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3월 24일
아프간의 역사(퍼온글)
아프가니스탄 공화국(Islamic Republic of Afganistan).
북부 평원지대는 농업지대고, 힌두쿠시 산맥으로 구성된 중부 산악지대와 리게스탄 사막을 포함한 남서부 고원지대로 나뉘어져 있다. 여러 광물 자원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교통 환경이 불편하여 거의 개발되지 못했으며 북부 평원지대의 천연가스만 개발되어 있다. 현재는 대규모 양귀비 재배로 아편 수출이 이 나라의 주된 수입원이다. 척박한 환경 탓에 양귀비 이외의 작물 재배가 어려워 양귀비 재배를 근절할 방법이 없다. 오죽하면 이 나라의 양귀비 재배를 허용하고 모르핀 등 약품 제조로 유도하자는 의견까지 나오고 있겠는가.
국민의 절반 가량은 파슈툰 족(45%). 그외 타지크인(25%), 하자라인(10%), 우즈베크인(8%), 투르크멘인 등이 국민을 구성하고 있다. 공용어는 파슈투어고, 다리어가 1/3, 북부 지역에는 알타이어에 속하는 우즈베크어와 투르크멘어도 사용하고 있다. 국민의 85%는 수니파 이슬람교도이고 15%는 시아파 이슬람교도다.
아프가니스탄 지역은 BC 6세기에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지배 아래 있었다. BC 4세기에 알렉산드로스(알렉산더)가 이 땅을 점령했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셀레우코스 왕조가 일부를, 인도 북부의 마우리아 제국이 나머지 땅을 통치했다. 그 뒤에는 박트리아 왕국의 영토가 되었다. BC 2세기에는 인도 쿠샨 왕조의 카니슈카 왕에게 정복되었다. 불교가 전파되었고, 불교는 오랫동안 영향을 주었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나 현장의 대당서역기에도 이 곳의 불교 이야기가 나온다. 특히 바미얀 국의 신앙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는데, 이곳에 그 유명한 바미얀 석불이 있었다. 현장의 대당서역기에는 그 불상에 대해서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이 석상은 2001년 탈레반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후 에프탈 왕조와 사산조 페르시아의 지배 아래 있을 때 힌두교가 전파되었다고 한다. 힌도교는 불교의 전파와 더불어 서서히 전파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쿠샨 왕조의 예술 양식에도 힌두교적인 흔적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힌두교도들은 아직도 남아있다. 탈레반은 이들 힌두교도들도 극렬 탄압 중이다. 힌두교도들은 힌두교도라는 표식을 붙이고 다녀야 한다.
870년경 이슬람 사파르 왕조 시대에 이슬람이 전파되어 이슬람교를 믿게 되었다. 1219년에 몽골에게 점령되었고 몽골 제국이 붕괴된 후에는 인도 무굴 제국과 페르시아 사파위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1700년대 초에 와서 페르시아 군주 나데르 샤에 의해서 무굴 제국의 영향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나데르의 경호대장이었던 아흐마드 칸 아브달리가 아흐마드 샤 두라니라는 이름으로 아프가니스탄 지역을 차지하여 독자 왕국으로 탄생했다.
그러나 1722년 두라니가 죽은 후 부족들의 불화와 영국, 러시아의 음모로 왕국은 붕괴되어 버렸다. 영국은 이 지역을 식민지로 만들고 싶어했으나 끊임없는 항쟁을 통해 독립을 유지했다. 3차례의 전쟁이 있었다. (1839~1842, 1878~80, 1919)
1919년 왕국으로 출발한 아프가니스탄은 1930년대부터 안정된 정치가 실시되었으나 1973년 국왕 외유 중에 국왕의 사촌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났고 그 반동 여파로 좌파 혁명이 일어나 군주제를 종식시켰다. 공화국이 탄생했다. 1977년 좌파정당 PDPA(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의 온건파 Parcham(파르캄)파와 급진파 Khalq(칼크)파는 1978년 정권을 잡자 곧 분열했다. 또한 맑시즘에 입각한 개혁 때문에 농촌에서는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1979년에 좌익 정권을 수호하기 위해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 파병을 실시했다. 반군은 PDPA 정권을 무력화시키며 게릴라 전을 감행해 소련 군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이 시기에 수백만 명의 국민들이 파키스탄과 이란으로 망명했다. 수렁에 빠진 소련 군은 1988년 5월부터 철군하기 시작했다. 이 전쟁의 여파로 소련은 해체되고 만다.
