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2월 26일
퍼온글)천리포수목원, 민병갈원장
민병갈은 광복 직후 우리나라 현대사의 격동기를 겪으며 역사의 현장에 서 있었던 특이한 경력을 갖고 있다. 한반도에 진주한 미군 24군단의 선발대 장교로 서울에 들어와 조선총독부의 통신시설을 장악했고, 미국 군정청 관리로 일하며 정부 수립 때까지 미국 대한정책의 일선 집행관 노릇을 했다. 서양인으로는 최초로 한국에 귀화한 그는 해안국립공원 태안반도에 대단위 수목원을 세워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목련동산을 일궈 놓았다.
민병갈과 한국의 운명적 만남
민병갈이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된 경위는 매우 극적이고 운명적이었다. 1945년 9월8일. 그날의 서해 바다는 유례 없는 대규모 선단에 놀랐는지 풍파조차 일지 않았다. 오키나와를 출발하여 어둠의 바다를 뚫고 들어온 미군 함대가 월미도 근처에 닻을 내린 시간은 새벽 다섯 시. 1886년 대동강의 셔먼호 사건 이후 59년 만에 미국 배로서는 처음으로 한국 연안에 정박한 순간이었다. 이날은 한국을 지배하던 일본이 미국에 항복한 지 23일째 되는 날로 인천 앞바다는 전승국의 함대가 위압적으로 들어차 긴장감이 감돌았다.
날은 밝았지만 연안 주민들은 아직 잠을 덜 깬 시간이었다. 그런데 난데없는 배들이 쏟아내는 소음에 잠을 깬 주민들은 해안으로 나와 보고는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들이 본 것은 육지로 몰려오는 수많은 미군 상륙정들이었다. 얼굴에 검댕이 칠을 하고 완전무장한 미군들은 무섭기만 했다.
그런데 한 상륙정에서 내리는 13명은 다른 군인들처럼 민첩하지 못했고 지휘 장교마저 군인답지 않게 어리숙해 보였다. 더욱 신기한 것은 장교 한 사람만 키가 큰 백인일 뿐 나머지 대원들은 한국인과 비슷한 동양인이라는 점이었다. 부두의 구경꾼들에게 흥미를 끈 이 부대는 일본계 미국인으로 편성된 ‘씨그’(CCIG, Civil Censorship Intelligence Grou p)라는 정보대였고, 지휘장교는 칼 밀러(Carl F. Miller)라는 24세의 풋내기 해군 중위였다.
밀러 중위가 이날 함상에서 처음 본 한국 땅은 월미도였다. 그리고 얼마 후 상륙정에 올라 인천항 부두로 들어오면서 그는 한국의 상쾌한 아침을 맛보았다. 해풍을 타고 코끝에 닿는 갯내음이 약간 비릿했지만 얼굴을 스치는 새벽 공기는 차가우면서도 신선했다.
막상 말로만 듣던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왔다 싶으니 긴장감보다 호기심이 앞섰다. 뒷날 민병갈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에 귀화한 그는 1980년 영문잡지 ‘아리랑’과의 인터뷰에서 “전투훈련을 한 번도 받지 않은 통역장교였던 나는 무거운 M1 소총과 허리에 매단 수류탄이 거추장스럽기만 했다”고 상륙 당시를 회고했다.
미군이 상륙한 인천항 도크에는 뜻밖에도 일본의 고위 관료들이 미군을 마중나와 있었다. 키가 작은 일본인들이 높은 모자에 흰 장갑을 낀 서양 귀족형 정장을 하고 뻣뻣이 서 있는 모습은 어색하기만 했다. 일본어 통역장교이기도 했던 밀러는 이들과 악수를 나누고 부대원들과 함께 열차에 올랐다. 이날 인천항에 들어온 미군의 일부는 월미도에 남고 주력부대는 경인 철도를 이용하여 용산까지 들어왔다. 밀러가 지휘하는 CCIG 부대는 중앙우체국을 장악하는 선발대 임무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가장 먼저 서울 중심가로 들어가야 했다.
열차가 부두 하역장을 출발하여 용산 역까지 오는 동안 밀러는 한국의 대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맑은 하늘, 야트막한 산, 한가로운 촌락 등 한국의 자연과 풍물이 정겹기만 했다. 용산에 도착한 미군 수송 열차는 주력 부대를 하차시킨 다음 밀러 일행 13명만 태운 채 서울역으로 진입했다. 그런데 플랫폼에서 트럭에 옮겨 탄 밀러 부대는 역 구내를 벗어나는 순간 예기치 않은 인파에 휘말리는 사태가 벌어졌다. 미군이 기차를 타고 온다는 소문을 듣고 수많은 시민들이 환영나와 있었던 것이다.
뜻밖의 군중에 포위돼 트럭이 움직일 수 없게 되자 밀러는 지휘관으로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길을 뚫어 보려고 일단 차에서 내렸으나 이번에는 그가 집중적인 환영 인물로 포위돼 더욱 난처해졌다. 군중들은 밀러를 사령관쯤으로 생각했는지 집중적으로 그를 에워싸고 태극기를 흔들며 환성을 터뜨렸다. 힘겹게 군중을 벗어난 밀러 부대는 중앙우체국에 도착해 성조기를 게양한 후 가까운 곳에 있던 조선호텔(지금의 웨스틴 조선호텔) 마당에 군막을 쳤다.
그날로부터 정확히 50년 뒤인 1995년 9월8일 저녁. 밀러는 조선호텔측이 베푼 ‘민병갈 선생 한국생활 50주년 축하 모임’에서 인사말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본의 아니게 한국민들의 대규모 환영을 받는 최초의 미군 지휘관이 됐습니다. 하지 사령관에게는 대단히 미안한 일이었지요. 사람들이 자꾸 내게로 몰려 와 계급장을 보이며 ‘나는 장군이 아니다’라고 일본 말로 외쳤지만 군중들은 막무가내였습니다. 할 수 없이 나는 대원들을 하차시켜 도보 행군으로 길을 열었지요. 내가 졸지에 미군 대표가 된 것이 우습고 당혹스러웠습니다. 미국이 한국을 위해 일본과 싸운 것도 아닌데 한국인들이 미군을 환영해 주는 것도 미안했습니다. 50년 전의 오늘은 내 생애에서 가장 긴 날이었습니다.”
이날 파티는 밀러 부대가 조선호텔 마당에서 야영한 첫 날의 50돌을 기념하여 호텔측이 밀러를 위해 특별히 마련한 자리였다. 마고자 등 전통 한복차림으로 파티장에 나온 밀러는 패기 넘치는 미군의 청년 장교에서 어느덧 백발이 성성한 74세의 한국 노인으로 변해 있었다.
당시 그는 민병갈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에 귀화한 지 16년째를 맞고 있었는데, 외모만 서양인일 뿐 의식주의 습성은 한국인과 다름없었다. 김치와 깍두기를 즐기는 식성이 그렇고, 기와집과 온돌을 좋아하는 습성이 또한 그러했다.
img2R밀러가 한국 땅을 처음 밟은 날은 1945년 9월8일이지만 한국 사람을 처음 만난 때는 그보다 4∼5개월 전이었다. 오키나와 미군사령부에서 통역장교로 있을 때 일본군 포로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상당수의 한국인을 만났던 것이다. 그들은 강제로 일본군에 끌려온 사람들이었는데, 밀러는 이들에게서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친밀한 인상을 받았다.
특히 그의 시선을 끈 포로는 종군위안부로 부산 지역에서 끌려온 앳된 여성들이었다. 가냘픈 체구, 순박한 얼굴, 겁먹은 표정들은 청년 장교에게 깊은 연민을 갖게 했다. 밀러는 이때 강력한 코리아에 대한 유혹을 느끼고 한국행을 지원하게 됐다. 원래 그는 일본 파견 CCIG 대장으로 편성됐었으나 한국에 가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동료 장교와 자리를 바꿔 인천행 전함을 타게 됐던 것이다.
