: 전체적으로 8개사 생산량의 10%인 221만대 감산  1만명 감원
도요타 주 4일 근무체제 전환
(소니 1개사만도 16000명 이상 감원: 자동차보다 더 심한 IT불황?)
 
미국 빅3 감산규모:
   GM  -30% (전기자동차 공장 건설 보류, 공장 10곳 1/11까지 조업중단) 
   포드 -38% (1/11일까지 북미 10개 공장에 대한 사실상의 조업중단) 
   크라이슬러: 최소 한달간 북미 전체공장(30곳) 조업중단.
독일 폭스바겐
   볼프스부르크 공장 가동 12월18일부터 3주간 중단.
   자회사인 아우디 12월 중순부터 한 달간 헝가리 공장을 폐쇄
BMW  8000명 감원
현대기아차 감산 감원 규모? (이게 중요.  감산은 해도 감원은 안한다지만....버틸수 있다면 대단 대신 그만큼 실적은 줄어들 것임.)
 
(3)원/달러 환율 추이
그동안 현대/기아차에 대한 기대감의 근본은 원화약세/엔화강세 였다.
그러나 미국이 제로금리 정책으로 전환함에 따라 아시아와 유럽 통화가 달러대비 절상되기 시작했다.
이젠 환율 절상속도와 절상 환율 지점이 관심이다.
 
삼성전자나 현대차가 대표하는 IT 자동차에 대해 이익전망(EPS)가 감소하고 있다는 기사들이 있다.
이것은 판매감소 + 최근 원/달러 환율하락+  상여금 등으로 인한 것이다.
얼마전 까지 판매감소를 원화약세가 방어해주었으나 이젠 달러 약세로 인해 원화절상이 일어나면서 판매감소와 더불어 이익을 함께 줄이는 역할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원/엔 환율 : 원화 절상속도와 엔화 절상속도가 관심의 대상  
Chart for JPY to KRW (JPYKRW=X)
 
(4) 4대그룹 두둑한 년말성과급  지급은 4분기 순익 저조? 
내수촉진을 위해 4대 재벌이 두둑한 년말 성과급을 지급한다고 한다. 좀 주제 넘은 짓이 아닌가 싶다.
실적이 나쁘면 성과급 지급을 하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닌가?
 
판매가 감소하는데 두둑한 성과급을 지급한다면 4분기 순익은 줄어든다.
그러나 배당은 07년 보다 못할 것이라는 예상이다(직원 우대/ 주주 홀대). 
판매위축+ 원/달라 환율하락+대규모 성과급=  컨센서스 이하의 4분기 순익감소...... 이런 점은 12월들어 삼성전자, 현대차 등 IT 자동차주의 약세 원인이 될 듯 싶다. 
 
(예컨데 삼성전기는 1분기가 년중 가장 실적이 저조할 땐데도 꼬박꼬박 대규모 구정 상여금을 지급하여 실적악화를 자초한다. 이는 해마다 공매도+풋쟁이들이 12월부터 3월까지 삼성전기에 달라 붙게 하는 상습요인이다. 때문에 삼성전기는 1분기 주가하락폭이 매우 크다. 여기에 원/$ 환율 하락+ 실물악화까지 겹치니 진폭이 클수 있다.)  
 
이런 불똥은 현대/기아차의 4분기 순익전망에도 붙은 것 같다(이 점은 지난주 후반에 대두된 이슈).
 
클릭하시면 확대 이미지를 보실수 있습니다 
 
6. 낙관과 비관의 힘겨루기 전망
 
현대차는 목하 많은 사람들의 포트폴리오중  속 썩이는 종목(코스피 대비 덜 올라서)이다.
필자의 포트폴리오 중에서도 못난이에 속한다.
 
그러나 전세계 자동차주중 현대차가 가장 낫다고 본다.
 
하지만지금은 현대차의 능력이 차별화 되지 않은 채 도매금으로 취급되는 형국이다.
도요타도 반기영업 적자인데 니들도 별수 있겠어? 하는 분위기이다.
 
현대차의 4분기 순익이 3분기만도 못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FnGuide 컨센서스로는 여전히 4분기 순익이 7379억으로 나와있다. 판매감소와 /달러 환율급락과 두둑한 상여금은 이를 갉아 먹을 수 있다. 논쟁거리이다,
 
1분기 전망은 회사만이 안다.
도요타 등 일본차들은 09년 경영전략을 공표했으나(대폭감산) 아직 현대/기아차는 공표하지 않고있다.
현대차의 2009년 영업전망발표가 긍정적이던지 부정적이던지 가장 중요한 모멘트가 될 거 같다.
 
수출대표주인 삼성전자조차 09년 2분기까지 적자가 예상되는 마당에 D램 현물가 반등으로 큰폭으로 상승했다.
그러나 현대차에서는 빅3의 장기적 불안정성과 각국 자동차 회사들의 감산 등이 심리적 불안감을 주고 있다.
현대차가 투자자들에게 어떤 비젼제시를 할 지가 주목된다.
 
기관과 외인이 쌍끌이 매수를 하거나 둘 중 하나가 대량매수를 해주어야 60일선까지 접근할 것이나 아직 그런 모습이 관찰되지 않았다.
 
현대차는 빅3 구제 소식으로 주초반은 긍정적 흐름이 예상된다.
세계 자동차들의 잇따른 감산소식 등 실물 악화는 상승폭을 제한 할 수 있다.
 
12/23일 밤 미국 신규 및 기존 주택판매 수치가 발표되는데 저조하다(요즘 뉴욕증시는 지표악화에 무감각하기는 하다. 뉴욕증시에서 산타랠리가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 있는 등 어수선).
 
배당기준일 이후 대규모 프로그램 매도가 있을 수 있다는 예상이 있으니만큼 주후반엔 배당을 선택하고 뚜드려 맞을 것인가 아니면 배당을 포기하고 현금을 보존할 것인가가 선택의 기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日 자동차업계, 내년 221만대 감산 결정
임광민 기자
2008년 12월 20일 10:27 KST
 
일본자동차 업계가 급감하는 수요 부진을 감당하지 못하고 줄줄이 감산 결정을 하고있다.
19일 도요타와 닛산, 혼다를 비롯한 8개의 일본 자동차 회사들은 내년 국내외 생산을 221만1천대 가량 줄일 계획이라고 밝히며 일본내에서만 1만여명 이상의 종업원도 해고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들 8개사의 감산 규모인 221만대는 지난해 이들의 전세계 판매대수인 2천307만대의 10%에 해당되며 이는 일본 4위의 자동차 회사인 스츠키의 연간 생산량인 240만대에 육박하는 수치이다.
 
이달초 도요타가 렉서스를 비롯한 고급차종의 감산 결정에 이어 닛산과 혼다도 잇따라 감산을 결정했다.
대형차 위주로 시작한 감산이었지만 최근에는 저연비 소형차까지도 감산리스트에 올랐다.
 
회사별 감산대수는 도요타 95만3천대, 닛산 35만대, 혼다 31만4천대, 스즈키 24만6천대, 마쓰다 14만8천대, 미쓰비시(三菱)자동차 11만대, 다이하스공업 3만대, 후지(富士)중공업 6만대 등으로 총 221만1천대다.
 
감축 예정인 국내 노동자는 도요타 3천명, 닛산 2천명, 혼다 1천210명, 스즈키 600명, 마쓰다 1천600명, 미쓰비시 1천100명, 후지중공업 800명 등 총 1만310명으로 조사됐다.
 
