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글)주택부문 전망 Eye to the realty

쥬라기: 부동산 시장을 함 봅시다.

쥬라기: 앞으로 부동산이 오를 일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

쥬라기: 1. 있다, 2. 없다. 투표해 보세요.

 

쥬라기: 우리나라 부동산 가격 상승의 역사입니다.

쥬라기: 우리나라는 1974년 이전에는 한집에 8명내지 10명이 모여 살았기 때문에

쥬라기: 가구수보다 집이 많았습니다.

 

쥬라기: 그러나 인구가 늘고 결혼을 해 분가를 하면서

쥬라기: 가구수가 집수를 추월하기 시작한 해가 1974년입니다.

쥬라기: 이 때부터 부동산 투기의 역사가 시작이 됩니다

 

쥬라기: 부동산 가격은 누가 올리려고 해서 오른다기 보다는

쥬라기: 주택을 필요한 만큼 짓지 못하여 집이 부족할 때 오릅니다

쥬라기: .

 

쥬라기: 1980년대 초반에는 경기가 어려운데다 금리가 너무 높았었죠 ?

 

쥬라기: 당시 미국의 모기지 금리가 몇 %인지 보십시오,

쥬라기: 저렇게 금리가 높은 상태에서는 집을 지어 팔기 어렵게 되죠

쥬라기: 그래서 80년대 상반기에 집을 많이 짓지 못했고

쥬라기: 이것은 80년대 후반에 주택부족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쥬라기: 이때 일차로 부동산 투기 국면이 나타났고,

쥬라기: 이후 주택공급 확대 정책에 올인하죠, 

쥬라기: 그래서 주택공급이 크게 늘어난 1990년쯤해서 부동산 열기가 식습니다

쥬라기: .

쥬라기: 그 다음에는 IMF때 은행이 망하고, 건설회사가 망하면서 집을 짓지 못했죠

쥬라기: 1997, 1998, 1999, 2000 집을 제대로 착공하지 못하면서

쥬라기: 2001년 말부터 주택부족이 심각했고 그리고 부동산 가격이 크게 올랐죠

쥬라기: 2002년 월드컵 게임이 열리던 해 우리 관심은 축구였지만

쥬라기: 정부의 관심은 부동산 가격 잡기 였어요

쥬라기: 1년 열두달 중 주택가격 대책을 내놓은게 11번입니다

쥬라기: 그렇게 얻은 교훈으로 주택은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도

쥬라기: 집을 늘려 짓지 않고는 해결이 되지 않는다는 교훈을 얻죠

쥬라기: 그래서 법으로 건설장관은 10년 주택수요를 예측해서 공급 계획을 세우고

쥬라기: 매년 연간계획을 세워서 주택 수급에 차질이 없도로 강제화했죠

쥬라기: .

쥬라기: 이때 늘려서 착공한 주택이 2001~2003년 완공이 되면서

쥬라기: 이 시기 주택가격이 안정적으로 움직였습니다

쥬라기: 그러나 참여정부는 주택공급을 수도를 지방으로 옮겨서 해결하려는 정책을 폈죠

쥬라기: 공공기관도 이전하고 행정수도를 만들어 수도권 인구를 밖으로 옮기면

쥬라기: 주택문제, 교통문제 등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고

쥬라기: 이를 공약하고 정권을 잡았죠

 

쥬라기: 그래서 주택공급에는 다른 차원에서 접근을 했으나

쥬라기: 장관이 주택계획을 세워서 지속적인 건설을 하지 못한 것도 문제였고,

쥬라기: 2004년 봄에 대통령이 탄핵되고, 행정수도가 위헌심판이 되면서

쥬라기: 1년을 정책 공백기를 갖게 되었죠

쥬라기: 건설업체들이 수도권에 집을 지어야 하는지,

쥬라기: 지방에 지어야 하는지를 결정할 수 없었죠. 스톱입니다.

쥬라기: 2004년부터 2005년 주택공급이 다시 줄어들게 되고

쥬라기: 이후 2005년부터 2007년까지 또 부동산 가격이 오르면서

쥬라기: 참여정부 후반에는 주택가격을 잡는데 온 힘을 쏟았습니다

 

쥬라기: 참여정부때 수도권에 집을 지으려 해도 택지가 없었던 것도 문제였죠

쥬라기: 그래서 택지를 마련하느라 많은 땅을 사들이고 보상금을 풀었었죠

쥬라기: 택지가 마련된 후 주택을 건설을 늘려 2007~2008년 공급이 늘면서

쥬라기: 이후 부동산 가격이 하락 안정이 되었습니다

 

쥬라기: 그런데 2008년 금융위기가 발생하였고 

쥬라기2008년부터 2011년까지 주택 공급이 크게 줄었죠

 

쥬라기: 2004~2006년 부족 공급보다 훨씬 더 적은 물량이 공급되었고,

쥬라기: 또 공급부족이 된 기간도 깁니다

쥬라기: 여기까지 흐름을 알면,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대략 짐작이 되지요?

쥬라기: 공급이 줄었으니 필연적으로 주택부족이 나타나게 되고

쥬라기: 그런 다음 가격은 수급의 원리로 움직이게 됩니다

쥬라기: 그래서 부동산이 있으면 특히 지방부동산은 팔지 말고 사십시오,

쥬라기: .

쥬라기: 작년 상반기만 하더라도 인구가 2018년에 정점이 되고 이후에는 감소아니

쥬라기: 부동산이 좀 오르더라도 참고 견디면 장기 하락을 한다고 생각을 했죠,

쥬라기: 그래서 집이 없는 사람은 전세로 좀 살다보면 주택 하락이 되겠지 했고,

쥬라기: 부동산 투자를 하려는 사람은 오르더라도 마지막 끝물이니

쥬라기: 더 오른 가격에 팔기는 어렵다는 생각을 해서 투자를 안했죠.

쥬라기: 대부분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는 까닭에 가격이 안정되어 있습니다.

 

쥬라기: 그러나 지난해 하반기 인구를 확인한 결과

쥬라기: 2006년에 예측했던 인구보다 무려 52만명이 더 많게 집계되었습니다.

쥬라기: 그래서 인구를 수정하고 인구 예측 모델을 수정해서 미래 인구를 계산해 보니

쥬라기: 인구가 2018년을 전후로 감소하는 것이 아니라

쥬라기: 2031년까지 인구가 줄지 않고 늘어나는 것으로 확인이 되었죠,

 

쥬라기: 20년이면 부동산이 한번 올랐다가 다시 하락하는

쥬라기: 부동산의 완전한 주기 17년(한센 주기)보다 깁니다

쥬라기: 그러니 저 상황이라면 주택은 분명 문제가 발생하여 있고,

쥬라기: 저 부족분이 해소되기까지는 가격 상승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쥬라기: 이것이 부동산 가격 변동의 원인입니다

쥬라기: 이 주택건설 실적 통계를 보고 미래의 주택수급을 어림할 수 있으면

쥬라기: 좋은 부동산 투자의 타이밍을 알기 쉽습니다

쥬라기: .

 

쥬라기: 아직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건설 경기가 최악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쥬라기: 건설 경기가 헤어날 길이 없는 어려움에 처한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죠

쥬라기: 건설착공 통계입니다.

쥬라기: 저기 그래프들은 건축착공면적의 12개월 평균입니다.

쥬라기: 맨의 전체 건축면적은 2003년에 최고였다가(집값 안정시기)

쥬라기: 2007년에 다시 최고입니다.

쥬라기: 이 고점들을 선으로 이으면 하나의 추세 저항이 된다고 할 수 있는데

쥬라기: 2011년 4분기에 이 저항선이 위로 뚫렸죠 ?

 

쥬라기: 건설이 엄청난 호황 국면으로 가고 있는 모습입니다

쥬라기: 이제 착공을 시작하는 모습입니다

쥬라기: 맨 아래는 주거용 주택건설 착공입니다

쥬라기: 역시 추세 저항을 돌파하여 강력한 상승 추세의 모습이 되어 있습니다

쥬라기: 현재 값은 2004년 이후 최고를 나타냅니다

쥬라기: 바로 이 건설 경기 때문에 경기가 풀리게 되는 것입니다.

 

쥬라기: 그리고 이 건설경기 회복 과정에서 철강, 화학, 건설, 기계, 운수, 건설, 조선

쥬라기: 그리고 돈을 빌려주는 은행, 증권이 오르는 과정을 실적장세라고 합니다

쥬라기: 이 사이클이 설비투자 주기인 쥬글라 사이클과 겹쳐 있으니

쥬라기: 그래서 강한 성장국면이 나온다고 할 수 있죠.


A psalm of life(인생 찬가) Eye to the poem


Tell me not in mournful numbers,
Life is but an empty dream!
For the soul is dead that slumbers,
And things are not what they seem.

슬픈 어조로 말하지 마라
인생은 단지 공허한 꿈이라고

영혼은 잠이들면 죽는 것이라고
사물은 보이는 것과는 다르다

 

Life is real! Life is earnest!
And the grave is not its goal;
Dust thou are, to dust thou returnest,
Was not spoken of the soul.

삶은 진실하고,  삶은 진지하다
무덤이 삶의 종착역은 아니다.
“너희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라” 는 말은
영혼에 대해 일컫는 말이 아니다.

Not enjoyment, and not sorrow,
Is our destined end or way;
But to act, that each tomorrow
Find us farther than today.

쾌락이나 슬픔이
운명으로 지워진 목표와 길은 아니다.

모든 내일이 오늘보다 나아지도록
행동하는 것이 목표이고 길이다!

Art is long, and Time is fleeting,
And our hearts, though stout and brave,
Still, like muffled drums, are beating
Funeral marches to the grave.