조선호텔 마당의 차가운 군막에서 한국의 첫 밤을 보낸 밀러는 이튿날 지프에 올라 소공동과 명동 그리고 태평로 일대를 돌아봤다. 사무실로 쓸 만한 건물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는 점령군의 선발대 장교로서 일본 재산이라면 차지하지 못할 것이 없었다. 처음에는 접수한 중앙우체국 건물을 쓰려 했으나 가까운 곳에 그보다 훨씬 좋은 건물이 있음을 발견하고 생각을 바꿨다. 명동에 있던 호사스러운 공연장인 시공관(전 명동예술극장)이었다. 밀러는 이곳에 CCIG 본부를 차리고 10개월간 일본인의 통신물을 검열하고 그들의 재산을 관리하는 업무를 수행했다.
밀러가 처음 본 한국은 서양에 알려진 말 그대로 조용한 아침의 나라였다. 그는 지도를 들고 전차 길이 난 서울의 중심가부터 돌아봤다. 이때 그를 사로잡은 것은 흰 옷을 입은 한국인들의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미군 차가 오면 슬슬 비켜서며 신기한 듯 바라보는 행인들의 순박한 모습에서 그는 오키나와에서 받았던 코리안의 이미지가 결코 틀리지 않았음을 재확인했다. 그의 눈에 비친 한국인은 자연에 순응하면서 꾸밈없이 살아가는, 지구상에서 가장 착한 사람들이었다.
한국에 살으리랐다
밀러 중위가 이끄는 CCIG 부대의 임무는 1946년 여름 10개월 만에 끝났다. 당초부터 군인 체질이 아니었던 밀러는 학업을 계속할 셈으로 이 해 8월 귀국하여 군복을 벗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에는 한국에 대한 미련이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고심 끝에 그는 대학원 진학을 포기하고 워싱턴에 있는 펜타곤(국방부)을 찾아가 서울 근무를 신청했다.
밀러는 주한 미군총사령부 사법부 정책고문관 발령을 받고 1947년 1월 다시 한국으로 왔다. 그의 한국 직장은 군정청 소속으로 주로 적산(敵産-일본인 재산)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그때 나이는 26세. 엄격한 군대 규율에서 벗어난 그는 자유로운 민간인 신분으로 본격적인 한국 수업에 들어갔다.
서울의 미 군정청에서 근무한 2년은 밀러에게 한국의 자연을 익히는 초등 과정의 수학 기간이었다. 그는 이미 군인 시절 10개월 간의 입문 과정을 마친 상태였다. 그가 군정청에서 일했던 1947∼48년은 극심한 경제난 속에 전승국의 신탁통치 여부를 놓고 국론이 분열되고, 좌우익이 첨예한 사상대립을 벌이는 등 사회 전체가 시끄러웠던 시기였다. 그런 혼란중에도 점령국 관리로서 거칠 것이 없었던 밀러는 여유만만하게 한국의 자연과 풍물을 즐겼다.
군인 시절 밀러가 최초로 즐긴 한국의 자연은 서울의 남산이었다. 근무지인 명동이나 숙소인 회현동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남산은 그에게는 알맞은 산책 코스였다. 틈만 나면 서울 시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남산에 올라 유서 깊은 고도(古都)의 전경을 조망했다. 그의 눈길에는 고궁보다 오밀조밀한 초가들에 더 호감이 갔다. 그를 최초로 사로잡은 한국의 자연은 북한산의 수려함이었다.
군정 시절에는 그의 산행 반경이 동쪽으로 치악산과 오대산까지, 남쪽으로는 속리산과 지리산까지 그리고 1948년 여름에는 멀리 한라산까지 이르렀다. 분단의 현장을 보고 싶었던 그는 38선을 두 차례나 찾아가 소련 보초병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는 러시아어를 할 줄 알았다.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군정청이 문을 닫게 되자 밀러는 다시 귀국해야 했다. 한동안 서울에 남아 있던 그는 적당한 일자리가 없어 일단 미국으로 돌아갔으나 마음은 여전히 한국에 있었다. 이번에는 국무부 관할의 해외원조 기관인 원조협조처(ECA:AID의 전신)에 취직해 1949년 7월, 세번째로 한국을 찾았다. 그러나 한국에서 살고 싶었던 그의 집념은 또 한번 제동이 걸렸다. 새 직장에서 근무한 지 1년도 안돼 6·25 전쟁이 터져 일본으로 피난을 떠났기 때문이다.
일본 체류 두 달 만에 전시 임시수도였던 부산으로 돌아온 밀러는 유엔군의 인천상륙 작전에 맞춰 위험한 북행(北行) 열차에 올랐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9월말,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열차 작전은 밀러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대장정이었다. 그것은 5년 전의 인천∼서울 열차작전과는 비교가 안 되는 전시 작전이었다. 영문잡지 ‘아리랑’에 실린 밀러의 2차 서울 장정 회고담은 그의 생애에서 1945년 9월의 인천 상륙에 이은 또 다른 하이라이트였다.
“1945년 인천에서의 서울 입성 작전은 한 시간 만에 끝났는데 1950년 부산에서의 서울 입성 작전은 나흘 반이 걸렸습니다. 일요일 아침 10시에 부산역을 출발해 목요일 오후 4시 영등포 역에 도착했으니까요. 열차 안에서는 야전식으로 끼니를 때우고 나무 의자에서 새우잠을 잤습니다. 영등포에서는 퇴각하지 못했던 북한군이 한밤중에 열차를 공격해 목숨을 잃을 뻔했지요. 그런데 전쟁 직후 한강 철교가 폭파돼 열차가 더 이상 갈 수 없었습니다. 나는 미군으로부터 지프 한 대를 구해 임시로 가설된 부교를 이용하여 간신히 한강을 건넜습니다.”
한국의 명산·명소를 모두 가 보고 싶었던 밀러의 집념은 6·25 전쟁중에도 멈추지 않았다. 1950년 11월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북진하자 그는 북한의 명산에 가 볼 욕심으로 눈보라를 맞으며 북쪽으로 차를 몰았으나 개성에서 더 이상 갈 수 없었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역전된 줄 몰랐던 그는 유엔군의 후퇴 행렬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에서 살고 싶었던 밀러에게는 시련이 끊이지 않았다. 간염 치료를 위해 일본과 미국을 오가는 동안 ECA가 대만으로 옮겨가 타이페이로 전근해야 할 형편에 놓이게 됐다. 1951년 두말 없이 사표를 던진 그는 유엔 군사원조단(UNCACK)으로 자리를 옮겨 한국생활을 계속했다. 얼마 후에는 한국은행의 미국인 고문을 보좌하는 임시직으로 있다 계약기간이 끝나 한국을 떠났다.
그리고 1953년 한국은행에 재취직하여 자리를 잡았다. 밀러는 한국에 머무르기 위해 7년 동안 여섯 군데의 근무처를 전전했던 것이다.
밀러는 1953년 한국은행에 취직하여 안정된 직장을 갖게 되면서부터 자연학습을 한국 친화 방식으로 바꾸었다. 미국 기관에서 근무한 7년은 대부분 자동차를 이용한 단독 답사였기 때문에 한국의 명소와 지리를 익히는 이상의 발전이 없었다. 한국의 자연과 풍물을 좀 더 알기 위해서는 여러 사람과 어울리면서 직접 몸으로 체험하는 현장주의가 바람직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한 장거리 탐사 여행이었다. 1950년대 중반 밀러는 혼자 배낭을 메고 청량리 버스정류장에 자주 나타났다.