영업이익 또한 도요타 6천억엔, 닛산 2천700억엔, 혼다 1천800억엔, 스즈키 1천억엔, 마쓰다 900억엔, 미쓰비시 500억엔, 다이하쓰 560억엔, 후지중공업 230억엔 감소할 것으로 전망

by 하야니 | 2008/12/22 19:54 | Eye to the stock | 트랙백 | 덧글(0)

실패한 나라 파키스탄을 가다

 비상사태 선언, 부토 전 총리 암살, 폭탄 테러의 연속. 이것이 파키스탄의 모습이다. 핵무기를 가진 가난하고 실패한 나라이다. 한국과 같은 시기에 독립했었고, 1960년대 초 우리가 개발의 모델국으로 삼았던 파키스탄의 비참한 오늘이다. 봉건적 잔재가 청산되지 않는 풍토에서 근대 국민국가를 만들어 운영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잘 보여주는 실패사례가 파키스탄이다. 필자는 9년 전 파키스탄을 여행하고 대통령을 인터뷰했었다. 당시의 기행문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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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부르의 南進路를 따라
 
  1996년 7월18일 기자는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를 두 번째로 찾아가 카리모프 대통령과 인터뷰를 마친 뒤, 20일에 인도 뉴델리 공항을 거쳐 파키스탄 라호르 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 창가에 앉아 내려다 본 地形은 雪山, 돌산, 사막, 인더스江, 평야, 취락, 대도시로 이어졌다.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인도로 내려간 비행기의 南下 경로는 500년 전 바부르라는 20대 젊은이가 걸었던 길이기도 했다.
  자하루딘 무하마드 바부르는 1483년 2월24일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페르가나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페르가나에서 小王國을 지배하고 있었다. 바부르는 父系로는 티무르 大帝의 5代孫, 어머니쪽 혈통으로는 징기스칸에 연결된다고 한다. 그는 몽골-투르크系의 합성이었다. 바부르의 소년기 교육은 그의 위대한 人格을 키워낸 토양을 만들었다. 그는 투르크語와 페르시아語를 배웠고 戰時에도 시를 지었으며 회고록을 남겼다.
  11세에 왕이 된 그는 20代에 지금의 우즈벡을 통일하여 티무르 제국을 회복하려다가 우즈벡(몽골系)族에게 쫓겨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으로 피해갔다. 패전에도 불구하고 1만2000명의 몽골-투르크 기병이 그를 따랐다. 카불에 본거지를 둔 그는 북쪽으로 재진격하여 失地를 회복하려 했으나 패전을 거듭했다. 그가 고향 페르가나를 못잊어 한 것은 그 지방이 중앙아시아 전체에서 가장 비옥하여 과일과 곡식이 풍성하게 산출되었던 것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1512년 우즈벡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 바부르는 北進을 단념하고 파키스탄, 인도쪽으로 南進하기 시작했다. 이 南征의 막장은 1526년 4월12일 뉴델리 근교 파니파트에서 벌어진, 로디 王朝의 아이브라힘王이 지휘하는 10만 군대와의 결전이었다.
  이때 바부르의 병력은 2만도 안되었으나 전형적인 유목 기마전술에다가 총포부대를 결합시켜 10만 병력의 敵을 섬멸했다. 그는 몽골기병을 좌익과 우익의 맨 끝에 배치하여 전진하는 敵의 주력을 배후로 돌아서 포위, 등 뒤에서 공격하게 하는 한편, 중앙에 배치한 총포부대는 일제사격으로 정면을 치케 했다. 포위 섬멸된 적은 4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 전투는 인도의 역사를 바꾸었다. 몽골系 무갈제국을 탄생시킨 전투였다.
  바부르는 인도 북부를 점령했으나 더운 날씨에 질려버렸다고 한다. 부하들도 시원한 아프가니스탄의 산악지대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그러나 이 땅을 차지하기 위해 바친 수많은 희생들을 생각하니 그럴 수가 없었다. 그 대신 바부르와 그 후손들은 가는 곳마다 페르시아式 정원을 만들어 그들이 두고 온 녹색지대를 추억하면서 스스로를 달랬다.
  파키스탄-인도는 10세기부터 19세기까지 약 1000년간 이슬람化된 몽골-투르크族의 지배를 받았다. 한국인들은 무갈제국의 5代王이 먼저 죽은 아내를 추모하려고 지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타지마할은 잘 알지만, 그것을 세운 王朝가 한국인과 인종적으로 연결되는 몽골-투르크族이었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기자의 파키스탄-인도 취재는 따라서 무갈제국에의 탐험이었다.
 
  다니 박사의 역사 이야기
 
  7월21일 기자는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아하마드 하산 다니 박사(76)를 인터뷰했다. 중앙아시아-서남아시아-실크로드 분야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학자로 알려져 있다. 역사·고고학자로서 수많은 저서를 남긴 다니 박사는 파키스탄 국민들에게 친숙한 인물이다. 그는 아주 곱게 늙은 「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大學者답게 재미있고 간략하게 파키스탄-인도와 유목민족의 관계사를 설명해 갔다. 다니 박사는 서기 5세기에 북쪽에서 쳐들어온 훈族이 200년 동안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을 지배한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말했다.
  『그들(훈族)은 쿠샨王朝를 무너뜨리고 후나(HUNA)제국을 건설하여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인도 북부를 통치했습니다. 터키학자들은 이 훈族을 투르크族이라고 분류합니다. 서양학자들은 이들을 파괴자로 말합니다만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그들은 봉건영주제도를 우리나라에 소개했습니다. 제가 우리나라라고 하는 것은 아프가니스탄을 포함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두 나라가 분리된 것은 18세기였으니까요.
  훈族은 수많은 부족의 연맹체였습니다. 우리나라를 점령한 뒤엔 각 부족에게 땅을 나눠주어 독자적인 통치를 하도록 했는데 이것이 봉건영주 제도로 정착하였습니다. 1996년 현재까지도 파키스탄엔 봉건제도가 남아 있습니다. 大地主들이 각 지방에서 사실상 행정을 장악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국회의원들도 地主출신이고 군대도 地主들의 아들들이 장교가 되어 장악하고 있습니다. 이게 모두 5세기에 훈族이 정착시킨 제도입니다』
 
  다니 박사는 계속했다.
 
  『8세기에는 투르크族이 중앙아시아쪽에서 쳐들어와 200년간 우리나라를 지배했는데 이들은 이슬람교도가 아니었습니다. 10세기에 비로소 이슬람 교도가 된 투르크族이 우즈베키스탄에서 쳐내려와 우리나라와 인도 사람들 중 일부를 이슬람화시켰습니다. 이때는 非이슬람 失住 투르크族과 이슬람 투르크族이 서로 싸웠습니다』
  다니 박사는 아랍인들은 海路를 통해서, 투르크族은 중앙아시아에서 남하하여 파키스탄-인도 대륙에 이슬람敎를 전해주었다고 했다.
  『아랍인들은 아랍語와 상업, 중앙아시아인들은 이슬람 성직자(수피)제도와 페르시아語를 갖고 왔습니다. 파키스탄과 북부 인도는 10세기 이후 중앙아시아의 이슬람문화를 닮게 되었습니다. 10세기에서 18세기까지 우리나라의 공용어는 페르시아語였으니까요. 몽골-투르크族이 건설한 무갈제국조차도 공식어로는 페르시아語를 사용했습니다』
 