시간은 덧없이 흐르고 예술은 길다.
우리의 심장은 비록 강건하고 담대해도
헝겊을 씌운 북처럼 낮은 소리로 
무덤을 향한 장송곡을 끊임없이 두드린다.

In the world's broad field of battle,
In the bivouac of Life,
Be not like dumb, driven cattle!
Be a hero in the strife!

세계의 넓은 싸움터에서,
인생의 야영지에서, 
말못하고 쫓겨 다니는 가축이 되지 말라! 
투쟁하는 영웅이 되라.

Trust no Future, howe'er pleasant!
Let the dead Past bury its dead!
Act, act in the living Present!
Heart within, and God o'erhead!

미래가 아무리 즐겁더라도 그것에 기대지말라.
죽은 과거는 땅에 묻혀 잊혀지도록 하라!
행동하라, 살아 있는 지금 행동하라!

마음속에 용기와, 머리위에 신의 가호가 함께하리라!


Lives of great men all remind us

We can make our lives sublime,
And, departing, leave behind us
Footprints on the sand of time;

위인들의 생은 우리들을 깨우쳐준다.
우리도 그들처럼 숭고한 삶을 살 수 있고
그리고 떠나갈때, 시간의 모래 위에 
우리의 발자취를 남길수 있도록; 


Footprints, that perhaps another,
Sailing o'er life's solenm main,
A forlorn and shipwrecked brother,
Seeing, shall take heart again.

그 발자취들은 아마도 다른 사람들, 
인생의 장엄한 바다를 항해하다가
배가 난파되어 버려진 형제들이
발견하고, 다시 용기를 얻게 될 것이다.

Let us then be up and doing,
With a heart for any fate;
Still achieving, still pursuing,
Learn to labor and to wait.

자, 우리 모두 일어서서 행동하자
어떠한 운명에도 용기를 잃지말고
끊임없이 성취하고 추구하면서
노력하며 기다리는 지혜를 배우자.


 

Henry Wadsworth Longfellow((1807-1882)
롱펠로우는 19세기 미국의 시인으로 1825년 Bwdoin 대학을 졸업했다. 약3년의 유럽 유학후 모교의 근대 언어학 교수가 되었고 몇 년후 하버드대 교수로 18년 재직하였다. 1839년 죽은 부인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히페리온"(Hyperion)과 "The Psalm of Life", "The Light of the Stars" 등이 실린 시집 "Voices of the Night"를 출판했고 옛 프랑스 식민지 아카디아의 목가적인 이야기 "에반젤린"(Evangeline,1847) 외 다수가 있다.


퍼온글) 우리가 종주국이면 다른나라는 Eye to the maxim

우리가 종주국이면 다른나라는 종놈국인가
<신성대의 무예이야기>태권도 K-pop 등 종주국 앞세우면 역풍 맞아
국가브랜드위? 개발도상국적 발상…국가 아닌 개별 상품 전략이어야
새마을정신에서 글로벌마인드로

우리가 키우는 작물들 중에 처음 싹을 틔운 밭에서 다른 밭으로 옮겨주어야 더 잘 자라는 것들이 있다. 문화 또한 반드시 그것이 태어난 곳에서만 번성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다른 곳에서 더 크게 번성하는 경우가 많았다. 불교가 인도를 떠나지 않았다면, 기독교가 이스라엘 땅에만 머물렀다면 어쩌면 우리는 지금 그 둘을 세계종교사란 두꺼운 책 속의 한 줄로밖에 기억하지 못할는지도 모른다.

교황청은 로마에 있다. 골프는 지금 미국이 주무대이고, 양궁은 한국에서 꽃을 피우고 있다. 반면 검도는 유도와 더불어 체육화되었지만 일본과 식민지배를 통해 배운 한국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가라테는 한국으로 이식되어 태권도란 이름으로 현지화하여 올림픽 종목으로까지 성장했다. 조선 중기 임진왜란 병자호란으로 한반도에서는 대규모 국제전을 치렀다.

당대 한중일 3국의 최정예 실전무예가 총결집하여 치열한 합을 겨뤘는데, 그 기예들 모두는 고스란히 십팔기란 이름으로 한국에만 남아 있다. 라면은 일본이 원조지만 지금은 한국이 세계 시장을 석권하고 있고, 커피, 코코아 생산은 못하지만 커피믹스와 초코파이는 세계적인 한국상품이 되었다. 문화란 그런 것이다. 향유하는 자가 곧 주인이다.

종주국(宗主國)? 누가 아니랄까봐 유독 자기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낸 용어다. 태권도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이 표현은 혹여 누가 태권도더러 한국 것이 아니라거나 과거 일본의 가라테를 경기용으로 바꾼 것이라고 시비라도 걸까봐 반드시 붙이는 수식어이다. 오랫동안 중국문화권에서 사대했었다는 자격지심, 그리고 일제 식민지배에서 나온 문화적 경계심의 발로일 것이다. 오죽 종주(宗主) 대접 한번 받아보고 싶었으면 그랬을까. 단일민족, 백의민족, 혈통주의, 순결주의, 결벽주의도 어쩌면 식민지배로 인한 문화적 열등감에서 나온 반발일 것이다.

사실 그 이전에도 그런 비슷한 표현을 사용한 적이 있었다. 바로 십팔기의 ‘본국검(本國劍)’이다. ‘신검(新劍)’이라고도 불렀었다. 유사 이래 중국에 대해 감히 본국(本國)이란 표현을 당당히 이름붙인 첫 사례일 것이다.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조선의 무예가 하도 보잘 것 없어 중국과 왜국의 것조차 받아들여야 했던 현실을 한탄하면서 적어도 이것 하나만은 우리 무예, 즉 본국(本國)의 검법임을 강조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다. 물론 이후 본국검이 다른 나라에 퍼지지 않았으니, 아직 본국검의 종주국이니 하는 말은 없다. 아무튼 외침을 당하고서야 ‘본국’이니 ‘종주국’이니 하는 용어가 나온 셈이다. 그 의연한 기개를 자랑스러워하기에는 왠지 역사의 그늘을 연상케 하는 단어들이다.

메이드 인 코리아?

태권도가 세계인이 즐기는 스포츠로서, 올림픽 핵심종목으로 남으려면 하루빨리 이 국수주의 냄새나는 ‘종주국’이란 표현부터 지워야 할 것이다. 더하여 요즘 일고 있는 ‘한류’ ‘K-pop’이란 용어도 상당히 우려스런 표현이다. 개개의 상품명으로 밀고나가 승부를 해야 오래갈 수 있다. 상품이나 작품을 애국심으로 포장하여 국가주의를 전면에 내세우는 건 그다지 세련되지 못하다는 말이다. 그건 이미 일본이 실패한 전례를 따르는 거다. 검도가 세계화되지 못하는 것도 지나친 국가색 때문이다.

국명이라는 거대한 단일 브랜드를 이용하면 초기에는 힘을 얻지만 조금 커질라치면 곧바로 저항에 부딪히게 된다. 떼지어 몰려드는 것에 대한 거부감과 경계심이다. 메이드 인 재팬? 메이드 인 코리아? 요즘은 일반 기업에서도 그렇게 안한다. 과거 일본이 그랬듯이 한국 경제가 성장하는 만큼 다른 나라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되고, 코리아라는 국가 브랜드를 연상케 하는 상품이나 종목은 그만큼의 역풍을 맞게 된다는 말이다. 해서 도요타의 렉서스처럼, 하이트맥주처럼 경우에 따라서는 상품의 원산지나 기업명을 일부러 감추기도 한다. 브랜드의 단일화 집중화가 장점도 있지만 그만큼 위험성이 따른다는 사실은 이미 많은 기업들의 부침에서 증명되고 있다. 한물간 전략이다.

국가브랜드위원회? 이런 개발도상국적 발상은 하루빨리 없어져야 한다. 어떻게 해서든 코리아를 알리고, 뻗어나는 국가 이미지에 편승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글쎄 그건 순전히 우리의 바람일 뿐 소비자들은 반드시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거다. 마음속으로야 얼마든지 코리아에 대한 자부심으로 넘친다 해도, 그걸 밖으로 드러내 과시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그냥 비틀즈이고, 대장금이고, 겨울연가이고, 소녀시대이고, 동방신기여야 한다는 말이다. 그걸 한류니, K-pop이니 하고 국가적 브랜드로 묶어 시너지 효과를 보겠다는 생각은 한참 뒤떨어진 시대감각이다. 과거 일본이, 그리고 미국이 지나치게 국가를 앞세우는 바람에 미운털이 박힌 거다.

국가가 도와준답시고 매사에 쓸데없이 간섭하고 앞장서 생색내려 하는 것은 오히려 방해만 되고 되레 역풍까지 맞을 가능성도 있다는 말이다. 요즘 올림픽 핵심종목에 선정되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태권도가 이런 한류 바람에 함께 편승하고자 애쓰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바람에 편승했다간 언젠가 그 바람이 잘 때 함께 추락할 수도 있음을 염려해야 한다. 집단화 집중화보다는 개별화 분산화가 글로벌 시대에 보다 유리한 전략이다. 초기 태권도 해외 진출도 그랬다. 각자가 생존 욕구에 불타 스스로 용맹정진하는 것이 최선이다. 단지 지금은 코리아를 굳이 앞세울 필요 없다는 거다.