한국은행 시절 초기에 밀러가 한국의 자연과 함께 탐닉한 또 하나는 한국의 풍물이었다. 일찍부터 한국적인 여유와 순박함에 심취했던 그의 눈에는 꾸밈없이 살아가는 한국인들이 이루어 놓은 생활문화가 또 다른 아름다움으로 떠올랐다. 토속적이며 인간적인 한국의 풍물들은 한국인에게서 그랬듯 친근하게 느껴졌다. 밀러와 50여 년간 친구로 지낸 서정호(徐正虎)는 그의 유별난 한국의 풍물 사랑을 이렇게 소개했다(서정호는 1945년 밀러가 부대장으로 있던 미군 CCIG 부대에서 일한 경력 때문에 밀러와 특별한 인연을 갖고 있다).
“한국전쟁이 휴전에 들어간 1953년 8월부터 한동안 미국에 가 있던 밀러가 이듬해 다시 나타났어요. 한국은행에서 다시 일하게 됐다며 북한에 소속돼 있던 설악산이 휴전선 이남으로 넘어왔다고 반가워하더군요. 그리고 강원도로 떠날 채비를 하는 것을 봤는데 며칠 후 한은 고문실을 방문한 나에게 대관령에서 서당 구경을 하고 왔다고 자랑했습니다. 망건 쓴 훈장과 댕기 딴 학생들의 모습을 한바탕 설명하며 대단한 발견을 한 듯한 표정이더군요.”
그러나 6·25 전쟁 직후의 대중교통은 극도로 열악하여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밀러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버스 여행의 문제는 화장실이었다. 밀러는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한 여행이 쉽지 않자 그가 오랫동안 관여했던 영국왕립 아세아학회(RAS:Royal Asiatic Society) 한국지부를 활용한 단체여행을 구상했다. RAS는 1823년 영국에서 발족한 유서 깊은 단체인데 한국지부(RAS-KB)는 구한말인 1900년 10월에 결성돼 있었으나 일제의 한국 병탄으로 소멸된 상태였다. 밀러는 군정청 근무 때 이 같은 사실을 알고 1947년 이 단체의 부활을 주도하여 회장직을 맡고 있었다. 회원들은 외교관·선교사 등 모두 외국인이었다.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한 한국의 자연과 풍물 탐사방법으로 밀러가 1950년대 중반에 기획한 ‘RAS투어’는 결과적으로 밀러 개인의 수익사업이 되고 말았다. 우리나라 단체관광의 시초가 된 RAS투어는 돈 많고 호기심 많은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수입이 짭짤했다. 초기의 교통편은 극도로 열악하여 열차를 개조해 쓰거나 미군 버스를 이용했다. 대사급이나 미군 장성이 끼어있는 제주도 관광 때는 해군에서 함정까지 지원했다. 1950년대말 울릉도에 갔을 때는 섬이 생긴 이래 처음으로 외국인 손님이 많이 왔다며 군수가 소를 잡아 주는 환대를 베풀었다.
RAS 관광단을 이끌고 전국의 명산대찰을 돌던 밀러는 사찰을 감싸고 자라는 다양한 나무들에게서 특별한 공식 하나를 발견했다. 그것은 아무리 헐벗은 산이라도 절이 있으면 그 주변에는 나무가 많다는 사실이었다.
‘절=숲의 법칙’은 밀러에게 중대한 암시로 떠올랐다. 그가 얼마 뒤 필생의 사업으로 시작한 수목원 사업은 이 공식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었다. 이때 그는 스님들로부터 사찰 주변에서 자라는 나무들에 대한 지식을 많이 얻었다. 뒷날 밀러는 우리나라의 산에 나무를 지켜주는 절이 많지 않았더라면 산림이 크게 황폐했을 것이라며 스님들의 자연 보전 공로를 높이 평가했다.
민병갈의 한국에 대한 열정
밀러는 직장을 옮겨다니면서도 한국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군정청 직원으로 있을 때 좀더 체계있는 학습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찾은 곳은 미 8군 도서관이었다. 그러나 그의 관심사였던 한국의 자연·문화·풍물에 관한 책은 드물고 역사·지리·정치에 관한 책이 대부분이어서 도움이 안 됐다. 대학 도서관을 몇 군데 찾아갔으나 읽을 만한 책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서울 뒷골목의 고서방을 찾는 일이었다.
군정청 시절 밀러가 한국에 관한 책을 많이 읽게 된 데는 서울 인사동에 있던 ‘통문관’의 역할이 컸다. 이 고서방의 주인 이겸로(李謙魯)와는 일본어 소통이 가능하여 큰 어려움 없이 책을 주문할 수 있었다. 인사동에서 산기(山氣) 선생으로 통하던 이겸로는 지금도 93세의 고령을 무릅쓰고 통문관 2층 사무실에 매일 출근하는 노익장을 보인다. 지난 1월 돋보기를 들고 고서와 서화를 정리하던 그는 56년 전에 본 밀러의 모습을 생생하게 이야기했다.
“군정 때 웬 젊은 미국인이 와서 더듬거리는 한국말로 영어로 쓴 한국 관련 책을 사겠다고 해요. 한국말이 잘 안 통하면 일본 말이 거침없이 나와 놀랐지요. 그때 나는 꽤 많은 책을 구해 주었지요. 그는 우리 가게의 단골이 됐는데, 나중에 하는 말이 6·25 전쟁 때 부산으로 옮겨 놨던 책들이 모두 불타 버렸대요. 역 창고에 불이 나 그랬다는데 참으로 아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밀러는 통문관을 통해 수집한 한국 관련 영문 책자를 빠짐없이 정독했다. 그 때 읽은 책 중 하나가 ‘하멜 표류기’였다. 이겸로에 따르면 밀러는 휴전 후에도 통문관에 자주 들러 고문서를 많이 사 갔다고 한다. 그가 수집한 책들 중에는 ‘조선 고지도’등 희귀본이 많았는데 식물 원예학에 관련된 서적을 제외한 5,000여 권의 장서는 모두 1986년 9월 이화여대 100주년기념도서관에 기증했다.
밀러가 서양인으로는 드물게 한자에 밝고 일본어를 잘 하게 된 데는 그럴 만한 교육적 배경이 있었다. 1921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에 있는 웨스트 피츠턴에서 태어난 그는 버크넬(Bucknell)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한 자연과학도였다. 외국어에 남다른 재능이 있던 그는 대학 시절 이미 러시아어와 독일어가 상당 수준에 올라 있었고 심심풀이로 한자를 익히기도 했다.
그런 그가 1944년 콜로라도 대학의 해군 정보학교 일본어 과정에 입교한 것은 징병에 걸리지 않으려는 편법이기도 했다. 그는 이곳에서 1년 동안 일본어만 사용해야 하는 밀폐교육을 마친 뒤 1945년 4월 오키나와 미군사령부의 통역장교로 배치됐다. 밀러의 한자 실력은 한자 투성이였던 1960년대의 한국 신문을 불편 없이 읽을 정도였다.
밀러가 한국 이름 민병갈을 갖게 된 시기는 1960년대 초반이었다. 한국 이름을 갖고 싶었던 그는 당시 가까이 지내던 민병도(閔丙燾) 한은 총재의 성이 자신의 성 ‘밀러’의 첫 발음과 비슷한 것에 착안하여 이를 따르기로 했다. 이름의 마지막 자 ‘갈’(渴)은 자신의 영어 이름 ‘칼’에서 따왔다.