  파키스탄人의 피의 62%는 투르크系
 
  같은 문화권이던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된 것도 파키스탄이 투르크族에 의해 이슬람화된 데 대해 인도에서는 힌두교가 다수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다니 박사는 파키스탄人 피 속의 62%는 투르크人의 피로 본다고 말했다. 몽골의 세계 정복에 대해서 다니 박사는 재미있는 설명을 했다.
  『그들의 힘은 호스파워(Horsepower=馬力)에서 나왔지요. 말을 전쟁에 처음 쓴 사람들은 아리안系로서 4000년 前부터였습니다. 서기 前 2세기경에는 아리안系의 스키타이 유목민이 발걸이(金登 子)를 발명했습니다. 그러나 안장과 발걸이 등 馬具를 정교하게 발전시킨 것은 몽골族이었습니다. 이 馬具를 바탕으로 독특한 군사기술을 발전시켰습니다. 몽골人들은 말을 번식시키는 데 비상한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말의 숫자가 많아야 전투력의 원천인 馬力이 증가할 것 아닙니까. 種馬를 아주 귀하게 여겨 족보까지 만들어 관리했습니다. 이 種馬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唐나라에까지 들어가서 힘세고 지구력이 강한 몽골 말이 확산되었습니다』
  다니 박사는 징기스칸의 西征 이후 몽골族이 파키스탄과 인도로 많이 들어와 지금도 파키스탄의 라호르 근방, 캐시미르, 페샤와르 지방에 살고 있다고 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무갈」(몽골族이란 뜻)이라고 부른다. 징기스칸의 몽골군대는 서기 1229년과 1241년 두 차례 중앙아시아→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인도 북부 푼잡지방까지 침공하여 1270년까지 주둔하였다. 인도대륙이 1000년간 이슬람化된 투르크族의 지배下에 있었다는 것은, 몽골-투르크族의 지배지가 넓이에서 뿐 아니라 피지배국의 인구수에 있어서도 항상 중국(인도와 인구가 비슷)을 능가하는 세계 최대규모였음을 뜻한다.
 
  신기루
 
  7월22일 지프차를 타고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를 출발하여 大宇건설이 닦고 있는 이슬라마바드-라호르 구간 6차선 고속도로(334㎞)를 따라 남쪽으로 달리는 길은 20세기말에서 中世 봉건사회로의 회귀였다. 깨끗한 이슬라마바드만 보면 파키스탄은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고 평화로운 田園국가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슬라마바드에 모여 있는 이 나라의 파워 엘리트들도 그런 자기 최면에 빠지지 않을까. 인간은 자신이 체험하는 범위 안에서 사고(思考)하는 버릇이 있다. 이 습관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로 기득권을 버리는 자기 혁신이다. 이 자기 혁신이 어느 나라의 지배층보다 더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는 파키스탄의 정치·행정 엘리트들이 빈곤과 바닥에 있는 파키스탄의 현실과는 절연한 채 신기루 같은 이슬라마바드에서 과연 민중을 위한 정책을 구상하고 추진할 수 있을까?
  大宇가 1992년 4월1일에 착공, 1997년 12월31일까지 완공하기로 돼있는 고속도로 공사는 9억8700만 달러짜리. 이 공사대금의 33.7%만 파키스탄 정부가 대고 66.3%는 大宇가 댄 뒤 상환을 받게 돼 있다. 외환이 부족한 파키스탄은 이런 BOT(Build·Operation·Turnover) 방식의 공사를 선호하고 있다. 2512대의 각종 차량과 중장비가 상시 동원되고 있는 이 공사현장에서는 약 6000명이 매일 일하고 있다. 95.6%가 파키스탄 노동자, 2.9%인 169명이 한국인, 필리핀人이 1.4%, 영국사람도 4명이 일하고 있다.
  현장관리를 책임지고 있는 金光洙 상무는 『하청공사分까지 포함하면 파키스탄 사람 10만 명(가족 포함)이 이 공사 덕분에 먹고산다고 보면 된다』고 했다. 파키스탄 건설 노동자들은 현장 부근에 천막을 쳐놓고 합숙하면서 일을 하고 있었다. 월급을 받으면 한 달에 한 번쯤 집에 갔다가 오고 일요일도 없이 거의 쉬지 않고 일한다. 金상무는 『이들의 노동효율은 한국 노동자의 80%쯤 된다』고 했다. 임금은 한국건설노동자의 약 20분의 1이다. 대체로 성실한 편이라고 한다. 노동자들을 뽑을 때 간부후보로 軍에서 제대한 하사관들을 찾아내 많이 채용했다고도 한다.
  기자의 짧은 파키스탄 취재 인상은, 순박한 파키스탄 민중을 이 나라의 대다수 엘리트들이 계도의 대상이 아니라 착취와 경멸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었다. 파키스탄에서 일하는 한국 기업인들은 자신들이 상대하는 정치인·관료들이 너무 애국심이 없다고 불평하고 있었다.
  『한국으로 기술자들을 연수 보내 주겠으니 계획을 짜달라고 해도 별 무반응입니다. 이 나라에는 아무래도 朴正熙 같은 지도자가 나와야 발전할 겁니다』
  이슬라마바드-라호르 고속도로는 장차 중앙아시아와 카라치(파키스탄의 인도양쪽 항구)를 연결시켜 주는 더 긴 고속도로를 위한 첫 단계 사업이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물론 아프가니스탄에 평화가 와야 가능한 사업이다. 5시간에 걸쳐 이 공사현장을 달렸는데 이 도로는 푼잡 평야를 관통했다. 푼잡이란 인더스江의 지류인 다섯 강이 흐르는 지방이라는 뜻이다. 파키스탄과 인도에 걸쳐 있는 이 평야는 세계에서 가장 비옥한 농경지로 꼽힌다. 인도 인구 9억5000만과 파키스탄 인구 1억3000만을 합쳐 약 11억의 인구가 이 평야에 기대어 생존하고 있다고 봐도 무리가 아닐 정도이다.
 
  소년·여자·당나귀
 
  이 평야지대를 달려보니 定型化된 풍경화가 반복되었다. 넓디넓은 논·밭 사이엔 큰 나무들이 듬성듬성 서 있었다. 그 나무 그늘에서 윗통 벗고 한가롭게 쉬는 것은 남자들이고, 그들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땡볕 농토에서 열심히 육체노동을 하고 있는 것은 여자들이었다. 작은 당나귀가 집채만한 짐을 지고 요령부리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뒤에서 나무 작대기를 휘둘며 쫄쫄 따라오는 것은 소년들이었다. 끙끙대는 당나귀의 표정은 한국의 가난한 할머니들 인상처럼 슬프기도 고맙기도 했다.
  이곳 당나귀는 자기 집을 찾아가는 데 능력이 발달돼 있어 짐을 싣고 혼자서 하염없이 길을 걷는 당나귀들도 많이 보였다. 金光洙 상무는 『파키스탄에서 제일 고생 많이 하는 게 당나귀, 어린이, 여자들이다』라고 했다. 시골의 초등학교들을 몇 군데 지나쳤다. 학교 사무실만 있고 교실은 없었다. 교실은 큰 나무 밑 그늘이었다. 문맹률 약 70%의 현장이었다. 학교 취학률이 낮으니 어린이들이 노동현장에 많이 고용된다. 파키스탄의 어린이 노동 문제는 지금 국제적인 관심사가 되고 있다. 기자가 이곳에 있을 때도 EU(유럽공동체)에서 조사관을 보냈다는 뉴스가 신문에 났다.
 
