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간과 한국: 국제정치사의 아이러니 (김경수 명지대교수)-퍼온글

한국과 아프가니스탄은 일견 서로 간의 연관성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같은 ‘아시아’에 속한다는 것 빼고는 각기 동북아와 서남아지역에 위치한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정 반대방향의 위치에 종교와 문화, 언어, 민족 등 공통분모가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근·현대사에서 두 나라는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는 역사적 이벤트를 공유하고 있다. 특히 아프간은 여러 의미에서 현대 정치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는데 있어 ‘태풍의 눈’ 역할을 해온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거문도 사건, 영·러간 아프간 세력다툼의 여파

지금으로부터 120여년 전 1885년 4월 영국의 동양함대가 남해의 거문도를 점령한 사건을 우리는 ‘거문도사건’으로 중고등학교 시절 역사에서 배웠다. 하지만 왜 거문도 사건이 일어났는지 그 배경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요컨대, 당시 약소국인 한국의 영토가 대영제국의 함대에 의해 강제점령 당하는 비운을 맞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아프간에서의 영국과 러시아간의 세력다툼의 불똥이 이역만리 한반도에 튄 까닭이다.

19세기 5대양 6대주에서 ‘해가지지 않는 나라’로 불리던 해양세력 대영제국은 나폴레옹 전쟁에서 그 위력을 발휘한 대륙세력의 강국 러시아의 도전을 받는다. 부동항을 찾아 ‘흑해’로 진출하려는 첫 번째 러시아의 도전은 나이팅게일로 유명한 크리미아 전쟁(1853년)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세력의 견제로 좌절되었다.

그후 1885년 러시아가 ‘페르샤만’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로 중앙아시아의 실크로드(교통) 요충지인 아프간 접경 ‘머브 오아시스’(Merve Oasis)와 아프간의 ‘판즈데 오아시스’(Panjdeh Oasis)를 강제 점령하자 당시 인도식민지 경영에 여념이 없던 영국은 양국 간 국경위원회 구성을 제의하며 타협하는 한편 극동에서 부동항을 찾아 한반도로 러시아세력이 남하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할 목적으로 거문도를 불시에 점거하게 된 것이다.

당시 한국(조선)은 갑신정변(1884년)으로 국내 정치가 혼미상황이었기에 영국의 거문도 점거도 손쉽게 이루어 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청국의 이홍장의 중재로 러시아가 한국 영토에 야심이 없다는 다짐을 받고 2년 뒤 영국 함대가 철수하기는 했으나 우리 주권국가 역사의 오점으로 기록되는 사건이다.

이로부터 바로 10여년 뒤 영국이 우려했던 대로 러시아세가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손을 뻗치게 된다. 자의반 타의반이기는 하나 고종의 아관파천(1896년)은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하여 국사를 보았다는 데서 다른 열강의 질시를 받았던 것도 사실이다.

영국의 거문도 점령이 러시아세의 남하를 저지하려던 제스처였다면 1902년의 영·일 비밀동맹은 영국이 일본을 내세워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려고 한 또 다른 견제구였다. 2년 뒤 일본은 막강한 영국을 뒤에 엎고 노·일전쟁(1904~5년)을 일으켜 승리한 후 급기야 한국(조선) 병탄의 수순을 밟게 된다.

즉, 거문도사건은 영·일동맹의 전조이고 영·일동맹은 일본이 당시 대륙의 최대강국 러시아에 도전하는 빌미를 제공하였으며 그 결과 한국(조선)은 독립을 잃게 되는 수순을 밟아가게 되는 것이다.

아프간 2차대전 후 구소련과 밀접한 관계 지속

한편 아프간에 대한 러시아의 야심은 영국이 인도와 인도양에서의 제해권 보호를 명분으로 강력 견제함에 따라 일단 아프간을 완충국(buffer state)으로 놔두고 두 나라가 사이좋게 영향권을 반분하기로 타협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아프간은 1차 세계대전 이후 1919년 지역거점의 여러 토후국에서 통합된 왕국으로 거듭 나면서 러시아는 제일 먼저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1921년에는 양국 간 우호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르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프간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중립정책을 고수했다.