그런데 그가 1979년 한국에 귀화하여 호적 신청을 할 때 본관(本貫)을 정해야 하는 서류상의 문제가 생겼다. 밀러는 자신의 미국 고향의 이름을 따 ‘펜실베이니아 민씨’로 하자고 제안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민병도의 본관인 여흥(驪興)을 따랐다. 그는 이듬해 문중 원로들을 천리포수목원에 초대하여 성대한 종친회를 베풀었다.
천리포와의 첫 인연
민병갈이 천리포에 수목원의 터전을 잡게 된 것은 지극히 우연이었다. 1950년대말 한국은행 고문직에 있었던 그는 여름철이 되면 직장 동료이자 한은 간부였던 송인상(宋仁相·전 재무부 장관)·장기영(張基榮·전 한국일보 사주) 등과 함께 만리포 해수욕장을 찾는 일이 많았다. 한국의 자연과 인심에 푹 빠져 있던 그에게는 해수욕보다 서해의 낙조가 더 큰 매력이었고, 현지 주민과 어울리는 것 또한 큰 즐거움이었다. 그때 이미 한국에 온 지 15년이 넘었던 그의 한국어 실력은 한국인 누구와도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없을 정도였다.
1962년 여름. 예년처럼 만리포 해수욕장을 찾은 민병갈은 이웃에 있는 천리포로 산책을 나섰다가 한 마을 노인으로부터 간절한 부탁 하나를 받았다. 전부터 안면이 있던 그는 과년한 딸의 혼수비용으로 돈이 필요하다며 자신의 야산 6,000평을 사달라고 조르는 것이었다. 민병갈은 처음에는 완곡하게 거절했으나 거듭 부탁하는 노인의 사정이 딱해 보여 돕는 셈치고 그의 야산을 사기로 했다. 만리포 근처에 별장을 갖고 싶었던 그에게는 당시의 화폐 단위로 평당 200환씩, 120만환은 큰 부담이 아니었다. 이렇듯 막연한 생각으로 산 이 땅은 뒷날 18만평 규모의 수목원으로 성장하는 바탕이 됐다.
미국인이 땅을 샀다는 소문이 돌자 많은 땅 주인들이 민병갈을 찾아와 자기 땅도 사달라고 졸랐다. 돈에 별로 구애받지 않던 민병갈은 이듬해부터 조금씩 땅을 사들여 1966년 말에는 소유지가 1만9,000평으로 늘어났다. 1970년에는 해안에서 300m쯤 떨어져 있는 ‘닭섬’이라는 무인도를 사들였다. 닭고기를 지독히 싫어했던 그는 섬 이름을 ‘낭새섬’으로 바꾸는 작명술도 발휘했다. 이 섬에 낭새라는 조류가 서식했던 점에 착안하여 이같이 이름을 지은 것이었다. 당시 국내법으로는 외국인이 땅을 살 수 없었기 때문에 양아들이나 한국인 친지 이름을 빌렸다.
img3L생각 밖으로 땅이 불어나자 민병갈은 천리포 땅에 본격적으로 나무를 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1960년대의 민병갈은 RAS투어와 증권 투자 등 돈벌이에 여념이 없었다. 1970년 식목철을 맞아 민병갈은 천리포에 아담한 자연동산을 꾸밀 생각으로 첫 작업에 들어갔다. 이때 심은 나무들은 재래종 중심의 방풍림과 정원수 정도였다. 그가 처음 사들인 땅은 해풍을 많이 탔기 때문에 바람막이로 천리포에서 많이 자생하는 곰솔을 심었다. 정원수는 주로 꽃나무를 택했다.
그로부터 9년 뒤 한국으로 귀화한 그는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천리포수목원의 초기 구상을 이렇게 회고했다.
“처음에는 2만평 정도의 자연농장을 꾸밀 생각이었습니다. 아담한 한옥을 짓고 주변에는 내가 좋아하는 꽃나무를 많이 심을 작정을 했지요.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나의 식물 지식은 거의 백지 상태여서 어떤 나무를 심어야 좋을지 몰라 사 둔 땅은 버려둔 채 나는 자연 답사에만 전념했습니다. 나무를 심기 시작한 초기에는 목련이나 장미 등 보기 좋은 꽃나무에 집착했는데, 내가 산 땅은 토질이 나빠 꽃나무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이때 민병갈이 천리포 전진기지로 삼은 천리포 집은 서울에서 실어온 낡은 기와집이었다. 남달리 한옥을 좋아했던 그는 서울에서도 기와집에 살고 있었는데 도시계획으로 헐리게 된 한옥 세 채를 천리포에 옮겨 놓았다. 당시 그의 소유지 안에 있던 초가는 지금까지 100년 넘게 보존돼 태안군의 명물로 남아 있다. 현재 천리포수목원에 있는 15채의 한옥은 민병갈의 취향에 따른 것으로, 다섯 채는 옮겨 지은 것이고 나머지는 직원용으로 신축한 것이다. 이들 한옥에는 후박집·목련집 등 나무 이름이 붙어 있다.
천리포에 일단 나무를 심기 시작했지만 난감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나무동산을 꾸밀 만한 조건이 못 되었다. 제대로 된 진입로도 없었고 전화는 물론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토양 조건이었다. 그가 사들인 야산은 척박한 토질에 일부는 황량한 모래밭이었다. 자갈밭을 헤치고 20cm 정도 파면 식목에 부적합한 모래흙이나 염분이 섞인 황토가 나오기 예사였다. 나무의 생장에 적합한 사질 양토가 부족했던 것이다.
강수량이 연평균 1,000mm밖에 안 되고 배수가 잘 안 되는 저지대라는 점도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 당장 급한 것은 식목용 용수 확보였는데 전기가 없으니 급수펌프를 가동시킬 수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울에서 발전기를 들여왔으나 지하수의 수맥을 제대로 찾아 파이프를 묻는 난제가 뒤따랐다. 천리포는 강수량이 적어 지하수 웅덩이가 많지 않았던 것이다. 농사 경험이 많은 인부들의 감각에 의존한 수맥 찾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중장비가 없던 시절이어서 삽과 괭이로 힘겹게 땅을 파내려가도 지하수가 나오지 않아 헛수고로 끝나기가 예사였다.
“절벽 위에 나무를 심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어요. 자갈 투성이의 땅을 파기도 힘들거니와 묘목에 줄 물이 있어야지요. 인부들이 물지게로 동네 우물에서 물을 퍼 날랐지만 쉽게 될 일이 아니었지요. 몇 십 그루를 심다 보면 해가 저물기 예사였어요. 그래도 민병갈 님은 그날 심을 나무의 수를 할당해 기어이 하루 분량을 채우도록 했습니다. 땅거미가 지면 광솔로 만든 횃불을 밝히며 나무를 심었지요.”
당시 인부로 일했던 박재길(朴在吉·천리포식당 주인)의 회고담이다. 천리포 토박이였던 그는 1971년 정식 직원으로 채용돼 11년간 재산관리인으로서 수목원 일을 도왔다. 그런데 천리포에 나무를 심은 첫 해 여름, 인부 몇 사람이 민병갈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 작은 사건이 일어났다. 근처의 학암포 앞바다에 있는 대뱅이섬에서 자생하는 야생 나무를 캐다 그가 거처하는 한옥 근처에 심은 것이다.
민병갈이 1970년 7월에 쓴 수목원 일지를 보면 인부들이 캐온 나무는 후박나무 일곱 그루, 동맥나무 다수(many), 참식나무 한 그루 등 세 가지로 적혀있다. 당시 민병갈은 후박나무 군락지를 훼손했다고 인부들을 크게 나무랐다.