  노예와 봉건영주
 
  어린이들은 손길이 섬세하기 때문에 카펫 제조공장에 특히 많이 고용된다고 한다. 파키스탄 언론에서도 이런 어린이를 「노예」라고 표현하고 있을 정도였다. 파키스탄의 英子신문들은 지방 토호(〓地主)를 「봉건영주」란 의미의 「Feudal lord」라고 표기하고 있다. 21세기의 문턱에 있는 나라, 원자폭탄을 제조한 나라, 그리고 金泳三 전 대통령이 「동지적 민주투사」로 칭송했던 부토 여사가 총리로 있던 나라, 5·16직후엔 한국이 본받고 싶어한 나라, 最高의 인류문명과 最大의 곡창지대를 가진 나라에서 아직도 中世的 용어가 예사로 쓰여지고 있다.
  1945년 이후 파키스탄 현대사에서 파키스탄 민중에 대한 동정심을 깔고 진정으로 개혁을 하려고 했던 거의 유일한 지도자로서는 아유브 칸을 꼽는 파키스탄인들이 많았다. 그는 1958∼69년 사이 집권했다. 평민출신 장군 아유브 칸은 파키스탄의 정치가 대혼란에 빠지자 등을 떠밀리다시피 하며 집권했던 사람이다. 그는 1965년 캐시미르를 둘러싼 인도와의 전쟁에서 사실상 패배한 뒤 알리 부토를 비롯한 직업 정치인의 도전을 받았다. 反정부 시위로 행정기능이 마비되자 1969년에 정권을 후배 장군 야하 칸에게 이양하고 하야했다. 그는 하야 직전의 술회에서 이런 고백을 했다.
  『파키스탄은 구조적으로 어려운 나라이다. 아마도 나는 우리나라를 너무 세게 근대화 쪽으로 밀어붙인 것 같다. 나는 정권을 이양하려고 민간정치인들과 접촉했으나 가장 큰 실망은 단 한 사람도 이기심을 뛰어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나는 우리 정치권이 선량한 지도자를 장기간 활동하도록 내버려둘지에 대해선 의문을 가진다. 그래도 우리가 군대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하느님께 감사해야 한다. 내가 이 나라를 10년간 통치해온 것은 한 바구니에 여러 마리의 개구리들을 넣고 들고 가는 기분과 같았다. 두 개의 파키스탄에는 희망이 없다. 東파키스탄(지금의 방글라데시)은 그들의 길을 가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守舊세력과 군대
 
  아유브 칸의 30년 前 절망은 지금도 그대로이다. 이 나라의 지배 엘리트가 守舊세력으로서 변화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地主계급은 그 엄청난 농업소득에 대해 세금을 면제받아왔다. 농지세를 내도록 하려는 압력이 일어나 4개 주 가운데 두 군데에서 법안이 통과되었으나 최대 곡창 지대인 푼잡州 정부는 거부하고 있어 사실상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地主계급이 정치뿐 아니라 아들들을 장교로 보내 군대까지 장악하고 있으니 5·16쿠데타와 같은 개혁 지향적 군사 개입도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파키스탄은 네 번의 軍政을 겪었으나 한국처럼 경제개발을 이루지도 못했다. 이곳 정치인들은 민중에 대한 애정이 결여된 상태에서 단순히 정치인을 위한 정치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하는 느낌마저 주었다. 1996년 7월20일자의 영자신문 돈(DAWN)紙에 실린 기사들은 파키스탄의 상황을 단면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의사들, 그들의 소득에 물품세를 과세하기로 한 데 반발하여 스트라이크 결의.
  ·야당, 내일 총파업 호소.
  ·EC관리, 어린이 노동 문제 논의하기 위해 방문.
  ·봉건영주들(Feudal lords), 다두 지방의 수사에 압력.
 
  이슬라마바드에서 만났던 다니 박사는 『인도는 독립 직후 네루가 농지개혁으로 地主계급의 권력을 축소시켰는데 우리는 그것을 하지 못했다』고 한탄했었다. 문맹률을 70%대로 유지하는 것도 地主계급이 민중들을 다스리기 편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을 하는 이들이 많다. 파키스탄의 초등학교 중 2만4750개가 건물이 없는 야외수업 학교이다. 문맹률은 특히 여성에서 심한데 약 80%나 된다. 파키스탄은 인구가 약 1억6000만 명으로서 세계 8위인데 인구증가율은 약 3%로서 세계 최고수준이다. 23년 내에 인구는 배로 늘 것이다.
 
  라호르城
 
  7월22일 오후 섭씨 40도의 불볕 더위 아래에서 라호르市內에 있는 무갈제국 유적을 둘러보았다. 전성기의 성(Fort)과 모스크는 그 규모와 예술성에 있어서 이 제국의 물리적 크기와 정신적 깊이를 짐작케 하는 대건축물이다. 성(城) 안에는 무갈제국 제3代 황제로서 인도와 그 주변 국가들을 통일하여 인도 역사상 최대의 제국을 건설했던 아크바르의 궁전들이 많이 있다. 아크바르는 15세기말에 수도를 인도의 아그라에서 지금은 파키스탄에 있는 라호르로 옮겼다가 14년간 뒤 아그라로 돌아갔다.
  아크바르의 성은 시내를 내려다보는 대지 위에 건설되었다. 허물어지고 퇴색된 그대로 방치되고 있지만(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역사의 무상을 더 잘 느낄 수 있다) 성장(盛裝)했을 때는 동시대의 베르사이유 궁전에 못지 않았을 규모이다. 이 궁전의 돔 모양도 유목민족의 천막을 본뜬 것이다. 회랑에 난 돔의 내부천장은 밤하늘의 별자리를 모방한 장식이었다. 무갈제국의 왕족들은 草原에 드러누워 청명한 밤하늘을 구경하던 시절이 그리웠던 모양이다.
  이 궁전 바로 옆에는 아크바르의 아들인 아우랑제브 황제가 건설한 바드샤히 모스크가 있다. 주황색 사암(砂岩)으로 만든 이 모스크에 들어갈 때는 신발을 벗어야 한다. 17세기말에 건설된 이 모스크는 인공 垈地(대지) 위에 세워진 170×170m의 정사각형을 이루고 있다. 한복판에 난 운동장 같은 공간은 기도자들이 모이는 곳인데 10만 명의 수용능력을 갖고 있다고 한다. 건설 당시엔 세계 최대의 모스크였다.
  무갈제국의 역사를 읽고 유적을 답사한 뒤 학자들과 만나 궁금증을 풀면서 기자는 이 제국의 예술적이고도 관대하며 때론 무자비한, 그리하여 이야깃거리가 풍성한 황제들의 인간상에 빠지게 되었다. 창건자 바부르(호랑이란 뜻)는 아들 후마윤이 병에 들어 死境을 헤매자 매일 그 병상을 돌면서 알라神에게 『아들의 병을 저에게 옮겨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바부르의 소원대로 되어 아버지는 병을 얻어 죽고 아들은 나았다고 한다. 2代 황제 후마얀은 아버지가 건설한 제국을 다 잃어버리고 한때는 페르시아王의 보호 속에서 연명하기도 했었다. 그의 아들 아크바르가 무갈제국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 방글라데시를 포함한 당시로서는 인구수나 면적에서 세계 제1의 제국이었다. 아크바르는 인도 역사 교과서에도 불교왕 아쇼카와 함께 2大 賢君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는 위대한 전략가였을 뿐 아니라 예술가와 건축가를 우대하여 무갈제국을 文化大國으로 만들었다. 그의 아들 자항길은 자신의 명령에 의하여 죽음을 당한 부하 장군의 미망인 눌 자한과 연애에 빠져 딸을 가진 이 과부와 결혼했다. 눌 자한은 대단한 미모와 용기, 그리고 정치적 능력을 소유했다. 남편을 도와 그녀는 무갈제국의 전성기를 빛낸 여자로 꼽힌다. 자항길 황제의 아들 샤자한은 아버지에게 반항, 반란을 일으켰다가 항복한 적이 있었다. 눌 자한은 샤자한을 용서해 주도록 했다. 살벌한 유목민족제국사에서는 보기 힘든 일이다.
 