이후 아프가니스탄은 정권을 둘러싼 길고 긴 내전에 돌입한다.
아프가니스탄 내전 (1989년 ~ 1992년) - 소련군 철수 완료(1989) PDPA 정권과 무자헤딘 간의 내전 종식 (2백만 명의 사망자와 5백만 명의 난민 발생...)
아프가니스탄 내전 (1992년 ~ 1996년) - 무자헤딘 간의 내전 끝에 탈레반 집권
아프가니스탄 내전 (1996년 ~ 2001년) - 탈레반 정권 시기의 내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2001년) - 9.11 테러로 인한 미국의 침공으로 탈레반 정권 붕괴
탈레반이 나왔다. 탈레반은 1994년 10월, 2만 5000여 명의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아프가니스탄 남부 칸다하르에서 결성한 수니파 무장 이슬람 정치조직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들은 9.11 테러를 주도한 오사마 빈 라덴과 그의 조직 알 카에다를 옹호하고 있는데, 같은 조직은 아니다. 이들은 근본주의 이슬람교도로 인류문화유산인 바야마 불상을 파괴해버리거나 여성의 인권을 극도로 제한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고 있는 과격파다.
1992년 공산 정권으로부터 수도 카불을 탈환한 사람은 Ahmad Shah Massoud(아마드 샤 마수드) 장군이었다. 타지크인 출신으로 소련 항쟁에서 가장 탁월한 전략가로 평가받은 사람이다. 마수드 장군은 1973년 공산 정권 수립 후 1975년 파키스탄으로 망명했다가 이슬람에 대한 탄압이 극심해지자 1978년 고향 판지시르에 잠입하여 게릴라 전을 펼치기 시작한다. 이때 나이가 26.
소련 군은 이 탁월한 전략가에 의해 극심한 피해를 입고 대규모 작전을 통해 마수드 검거에 나서지만 그때마다 농락만 당하고 만다. 마수드가 북부동맹(정식 명칭은 아프가니스탄 구국 이슬람연합전선 United Islamic Front for the Salvation of Afghanistan, UIF)을 이끌며 아프가니스탄의 동북부에서 소련 군을 궁지에 몰아넣고 있을 때, 아프가니스탄 남부에는 이슬람 당이라는 조직이 미국의 지원 아래 성장하고 있었다.
이슬람당과 마수드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자생 게릴라 조직을 이끄는 마수드가 보기에는 미국의 지원을 업은 이슬람당도 외세이기는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이 이슬람당이 훗날의 탈레반을 탄생시키는 모체다.
마수드 장군은 국방장관이 되었다. 내전은 끝나지 않았다. 이 시기의 아프가니스탄의 정권은 하도 복잡해서 정리하기도 쉽지 않다. 이 혼란기에 무자헤딘 단체들은 지방 군벌화 하여 국민들을 괴롭히는 집단이 되었다. 이때 사우디아라비아의 갑부 오사마 빈 라덴이 아프가니스탄 정국에 개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4년 빈 라덴의 지원을 받아 결성된 탈레반은 산적떼나 다름없는 무자헤딘들을 격파하고 정국의 태풍으로 등장하게 된다.