그리고 자생목을 캐다 심는 것은 중대한 자연파괴라고 교육시키고 다시는 그런 일을 못하게 했다. 그런데 몇 해 후 대뱅이섬을 찾은 그는 후박나무들이 모두 목재나 한약재로 잘려 나간 것을 발견하고 더 많이 캐다 심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그가 역정을 냈던 일곱 그루는 그가 머물렀던 소나무집 옆에서 30년 넘게 자라며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1971년 7월 첫 주말. 만리포와 천리포를 잇는 해안에서 희한한 구경거리가 벌어졌다. 대형 미군 트럭 한 대가 물이 덜 빠진 바다를 헤쳐 나가는 보기 드문 장면이었다. 트럭에는 서울에서 가져온 묘목이 가득 실려 있었다. 당시 천리포에는 자동차 길이 나지 않았기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썰물로 수심이 낮아진 바다를 수송로로 이용한 것이다. 간만의 차가 심한 서해안은 썰물 때가 되면 물이 많이 빠져나가 갯벌을 육로로 활용할 수 있었다. 천리포 앞바다는 다행히 갯벌이 단단하여 트럭의 이동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천리포수목원에 대량의 묘목이 반입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미군 트럭에 실려온 나무들은 민병갈의 오랜 산행 친구였던 임업연구소 연구관 조무연(趙武衍·1987년 작고)의 배려로 서울 홍릉에 있던 임업연구소가 기증한 것이었고, 수송편은 민병갈의 교섭으로 미군 공병단에서 지원했다. 특히 이날 ‘나무 할아버지’로 이름났던 김이만(金二萬·1985년 작고)이 홍릉에서 내려와 직접 묘목의 자리를 잡아 주는 등 식목작업을 도와줬다. 이때 심은 재래종 나무들은 외국 수종이 대부분인 천리포수목원에서 ‘1세대 품목’으로 대접받으며 30여년간 잘 자라고 있다.
낭새섬 매입을 계기로 민병갈은 규모를 키워야겠다는 생각으로 주변 야산을 더 사들였다. 추가로 매입한 땅은 1975년까지 10만평이 넘어 소유지가 15만평으로 늘었다. 천리포수목원의 현재 규모 18만평은 1981년에 마무리된 것이다. 그후 불어난 땅은 2000년 2월에 매입한 4,800평뿐이다. 민병갈이 본격적으로 수목원을 구상한 시기는 10만평을 확보한 1970년대 초반이었다. 금요일 오후만 되면 어김없이 천리포로 내려왔던 그는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정자에서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담한 자연농원’을 꿈꾸며 나무를 심었던 민병갈은 나무 가족이 늘자 2년 만에 생각을 바꾸었다. 본격적인 수목원으로 규모를 키우기로 한 것이었다. 제대로 된 수목원 조성을 결심한 그는 전문가들과 함께 자연입지 조사를 한 결과 천리포 일대는 토양은 척박해도 기후 조건이 좋았다. 같은 위도보다 따뜻한 해양성 기후는 다양한 식물들이 자랄 수 있는 좋은 환경이었다. 촌로의 간청에 못 이겨 우연히 산 땅이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췄던 것은 민병갈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운명의 신은 그에게 일찍부터 수목원을 차리도록 점지해 주었던 셈이다.
끝없는 자연학습, 나무 공부
민병갈은 자연탐사와 RAS 관광여행을 하면서 어느 정도 나무에 관한 기초지식을 쌓았다. 미국에 잠시 가 있던 기간을 빼면 천리포에 땅을 마련할 때까지 그는 15년 넘게 한국의 자연을 익혔다. 그러나 그때까지 그가 갖고 있던 나무 지식은 사찰의 스님들로부터 배운 단편적인 것이어서 성에 차지 않았다.
좀더 나무를 알기 위해서는 믿을 만한 지도교사가 필요했다. 이때 그를 도와준 청년이 당시 서울대 임학과에 재학중이던 홍성각(洪性珏·건국대 교수)이었다. 1963년 가을 강원도 오대산에서 밀러를 만난 그는 이창복(李昌福) 서울대 임학과 교수와 조무연 홍릉 임업시험장 연구관을 소개했다. 사제 관계인 이들 세 사람은 그후 민병갈의 단골 산행 파트너이자 나무 선생님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민병갈은 이창복·조무연 등과 어울리면서 막연한 자연공부를 벗어나 확실한 나무공부를 하는 단계로 올라섰다. 그는 이때부터 대학이나 연구기관의 야생식물 탐사에 참여하는 등 현장학습을 하며 국내 식물학계와 지면을 넓혔다. 그러나 한국은행 근무, RAS 사업, 증권 투자 등 세 가지를 한꺼번에 하다 보니 그의 학습에는 큰 진전이 없었다. 실제로 민병갈의 본격적인 나무 공부는 RAS 사업에서 손을 떼고 수목원 조성을 결심한 1970년대 초반에 시작됐다.
민병갈은 천리포 땅이 15만평에 이르던 1975년께 나무공부 수준을 한 단계 더 높였다. 이때는 농원 수준이 아닌 본격적인 수목원으로 규모를 키우기로 결심한 시점이다. 이를 계기로 그가 해오던 현장학습 방법을 수목원 중심의 실용주의로 바꿨다. 식물 탐사에 나설 때는 수목원 직원과 동행했고, 나무를 관찰할 때도 생장환경 등 실제적인 것으로 관점을 모았다. 탐사 지역도 천리포와 자연환경이 비슷한 서해 남부나 남해안 지방을 우선 대상으로 삼고 씨앗 채집이 가능한 가을철을 많이 이용했다.
민병갈 생애에서 가장 기념비적인 식물 탐사는 수목원이 재단으로 출발하기 1년 전인 1978년 봄의 서부 남해안 야생식물 답사 여행이었다. 수목원 직원들과 함께 나선 이 탐사에서 그는 국내외 학계에 보고되지 않았던 감탕나무(Ilex)과의 새로운 식물을 발견하는 획기적 성과를 올렸다.
그가 발견한 신종(新種)은 감탕나무와 호랑가시나무의 자연 교잡(交雜)으로 생긴 것으로 몇 단계의 검증을 거친 결과 전세계적으로 완도에서만 자라는 희귀종이었다. 민병갈은 이 식물의 학명을 ‘Ilex x Wandoensis C. F. Miller’로 정하고 국제학회에 등록했다. 학명에 발견자와 서식지 이름이 들어간 것은 국제규약에 따른 것이다. 한국어 이름은 ‘완도호랑가시’로 정했다.
그후 완도호랑가시는 천리포수목원에서 배양돼 국제 종자교환 프로그램에 따라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완도호랑가시 발견에 크게 고무된 민병갈은 1979년 7월 천리포수목원 원장에 취임한 뒤 해외 학계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수목원의 국제화를 겨냥한 식물원예학 수업에 들어갔다. 수목원이 재단법인으로 출범한 1979년부터 시작된 그의 해외교류 학습은 89년 영국 왕립 원예협회(RHS) 공로메달을 받기까지 11년간 계속됐다. 이 시기는 그에게 나무 전문가로서 명망을 누리면서 수목원을 국제적 수준으로 끌어 올린 성공시대이기도 했다.
민병갈은 한서대·원광대에서 명예 원예학 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식물학자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식물 애호가 정도의 아마추어 수준은 아니며 적어도 원예 전문가 수준은 넘는다. 그가 식물 공부에 쏟은 시간과 정열 그리고 지식의 수준으로 보면 박사라고 해도 모자라지 않았다. 단지 정규 과정을 밟지 않았을 뿐이다. 특히 목련·호랑가시과 등 일부 수종에 관한 연구의 깊이와 독서량은 박사급 수준이라는 것이 주변 학자들의 이야기다.