  타지마할의 비극
 
  샤자한은 愛妻 뭄타즈 마할이 죽자 그녀를 추모하기 위해 20년에 걸쳐 타지 마할을 만들었다가 아들 아우랑제브에게 쿠데타를 당했다. 그는 딸과 함께 아그라 城에 갇혀 8년간 유폐생활을 하다가 타지마할을 바라보면서 74세에 숨을 거두었다. 그는 타지마할 안에 있는 아내 무덤 곁에 묻혔다. 무갈의 궁정秘史는 오스만 투르크처럼 피비린내가 나지 않는다. 배반과 용서, 순정과 열정, 그리고 관용과 예술성이 느껴진다. 역사 이야기라기보다는 소설 줄거리 같기도 하다. 등장 인물이 모두 독특한 개성에 따라 생동하기 때문일 것이다.
  무갈제국의 유적을 정신없이 구경하고 있는데 동행한 大宇건설 직원이 휴대 전화를 받더니 『라호르 공항에서 폭탄이 터져 10여 명이 죽고 100여 명이 다쳤다』고 전해 주었다. 이틀 전에 기자가 도착했던 바로 그 공항이었다. 파키스탄 사람들은 인도가 사주한 테러일 것이라고 말했으나 테러 범인을 제대로 잡은 적이 없어 설(說)로만 그치고 있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캐시미르 지역에 사는 이슬람 교도들의 자결권 문제를 놓고 독립 이후 계속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캐시미르 지방에는 회교도가 더 많기 때문에 주민들의 자주적 결정에 의해 파키스탄에 통합되어야 한다는 것이 파키스탄쪽의 주장이다. UN 안보리의 결의도 주민의 자결권을 지지하고 있다. 인도는 이곳에 많은 군부대를 파견하여 이슬람 저항조직을 분쇄하려 한다. 인도의 스위스라고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캐시미르는 사실상 軍政下에 있다.
  관광지로도 쓰이지 못한다. 인도는 파키스탄이 캐시미르의 무장조직을 지원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파키스탄 신문 지면에는 거의 매일 캐시미르에서 일어난 충돌 기사가 실리고 있었으나 워낙 인구가 많아 사람값이 싼 탓인지 이곳 분쟁은 국제적 관심도 끌지 못하고 있다.
 
  ◎ 파키스탄 사르달 팔루크 아하마드 칸 레가리 대통령
 
  『인도가 핵개발을 포기하면 우리도 한다』
 
  부족장 家門 출신 대통령
 
  7월23일 오전 11시부터 12시30분까지 파키스탄 대통령 사르달 팔루크 아하마드 칸 레가리 대통령과 인터뷰를 가졌다. 1940년에 태어난 레가리 대통령은 발로크 부족장 家門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는 부족장에게 농민들이 내던 세금을 없애는 등 개명한 지주였다고 한다. 파키스탄은 지금도 일종의 부족 사회이다. 부족끼리 전투가 벌어지면 경찰이 구경만 한다고 한다. 대통령의 이력서에 출신 부족명이 명기(明記)될 정도이다.
  영국 옥스퍼드大에서 석사과정을 밟은 그는 지하울 하크 대통령의 軍政 시절에 민주화 투쟁을 벌여 3년간 옥살이를 했다. 1989년 국회의원에 재선된 그는 베나질 부토 총리 밑에서 수리(水理) 및 발전 담당 장관으로 발탁되었다. 1993년 부토 여사가 재집권하자 여당의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어 국회에서 당선되었다.
  파키스탄의 대통령은 二元 집정제의 대통령만큼 강력하여 정치를 조정하고 軍을 통수한다. 이슬라마바드의 대통령宮 접견실에서 기자를 맞은 레가리 대통령은 큰 키에 아주 유순한 인상이었다. 완벽한 영국식 영어를 구사하는 대통령은 편안함과 신뢰감을 동시에 주었다. 그의 성실하고 솔직한 답변은 파키스탄의 문제를 안고 고민하는 지도자像을 기자의 마음속에 새겨 주었다.
 
  『같은 아시아人으로서 한국의 발전에 자부심 느낀다』
 
  ―어제 라호르 공항에서 있었던 폭발사고로 희생된 분들에 대하여 조의를 표합니다. 그런 사고를 당하여 바쁘신 가운데서도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관심을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불행히도 우리나라에서는 테러가 자주 발생하였습니다. 여러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관계로 테러를 방지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테러로써 파키스탄의 사회적 안정을 해치려는 세력이 있습니다만 그런 방식으로는 절대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정부로서도 정보수집 부문 등 몇 가지 면에서 對테러 작업에 문제가 있었습니다만 이제는 체제를 정비하여 테러조직을 반드시 뿌리 뽑겠습니다. 우리 부토 총리가 貴國을 방문하고 있는 가운데 이렇게 파키스탄을 찾아주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여기 와서 「동쪽 나라를 배우자」(Look Toward East Policy)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동쪽」중의 하나인 한국에 대한 대통령의 평가와 바람직한 파키스탄-한국 관계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우리는 지난 수십년간 한국이 굉장한 공업국가로 성장해 가는 것을 지켜 볼 수 있었습니다. 환(環)태평양 지역에서 한국이 그런 발전을 이루는 것을 지켜보면서 같은 아시아인으로서 긍지를 느끼기도 하였습니다. 우리 총리께서 貴國을 방문한 길에 한국의 성공비결에 대하여 많은 것을 배워오리라 기대합니다. 저는 한국뿐 아니라 모든 국가의 성공 비결은 人的 자원의 개발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은 교육을 통해서 오늘날의 공업大國을 이루었습니다. 특히 문맹률을 낮추고 기술교육을 왕성하게 하고 정치를 안정시킨 것이 성공의 비결이었습니다. 1960년대 초에는 1인당 국민소득에서 한국은 우리나라와 비슷하였고 우리가 한국에 상품을 수출하는 입장이었습니다만 지금은 처지가 역전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두 나라의 역사와 환경이 많이 다르지만 공통점 또한 많을 것입니다.
  물론 한국도 日本같은 나라로부터 기술을 배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과학기술은 지금 선진국과 비견될 정도이고 어떤 부분에서는 일본을 앞지르고 있다고 이해합니다. 한국의 성공 비결에서 또 중요한 것은 시장경제 체제를 살려 민간 부문의 역할을 활성화시킨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장래의 두 나라 관계에 대하여 말씀드린다면 이번에 부토 총리의 訪韓이 계기가 되어 한국의 민간 회사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우리나라에 투자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파키스탄은 큰 나라입니다. 인구만 해도 1억3000만이 넘고 지정학적(地政學的)으로 요충지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동서양의 여러 文明이 만난 십자로이기도 합니다. 중국과 긴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특히 관계가 좋습니다. 걸프 지역과도 가까울 뿐 아니라 소련 붕괴 이후 새로운 맥박이 뛰고 있는 중앙아시아 지역의 관문이기도 합니다. 이런 조건下에 있는 파키스탄은 한국 민간기업에 있어서 무역의 거점으로 적합한 곳입니다』
 