자랑하기 전에 고민 많이 해야

코리안 심볼? 나랏돈으로 거대한 태권도공원을 만들어 그곳을 세계인이 찾는 태권도 성지로 삼겠다는 꿈도 좋지만, 그게 과연 글로벌 시대에 어울리는 발상인지 다시 생각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새마을운동처럼 우리보다 후진국 태권도인들 불러다 잔치 벌이고 쇼 보여주면 감동할 것이다. 허나 이미 문화적으로도 글로벌화되어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선진국 사람들이 볼 때에는 그다지 반색할 일이 아닐 수 있다는 말이다.

한국 태권도의 중흥은 70년에 시작된 새마을운동, 그리고 한국의 해외 진출과 궤를 같이한다. 해서 알게 모르게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새마을 정신이 배어 있다. 그런 정신으로 해외에 나가 도장들을 개설했고, 그걸 바탕으로 올림픽에까지 올랐다. 하지만 ‘범국가적’ ‘범국민적’ 등 새마을운동식 밀어붙이기는 저개발국가에서나 유효할 뿐이다. 지나친 국가주의, 기업주의는 그 문화 그 상품이 글로벌화하는 데 마이너스 요인이 될 수도 있음이다. 해서 기업들도 어떻게 하면 현지화 글로벌화할 수 있을까를 궁리하고 있지 않은가?

헌데 한국이 종주국이면? 그럼 나머지는 종속국 혹은 종놈국? 철지난 제국주의적 발상으로 오해받기 십상이다. 한국이 저개발국, 개발도상국일 시절에는 귀엽게 봐 주었지만 선진국 문턱에 선 지금은 아니다. 한국이 저개발국들의 모범인 건 분명하지만 이젠 선진국들의 견제 혹은 검증 대상이다. 글로벌 시대에는 더 이상 이런 촌스러운 표현이 먹히지 않는다. 함께 그리고 동등하게 공정하게 즐기자는 것이 올림픽일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종주국’이란 표현은 올림픽정신에도 맞지 않는다. 스포츠는 스포츠일 뿐, 종교가 아니지 않은가?

한국을 종주국으로 떠받들어주길 원하는가? 그렇다면 올림픽 모든 종목마다 종주국 찾아다니며 떠받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종주국이라고 우쭐대는 만큼 상대국들은 굴욕감을 느끼란 말인가? 경기마다 금메달 싹쓸이하는 게 종주국? 우리가 만든 종목이니 당연히 금메달은 우리 것이어야 한다? 허구한 날 누가 독주국 잔치에 들러리만 서고 싶겠는가? 아마도 속으론 비웃을 게다. 계속 이러다간 ‘타도 코리아’가 나오지 말란 법도 없다. 그리되면 한국의 위상을 높이는 게 아니라 오히려 끌어내리게 될 것은 분명한 일이다. 좀 더 깊게, 좀 더 많이 고민해야 한다.

고품격 스포츠로 거듭나야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든 세상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태권도는 끊임없이 변신을 거듭해 왔다. 바야흐로 태권도가 진정한 세계인의 스포츠가 될 수 있을지 그 전환점에 와 있는 것 같다. 기실 올림픽 핵심종목이 되고 안 되고는 부차적인 문제일 것이다. 발상의 전환이 절실한 때다. 그러기에 앞서 글로벌적인 마인드부터 갖춰야 할 것이다. ‘종주국’이란 용어, 그리고 그런 사고는 글로벌에 걸림돌이다. 미국의 야구처럼 되지 않으려면 이런 걸림돌은 얼른 치워야 한다.

한국은 이미 개척시대를 지나 품격의 시대로 들어서고 있다. 세계 톱10 진입이 눈앞이다. 더 이상 하드적인 마인드론 안 된다. 정밀하면서도 소프트한 전략이어야 한다. 억지로 태권도를 보급하려거나 올림픽 종합 순위 올리는 데 이바지하겠다는 후진국적 발상, 그런 도전적이고 적대적이며 도구적인 생각을 버리지 않으면 결코 스포츠 선진국으로 못 올라간다. 금메달 독식하지 못하면 종주국 지위 잃는 줄, 금메달만 많이 따면 그걸로 선진국이 되는 줄 아는 착각 따윈 이제 그만해야 한다. 그런 구태의연한 ‘치고박고’식 단무지철학으론 결코 선진문턱 못 넘어선다.

진정 태권도가 올림픽 핵심종목으로 남으려면, 당장 다음 올림픽부터 한국이 메달 싹쓸이할 생각 버려야 한다. 오히려 다른 나라들이 메달을 딸 수 있도록 기술지도 및 한국연수를 아낌없이 지원해줘야 한다. 이제까지 올림픽에서 메달 하나 못 따본 나라가 만약 태권도에서 동메달이라도 하나 땄다고 상상해보라. 과거 대한민국이 올림픽에서 첫 메달 땄을 때의 감동을 생각해보면 알 것이다.

아니면 김연아가 피겨스케이팅에서 금메달 땄을 때의 감격을 연상해보라. 거국적인 축제가 벌어질 것은 물론 그 나라 올림픽 역사를 태권도가 장식할 것은 당연지사, 어쩌면 태권도가 그 나라의 국기가 될 수도 있다. 역시나 태권도에 관심 없는 몇몇 선진국(IOC위원국)이 태권도 금메달 하나씩 따게 되면? 애써 핵심종목 선정 로비 할 것도 없다.

각설하고, 이젠 메달이라고 다 같은 메달이 아니다. 질이 다르다. 김연아의 금메달은 다른 모든 메달을 합친 것보다 더 빛나고 있으며, 또 그녀가 하기에 따라 그 이상의 힘을 발휘할 수도 있다. 투지와 땀 냄새만으로 아무리 메달 많이 따도 선진국 대접 못 받는다. 어느 나라, 누가 메달을 얼마나, 그리고 종합순위가 몇 등인지 국민은 물론 세계인 누구도 관심 없다. 메달보다 누가 어떤 감동을 주었느냐만 기억될 뿐이다. 스토리텔링이 더해지면 때론 동메달 하나가 금메달보다 더 빛날 수도 있다. 그러자면 선수 개개인도 틈틈이 인문학적 교양으로 무장해야 한다. 그래야 메달이 메달 이상의 가치, 무한한 부가가치를 창출해낼 수 있다. 이젠 메달도 우아하게, 그리고 품위 있게 따야 한다.

아량, 여유, 배려로 보이지 않는 벽을 넘어야

지금 선진국들은 한국이 과연 진정한 동반자로서 자기네들과 함께할 만한 품격을 갖추었는지를 두고 관망하고 있는 중이다. 비단 태권도인뿐만 아니라 한국인 모두가 문화 전반에 대한 전향적이고 보다 성숙된 인식을 지녀야 한다. 그리고 어떤 분야에서든 정부의 지원은 보이지 않는 손이어야 한다. 은근하고 정교하고 세련되고 지혜로워야 한다. 때론 더없이 교활하기조차 해야 한다. 이미 세계 속에서의 한국의 위치가 그렇다. 한국은 더 이상 위만 쳐다보며 기어 올라가기만 하는 나라가 아니다. 이젠 상하좌우 견제와 협력을 동시에 해나가야 하는 위상과 책무를 지닌 리더의 나라다. 지금 그 시험대에 올라있다. 그게 바로 선진국 진입 문턱이다.

무엇보다 세계인과 함께하자면 먼저 상대에 대한 동반자적 배려가 우선이다. 그게 없으면 협력, 협상, 소통, 공감 등등, 함께해야만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쉽지 않다. 태권도 종주국의 위상? 권위, 권리, 텃세? 다 버리고 오직 배려만을 생각해야 한다. 그게 최상급의 스포츠 외교다. 그래야 품격이 올라간다. 그래야 국격(國格)도 올라간다. 한류나 국격에 편승할 것이 아니라 전위에서 고품격 지향으로 이끌어야 한다. 은근과 끈기, 그게 원래 한민족의 심성이 아니던가? 이젠 그 미덕을 살려내야 한다. 자신감에서 우러나오는 담담하면서도 당당한 배려심, 그게 글로벌 시대의 무혼(武魂)이자 무덕(武德)이다.

퍼온글)경매전문 변호사-한두가지에 집중하라 Eye to the realty

최광석 부동산 경매 전문 변호사

선택과 집중에서 물건 보는 안목 길러져
성공보다 실패 안한다는 마인드로 투자를
욕심 앞서면 경매계 떠나야

 

부동산 전망(퍼온글) Eye to the realty

행복에 대해서 저도 잘 모르지만 오늘 이 시간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행복에 대해 함께 고민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사례를 통해 설명드리자면, 우리나라 가계 평균 소득이 340만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 평균일 뿐 실제적으로 봤을 때 40대 중반의 중간층 4인가족 가계소득을 300만원으로 보고 있습니다.

40대 중반의 김씨는 4인 가족으로 3억짜리 아파트를 대출없이 보유하고 있고 월 300만원의 소득이 있다고 했을 때, 나름 건강하게 사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에 어느 날 삶의 변화가 찾아옵니다.

 

  (소문) 집 앞으로 지하철이 들어온다 → 3억짜리 집값이 4억으로 1억 상승 → 집 바로 앞으로 역이 들어선다 → 5억으로 상승, 2억 자산가치 상승 → 카드 및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어 소비 증가, 2000만원의 부채증가, 그러나 집값상승으로 인해 스트레스는 없음 (2억 - 2천=1.8억) →지하철 백지화 →위기가 몰려옴

 

 

이런 위기가 닥쳤을 때 선택할 수 있는 극단적인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긴축을 하는 것입니다. 2000만원을 갚기 위해 10년이란 장시간이 필요합니다.

둘째, 구조조정에 들어갑니다. 집을 팔고 전세로 들어가 부채로부터 벗어납니다.

 

일본의 경우를 사례로 들고 비교해 보겠습니다.