빈 라덴은 소련 침공 시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가 소련 군과 싸웠기 때문에 그의 명성은 탈레반 결성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이 무렵 미국이 빈 라덴을 직접 지원했다는 말도 있으나, 이에 대해서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1991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미국이 쿠웨이트 탈환에 나서며 사우디 아라비아 안에 미군 기지가 들어섰을 때 오사마 빈 라덴은 미국을 비난하며 미국과의 밀월 관계를 끝냈다. 1991년 빈 라덴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아진 사우디 아라비아를 떠나 수단으로 이주했다. 1993년 빈 라덴은 소말리아에서 미군을 테러했으며, 미국은 수단에 있던 빈 라덴을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빈 라덴은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가 탈레반을 결성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들 탈레반의 목표는 오직 정권 장악에 있을 뿐이다. 그를 위해서는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들은 과격파 회교주의자로 비이성적인 집단에 불과하다. 빈 라덴이나 탈레반 지도자 오마르가 소련 군과 싸웠다고 해도 마수드 장군의 위업에 대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이 정권을 잡았을 때 행한 인권 침해는 끔찍한 수준이었다. 텔레비전 시청도 금지되었고, 여자들이 다니는 학교는 폐쇄되었으며, 원시적인 수준의 이슬람 형벌이 부활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타 종교에 대한 탄압도 극심하게 행해졌다.
강정구 교수는 탈레반을 우리나라의 임시정부와 비교했으나, 이는 말도 되지 않는 비교다. 탈레반은 1994년에 결성되었으며 소련 군과 싸운 집단도 아니다. (다만 탈레반의 지도자로 알려진 오마르는 소련 군과 싸운 인물이다. 그는 그 전쟁에서 한쪽 눈을 잃었다고 전해진다.) 더구나 이들은 민간인을 납치해서 자신들의 요구 조건을 관철하려는 파렴치한 집단이다. 김구 주석의 임시정부가 민간인 테러를 일삼았던가? 탈레반의 이런 행각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다.
마수드 장군이 훗날 탈레반을 비난한 말이 있다.
"여자와 아이들을 죽이는 것을 어찌 지하드라 부를 수 있는가?"
탈레반은 원래 그런 집단이었던 것이다. 탈레반의 입장에서 눈의 가시였던 마수드 장군은 9.11 테러 직전에 탈레반에 의해서 제거되었다. 자살 특공대가 알 자지라 방송사 기자로 위장한 뒤 카메라에 넣어둔 폭탄을 폭발시킨 것이다. 판지시르의 사자라 불렸던 아프가니스탄의 전쟁 영웅은 동족의 손에 의해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마스드 장군에 대해서 좋은 트랙백이 걸렸네요. ◆진짜 '이슬람 전사'를 아시나요?[클릭])
본래 학교선생님이 되는 것이 꿈이었던 마수드 장군은 많은 학교들을 건립했는데, 이또한 근본주의자들과 충돌하는 이유가 되었다. 그가 세운 학교는 남녀공학이어서 공격받은 것이라고 한다. 마수드 장군은 그런 반발을 코웃음쳤다고 한다.
"조국을 재건하려면 여자도 배워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라면서.
마수드 장군의 문제와 빈라덴과 탈레반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런 반론도 들어와 있다. 여러가지 자료로 보아 상당한 근거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아프가니스탄 문제에 대해 더 깊은 관심이 있는 분들은 들러보면 좋겠다.
CIA-마수드, 빈 라덴-탈리반 관계 [클릭] sonnet님의 포스팅에 링크
현재 아프가니스탄의 대통령인 Hamid Karzai(하미드 카르자이)는 1957년생으로 이후이 부족의 족장이기도 하다. 그는 인도 유학생 출신으로 소련 군과 맞서 싸웠으며, 초기에는 탈레반과 사이가 좋았으나 탈레반의 무분별한 원칙주의에 반발하게 되었다. 그 대가로 탈레반은 1999년에 그의 부친을 암살했다. 그는 탈레반과 투쟁에 나섰으며 2001년 미군의 지지 아래 과도정부의 수반에 오를 수 있었다. 당시 그의 입각은 임시방편의 얼굴마담에 불과한 것이라고 했으나 아직까지는 정치력을 발휘해 아직까지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북부 평원지대는 농업지대고, 힌두쿠시 산맥으로 구성된 중부 산악지대와 리게스탄 사막을 포함한 남서부 고원지대로 나뉘어져 있다. 여러 광물 자원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교통 환경이 불편하여 거의 개발되지 못했으며 북부 평원지대의 천연가스만 개발되어 있다. 현재는 대규모 양귀비 재배로 아편 수출이 이 나라의 주된 수입원이다. 척박한 환경 탓에 양귀비 이외의 작물 재배가 어려워 양귀비 재배를 근절할 방법이 없다. 오죽하면 이 나라의 양귀비 재배를 허용하고 모르핀 등 약품 제조로 유도하자는 의견까지 나오고 있겠는가.