  소란스런 정치
 
  ―저는 파키스탄에 온 지 3일밖에 되지 않아 아주 피상적인 관찰이 될지 모르지만 실례를 무릅쓰고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파키스탄의 정치는 정책대결보다는 권력게임에 너무 집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나라의 지배 엘리트층은 국가적 목표의식·애국심·개혁의지를 결여하고 있을 뿐 아니라 가난한 국민들에 대한 동정심도 없는 것 같습니다. 국가나 국민을 개혁하기 전에 지배엘리트層이 스스로를 먼저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대통령께서는 어떤 생각이십니까.
  『파키스탄에 며칠밖에 안 계셨다고 하셨지만 지금 지적하신 내용은 아주 핵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 정치인들이 소란스러운 정치를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몇 가지 중요한 전략적 문제에 관해서는 만장일치에 가까운 컨센서스를 이루었다는 것도 간과하셔서는 안될 것입니다. 예컨대 安保정책, 캐시미르 지역 분쟁에 관한 정책, 그리고 核무기에 관하여는 여야가 구별 없이 합의한 국가적 원칙을 갖고 있습니다.
  경제정책에 관해서도 자유 개방 정책을 중단 없이 추진해야 한다는 점에서 與野가 거의 같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稅率을 낮추는 대신에 납세계층을 확대하여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도 정치세력은 합의를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한적 대결이 정치판에서 계속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현역 정치인들에게 얼마나 책임을 돌려야 할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습니다.
  우리는 두 번에 걸쳐 군대가 정치에 개입하고 계엄령으로 민주질서를 억압한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한국도 이런 일을 겪었습니다만, 이런 군사통치가 오늘날의 극한적 대립을 만든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파키스탄의 건국 자체가 위대한 지도자 진나의 영도하에서 이뤄진 민중운동의 결과이듯이 우리는 민주주의의 뿌리가 깊은 나라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사통치세력 기간內에 군인들이 후견하고 후원한 非민주적 정치세력이 생겼습니다.
  민주세력과 이런 세력 사이에는 정치 문화가 다른 만큼이나 敵對의식이 생긴 것입니다. 특히 군사독재정권의 억압을 받아 고생한 정치인들이 많다는 것도 한 요인이 되겠습니다. 저는 여러 정당의 정치인들과 허심탄회한 대화를 자주 가집니다. 이야기를 하다가 보면 국가의 중요과제에 대해서는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컨대 人的자원의 개발을 위해서 여자들에 대한 교육을 집중적으로 향상시켜야 한다든지, 의료문제·빈민층 대책에 정치가 앞장서야 한다든지 하는 데 있어서는 같은 생각인 것입니다. 본인이 대통령이 된 이후 2년 반 동안 어떻게 하면 우리 정치의 열기를 냉각시켜볼까 고심(苦心)했습니다. 아시다시피 나는 집권당 소속이었고 민주화 투쟁에 섰던 사람입니다만 대통령이 되자마자 당적을 버리고 초당적인 입장에서 國政을 관리하겠다는 것을 선언했습니다. 헌법에는 대통령이 당적을 포기하라는 규정이 없고 과거 대통령은 그렇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랬는데도 우리 야당은 본인을 여당 대하듯 공격해 왔습니다.
  작년부터 그들도 태도가 좀 바뀌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나를 대화의 상대로 생각하는 것 같고 내일에는 나를 만나러 오겠다고 하는군요. 그들도 좀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나는 나를 공격하는 야당인사들에게도 대화의 문호를 열어놓고 있습니다. 다행히 최근 들어와서 정부와 야당의원들이 캐시미르 문제에 관한 소위원회에서 마주보고 앉아 대화를 갖게 되었습니다』
 
  캐시미르와 核개발 문제
 
  ―대통령의 부친과 조부께서는 발로크 부족의 長으로서 여러 가지 근대화된 정책과 발상을 소개하는 데 있어서 개명(開明)된 지도자의 역할을 하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할아버지(나와브 자말 칸 레가리)께서는 소작농들이 부족장에게 바치는 세금을 폐지하신 것으로 존경을 받고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 大地主들에게 농업소득세를 부과하려는 조치가 大地主들 출신의 정치세력이 반대하는 바람에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前근대적인 기득권 세력과 농업세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농업세는 중앙정부의 관할이 아니라 지방정부의 관할입니다. 연방정부는 총리와 함께 지방정부에 대하여 농업세를 부과하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두 개 주, 즉 신드州와 北東지역州에서는 농업세를 부과하고 있으나 농지가 가장 많은 푼잡州에서는 실시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농업주(農業主)들은 그 동안 농산물을 시장가격보다 싸게 팔게 유도하는 정책을 따르다가 보니까 결국 우리나라 각계에 보조금을 지불하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농업세를 도입하면 그런 보조기능이 약화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납세 계층을 넓히고, 담세율을 지금의 13%(GDP기준)에서 20%로 높여서 사회간접시설과 人力개발에 대한 투자 재원으로 확보하려는 정책에는 찬성하는 바입니다. 세금구조도 고쳐서 세금과 소득이 비례하도록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파키스탄 정부는 여러 번 核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능력은 갖추었으나 실제로 핵폭탄을 만드는 것은 삼가고 있다는 입장을 취해 왔습니다. 인도도 핵무장을 한 상태입니다. 두 인접 국가는 캐시미르 지역을 둘러싸고 영토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두 核무장국끼리의 이런 긴장상태는 의도적이든 우발적이든 核전쟁으로 발전할 소지를 제공합니다. 파키스탄 정부의 입장을 설명해 주십시오.
  『먼저 분명히 해둘 것이 있습니다. 캐시미르 분쟁은 영토분쟁이 아닙니다. 캐시미르 지역에 관한 UN 안보리 결의는 지역住民들의 자율적 결정에 의하여 이 지역이 소속될 나라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었으나 인도가 그 결의안을 위반, 무력으로 강점한 데서 일어난 분쟁입니다. 이 지역의 분쟁이 지난 50년간 파키스탄과 인도의 관계를 악화시켜 온 것이 사실입니다. 캐시미르는 150×80㎞의 면적에 불과합니다. 사람이 살 수 없는 산악지대도 많습니다. 그런 지역에 인도는 60여 만 명의 잘 훈련된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습니다. 인구비례로 따져서 이처럼 병력이 집중된 곳은 세계 역사상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결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발포하고 연행하는 등 만행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할 수 없이 인도 주둔군에 무력으로 저항하는 캐시미르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5만 명 이상의 캐시미르 사람들이 인도 주둔군에 의하여 살해되었습니다. 청장년들은 집에서 연행된 다음날 시체로 발견됩니다. 유고 학살보다 더 비극적인 상황이 1989년 이후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력에 의한 해결에 반대하고 정치적인 해결을 바라고 있습니다. 나는 작년에 인도를 방문하여 정치인, 지식인, 언론인 등 지도층을 만나 자리에서 말했습니다. 이 문제는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 왜? 파키스탄과 인도의 인구를 합치면 약 10억을 넘는다. 캐시미르 분쟁을 다른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세계 인구의 약 20%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다. 파키스탄은 인도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하여, 그야말로 생존을 위해서 막대한 국방비를 쓰고 있다. 캐시미르 분쟁이 평화적으로 해결된다면 우리는 국방비를 줄여서 발전소, 건설, 의료비 등에 더 투자를 할 수가 있게 되며 공동의 번영을 도모할 수 있다… 그렇게 강조했습니다.
  이곳의 긴장이 에스컬레이터 될 소지는 많습니다. 지난 2년간 인도는 核운반 능력을 갖춘 미사일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파키스탄의 주요 도시가 사정거리에 들게 됩니다. 우리는 미국을 통해서 인도에 제의했습니다. 즉, 미사일을 전면 폐기하는 방법을 놓고 토론해 보자고 한 것이지요. 인도는 중거리 유도탄도 개발중인데 동쪽으로는 한국까지, 서쪽으로는 中東, 남쪽으로는 서남아시아의 맨 아래쪽까지 사정권 안에 든다고 합니다. 파키스탄은 평화적인 核개발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核무기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해놓고 있습니다. 우리가 안보상의 위협을 받는다면 우리는 즉시 核무기에 의존하는 방위능력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지난 10년 동안 우리는 일관되게 주장해 왔습니다. 인도가 核확산금지조약(NPT)에 서명하면 우리도 조건 없이 하겠다고. 우리는 主權국가로서의 생존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는 입장입니다. 귀하도 잘 아시겠지만 1971년에 인도는 東파키스탄으로 쳐들어 가 파키스탄으로부터 분리시켜 방글라데시를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인도의 큰 덩치에 의하여 협박을 당하면서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평화롭게 번영하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권국가의 권리로서 평화적인 核개발을 계속 추구해가면서 인도에 대하여는 이 지역의 평화를 항구화하기 위한 대화를 중단 없이 시도할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별로 효과가 없습니다만』
  ―몇 년 전에 북한의 核무기 개발이 세계적인 이슈가 되었을 때 한국에서는 북한이 파키스탄의 核연구 센터에 많은 기술자를 보내 연수를 시켰다는 미확인 보도가 있었습니다.
  『그런 사실이 없습니다. 파키스탄은 북한과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가끔 북한으로부터 무기를 사긴 하지만 귀하가 말한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저는 남한과 북한이 자율적으로 통일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파키스탄과 중앙아시아가 연결되어야』
 