한 때 세계 최고 부자나라였던 일본이 현재는 세계에서 빚이 가장 많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일본 - GDP대비 부채 230%                     영국 - 90%

미국 - 85%                                             한국 - 40%

 

일본인들 1인당 부채는 1억 천만 원입니다. 이대로 간다면 10년 안에 부도가 날 수도 있습니다. 1년 예산의 1/4을 나라빚 이자 갚는다고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경제와 비교해 봤을 때 경제규모가 우리나라의 3배인 일본이 왜 이렇게 나라빚이 많은 걸까요? 쉽게 이해가 되십니까?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외국인 투자자본의 35%가 일본입니다. 만기시 연장을 안 해주면 한국도 부도가 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해마다 전전긍긍하는데 실제 알고 보면 우리나라에선 35%의 일본자본이 일본이 해외에 투자한 자본대비 투자율은 불과 1.7%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일본의 경제의 규모는 한국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어마어마 하다는 얘기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세계에서 빚이 제일 많은 나라가 되었을까요?

 

일본의 인구중 65세 이상이 차지하는 비율이 무려 21%나 됩니다. 심각한 노인사회, 노인국가지요.

7%이상 - 노인사회

13%이상 - 후노인사회

일본은 21% - 말기사회(웃자고 하신 말씀 ㅎㅎ)

 

한국도 2030년에는 22%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일본이 노인사회라는 것만으로 일본정부가 휘청이고 있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으실 것입니다. 유럽만 보더라도 일본보다 더 빨리 노인사회에 진입한 사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에서일까요?

 

알고 보니 일본은 일본경제의 74.6% 무려 인구의 3/4이나 차지하는 돈이 모두 노인주머니에 들어있다는 것인데 이 돈은 곧 죽은 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제의 기본은 곧 소비인데 일본의 노인주머니의 돈은 소비를 절대로 하지 않아 죽은 돈이라는 것이죠. 이 죽은 돈으로 인해 일본 내에는 엄청난 돈이 있음에도 나라는 큰 빚을 지게 되고 또 경제가 어려워 진 것이죠.

 

국민들이 소비를 안 해 소비침체 → 정부의 수입은 줄고 노령화 사회로 지출은 늘고 → 정부가 돈을 빌려 국채를 발행 → 노령임금 지급 → 남은 노령임금으로 또 다시 국채발행 → 노령임금지급

 

현재 일본은 이런 악순환이 계속되면서 빚더미에 앉게 된 것입니다.

 

돈에는 전이효과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른 주머니에 있는 돈을 젊은 사람들한테 줘서 소비하게 만드는 것,, 단연 한국이 세계 1위라고 할 수 있죠. 따라서 한국경제가 돌아갈 수 있는 것이죠. 한국사람들은 부모주머니에 돈 있는 꼴을 못 보잖아요..ㅎㅎ 반대로 일본은 이 전이 효과가 가장 적은 나라입니다.

이로써 일본은 아이러니하게 은퇴기시보다 사망 때 돈이 더 많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된 데에는 1990년에 일본 경제에 불어닥친 버블 붕괴라는 큰 사건이 있었습니다. 1970년대 80년대 20년간 일본열도가 모두 부자였고 일본 국민이 가장 행복했던 시기입니다. 부동산은 200배나 올랐고 주식은 최고 500배까지 오르던 시기입니다.

이 시기의 거품을 상징하는 일화로 80년대 후반에 직장여성들 사이에 하와이계가 유행했다고 합니다. 와이키키에 땅 사서 별장지어 놀러가기~~~

 

투기는 피라미드와 같아 끝이 있고 어느 순간 와르르 무너집니다.

 

1990년에 주식이 3개월만에 30%나 하락하게 됩니다. 한국에서라면 30%쯤이야.. 할 수 있지만 지난 20년간 끊임없이 500% 상승한 일본에서는 큰 일이 아닐 수 없었죠.

이때 한 증권사에서 유명한 명언이 나옵니다.

 

증권사 명언 “ 장기투자적 필승, 위기는 기회”

 

갑자기 부동산 시장이 이상기후를 보이며거래가 감소하고 가격이 60%나 하락합니다.

이때 부동산에 관련한 유명한 명언이 나옵니다.

 

“일본열도 황금성” - 일본열도는 황금으로 만들었기에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

 

부동산을 저가에 다시 매입하고 부동산은 다시 상승하기 시작하죠. 그러다 결국 1992년부터 지금까지 계속 하락하고 있습니다. 그 예로.

1. 골프장 회원권 - 92% 하락

2. 상업용 부동산 83~85% 하락 10억→1.5억

3. 주식 70% 43000포인트 → 9500포인트

4. 거주용부동산 60% ( 세합 70~80%)

 

이렇게 해서 일본은 경제침체, 경제 불황이란 깊은 늪에 빠지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90년대 중반부터 돈만 생기면 예금하고 저축하고 빚을 갚는 등의 행동이 생기게 된 것이죠.

 

모두가 예금, 빚 청산

은행돈 아무도 안 빌려감

부동산 투자 올 스톱

가정 내 긴축 경제 (잃어버린 20년)

 

한국의 김씨가 긴축으로 2000만원의 빚을 10년간 청산해야 한다면 일본의 다나카씨는 잃어버린 20년을 위해 90년대 중반부터 오늘까지 긴축으로 돈을 모으고 빚을 갚고 있는 것이죠.

 

미국의 경우를 또 예로 살펴보겠습니다.

2차세계대전으로 미국은 전 세계적으로 초강대국이 되었죠. 80~90년대 미국의 집값이 올라가면서 자산 상승분에 대해 신용대출 및 카드 한도를 올려주는 미국에서 너도 나도 과소비를 하기 시작했고 그걸로 인해 일본경제가 호황을 맞게 됩니다. 그리고 한국의 경제가 살아나고 90년대 말에는 중국의 경제까지 호황을 맞게 되죠. 이 때 미국의 저축률은 1%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는 세계 초강국에서 무역적자, 최대 빚쟁이 나라로 전락하게 되죠.

 

세계경제의 본질을 보면 2000년대 전 세계가 너도 나도 과소비를 하기 시작합니다. 경기가 호황을 맞게 되면 당연히 인플레이션이 와야 하는데 금리도 안정되고 물가도 안정되었던 것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인구가 전세계에 물자를 공급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것이 2006년 8월부터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미국의 베이비부머가 은퇴하면서 집값이 하락하기 시작하고 이자를 감당 못하다 결국 집은 경매로 넘어갑니다.

 

베이비부머 소유의 집 경매로 넘어감

2007년 봄 은행들이 부도나기 시작

그러나 과소비는 여전함

2007년 가을 집값 하락

2008년 가을 세계경제 호황의 마지막

금융위기

 

 

여기에서 미국인 제임스씨는 일본의 다나카 씨와 마찬가지로 긴축을 선택합니다. 1%에 불과했던 저축률은 현재 4.5%로 역대 최고를 기록합니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되찾기 위한 20년째 긴축과 2008년 가을 이후 미국의 긴축, 이제 한국도 긴축을 준비하기 시작하면서 세계 경제는 소비가 감소하고 대혼란에 빠져있습니다.

 

이에 각국 정부들은 빚을 내서 민간사업을 대신해 공공공사라든지, 도로,강등의 공적사업으로 소비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현재 얼핏보기에 경제성장률이 플러스를 보이고 있는 것은 정부가 이런 공적사업으로 간신히 경제성장을 올리고 있는 것인데 사실은 전세계 정부의 빚은 계속해서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내년이 되면 이런 정부의 소비가 불가능 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 남은 것은 국민이 스스로 소비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공적자와 민간소비의 침체 민간이 소비를 계속하느냐 허리띠를 계속 졸라매느냐에 따라 경제성장여부가 달려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살펴보면 우리가 IMF를 버틴 큰 힘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90년대 후반 한국의 ①저축률은 세계 1위 15%에 육박하는 어마어마한 수치였습니다. 이는 자연스럽게 자영업이 증가하게 만들었는데 이때 우리나라 자영업은 36%로 증가했습니다. 보통 한 나라에 자영업이 20%가 넘으면 나라가 무너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경제는 이상하게도 다시 살아났죠. 왜 그런지 아십니까? 바로 ②연대의식이 물결처럼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자영업은 1년간 손익분기점을 못 넘기면 무너집니다. 그런데 IMF이후 우리나라 자영업은 지인들이 도와주고 하나씩 사주면 그 돈으로 옆 가게 가서 물건 하나씩 또 사주고 그 가게는 또 옆가게 가서 하나씩 사주고.. 이런 식의 연대의식이 물결처럼 이어졌기에 자영업도 살아나고 나라경제도 살아났던 것입니다. (저도 기억나네요.. 시아버님이 지인 양복점에 가서 남편보고 양복 사줘야 한다고.. 몇 년간 그렇게 양복을 맞춰입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10년이 지난 지금 현재 우리의 저축률은 3%로 뚝 떨어지고 OECD국가 중 꼴찌에서 두 번째라고 합니다. 그 첫째 이유로는 집장만에 있겠고 두 번째는 바로 교육에 있습니다.

우리나라 1인당 부채는 통계상으로는 4600만원, 실제로는 1억 5천~2억에 해당할 것으로 보입니다. 지난 10년간 우리나라는 심각한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빚을 지는 것은 오늘 당장 죽어도 좋다는 각오로 하는 것이고,

저축이 없다는 것은 위기를 헤쳐나갈 힘이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위기로부터 나는 얼마나 안전할 수 있을까요? 부채와 저축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남의 땅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내 땅을 지켜야 합니다.

 

IMF때를 보면 ‘같이 살자’ 라는 의식이 강했습니다. 구명조끼를 하나 던져주면 주위의 다른 사람에게 같이 살자 손을 내밀어 주었죠.