민병갈은 생전에 입버릇처럼 ‘수목원은 영원한 미완성’이라는 말을 많이 했다. 그의 표현대로 그는 중병이 들어서도 수목원 육성에 정열을 쏟았다. 그의 집착은 배움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타고난 독서광이었던 민병갈은 전문서적 탐독에도 남다른 열성과 이해력을 보였다. 다년간 그의 나무 공부를 지도했던 이창복은 2001년 4월 한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그의 학습열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수많은 제자들을 가르쳤지만 민(閔)원장처럼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나의 저서 ‘대한식물도감’을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 책이 닳아 더 이상 글씨를 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화장실에 갈 때도 책을 들고 가는 것을 봤어요. 당시 40대인데도 젊은 학생들에 못지않은 학습 진도를 보이더군요. 전문서적인데도 읽는 속도와 이해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빨랐어요. 특히 기억력이 뛰어나 까다로운 식물 이름들을 거의 다 외우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민병갈의 비상한 기억력은 2002년 4월13일 그의 장례식에서 공식적으로 화제가 됐다. 그의 오랜 친구였던 미국인 도로 (루터교)목사는 추도사에서 “민 원장은 자신이 키우는 수천여 종의 식물 이름을 거의 다 기억했다. 그것도 한국어 속명, 영어 이름, 라틴어 학명 등 세 가지를 한꺼번에 줄줄 외웠다”고 밝혔다. 일본어 학습 1년만에 통역장교로 발탁될 만큼 어학의 귀재이기도 했던 그는 칠순이 넘어서도 새벽에 일어나 중국어 학습에 열을 올렸다.
국제화로 승부를 걸다
민병갈은 항상 책 속에서 살았다. 그의 서울 연희동 집 서재나 집무실 서가 그리고 수목원 서고에 쌓여 있는 수많은 책들은 그가 얼마나 열심히 식물원예학 관련 서적을 수집하고 읽었는지 잘 설명해 준다. 그는 외국 잡지나 학회지를 통해 항상 해외 식물학계의 출판 정보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영국 신문 ‘파이내셜타임스’의 원예(Gardening) 페이지를 통해 주간 단위로 해외 원예계 동향을 점검하기도 했다. 그는 생전에 세계 최고의 식물학 도서관을 천리포수목원 안에 설립하는 것이 꿈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천리포수목원 본부 건물 2층 사무실로 통하는 계단 입구 벽에는 국제 수목단체로부터 받은 두 개의 명예훈장이 걸려 있다. 하나는 국제수목학회(IDS, International Dendrology Society)가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Arboritum Distinguished for Merit)으로 지정한 기념패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호랑가시학회(HSA, Holly Society of America)가 공인 호랑가시수목원(Official Holly Arboritum)으로 지정한 인증패다.
IDS 기념패는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2000년 4월에 받은 것이고, HSA 인증패는 그보다 1년 전에 미국 이외의 수목원으로는 프랑스에 이어 두번째로 받은 것이다. 국제적 명망을 가진 이 두 개의 상패는 민병갈이 혼신의 힘을 쏟은 국제화 노력의 소산이다.
img4R민병갈은 일찍부터 ‘한국산 나무만으로는 안 된다’ 는 생각에서 해외로 눈을 돌렸다. 1970년대 초부터 그는 해마다 두세 차례 외국으로 나가 선진국 수목원을 견학하며 새 품종과 학술 정보를 수집했다. 유명 식물학자를 찾아가 자문을 구하고 때로는 학술단체의 식물 탐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수목원 직원을 외국 수목원에 파견하여 연수시킨 것도 해외교류 사업의 하나였다. 외국의 단골 교류 상대는 영국의 힐리어수목원과 미국의 롱우드가든이었다.
외국산 묘목과 종자는 1972년부터 들여왔다. 그 이듬해에는 유럽호랑가시 등 10여 종을 추가로 구입하여 외국산 나무의 적응력 키우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민병갈은 끊임없이 해외산 종자를 들여와 천리포수목원의 보유 수종을 늘렸다. 1982년까지 10년 동안 도입한 해외 식물은 60개국 1만1,600여 종에 이르렀다. 천리포수목원이 현재 보유한 수종이 국내산을 포함하여 모두 1만여 종임을 감안하면 수종 확대를 위한 그의 집념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이들 해외산 묘목과 씨앗 중 천리포의 기후와 토양에 적응하여 살아 남은 것은 그 절반도 되지 않았다.
천리포수목원의 야생식물 탐사는 1980년대 후반부터 국제적 수준으로 발전했다. 해외의 유명 수목원과 제휴해 국내 자생식물 합동탐사를 했는가 하면 외국 식물학자와 함께 해외식물 원정 탐사도 했다. 1984∼89년 세 차례 실시한 국내 자생 식물 합동탐사에는 미국 국립 수목원을 비롯하여 홀덴수목원·롱우드가든·모리스수목원 등 미국의 쟁쟁한 수목원 탐사팀이 참여했다.
1977년 초에는 강추위를 무릅쓰고 영국 학자와 일본 큐슈(九州) 남쪽에 있는 섬 아마미오시마(奄美大島)를 찾아 희귀 자생목 다이모포필라(Ilex daimorphophylla, 감탕나무과) 씨앗을 채집했다. 이때 가져온 몇 줌의 씨앗은 그후 영국에서 번식돼 전 세계적으로 보급돼 멸종을 면했다.
민병갈은 국내 자생식물 탐사에 해외 석학과 동행하기도 했다. 그 중 또 한 사람이 스웨덴의 세계적 육종학자 나첼루에스 토르(Natzelues Tor)다. 그는 예테보리대학 교수로 있던 1966년 한국의 자생식물 탐사를 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한국 식물을 많이 알았다. 민병갈은 1997년 그를 초청하여 울릉도 식물탐사를 했다.
이때 토르 교수는 자신이 배양한 희귀종 목련(Magnolia x Gotoeburgensis) 한 그루를 가져와 천리포수목원에 기증했다. 중국의 함박꽃과 일본의 목련을 교배시킨 이 목련은 전 세계적으로 스웨덴·영국·한국 등 세 나라에 각각 한 그루씩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민병갈은 1970년대 초반 한국과 국교가 없던 중공(中共)에서 중국의 자생식물 30여 종의 씨앗을 들여오는 모험까지 했다. 외형상으로는 미국을 경유한 간접수입이었지만 밀수와 다름없었다. 당시의 한 수목원 직원은 미국인 신분이었던 민원장이 미국 중앙정보국(CIA) 요원과의 친분을 이용해 비정상 루트를 통해 씨앗을 극비리에 도입한 것 같다고 추측했다.
서슬 퍼런 군사정권 시대에도 천리포에는 북한 나무 종자가 들어왔다. 1980년대 민병갈의 친구인 영국인 학자 한 사람이 북한 방문길에 가져온 것이었다. 그는 백두산 진달래의 씨앗을 받아와 그 일부를 민병갈에게 선물했다. 정보기관이 이 사실을 알고 수사 대상으로 삼았지만 크게 문제삼지는 않았다.
민병갈은 1990년대 중반부터 해외 수목원과의 개인적 친분 관계를 활용해 수목 관련 국제회의를 여러 차례 유치했다. 1997년 4월에는 88개 회원국 809개 수목원이 가입된 국제목련학회(MSI, Magnolia Society International) 연차총회를 서울에서 개최했고, 98년 5월에는 HSA 총회를 천리포수목원에서 개최하여 세계의 유력 수목원 관리자들에게 한국의 자연과 식물을 소개했다. HSA는 미국 수목원이 주축을 이룬 범세계적 학술친목 단체다. 민병갈은 1998년 4월 IDS 연차총회를 유치한 것을 매우 자랑스러워했다.
img5L민병갈이 수목원의 국제화를 위해 마지막 정열을 쏟은 사업은 종자목록(Index Seminum) 발행을 통한 다국간 종자 교류 프로그램에 적극 참여하는 일이었다. 천리포수목원은 1978년부터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98년까지 36개국 140개 기관과 교류 관계를 맺고 다양한 품종의 나무를 수집하는 성과를 거뒀다.