국민의 절반 가량은 파슈툰 족(45%). 그외 타지크인(25%), 하자라인(10%), 우즈베크인(8%), 투르크멘인 등이 국민을 구성하고 있다. 공용어는 파슈투어고, 다리어가 1/3, 북부 지역에는 알타이어에 속하는 우즈베크어와 투르크멘어도 사용하고 있다. 국민의 85%는 수니파 이슬람교도이고 15%는 시아파 이슬람교도다.
아프가니스탄 지역은 BC 6세기에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지배 아래 있었다. BC 4세기에 알렉산드로스(알렉산더)가 이 땅을 점령했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셀레우코스 왕조가 일부를, 인도 북부의 마우리아 제국이 나머지 땅을 통치했다. 그 뒤에는 박트리아 왕국의 영토가 되었다. BC 2세기에는 인도 쿠샨 왕조의 카니슈카 왕에게 정복되었다. 불교가 전파되었고, 불교는 오랫동안 영향을 주었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나 현장의 대당서역기에도 이 곳의 불교 이야기가 나온다. 특히 바미얀 국의 신앙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는데, 이곳에 그 유명한 바미얀 석불이 있었다. 현장의 대당서역기에는 그 불상에 대해서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이 석상은 2001년 탈레반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후 에프탈 왕조와 사산조 페르시아의 지배 아래 있을 때 힌두교가 전파되었다고 한다. 힌도교는 불교의 전파와 더불어 서서히 전파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쿠샨 왕조의 예술 양식에도 힌두교적인 흔적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힌두교도들은 아직도 남아있다. 탈레반은 이들 힌두교도들도 극렬 탄압 중이다. 힌두교도들은 힌두교도라는 표식을 붙이고 다녀야 한다.
870년경 이슬람 사파르 왕조 시대에 이슬람이 전파되어 이슬람교를 믿게 되었다. 1219년에 몽골에게 점령되었고 몽골 제국이 붕괴된 후에는 인도 무굴 제국과 페르시아 사파위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1700년대 초에 와서 페르시아 군주 나데르 샤에 의해서 무굴 제국의 영향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나데르의 경호대장이었던 아흐마드 칸 아브달리가 아흐마드 샤 두라니라는 이름으로 아프가니스탄 지역을 차지하여 독자 왕국으로 탄생했다.
그러나 1722년 두라니가 죽은 후 부족들의 불화와 영국, 러시아의 음모로 왕국은 붕괴되어 버렸다. 영국은 이 지역을 식민지로 만들고 싶어했으나 끊임없는 항쟁을 통해 독립을 유지했다. 3차례의 전쟁이 있었다. (1839~1842, 1878~80, 1919)
1919년 왕국으로 출발한 아프가니스탄은 1930년대부터 안정된 정치가 실시되었으나 1973년 국왕 외유 중에 국왕의 사촌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났고 그 반동 여파로 좌파 혁명이 일어나 군주제를 종식시켰다. 공화국이 탄생했다. 1977년 좌파정당 PDPA(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의 온건파 Parcham(파르캄)파와 급진파 Khalq(칼크)파는 1978년 정권을 잡자 곧 분열했다. 또한 맑시즘에 입각한 개혁 때문에 농촌에서는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1979년에 좌익 정권을 수호하기 위해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 파병을 실시했다. 반군은 PDPA 정권을 무력화시키며 게릴라 전을 감행해 소련 군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이 시기에 수백만 명의 국민들이 파키스탄과 이란으로 망명했다. 수렁에 빠진 소련 군은 1988년 5월부터 철군하기 시작했다. 이 전쟁의 여파로 소련은 해체되고 만다.