지금은 그때의 그 연대의식이 다 사라져버렸습니다. 집 앞에 작은 슈퍼 또는 시장을 놔두고 우린 슈퍼 슈퍼마켓으로 발을 돌립니다. 36%였던 자영업이 매해 26000개씩 소멸하고 있다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언젠가는 돌고 돌아 나에게 피해가 오게 되는 것입니다.

 

① 부채비율을 낮춰야합니다.

② 저축률을 높여야합니다.

③ 사회적 연대란 손을 다시 잡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다시 위기가 왔을 때 극복하기 어렵습니다.


존 마에다 RISD 총장 인터뷰(조선일보) Eye to the people

10년만에 만난 천재적 스승과 제자… "21세기는 예술가들이 먹여 살릴 것"
20세기엔 과학ㆍ기술이 경제 주도
이젠 디자이너들이 이끄는 창조경제가 새 비즈니스 창출
"세상을 움직이는 진짜 힘은 현실 속 사람들 간의 상호작용 SNS로는 이룰 수 없어"
"리더는 전지전능하지 않아 실수를 인정하는 게꼭 필요한 리더의 자질"

존 마에다(John Maeda·45) RISD(Rhode Island School of Design·로드아일랜드디자인스쿨) 총장. 윤송이 엔씨소프트 부사장.

두 사람이 지난 8일 서울에서 만났다. 10년 전 이들은 미국의 매사추세츠 공대(MIT)에서 한 건물을 쓰는 교수와 학생이었다. 4층 미디어랩에서 마에다 총장은 부학장을 맡고 있었고, 윤 부사장은 같은 건물 3층에서 신경과학으로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다.

둘의 공통점? 그들은 '천재'로 분류된다. "학계의 스티브 잡스." "단순함이라는 디자인의 기본철학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구현한 천재." 포브스와 뉴욕타임스 등 미국 언론은 마에다 총장을 이렇게 평가한다. 그의 디지털 아트 작품은 스미스소니언 쿠퍼 휴이트 국립디자인미술관과 뉴욕 현대미술관에 영구 소장돼 있다. 윤 부사장은 서울과학고와 KAIST 졸업 이후 3년 반 만에 MIT박사학위를 따 '천재소녀'로 이름을 알렸다.

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윤 부사장은 "MIT 시절부터 마에다 교수님을 존경해왔다"고 했다. 치열한 학력 경쟁을 늘 '1등'으로 뚫어왔던 그에게 마에다 총장은 경계를 뛰어넘는 대담함과 창의성이 지닌 가능성을 보여준 사람이었다. 윤 부사장은 최근 마에다 총장의 책 '리더십을 재설계하라'를 번역했고, 이를 계기로 Weekly BIZ가 만남의 자리를 마련했다. 망설이는 그에게 마에다 총장은 "한국사회의 리더가 된 윤송이의 모습을 직접 보고 싶다"는 이메일을 보내 설득했다. 인터뷰는 윤 부사장이 주로 묻고 마에다 총장이 답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10년 만에 처음 만난 제자에게 마에다 총장이 한지를 가로·세로 10㎝로 잘라 만든 명함을 건넸다. 명함 위에는 'John Maeda president@risd.edu'라고만 적혀 있었다.

―(윤송이) 직접 만든 명함인가?

(존 마에다) "각 나라를 여행할 때마다 명함을 만든다. 나는 한지를 좋아한다. 인사동에서 산 거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바로 손을 움직여 뭔가를 만드는 것이 나 같은 디자이너들이다. 창조성은 머릿속에서만 맴돌다 끝나는 것이 아니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즉시 실행하고, 그 과정에서 머리와 실행이 서로를 자극해 시너지를 내는 것이다."

―명함이 너무 단순하다 싶을 정도인데.

"이름과 연락처 외에 필요한 게 있나? 컴퓨터과학자인 내가 평생 몰두한 고민은 어떻게 하면 기술을 보다 인간친화적으로(humanizing) 만들 수 있을까였다. 답은 '단순함'(simplicity)이었다. 애플이 성공한 이유이기도 하다. 스티브 잡스의 디자인 원칙은 '뭘 추가할지가 아니라, 뭘 뺄지 생각하라'는 것. 기기 성능이 아무리 복잡하고 좋아져도 유저에게 다가갈 때는 최대한 단순한 형태여야 한다는 것이다.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쓰기 편하도록 말이다. 그게 디자인의 핵심이고 창조적 사고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잡스는 디자이너들을 제품 개발 과정에 참여하도록 했다. 그 자체가 혁신 아니었나 싶다.

"(앞에 놓인 물컵을 집어들며) 디자이너의 역할은 이 물컵을 어떻게 하면 더 반짝반짝하고 예쁘게 보이도록 할까 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보다 창의적으로 물컵을 만들 수 있을까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내 비즈니스를 더 창조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 내 제품과 서비스를 더 창조적으로 만들어 팔 방법. 당신이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면 당신은 벌써 디자이너다. 새로운 비즈니스를 창출하는 '창조 경제(creative economy)'는 이런 사람들이 이끌게 될 것이다. 20세기를 먹여 살린 것이 과학과 기술이었으면, 21세기는 이런 디자이너들이 주도하는 창조경제가 될 것이다."

'존 마에다와 윤송이'

―(―부분은 이하 윤송이) MIT의 천재 컴퓨터 과학자가 디지털 아티스트로 방향을 바꾼 계기가 궁금한데?

(" " 부분은 이하 존 마에다) "나는 원래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그런데 강한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있었던 내 부모님이 수학이나 과학으로 성공해야 한다고 했다. 두 분은 일본에서 이민와 두부를 만들어 파는 일을 했다. 매우 고된 일이었다. 그런데다 자식까지 예술을 하면 굶어 죽는다고 생각했다. 당시 부모님이 들어본 대학은 하버드와 MIT가 전부였기 때문에 난 그 중 MIT에 들어갔다.(웃음) MIT에서 학사와 석사를 딴 후에도 디자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일본 쓰쿠바 대학의 예술&디자인 인스티튜트에서 박사를 땄다. 그 후 모교인 MIT로 돌아와 1996년부터 미디어랩 부학장을 맡았고, 2008년에는 RISD 총장이 됐다."

―생긴 지 135년 된, 미국의 가장 오래된 디자인스쿨 총장이 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좀 놀랐다. 디자이너출신으로는 최초의 대학 총장 케이스 아닌가?

"난 예술가적 창조성이 21세기를 만들어갈 것이라 믿고 있었다. 거기에 RISD 같은 디자인스쿨의 역할이 있는 것이고. 제2차 세계대전 전만 해도 MIT는 괴짜 과학자들이 모인 학교였지만, 전쟁 후 과학과 기술이 발전하면서 MIT는 20세기 첨단산업을 주도하는 대학이 됐다. 이제 RISD같은 디자인스쿨에서 당시 MIT와 같은 '역할 변화'가 일어나야 할 때다."

21세기 리더십의 핵심, 창조성

―내가 경영 현장에서 느낀 것은, 막연한 비전을 넘은 '구체적인 동기부여' 그리고 일이 실제로 굴러가게끔 하는 결단과 추진력이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그전엔 그걸 몰랐다. 끊임없이 배우는 중이다. 당신은 리더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창조성이다. 창조적 리더십의 법칙들은 다음과 같다. '아마도'(maybe)와 같은 모호함 인정, 채찍보다 당근 쓰기, 생산적으로 실패할 줄 알기, 공개적으로 비난받을 각오 하기, 계속된 배움. 우리는 이제 헌신, 빠른 의사결정, 하드워킹 같은 전통적 리더십의 장점에 이런 창조적 리더십의 법칙들을 적용해야 한다."

―동감한다. 말씀하신 것 중 자기 실수를 인정하는 것은 리더로서 꼭 필요한 자질이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동료들에게 '나는 전지전능하지 않다.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다, 나의 실수는 지적해달라'고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들과 벽이 생긴다. 중요한 정보가 내게 들어오지 않고, 나도 현실을 보지 못한다.

"절대 동감이다."

―기업 입장에서 좋은 인재를 뽑는 것만큼 중요한 게 있을까 싶다. IT기업 특성상 우리 회사가 보는 것은 태도다. 어차피 기술 변화는 너무 빨라서 1년만 지나도 세상이 바뀐다. 따라서 그런 흐름을 겸허하고 적극적으로 배우려는 태도를 지닌 사람들에게 좋은 점수를 줄 수밖에 없다. 그런 인재들을 뽑아도 이들의 잠재력을 꽃피게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일 텐데.

존 마에다(왼쪽 사진) - 세계적인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컴퓨터 공학자. MIT에서 학사와 석사학위를 딴 뒤, 그래픽 디자인에 매료돼 일본의 쓰쿠바(Tsukuba) 대학의 예술&디자인 인스티튜트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MIT 미디어랩 부학장을 거쳐 2008년부터 로드아일랜드스쿨오브디자인(RISD) 총장을 맡고 있다. 윤송이(오른쪽 사진) - 서울과학고와 KAIST 졸업. 2000년 MIT에서 컴퓨터신경과학 뇌인지과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맥킨지컴퍼니를 거쳐 만 26세 나이에 SK텔레콤 상무를 역임했으며, 2008년부터 엔씨소프트 부사장ㆍ최고전략책임 자로 일하고 있다.
"당신과 같은 리더의 역할이 중요하다. 리더는 조직원들의 실수에 너그러워야 한다. 또, 리더 본인이 열렬한 탐험의지를 보여야 한다. 아주 어린 직원이라 할지라도 그의 아이디어에서 배울 게 있다면 배워야 한다. 마지막으로, 관념적 사고에 능해 언제나 큰 그림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총장 취임 직후에 금융위기가 터졌고, 가장 먼저 본인 연봉을 삭감했다고 들었다. 기사가 달린 자동차와 회원제 식당 멤버십도 반납했고, 총장 집무실도 줄였다. 학생 식당에서 음식을 서빙하고, 캠퍼스에 새로 도착한 신입생들의 기숙사 짐으로 날라주고, 교수진을 위해 아침식사를 준비했다는데 그것 역시 창조적 리더십인가?