그런데 해외 학술팀과의 제휴나 종자 교환 사업 등 민병갈의 국제화 노력에 대해 곱지 않게 보는 시선도 있었다. 한국의 귀중한 토종식물을 해외로 유출한다는 문제가 있는가 하면, 그 일부는 변종으로 배양돼 한국으로 역수출돼 국익을 해친다는 것이었다. 1997년 한 공영 TV가 천리포수목원의 종자 교환 사업을 유전자원 유출이라고 문제삼자 민병갈은 ‘우물안 개구리’라는 말로 불쾌감을 나타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원로 식물학자 이창복은 2000년 4월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의 토종 식물 씨앗을 외국에 보내 번식시키는 일은 격려의 대상이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식물학자 입장에서도 종자 유출 논리에 찬성할 수 없습니다. 더 많은 토종 식물을 내보내야 하고 더 많은 외국 희귀 식물을 들여와야 해요. 그래야 우리나라도 식물 선진국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자생식물을 세계에 가장 많이 소개한 사람은 바로 민병갈입니다. 세계 식물지도에 한국이 편입된 것은 전적으로 민원장의 공로입니다. 국가간 종자 교환은 멸종 위기에 처한 자생식물 보존을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내가 좋아” 평생을 나무에 바친 집념과 열정
천리포수목원에는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두 개의 간판 수종(樹種)이 있다. 450여 종의 목련(mag nolia)과 370여 종의 호랑가시(Ilex)가 그것이다. 수집된 종류는 둘 다 세계 최대 규모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천리포수목원에서는 목련이 4월의 꽃이 아니다. 그 찬란한 빛의 향연은 4월에 절정을 이루지만, 봄이 지나고 겨울이 와도 이곳에서는 목련의 우아한 꽃무리가 질 날이 없다. 세계 각지에서 들여온 온갖 진귀한 품종들이 교대로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태산목의 교배종인 리틀 잼은 여름부터 초겨울까지 꽃이 핀다.
크리스마스 장식용으로 인기 있는 호랑가시 또한 천리포의 명물이다. 전 세계적으로 400여 종이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민병갈은 그 중 90%이상을 천리포에 모아 놓았다. 호랑가시는 4속(屬)으로 이뤄진 감탕나무과의 대표적인 속이다. 주로 난대성 기후에서 자라며 상록 및 낙엽성 두 가지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종은 대팻집나무·꽝꽝나무·호랑가시나무·먼나무·감탕나무 등 5가지로 알려졌으나 민병갈이 1978년 완도호랑가시를 발견하여 그 종류가 늘었다.
민병갈이 80세의 고령으로 중환이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정부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국가 차원의 서훈이 있어야 한다는 의견이 청와대와 산림청 일각에서 제기됐다. 그런데 정부가 중량급 훈장을 수여하기로 결정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그 상훈의 성격이 문제였다. 그가 받은 것은 뜻밖에도 금탑산업훈장이었다. 서양인으로는 최초로 귀화하여 한국의 자연보호에 헌신했고, 국제적 수목원을 육성한 공로만으로도 민병갈은 문화훈장의 대상이었다. 더구나 그는 한국의 식물을 세계에 알려 세계 식물지도에 한국을 편입시키는 학술적 공헌도 했다. 그런데 정부는 그를 조림사업가로 착각했던 모양이다.
2002년 3월11일 민병갈은 병약한 몸으로 청와대를 찾아가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금탑훈장을 목에 걸어준 김대통령은 잠시 민병갈과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당시 김대통령은 차남 김홍업의 비리 문제로 심기가 매우 불편한 때문이었는지 별 말이 없었다.
훈장 수여식에 배석했던 미국인 의사 인요한의 말에 따르면 김대통령이 수목원을 차린 동기를 묻자 민병갈의 답변은 “내가 좋아서”라는 한 마디였다고 한다. 그는 그 이상 할 말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의 짧은 말은 평생을 바쳐 나무를 사랑하고 키운 그의 집념과 열정을 가장 의미심장하게 함축한 말이었다.
민병갈은 2002년 3월 미국 프리덤 재단(Freedo ms Foundation)으로부터 평화와 자유 그리고 민주주의 실현에 헌신한 공로로 2002년도 미국 우정의 메달 수상자로 결정됐다. 그러나 그는 시상일을 19일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프리덤 재단은 4월27일 필라델피아의 래디슨 호텔에서 개최된 시상식에 고인의 여동생 준 맥데이드(June MacDade)를 초청하여 대리 수상하도록 했다.
나무는 민병갈에게 하나의 신앙이었다. 나무를 하나의 생명체로 보고 그 자체를 존엄의 대상으로 삼았다. 만년에 그는 원불교 신도가 됐지만 그의 마음 속에 신앙처럼 항상 자리잡고 있는 것은 나무였다. 그는 꿈을 꾸어도 나무 꿈을 꾸는 희귀한 나무광이었다. 1980년대 수목원 직원으로 일했던 노일승은 천리포수목원의 원장 숙소에서 한밤중에 민원장이 우는 목소리로 잠을 깨우는 바람에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빨리 정자집에 가 봐. 회화나무가 상처를 입었대.”
“회화나무가 밤중에 왜 다치죠?”
“꿈에 나타나 아프다고 울었어.”
자연은 생산자, 인간은 파괴자, 동물은 소비자
어처구니 없던 노일승은 민원장을 달래 잠자리에 들게 했다. 그런데 문제의 회화나무는 그로부터 10여 년 후 두 차례 큰 재난을 당했다. 2001년 여름 태풍 프라피룬을 맞아 뿌리가 드러날 만큼 몸통이 휘는 피해를 입더니 얼마 뒤에는 정자집의 화재로 불에 그슬렸다. 집안에 심으면 고명한 선비가 나온다 하여 우리나라에서는 물론 서양에서도 학자나무(Scholar Tree)로 사랑받는 이 나무는 민병갈에게 특별한 사연이 있었다. 그가 한국은행 재직 때 은행 뜰에서 자라고 있던 회화나무의 작은 가지 하나를 가져와 접붙여 키운 것이기 때문이다. 천리포수목원에서 하나뿐인 이 나무는 민원장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민원장은 나무가 아프다는 꿈을 꾸고 눈물을 흘릴 만큼 마음이 여렸지만 나무를 보호하는 데는 무섭게 엄격했다. 그는 사무실 안에서 두 사람만 눈에 띄어도 수목원 직원은 항상 나무와 함께 있어야 한다고 소리치며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어떤 구실로든 나무를 훼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수목원 직원들은 나무의 모양을 위해 가지를 친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한번은 한 직원이 지나는 사람을 거추장스럽게 하는 통행로의 나뭇가지 하나를 잘라 냈다가 현장에서 해고당했다. 이튿날 민원장은 가지를 잃은 나무를 찾아가 “나무야,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천리포수목원에서는 조경이라는 정원 개념이 통하지 않는다. 어떤 나무든 있는 그대로, 자라는 그대로 놔둬야 한다는 것이 민병갈의 지론이었다. 그래서 수목원 조성 초기에 무계획적으로 심어진 나무들은 옮겨지는 일이 없이 비좁게 자라는 경우가 많다. 나무가 무성해지면 간벌해야 하는 데도 민원장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가위질로 나무의 모양을 내는 일본식 정원 가꾸기를 아주 싫어했다. 그가 해외 학회지에 기고한 글을 보면 자연상태로 나무를 키우는 한국식 정원이 가장 이상적이라는 주장이 자주 눈에 띈다. 나무는 나무(Tree is Tree)라는 것이다. 그는 “천리포수목원은 나무를 위한 수목원이지 사람을 위한 수목원이 아니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그래서 18만평의 수목원에 철책을 치고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했다.