그러나 인도대륙이 1947년 영국으로부터 해방 독립되면서 파키스탄이라는 신생국가가 아프간에 이웃하는 국가로 태어나고부터 이 같은 중립정책에 변질을 가져오게 된다.

신생국 파키스탄의 서북접경지역에는 약 500만으로 추산되는 파탄족(Pathans, 파쉬툰(Pashtun)족이라고도 함)이라는 아프간 민족이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어 아프간 정부는 민족자결의 명분하에 파탄민족의 분리독립을 부추겨 왔다.

파탄족이 아프간과 파키스탄에 걸쳐 나뉘어져 살게 된 것은 1893년 ‘듀런드 라인’(Durand Line)이라 하여 영국의 인도 식민지 행정부가 인도(파기스탄 분리독립 이전)와 아프간사이의 국경을 임의로 획정하여 합의한데 따른 것이다.

이 무렵 파키스탄은 중국, 인도와의 관계에서 독립을 지키고자 1954년 미국과 동맹조약을 체결하게 되고 아프간정부는 파키스탄에 파탄종족의 독립을 위한 보다 실질적인 압력을 넣기 위해 소련으로부터 군사·경제적인 원조를 구하게 된다.

그로부터 25년간 소련과 아프간은 정치 군사 경제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다. 예컨대, 군대조직만 하더라도 1956년 이후에는 소련의 군제를 모방하고 장교들은 소련에 파견교육을 받으며 소련제장비로 무장되었다.

10년전 왕에 의해 실각되었던 다우드(Daoud) 수상이 1973년 일부 군부세력의 지지를 받아 쿠데타를 성공적으로 수행, 왕을 폐위하고 공화국을 만들어 탈소련 정책을 추구하다 실패하게 되면서 1979년 소련의 본격적인 개입이 이루어진다.

구소련 아프간 침공, 신냉전시대 계기

동·서 양 진영으로 갈라진 양극 체제하에서 아프간 국내정치가 혼미양상을 보이는 가운데 집권 좌경세력 보호를 구실로 한 구소련의 아프간 침공(1979년 12월)은 ‘70년대의 ‘미·소 데탕트’ 시대를 종식시키고 이른바 ‘신냉전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10년간 미국은 구 소련군과 정부군에 대항하여 싸우는 탈레반 등 회교 반정부군에 연간 1억달러 이상의 원조를 제공하며 좌경정부와 소련군의 축출을 도왔다. 예컨대 1985 회계연도 한해에는 미국 의회가 2억5000만달러의 ‘아프간 지원계획’을 통과시키기도 하였다.

그 결과 반군의 집요한 공격에 시달리던 소련군은 결국 1989년 아프간으로부터 철수하게 되고 그로부터 몇 년 뒤 내전을 거쳐 정권은 1996년 탈레반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국제정치학자들은 1989년 12월 미·소간 몰타(Malta) 정상회담에서 양국 대통령이 동·서 냉전체제의 해체를 공식 선언함으로써 이를 탈냉전의 기원으로 보지만 기실 내막적으로는 1989년 초 소련군의 아프간 철수가 촉매제 역할을 한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아프간은 국제정치사의 중요한 시대적 전환기마다 태풍의 ‘핵’ 역할을 해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가운데 미국은 2001년 10월 9·11 테러를 사주한 오사마 빈 라덴과 알카에다에 은신처를 제공한 탈레반정권을 무력으로 강제 축출하였던 것이다. 결국 미국은 반정부 민병대인 탈레반을 지원하여 아프간의 친소 정권을 축출한 후 탈레반이 정권을 잡은 지 5년 만에 다시 같은 정권을 다른 이유로 갈아 치우는 비극적 현실을 맞게 되었다. 이제 다시 미국을 위시한 나토 동맹국 등 다국적군과 탈레반과의 지리한 싸움이 전개되는 가운데 애꿎은 한국인 피랍사건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1885년 아프간에서의 강대국간 세력다툼 결과의 하나로 한국(조선)의 ‘땅’(거문도)이 볼모로 잡힌 지 꼭 122년 만에 이제 다시 아프간 현지에서 는 강대국(미국)의 대테러전 와중에 한국 ‘사람’이 인질로 잡히는 비운을 맞게 된바 그야말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by 하야니 | 2009/01/06 23:59 | Eye to the world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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