"그건 예술가인 내게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다. 특정 사안에 대해 RISD를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 속에 들어가 직접 그 일을 해보는 것뿐이었다. 예술가는 만드는 것과 생각하는 것을 구분하지 않는다. 아이디어와 창작이 공존하고 서로 영향을 미친다. 직접 부딪쳐 보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배운다.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손을 적시고 더럽히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이런 예술가의 태도야말로 창조적 리더십의 핵심이다."

―교수님은 디지털 아트 분야에서는 거물이다. 그런 당신이 총장을 맡은 후 SNS를 활용해 조직원들과 스스럼없이 소통을 시도해서 화제가 됐었는데.

"처음엔 블로그, 트위터, 페이스북, 이메일과 같은 디지털 세계에서 진짜 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 그런 도구로도 조직을 이끄는 것이 가능할 것이란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는 실제로 살아 숨 쉬는 이들을 설득해 내 방향으로 이끌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사람들은 보다 많은 전자메시지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interaction)을 원한 것이다."

―지금 트위터는 하지 않나?

"그 외 다른 것은 하지 않는다. 트위터도 가끔 들어가 내 생각을 기록하는 정도다. 한번 SNS를 하기 시작하면 일일이 모든 답에 응해줘야 한다. 그런 식으로는 어떤 일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옛날 방식으로 이끌기로 했다. 한 번에 한 가지 관계를 쌓는 것. 교직원들과 티타임을 갖고, 밤늦게 학생들과 조깅을 하며, 학생들이 모여 서로 얘기할 수 있도록 내가 스스로 피자를 구워 나르거나 하는 일 말이다. 이런 상호작용은 시간이 많이 걸리고 돈도 많이 들지만 정말로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그런 것이다."

새로운 비즈니스를 만들어내는 '창조경제'

2008년 존 마에다와 리복이 함께 제작한‘타임태니엄’(Timetanium)이라는 이름의 한정판 운동화. 운동화 겉면에는 마에다가 제작한 그래픽 이미지가, 안쪽에는 이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사용한 수학 공식이 친필로 적혀 있다. 이 운동화는 14시간 만에 다 팔렸다. / 출처 AIGA
―새해가 다가오고 있다. 경제전망은 어둡고 기업 입장에서는 앞으로 어떤 큰 그림을 그리고, 어떤 인재를 써야 할지의 문제가 절박하다.

"21세기는 창조경제로 그려볼 수 있다. 새로운 형태의 비즈니스를 창조해내는 것이 창조경제다. 우리 학교 졸업생 중 에어비앤비(AirBandB)란 회사를 만든 이들이 있다. 만약 당신 집에 빈방이 있으면 이 회사 사이트를 통해 다른 이들에게 렌트해 주는 것이다. 방을 이베이에 올리는 거나 마찬가지 개념이다. 지금 그 회사는 수십억 가치를 지닌 회사로 성장했으며 할리우드 스타 애쉬튼 커처도 투자에 나섰다. 이런 창업의 세계에 디자이너의 역할이 클 것이다. 창조적 아이디어 하나로 사업을 일으키는 디자이너 말이다. 이들이 손을 대면, 소비자들은 같은 돈으로 보다 창조적인 방식의 라이프스타일을 누릴 수 있다. 이것이 21세기 문화다."

―동감한다. 디지털 기반 경제는 새로운 시도를 하는 데 드는 비용을 크게 줄였다. 예술가들은 남과 다르게 바라보고 새로운 도전을 하도록 훈련받은 사람들이다. 이런 예술가들이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혁신적인 변화를 주도해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얼마 전 스티브 잡스가 세상을 떠났다. 잡스야말로 예술과 기술을 접목해 산업의 판도를 변화시킨 인물이다. 그를 어떻게 평가하나?

"그가 만든 건 복잡한 첨단기술이 구현된 전자제품이었지만, 그걸 통해 사람들의 오감을 사로잡았다. 그는 디자인의 힘을 알았다. 유저 경험에 초점을 맞춰 디자인(디자인의 단순함)으로 기술과 대중의 상상력을 동시에 장악한 사람이다. 자신이 속한 산업(IT)을 초월해, 시대의 아이콘이 된 이유다. 잡스와 애플은 단순히 휴대폰이나 컴퓨터를 만들어 낸 게 아니라 이 기기들을 아름답게 만들었다. 디자인을 통해 기술을 인간친화적으로 만들었고, 사람들로 하여금 복잡한 기술을 쉽게 이해하고 활용하도록 만들었다. 아이팟은 하나의 컨트롤 버튼으로 기능 조작을 통합시켰다. 아이폰의 경우엔 외관에 컨트롤 버튼조차 보이지 않는다. '작은 것이 힘이 세다(less is more)'는 단순함의 철학이 담겼다."

애플 제품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경험'을 얘기한다. 기기를 통해 사람들이 얻는 즐거움, 신선함 말이다.

"복잡한 컴퓨터 설비, 카메라보다 무거운 사용설명서로는 그런 경험을 만들지 못한다. 우리는 사람이다. 세계를 오감으로 느끼고 싶어하며 되도록이면 보기 아름답고 창조적인 것을 원한다. 이걸 가능하게 하는 이들이 디자니어이며 아티스트이며, 대학들은 이제 이들을 세상과 연결하려는 시도를 해야 한다."

예술·디자인에서 국가경쟁력 나온다

2005년 카르티에 현대미술재단에서 열렸던‘자연’전시에 걸렸던 작품. 자연이 주는 여러 가지 느낌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표현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의 경쟁력 회복을 위해 STEM을 강조했다. 과학(science), 기술(technology), 공학(engineering), 수학(mathmatics) 말이다.

"나는 21세기에 경쟁력을 갖추려면 STEAM이 돼야 한다고 본다. 즉 예술(Art)을 추가해야 한다는 말이다. 직관, 디자인, 감정은 다가올 창조경제를 설명하는 명확한 행동지침이다. 그동안 아티스트와 디자이너들의 역할이 과소평가돼왔다. 기술, 과학, 투자은행가들에 의해 지배돼온 경제였다. 그들이 20세기를 먹여살렸다면, 이제는 아티스트와 디자이너들이 21세기 리더십을 잡아야 한다. RISD도 사실 MIT는 크게 다르지 않다. MIT의 우뇌 버전이라고 보면 되는 것이다. 컴퓨터 공학자이자 MIT교수였던 내가 디자인 스쿨 총장이 됐다고 했을 때 기업들이 큰 관심을 가졌다. 이들 모두 '우리가 뭘 잃어버리고 있지?'(what did we miss)라고 묻고 있었고 우뇌형 사고방식을 통해 더 성장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기업들은 지금 우뇌형 인재들을 도입하고 싶어 안달이다. 세상을 창조적으로 보고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발명하는 인재들 말이다."

―동감한다. 조직 안에서도 좌뇌형 인재와 우뇌형 인재가 모두 충분한 역량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리더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쳐 있으면 소통 방법이나 시각도 그쪽으로 치우쳐져 다른 성향의 구성원을 인정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때문에 리더들은 균형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 난 오른손 잡이지만 그림을 그릴 때 일부러 왼손으로 그릴 때가 있다. 미국의 미술 교육가였던 베티 에드워즈(Edwards)의 이론을 따른 것인데, 평소에 쓰지 않는 쪽의 뇌 감각이 표현되게 해보는 것이다. 익숙한 것만이 언제나 가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한 방법이다. RISD는 우뇌형 인재들이 모여있는 곳이다. 좌뇌형 인재들이 중심이 된 일반 기업, 산업 현장에 우뇌형 인재들이 고루 투입되려면 RISD 같은 교육기관의 역할이 클 듯하다. RISD에서는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 한국의 대학들이 참고할 만한 게 있지 않을까 싶은데.

"내가 RISD에 와서 하고 있는 것도, 예술만을 위한 예술과 자본주의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예술 수업에 금융의 기본 과정을 넣는다든가 커리큘럼에 지적 재산권, 제품을 브랜드화하는 법, 계약하는 법 등을 넣은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우리 학생을 세상의 신생 기업들과 계속 연결해줘야 한다. 이제 문제는 어떻게 하면 더 기술을 정교하고 복잡하게 만들까가 아니라 세계를 어떻게 하면 더 인간적으로 만들 수 있을까다. 기술은 도구일 뿐이다. 지금 우리 시대가 간절히 필요로하는 것은 창의적 사고와 휴머니티다. 사람들은 잡스와 같은 CEO가 비즈니스스쿨이나 엔지니어링 스쿨에서 나오지 않을 거라 말한다. 맞다. 그런 이들은 아트와 디자인 분야에서 나올 것이다."

인문학 멘토 '이지성' 작가 (국민일보 퍼온글) Eye to the people

‘인문학 멘토’ 이지성 작가 “진정한 인문학은 약자를 위한 실천”


2004년 12월 31일 밤 서른 살 무명작가 이지성은 전화를 받았다. 대학 동창이었다. 잔뜩 취해 있었다. “너 너무 비참하다. 난 너를 존경하지만 13년 글을 써도 안 됐으면 이제 그만해야 하지 않겠니.” 그는 울먹이며 “가슴 아프다. 정신 차려서 결혼도 하고 정상적으로 살면 좋겠다”고 했다. 이지성은 “알았다”며 끊었다.