이후 아프가니스탄은 정권을 둘러싼 길고 긴 내전에 돌입한다.
아프가니스탄 내전 (1989년 ~ 1992년) - 소련군 철수 완료(1989) PDPA 정권과 무자헤딘 간의 내전 종식 (2백만 명의 사망자와 5백만 명의 난민 발생...)
아프가니스탄 내전 (1992년 ~ 1996년) - 무자헤딘 간의 내전 끝에 탈레반 집권
아프가니스탄 내전 (1996년 ~ 2001년) - 탈레반 정권 시기의 내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2001년) - 9.11 테러로 인한 미국의 침공으로 탈레반 정권 붕괴
탈레반이 나왔다. 탈레반은 1994년 10월, 2만 5000여 명의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아프가니스탄 남부 칸다하르에서 결성한 수니파 무장 이슬람 정치조직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들은 9.11 테러를 주도한 오사마 빈 라덴과 그의 조직 알 카에다를 옹호하고 있는데, 같은 조직은 아니다. 이들은 근본주의 이슬람교도로 인류문화유산인 바야마 불상을 파괴해버리거나 여성의 인권을 극도로 제한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고 있는 과격파다.
1992년 공산 정권으로부터 수도 카불을 탈환한 사람은 Ahmad Shah Massoud(아마드 샤 마수드) 장군이었다. 타지크인 출신으로 소련 항쟁에서 가장 탁월한 전략가로 평가받은 사람이다. 마수드 장군은 1973년 공산 정권 수립 후 1975년 파키스탄으로 망명했다가 이슬람에 대한 탄압이 극심해지자 1978년 고향 판지시르에 잠입하여 게릴라 전을 펼치기 시작한다. 이때 나이가 26.
소련 군은 이 탁월한 전략가에 의해 극심한 피해를 입고 대규모 작전을 통해 마수드 검거에 나서지만 그때마다 농락만 당하고 만다. 마수드가 북부동맹(정식 명칭은 아프가니스탄 구국 이슬람연합전선 United Islamic Front for the Salvation of Afghanistan, UIF)을 이끌며 아프가니스탄의 동북부에서 소련 군을 궁지에 몰아넣고 있을 때, 아프가니스탄 남부에는 이슬람 당이라는 조직이 미국의 지원 아래 성장하고 있었다.
이슬람당과 마수드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자생 게릴라 조직을 이끄는 마수드가 보기에는 미국의 지원을 업은 이슬람당도 외세이기는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이 이슬람당이 훗날의 탈레반을 탄생시키는 모체다.
마수드 장군은 국방장관이 되었다. 내전은 끝나지 않았다. 이 시기의 아프가니스탄의 정권은 하도 복잡해서 정리하기도 쉽지 않다. 이 혼란기에 무자헤딘 단체들은 지방 군벌화 하여 국민들을 괴롭히는 집단이 되었다. 이때 사우디아라비아의 갑부 오사마 빈 라덴이 아프가니스탄 정국에 개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4년 빈 라덴의 지원을 받아 결성된 탈레반은 산적떼나 다름없는 무자헤딘들을 격파하고 정국의 태풍으로 등장하게 된다.