민병갈의 나무지상주의는 천리포수목원의 비인간화 문제를 낳기도 했다. 일곱 군데로 흩어진 경내를 철망으로 에워싸는 바람에 마을 사람들의 통행을 어렵게 했다. 말년에는 본원 옆으로 지나는 도로 포장을 반대하여 주민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개발이라는 말을 가장 싫어했던 그는 ‘자연은 생산자, 인간은 파괴자, 동물은 소비자’라는 독특한 철학을 갖고 있었다.
민병갈은 나무뿐만 아니라 생태계 보호에도 각별히 신경썼다. 수목원의 본원 안에는 2,000여 평의 연못과 1,000여 평의 논이 있는데 민원장이 정성을 다해 생태계를 보존한 곳이다. 나무에 줄 물을 담아두기 위해 만든 이 연못은 시간이 흐르면서 철새들의 낙원으로 바뀌었다. 민병갈은 뜻밖에 이곳을 찾아든 흰뺨검둥오리·청호반새·해오라기 등 물새 보호에 어버이 같은 정성을 쏟았다. 특히 흰뺨검둥오리가 새끼를 치면 수목원 직원들에게 연못 금족령을 내리고 큰 소리도 내지 못하게 했다. 어미가 새끼들을 데리고 나들이를 나설 때면 망원경으로 오리 가족을 관찰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수련과 창포가 아름답게 떠 있는 연못은 철새들만의 낙원이 아니다. 그 밑에는 온갖 민물고기들이 서식한다. 이들 물고기는 철새들의 먹이만 안 된다면 천수를 다할 때까지 살 수 있다. 사람의 손을 타지 않기 때문이다. 몇 해 전에는 홍수가 나서 물이 넘치는 바람에 수많은 민물장어들이 논으로 흘러들어갔다. 수목원 직원들은 탐스럽게 자란 이들 장어를 보고 군침을 삼켰지만 민원장의 엄명에 따라 모두 연못으로 되돌려보냈다.
본부 건물과 큰 연못 사이에는 대여섯 마지기의 논이 있는데, 민병갈은 이 논을 문접옥답으로 생각하고 1970년대부터 농부 출신을 고용하여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짓도록 했다. 이곳에 농약이나 비료를 쓰는 것은 상상도 못한다. 그래서 소출은 많지 않지만 민병갈은 그 이상의 소득을 챙겼다. 여름이면 그가 좋아하는 개구리 울음 소리를 즐길 수 있고, 수확기에 들어서면 메뚜기 떼를 구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못과 논 사이의 작은 농로에는 민병갈이 만들어 놓은 두 개의 명물이 지금도 남아 있다. 하나는 돌로 조각한 개구리상이고, 또 하나는 연못의 오리들이 새끼와 함께 논으로 나들이하도록 만들어준 오리길이다. 민병갈은 여름 밤에 혼자 논두렁에 나와 개구리 울음 소리를 듣는 것을 즐겼다. 그는 “죽으면 개구리가 되고 싶다”고 할 만큼 개구리를 좋아했다.
천리포수목원에서는 송충이도 해충 취급을 받지 않는다. 민원장이 산새들의 먹이라고 잡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경내의 오솔길 산책중 어쩌다 거미줄이라도 건드리게 되면 민병갈은 깜짝 놀라 ‘미안하다’는 사과의 말을 하고 길을 돌아갔다. 그가 거처하는 수목원의 후박집 추녀에는 작은 새장 하나가 걸려 있다. 집 주인이 해외여행길에 사와 달아놓은 것이다. 민병갈은 서울에서 내려올 때마다 새장에 먹이를 넣어주는 일을 잊지 않았다.
죽어서는 나무의 거름이 되고파
민병갈은 인간과 인간이 꾸민 생활양식도 생태계의 한 부분으로 생각한 것 같다. 촌로(村老) 등 한국인의 원초적인 모습을 좋아하고 초가 등 한국의 옛스러운 풍물을 사랑하는 것이 이를 말해 준다. 한번은 충남 주포에 ‘ ’씨라는 희귀한 성(姓)을 가진 문중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직접 찾아가 집안 내력을 묻는 등 큰 관심을 보였다. 그가 남달리 초가를 좋아하여 수목원 경내에 있던 폐가를 보존하고 해마다 지붕을 가는 이유도 알고 보면 인간의 생활 양식을 생태계의 한 부분으로 보는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민병갈은 자신이 죽어서도 생태계의 한 부분으로 남기를 바랐다. 1991년 가을 필자는 ‘중앙경제신문’을 위한 인터뷰에서 그와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당시 그는 70세였다.
― 돌아가시면 한국에 묻히시겠습니까.
“묻히다니요? 땅이 아까워요. 그럴 땅이 있으면 나무를 심어야지요.”
― 아니면 화장을 원하시나요?
“물론이죠. 그러나 뼈도 묻어서는 안 돼요.”
― 그러면 뼛가루가 천리포 앞바다에 뿌려지기를 바라시겠네요?
“그것도 안 돼요. 나무의 거름으로 써야지요.”
농담인 줄 알았으나 민병갈은 웃지도 않고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11년 뒤 세상을 떠난 그는 자신의 뜻대로 화장이 안 되고 천리포수목원 경내에 매장됐다. 그의 양자 등 주변사람들이 원했기 때문이다.
민병갈은 말년에 들어 “한국과 한국인이 변했다”고 씁쓸해했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가 ‘소란한 대낮의 나라’로 바뀐 것이 서글펐던 것이다. 공손하고 어질기만 했던 한국 남성은 공공장소에서 무례하고 시끄러운 언행을 일삼는가 하면, 차분하고 다소곳했던 한국 여성은 대중 앞에서 수다를 떨고 흐트러진 자세를 보이는 것이 그에게는 실망스럽기만 했다. 어쩌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젊은 여성이 단정하지 못한 차림으로 껌을 씹는 모습을 보면 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img6R팔순에 접어든 민병갈은 심신이 쇠약해졌는지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애정이 옛날 같지 않았다. 타고난 보수적 기질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그의 의식 세계는 변하는 시대의 흐름을 타지 않고 항상 멈춰 있었다. 1950∼60년대 칼 밀러의 가슴에 새겨진 순박한 한국인의 인상이 2000년대 민병갈의 뇌리에 그대로 이어진 것은 그를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민병갈이라면 돈 많은 서양인으로 해안에 거대한 정원을 꾸며 놓고 자연을 즐기며 유유자적하게 살다 간 행복한 부르주아로 생각한다. 그러나 10년 넘게 그를 가까이에서 보며 그의 주변사람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그는 마지막까지 치열한 인생을 살았던 의지의 인간이었다. 그는 당초부터 자기 생전에 이룰 수 없는 ‘영원한 미완성’을 시작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고, 그 미완성 작품을 이 땅에 남겨 놓았다. 화가 전창운(全昌雲)은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이 좋다고 눌러앉아 살다 말년에 이르면 수집품들을 고스란히 본국으로 챙겨간다면서 ‘민선생은 가져갈 수 없는 것만 수집한 큰어른’이었다고 고인을 추모했다.
재단법인 천리포수목원은 민병갈 사망후 후임 이사장에 문국현(文國鉉) 유한킴벌리 사장을 추대하고 후원회와 산림청의 도움을 받아 고인의 ‘영원한 미완성 사업’을 잇는 삽질을 오늘도 계속하고 있다.
# by | 2009/02/26 23:31 | Eye to the realty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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