이지성(37)은 2007년 가을 ‘여자라면 힐러리처럼’으로 떴다. 미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의 출세 요인을 분석한 자기계발서였다. 각 분야 1인자의 인생에서 성공 법칙을 뽑아낸 ‘꿈꾸는 다락방’은 100만부를 돌파했다. 2009년 출간한 ‘스물일곱 이건희처럼’은 최근 영어로 번역돼 미국 서점에 깔렸다.

여러 사람이 읽고 고무됐다. 인생이 바뀌었다는 독자도 있다. 대부분 권태에 젖고 삶의 바닥을 헤매다 이지성의 책을 만났다. 그들에게 울림이 컸다. 생존 욕구를 일깨웠다.

이지성은 지난해 11월 인문고전 독서법 ‘리딩으로 리드하라’를 내고 인문학 멘토(조언자)로 각인됐다. 정·재계 인사들의 독서교사로 회자돼 유명세를 치르기도 했다. 22일 서울 여의도에서 만난 이지성은 “나는 특정 인사의 가정교사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비참하게 사는 사람이 내 독자”라고 말했다.

교대 입학

이지성은 1993년 3월 작가가 되기로 했다. 전주교대 2학년 때였다. 학교 도서관에서 운명처럼 받은 느낌이었다고 이지성은 말했다. 교대는 아버지 권유로 진학했다. 이지성은 재수해서 92년 입학했다.

그 전까지 이지성은 책과 거리가 멀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받은 독서상은 의외였다. 교실에 비치된 20여권을 읽은 대가였다. 몸이 아파서 책읽기 말곤 할 게 없었다고 이지성은 설명했다.

중학교 3학년 말에는 종말론 서적을 탐독했다. 호기심에서였다. 교회 창고에 100여권이 있었다. 연구 자료였을 것이다. 다미선교회의 시한부종말론을 접했다. 신도들이 곧 하늘로 들려 올라간다는 내용이었다. 세상이 망한다는 대목에 충격을 받았다. 친구들에게 ‘손잡고 천국 가자’는 편지를 3장씩 썼다.

교대 합격 후 아버지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과 장자의 ‘장자’를 권했다. 이지성은 장자에 빠져 명상 소설을 찾아다녔다. 순수이성비판은 어려웠다. 3분의 1쯤에서 포기했다. 아버지도 안 본 책이었다.

이지성에게 작가는 생애 첫 목표였다. 아버지에게 “중퇴해야겠다. 교사는 안 맞는 것 같다”고 했다. 아버지는 뭘 할 건지 물었다. “산에 들어가서 책 읽고 글 쓰려고요.” 아버지는 빗자루를 휘둘렀다.

손가락질

자주 결강했다. 도서관에서 책 읽고 글을 썼다. 주로 시를 지었다. 필명은 이지운(二志雲)이라고 붙였다. 학교 복사실에서 원고를 무더기로 복사했다. 출판사 20∼30곳에 보냈다. 모두 반송됐다. 집 우체통이 넘쳤다. 발신자 주소를 학교로 옮겼다. 원고는 학교 우체통에도 쌓였다. 친구들이 혀를 찼다.

글은 한 번도 채택되지 않았다. 임용고시 경쟁률은 높아졌다. 학생들은 입시공부 하듯 준비했다. 이씨는 시만 썼다. 평판은 나빠졌다. “병신 미친놈 사이코 또라이 등 별 얘기 다 들었어요. 그때 교대 분위기가 공부 안 하는 학생은 사람 취급을 안 했어요. 그렇게 멸시받은 건 난생 처음인 듯해요.” 후배들도 피했다. “(이지성과) 같이 있으면 인생 조지니까 옆에도 가지 말라”는 말이 돌고 있었다.

96년 졸업했다. 평점은 4.5 만점에 2.2였다. 임용고시 응시 자격이 안 됐다. 이지성은 전북대 법대 3학년에 편입했다. 입대를 미루고 글공부를 더 하겠다는 심산이었다. 부모는 임용 미달 사태를 노렸다. 전북대 도서관에는 낙방한 교대 동창이 몰려왔다. 이지성이 법대에 가서도 정신을 못 차렸다는 말이 퍼졌다. 97년 시집 ‘언제까지나 우리는 깊디깊은 강물로 흐르리라’ 등 2편을 냈다. 안 팔렸다.

군대

98년 전북대 졸업 후 육군에 입대했다. 이등병은 책을 보거나 글을 쓸 수 없었다. 독서를 허용해 달라고 대대장에게 간청했다. 그는 찌푸리며 말했다. “디스 이즈 아미(This is army).” ‘여긴 군대야’라는 의미로 한 말이었다. 대대장은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지성은 “허락 안하면 청와대에 터뜨리겠다”고 했다. 다음 날 내무반장이 “이등병은 매주 독후감을 써서 보고하라”고 하달했다.

자대 배치 직후 이지성은 교회에 갔다. 내무반에서 유일했다. 유령 취급을 받았다. 아무도 말을 안 걸었다. 이지성은 교회에서 초코파이 두 상자를 얻어다 내무반에 풀었다. 6개월간 반복했다. 사납던 내무반장이 점호 후 말을 걸었다. “막내가 큰일 했다.” 이지성은 제대 전 9개월간 군종병으로 일했다.

병장 때 임용고시를 봤다. 교원 명예퇴직으로 인력이 모자란 시기였다. 이지성도 응시 기회를 얻었다. 군복을 입고 경기도교육청 시험장에 갔다. 합격했다. 지원자 1100명 중 903등이었다. 이지성은 2000년 8월 전역하고 다음 달 분당의 서현초로 발령났다.

전향

첫 학기 교사 생활은 엉망이었다. 학생이 군대 졸병처럼 보였다. 월급날만 기다렸다. “그토록 싫다며 피했던 길인데 작가로 첫발도 못 떼고 원점으로 돌아간 기분이었죠. 애들이랑 학부모에게 상처를 많이 줬어요. 악덕 교사였죠.”

겨울방학이던 이듬해 1월 자취방에서 한마디가 들렸다. ‘Are you happy(행복하니)?’ 이지성은 거울을 보고 있었다. 절박함에 사로잡혔다. 텔레비전을 버렸다. 독서와 필사에 매달렸다. 하루 2, 3권씩 읽고 2, 3시간씩 베껴 썼다. 국내외 유명 작가의 자서전과 인터뷰를 수집했다. 너덜대도록 읽었다.

빈민의 삶이 눈에 들어왔다. 이지성은 달동네 옥탑방에 살고 있었다. 집들은 대부분 단칸방이었고 10가구 중 3∼4가구는 단전·단수 안내 공지가 붙은 동네였다. 노인들은 폐지 수집으로 버텼다. 종일 모아 2000∼3000원씩 벌었다. 자녀들은 정신질환과 알코올중독에 시달렸다. “그분들과 대화하면서 너무 안타까웠어요. 비참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죠. 가난이 질병 이상으로 무섭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때 이지성은 ‘처절하게 사는 사람을 위해 글을 쓰겠다’고 다짐했다. 허세를 버렸다. 자서전과 평전을 섭렵했다. 3년간 2000권을 읽고 150여권을 필사했다. 자기계발서 작가로 전향했다.

실천

독서를 강조한 이지성의 자기계발서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문학을 실용학문으로 만들었다는 지적이다. “실용이 나쁜 건가요. 저는 인문학이 먹고사는 데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에게 인문고전을 왜 읽어야 하는지 이야기하는 겁니다. 진정한 인문학은 약자를 위한 실천 아닐까요.”

이지성은 NGO인 기아대책과 함께 아프리카에 학교와 병원을 짓고 있다. 약 2년간 7000만원을 기부했다. 상반기 특강 수입 2400만원도 모두 쾌척했다. 이지성을 멘토로 삼은 독자도 동참하고 있다. 출판사를 상대로 기아대책 후원엽서를 책에 붙이는 운동도 시작했다. 그의 쪽방촌 독서교육은 활발하다.

“출판계가 나눔에 무감각했던 것 같아요. 연예인도 기부와 봉사에 열정적인데 어떻게 보면 작가가 더 열심을 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출판계에 기부 문화가 정착되면 좋겠어요.”

이지성은 덧붙였다. “거창한 말을 했는데, 옳은 일이니까 하는 거지 제가 인격적으로 바른 사람이어서는 아니에요.”


"생살을 깎아 먹여도 아깝지 않은 내 아들 반기문"(여성조선 퍼온글) Eye to the 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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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조선] "생살을 깎아 먹여도 아깝지 않은 내 아들 반기문"

신현순 여사는 지팡이를 내던지고 아들 반기문을 끌어안았다. / 조선일보 DB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 母情


아흔의 노모가 지팡이를 내던지고 달려간 곳은 장남의 품속이었다. 매일같이 108배를 올려가며 그저 건강하기를 빌고 또 빌었던 아들이었다. “생살을 깎아 먹여도 아깝지 않다”던 노모의 아들은 얼마 전 연임소식을 전해온 반기문 유엔(UN) 사무총장이다. 1년 만에 다시 아들의 얼굴을 매만졌다는 노모는 벌써부터 아들이 그립다.

“나는 친정 할머니가 가르쳐주신 대로 우리 애들을 키웠는데, ‘물에 돌팔매질 하지 말거라.’, ‘나뭇잎 함부로 따지 말거라.’, ‘땅에 떨어진 물건이라도 함부로 주워오지 말거라.’ 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어. 기특하게도 우리 애들은 누구 하나 속 한 번 안 썩이고 가르친 대로 착실하게 커줬어.”