  ―파키스탄은 中央아시아의 관문과 같은 위치를 점하고 있습니다. 중앙아시아 지역은 지금 급속도로 경제발전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과 관련하여 파키스탄은 미래에 어떤 역할을 할 계획입니까.
  『중앙아시아 지역은 지금 아주 역동적인 변화를 보이고 있는 곳입니다. 중앙아시아는 기름, 천연가스, 광물자원이 풍부한 곳이지만 이 지역은 인도양으로 연결되어야 제대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파키스탄→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 또는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중앙아시아 식으로 수송로가 뚫려야 합니다. 가운데 있는 아프가니스탄의 불안정이 해소된다면 인도양과 중앙아시아의 그런 연결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타지키스탄-우즈베키스탄-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인도로 연결되는 가스파이프라인과 시베리아-카자흐스탄-투르크메니스탄-우즈베키스탄-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으로 연결되는 석유 수송 파이프라인도 구상되고 있습니다.
  터키, 이란, 파키스탄, 아제르바이잔, 중앙아시아(5개국), 아프가니스탄은 이슬람 문화권으로서 3억의 인구를 갖고 있습니다. 이 지역 국가는 ECO(Economic Cooperation Organization)를 조직해 놓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중국, 이란, 아프가니스탄, 인도와 국경을 맞대고 있을 뿐 아니라 걸프 지역과도 연결되는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어 앞으로 이 지역의 공동발전에 있어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게 될 것입니다.
  WEF(World Economic Forum)가 내년에 파키스탄에서 중앙아시아 및 南아시아 합동 회의를 갖기로 한 것도 이 지역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1980∼90년대에 환태평양 지역이 발전하듯이 2000년대에는 중앙아시아가 거대한 잠재력을 활용하여 번영의 길에 접어들 것으로 봅니다』
 
2007.12.

by 하야니 | 2008/12/14 00:46 | Eye to the world | 트랙백 | 덧글(0)

한국 경제 위기설, '일본언론'에서는 어떻게 비치나?

1. 원화가치 폭락
엔/원 환율이 매매기준가가 100엔당 1584원으로, 현찰로는 1600원이 넘었다.

일본에서 부은 연금을 작년 4월, 한국에 일시 귀국해서 환전할 때와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그나마 700원대에서 잠깐 올랐던 800원대에 환전함)

 환율이 폭등함에 따라 한국경제도 몸살을 앓고 있고, 최근 언론을 떠들썩하게 한 인터넷논객 미네르바의 예언대로 내년3월 일본자본의 한국 접수에 관한 흉흉한 소문도 나돌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일본에서는 한국의 경제위기가 어떻게 비치고 있을까.


2. 보도 스테이션
 아래는 지난 달 말 아사히TV 보도 스테이션에서 다룬 한국 경제위기 및 환율에 관한 보도 내용이다. 원화가 폭락하고, 일본으로 놀러오는 한국인 관광객이 줄어들어서 관련 여관업계가 울상인 대신, 한국에 간 일본인 관광객은 엔화강세의 덕을 톡톡히 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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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년간 엔/원화 환율 추이...원화 가치가 거의 반토막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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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투자가 '한국주식'을 팔면서 원의 폭락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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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삼성과 LG와 거래하는 회사 사장 인터뷰...한국 업자와 우리들과의 가격경쟁을 붙이면 힘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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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온 일본인 관광객 - 기쁘죠. 물건 살 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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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두자- 한국!! 득!!! 한국 관광 공사에서 계속 내보는 광고...
- 신문에서도 계속 한 면을 차지하면서 나오고 있으나, 한국이 부가가치가 올라가서 관광객이 느는 게 아니라, 원화 가치가 폭락해서 가는 것이라...이 광고를 왠지 씁쓸하다.


3. 위기의 심화

 11월에 접어들면서, 아사히 신문에는 '강만수 장관'이 일본 및 중국과 통화스왑을 확대하는 협의를 하는 중이라는 내용의 기사가 실리더니, 중순에는 '한국, 불안해소에 열심!!'이라는 타이틀로 - 97년통화위기 재도래설을 경제면에서 크게 다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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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불안해소에 전념, 97년 통화 위기 재도래설. 정부 [외화준비는 윤택] -아사히 신문 11월 15일 조간 >

 주된 내용은 지난 10월 말 도쿄에서 재정경제부 차관보가 '97년 위기가 트라우마때문인지, 해외투자가는 민감하게 반응하기 쉽다.'라며 위기설 진화를 위한 설명회를 열었다는 것과, 같은 날 서울에서도 특파원 상대로 기획재정부, 금융감독당국, 한국은행 3자 합동으로 기자회견을 열었다는 것이다.
 주요 금융,경제 주체 3자합동으로 외국 미디어에 회견하는 것은 이례의 경우라고 아사히신문 기자가 썼는데, 기사의 요지는 한국 정부가 97년때와 달리 '외환보유가 2100억불로 윤택하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하나 한국 내 사정이 그리 만만치 않다며 한국 내 경제상황의 이모저모를 소개했다. 예를 들면 동대문 시장의 썰렁한 분위기를 전하면서, 정부의 감세나 부동산 정책 등 내수진작책, 한국은행의 금리인하 등 위기진화에 안간힘을 쓰고 있으나 위기설을 끊임없이 고개를 든다는 것이다.


4. 한국, 외환보유고 바닥이 드러나다?