빈 라덴은 소련 침공 시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가 소련 군과 싸웠기 때문에 그의 명성은 탈레반 결성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이 무렵 미국이 빈 라덴을 직접 지원했다는 말도 있으나, 이에 대해서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1991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미국이 쿠웨이트 탈환에 나서며 사우디 아라비아 안에 미군 기지가 들어섰을 때 오사마 빈 라덴은 미국을 비난하며 미국과의 밀월 관계를 끝냈다. 1991년 빈 라덴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아진 사우디 아라비아를 떠나 수단으로 이주했다. 1993년 빈 라덴은 소말리아에서 미군을 테러했으며, 미국은 수단에 있던 빈 라덴을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빈 라덴은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가 탈레반을 결성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들 탈레반의 목표는 오직 정권 장악에 있을 뿐이다. 그를 위해서는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들은 과격파 회교주의자로 비이성적인 집단에 불과하다. 빈 라덴이나 탈레반 지도자 오마르가 소련 군과 싸웠다고 해도 마수드 장군의 위업에 대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이 정권을 잡았을 때 행한 인권 침해는 끔찍한 수준이었다. 텔레비전 시청도 금지되었고, 여자들이 다니는 학교는 폐쇄되었으며, 원시적인 수준의 이슬람 형벌이 부활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타 종교에 대한 탄압도 극심하게 행해졌다.
강정구 교수는 탈레반을 우리나라의 임시정부와 비교했으나, 이는 말도 되지 않는 비교다. 탈레반은 1994년에 결성되었으며 소련 군과 싸운 집단도 아니다. (다만 탈레반의 지도자로 알려진 오마르는 소련 군과 싸운 인물이다. 그는 그 전쟁에서 한쪽 눈을 잃었다고 전해진다.) 더구나 이들은 민간인을 납치해서 자신들의 요구 조건을 관철하려는 파렴치한 집단이다. 김구 주석의 임시정부가 민간인 테러를 일삼았던가? 탈레반의 이런 행각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다.
마수드 장군이 훗날 탈레반을 비난한 말이 있다.
"여자와 아이들을 죽이는 것을 어찌 지하드라 부를 수 있는가?"
탈레반은 원래 그런 집단이었던 것이다. 탈레반의 입장에서 눈의 가시였던 마수드 장군은 9.11 테러 직전에 탈레반에 의해서 제거되었다. 자살 특공대가 알 자지라 방송사 기자로 위장한 뒤 카메라에 넣어둔 폭탄을 폭발시킨 것이다. 판지시르의 사자라 불렸던 아프가니스탄의 전쟁 영웅은 동족의 손에 의해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마스드 장군에 대해서 좋은 트랙백이 걸렸네요. ◆진짜 '이슬람 전사'를 아시나요?[클릭])
본래 학교선생님이 되는 것이 꿈이었던 마수드 장군은 많은 학교들을 건립했는데, 이또한 근본주의자들과 충돌하는 이유가 되었다. 그가 세운 학교는 남녀공학이어서 공격받은 것이라고 한다. 마수드 장군은 그런 반발을 코웃음쳤다고 한다.
"조국을 재건하려면 여자도 배워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라면서.
마수드 장군의 문제와 빈라덴과 탈레반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런 반론도 들어와 있다. 여러가지 자료로 보아 상당한 근거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아프가니스탄 문제에 대해 더 깊은 관심이 있는 분들은 들러보면 좋겠다.
CIA-마수드, 빈 라덴-탈리반 관계 [클릭] sonnet님의 포스팅에 링크
현재 아프가니스탄의 대통령인 Hamid Karzai(하미드 카르자이)는 1957년생으로 이후이 부족의 족장이기도 하다. 그는 인도 유학생 출신으로 소련 군과 맞서 싸웠으며, 초기에는 탈레반과 사이가 좋았으나 탈레반의 무분별한 원칙주의에 반발하게 되었다. 그 대가로 탈레반은 1999년에 그의 부친을 암살했다. 그는 탈레반과 투쟁에 나섰으며 2001년 미군의 지지 아래 과도정부의 수반에 오를 수 있었다. 당시 그의 입각은 임시방편의 얼굴마담에 불과한 것이라고 했으나 아직까지는 정치력을 발휘해 아직까지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 by | 2009/03/24 23:22 | Eye to the world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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