그런데, 일본의 보수 주간지 '주간 신쵸'의 우익 칼럼리스트 '사쿠라이 요시코'씨가 이번주 11월 27일자에서, '일본 르네상스'라는 글로 한국의 외환보유고의 실상을 나름대로 파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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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쓴 글 일부를 잠깐 살펴 보자. 원문의 일부를 올리는 이유는 이 칼럼리스트가 인용한 부분이 일본의 주요 언론매체(마이니치 신문, 닛케이신문)가 그 동안 보도한 내용을 추린 것이고, 일본언론에 비친 한국 경제상황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아래...칼럼 일부>
一方、金融サミットに先立つ11月9日、李明博韓?大統領は「?日新聞」と韓?の「朝鮮日報」、英?の「タイムズ」3紙との?見に?じ、次のように語った。
「ドルの世界的地位が低下した。日中韓3カ?が?一通貨に合意すれば、アジア(全域)に?げるのは難しくないだろう。日本の役割は大きい」(?日新聞11月11日朝刊)

 
 韓?は米??の金融危機で、自?の外貨準備が?らいでいると見られる。各?政府が保有する外貨は、貿易?字によってもたらされるだけではない。他?から借りて外貨を積み上げる場合もある。韓?の場合、2600億ドルの外貨のうち貿易?字で稼ぎ出した「?水」は約6割にとどまるといわれる(「日本??新聞」2008年2月18日、「?信?点?、韓?の?常?支」)
 とすれば、危機に直面して使える外貨は、約1500億ドルということだ。だが、韓?の外貨準備のうち、約500億ドルがファニ?メィ(米連邦住宅抵?金庫)に投資されていたととの情報もある。事?であれば、500億ドルは失われたも同然だ。

 このような?況の下で韓?政府が10月末に米?政府と300億ドルのスワップ協定を結んだ。米韓の中央銀行が300億ドル分のドルとウォンを互いに預け合い、自?の通貨を安定させるために使うというのだ。この場合はウォン安定化のためにドルを使うという意味だ。韓?政府はこの300億ドルのスワップを必要とするところまで外貨不足に?っているということでもある。
 ドルの地位が低下した、日中韓でアジア統一通貨を考えるべきだという李大統領の先の?言は、大統領が、米?とのスワップに?りながらも、他に危機打開の道はないかと模索中であることを示す。その際に?になるのが、アジア統一通貨に?する?言である。

칼럼 해석>

 한편, 금융서밋에 앞서 11월 9일, 이명박한국대통령은 「마이니치 신문」과 한국의 「조선일보」,영국의 「타임즈」3지와의 회견에 응한 뒤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달러의 세계적지위가 하락했다. 한중일 3개국이 단일통화에 합의하면, 아시아(전역)에 넓힐 히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일본 역할이 크다] (마이니치 신문 11월 11일 조간)

 한국은 미국발 금융위기로, 자국의 외환보유고가 흔들리고 있다고 보인다. 각국정부가 보유하고 있는 외화는 무역흑자에 의해서만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타국에서 빌려온 외화를 쌓아두는 경우도 있다. 한국의 경우, 2600억달러의 외화 중 무역흑자로 벌어들인 [진짜]는 약 60프로에 머무른다고 한다 (니혼케이자이신문,2008년2월18일, 황색신호 점등, 한국의 경상수지)
 그렇다고 한다면, 위기에 직면해서 사용할 수 있는 외화는, 약 1500억달러가 된다. 그러나, 한국의 외환보유고 중에서 약 500억달러가 패니매(미연방주택저당금고)에 투자되어 있다는 정보도 있다. 사실이라면, 500억 달러는 잃어버린 것과 같다.
 

 이런 상황속에서 한국 정부는 10월말 미국정부로부터 300억달러의 스왑협정을 체결했다. 한미 양국의 중앙은행이 300억달러분의 달러와 원을 서로 예치하여, 자국 통화를 안정시키기 위해 쓰기로 한 것이다. 이 경우는 원화 안정화를 위해서 달러를 쓴다는 의미다. 한국 정부는 이 300억달러의 스왑을 필요로 하는 상황까지 외화부족에 빠져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달러의 지위가 하락했다. 한중일에서 아시아통일통화를 생각해봐야한다는 이 대통령의 앞 선 발언은, 대통령이 미국과의 스왑에 의지하면서도, 다른 위기타개의 길이 없는지를 모색중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그 때 신경쓰이는 것인 아시아 통일 통화에 관한 발언이다.

- 한국 위기, 중국이 지배 확립인가, '일본 르네상스' 중에서 <주간 신쵸 11월 27일호>


즉, 이 필자의 요지는 한국의 현 실제 상황은 300억 달러스왑까지 필요로 할 정도로 외환보유고가 바닥이 났음을 알 수 있다는 것, 만일 아시아 단일 통화를 하게 된다면 중국의 위원화가 중심이 되지 않도록 엔화강세를 충분히 활용해서 일본에 유리하게 하자는 것이다.

 칼럼의 후반부에는 한 일본인 중국문제전문가의 말을 빌려 다음과 같은 내용을 싣고 있다.

 중국은 한국의 경제위기를 천재일우의 기회로 보고 있고, 중국정부가 직접 나서면 한국민들의 반발을 사므로, 민간기업을 매수하거나 자본참여하는 등 민간의 형태로 한국 지배에 두는 방식을 취할 거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한국이 북한과 함께 중국의 완전한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고 이것은 일본에게도 바람직하지 않으므로 일본은 IMF 및 달러체제를 지지하면서 한국에 세세한 지원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최종적으로는 일본경제로의 중국지배를 막 기 위한 엔기축통화체제구축의 전략을 세우는 것이라고 글을 끝맺는다.

 5. 괴담이 괴물로 되지 않기를...

 사실, 이 칼럼을 쓴 사쿠라이 요시코는 대표적인 우파 칼럼리스트로 중국자본의 한국지배에 관한 내용은 약간은 망상에 가깝다.
 그러나 한국이 현재 미국 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 달러 스왑까지 요청하고 있는 남루한 현실이 일본언론에는 훤히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일본 내 뉴스 흐름으로서는 인터넷 경제논객 미네르바가 말한 대로 일본이 노골적으로 한국 경제를 접수할 것 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한중일 통화스왑 시장 확대 등의 뉴스도 그렇고.
 
 그러나 낮아진 원화가치, 폭락한 주식시장, 엔화강세로 인한 일본기업들의 해외기업 매수 움직임 등 3박자가 맞아떨어지는 상황으로 봤을 때 한국이 보다 근원적으로 위기를 탈출하지 않는 한 '일본자본의 한국 지배괴담'은 끊이지 않을 것 같다.

 더군다가 최근 아소총리가 IMF에 1000억불을 융자해주기로 했는데, 이 금액은 일본자본이 더해질 경우 IMF의 1/3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향후 IMF에 일본의 입김이 상당히 들어갈 거라는 예상을 하게 만든다. (현재 IMF가 보유한 달러는 2000억불, 일본이 융자를 해주면 3000억불이 됨)

 암울한 것은  현 정부의 대책이라는 것이 대부분 그 때 그 때 급한 불만 끄는 식의 미봉책이 많아서, 오히려 위기를 더 키우고 있다는 점이다.
 만에 하나 정말로 정부 정책이 더 큰 위기를 자초하여 결국, 또다시 IMF로부터 한국이 손을 벌리게 된다면, 괴담은 괴물이 되어서 스크린이 아닌 한국전체를 덮치게 될 것이다.

 그저, 이런 불길한 일을 상상하는 날이 어서 끝나기를 바란다

by 하야니 | 2008/11/25 06:35 | Eye to the stock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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