반기문 UN 사무총장의 어머니 신현순 여사(90)를 만난 건 충북 충주시의 한 아파트 노인정에서였다. 연분홍 장미가 그려진 곱디고운 치마에 하얀 리넨 재킷을 차려입은 신 여사는 아흔이라는 나이가 무색하도록 정정한 모습이었다. 약속도 없이 찾아간 기자 일행이 당황스러울 법도 했지만, “어떻게 그 멀리서 나를 보러 왔느냐”며 손을 꼭 잡아주기도, 등을 쓸어내려주기도 했다.

노인정 한쪽에서 화투삼매경에 빠져 있던 할머니들이 “아들이 유명해서 사진도 찍히고 좋겠다”는 농담을 건네자 신 여사는 “여기저기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데 얼마나 정신이 없었는 줄 모른다”며 웃었다. 며칠 전 있었던 반기문 사무총장의 고향 방문행사를 떠올린 모양이었다. 반 총장은 지난 14일 고향인 충북 음성군 원남면 상당1리 윗행치마을을 방문했다. 유엔 사무총장이 된 후 네 번째 방문이었다. 선친 묘에서 성묘를 한 뒤 광주 반씨 조상의 사당에서 참배를 마친 반 총장 내외는 지난해 말 복원된 생가를 둘러보기도 했다.

수많은 환영 인파에게 “여러분의 따뜻한 성원에 힘입어 열심히 세계 평화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뜻을 전한 반 총장은 모교 충주고등학교를 찾아 후배들을 만나기도 했다. 6일간의 한국 방문일정을 마친 반 총장은 이날 다시 미국으로 떠났다.

딸 반정란 씨 내외와 함께 살고 있는 노모는 집으로 가자며 기자의 손을 이끌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아파트 앞 슈퍼에서 사들고 간 두유박스를 한사코 노인정에 두고 가라며 손사래를 치던 모습이었다. “여기 할머님들 잡숫게 그냥 두라”는 말씀 속에는 분명 따뜻한 배려가 배어 있었다.

공동 출입문을 열고 도어락의 숫자를 누르는 등 아흔의 노인에게 결코 간단하지만은 않을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어느 깔끔하고 소박한 가정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사진기자가 안쓰러웠던지 노모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선풍기 바람을 쐬라고 성화였다.

반기문 총장의 어머니 신현순 여사 / 조선일보 DB
이리저리 돌아가는 선풍기 고개를 바라보며 그렇게 인터뷰가 시작됐다. 기자는 노환으로 청각이 불편한 신현순 여사의 곁에 바짝 다가앉아 귀에다 대고 큰 소리로 또박또박 질문을 해야 했다.

불과 3일 전 아들을 부둥켜안은 노모는 “그날이 꼭 꿈결 같았다”고 회상했다. 연임 이후 처음으로 고향 방문에 나선 아들을 만나기 위해 노모는 미리부터 행사장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학수고대 하던 아들이 들어서자 노모는 지팡이를 내던지고 얼른 아들을 얼싸안았다. “1년 만에 만났는데 너무 좋았지 뭐. 바빠서 제대로 얘기도 못 했어. 그저 건강해라. 끼니 잘 챙겨먹어라. 그러고 말았지.”

아들 얘기에 진작부터 화색이 돌던 신현순 여사는 반 총장의 어린 시절을 들려달라는 말에 마치 어제 일인 양 생생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기문이 위로 형이랑 누나가 있었어. 토실토실하니 잘 크던 애들이 꼭 두 살을 못 넘기고 고만 가버리더라고. 세 번째 들어선 애가 기문인데 앞에 애들이 잘못돼서 집안 어른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 태기가 있자마자 친정 할머니가 무당을 불러다가 굿까지 했을 정도니까…. 나도 절에 다니면서 빌고 또 빌었어. 점점 배가 불러오는데 얼마나 조심을 했다고. 기문이를 낳은 건 초여름이었어. 그날 우리 숙모가 도토리묵을 쑨다 그래서 같이 도토리 물을 내는데 아무래도 애가 나올 것 같더라고. 집에 가서 낳아야겠다는 생각에 대문간을 막 나서는데 문지방을 넘기까지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몰라. 간신히 문지방을 넘어서 앞치마 끄르고, 치마 끄르고 애를 낳았지. 그런데 애 목에 탯줄이 세 번이나 감겨 있었어. 새파랗게 질려서 울지도 않더라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 그래 앞치마를 덮어서 가만, 가만 애기 몸을 주무르니까 그때서야 켁켁거리면서 울기 시작하는 거야. 애가 소담하니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

천신만고 끝에 얻은 아들. 어머니는 불면 날아갈까 쥐면 터질까, 애지중지 아들을 길렀다. 부유한 가정에서 가족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자란 어린 시절의 기문은 예의를 알고, 도리를 아는 착한 아이였다.

“우리 기문이는 참 착했어. 너무 착해서 가끔 미울 정도였지. 마을에 동갑내기 애가 하나 있었는데, 걔한테 만날 그냥 두들겨 맞고 오는 거야. 그러면 기문이 동생이 대번에 나한테 쫓아와서 ‘엄마, 형아 또 맞아. 형아 죽어.’ 그랬지. 속은 상해도 ‘너도 같이 때려라.’ 그러진 않았어. 나는 친정 할머니가 가르쳐주신 대로 우리 애들을 키웠는데, ‘물에 돌팔매질 하지 말거라.’, ‘나뭇잎 함부로 따지 말거라.’, ‘땅에 떨어진 물건이라도 함부로 주워오지 말거라.’ 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어. ‘나중에 저승 가면 그대로 되돌려 받느니라.’ 그랬지. 기특하게도 우리 애들은 누구 하나 속 한 번 안 썩이고 가르친 대로 착실하게 커줬어.”

3남2녀의 형제들 중에서도 유독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했던 장남 반기문은 어머니의 자랑이었다. 동네 어른들에게 90도로 허리 굽혀 인사하는 아이, 밥 한 술에 신문 한 줄을 읽던 아이, 다투는 동생들에게 찬찬히 그 이유를 묻고 이야기를 들어주던 아이, 그 아이가 바로 반기문이었다.

통운회사 소장을 지냈던 아버지가 빚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급격하게 가세가 기울었던 그 시절에도 기문은 동생들을 보살피며 집안일을 도왔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을 만큼 지독하게 공부했는데, 어머니는 아직도 밤을 새워가며 책을 읽고 공부를 하던 아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했다.

“‘좀 자거라, 자거라.’ 하는 말이 입에 붙어버렸어. 어쩌다 밥이 눌어 누룽지가 생기면 그거 박박 긁어서 공부하는 데 밤참으로 넣어주고 그랬지. 외교관이 꿈이라 영어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저기 댐 가는 길목에 비료공장이 하나 있었단 말이야. 거기에 있는 외국인 근로자를 만난다고 친구 서이서(셋이서) 만날 쫓아다녔어. 그 친구 이름이 뭐냐면….”

아흔이 넘은 노모는 50년 전 아들의 친구 이름까지 줄줄 꿰고 있었다. 아들에 대한 지극한 애정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반 총장이 서울대 입학시험을 앞두고 있던 그때 나무 밑에다 백설기를 쪄놓고 수십 번, 수백 번 절을 올리던 어머니는 실로 놀라운 일을 경험하기도 했다.

“우리 기문이가 서울대 입학시험을 치르고 와서 나한테 그래. 어젯밤에 꿈을 꿨는데, 벽에 웬 문제가 빽빽하게 적혀 있어서 다 풀어봤더니 다음 날 시험에 꿈에서 본 문제가 똑같이 나오더라고. 예삿일이 아니구나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서울대 외교학과에 수석으로 척 붙었지 뭐야.”

노모는 요즘도 매일같이 집 근처 절에 출근도장을 찍는다. 불상 앞에 앉아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치성을 드리는데, 그 정성의 중심엔 언제나 아들 반기문이 있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은 없어도, 유독 아픈 손가락은 있게 마련이다. “뭐니 뭐니 해도 장남이 최고”라는 노모의 얼굴에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애정이 서렸다. 노모의 지극정성은 반 총장을 지탱하는 힘이었다.

반기문 총장은 어머니 신현순 여사를 많이 닮았다. 노인정에서 한눈에 반 총장의 어머니를 알아볼 수 있었던 건 그래서였다. “반 총장님이 어머님을 많이 닮았다”는 말에 노모는 “나보다 저희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기문이는 아버지랑 판박이여. 점잖은 성격이며, 남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 아주 똑같아. 애 아버지 살아생전 내 소원이 뭐였게. 부부싸움 한번 해보는 게 소원이었어. 마음 단단히 먹고 한바탕 하려고 들면 고만 자리를 피해버리는데 싸움이 날 수가 있나. 한약방을 했던 시아버지도 아픈 사람들을 도와주곤 하셨어. 그러고 보면 사람 선한 게 집안 내력인 것 같아. 참 우리 남편 사진을 좀 보여줄꺼나.”

신현순 여사는 한 장 한 장 사진을 짚어가며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 조선일보 DB
주춤주춤 자리에서 일어난 노모는 방으로 들어가 장롱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쇼핑백에서 꺼낸 세 개의 액자 속에는 반기문 총장의 부친 고 반명환 선생과 신현순 여사의 사진이 담겨 있었다. “한 30년 전에 서울 구경 가서 찍은 사진인데, 양복 차려입은 품새가 근사하지? 참 멋쟁이셨어. 청주 농고까지 나온 똑똑한 양반이었는데…. 너무 일찍 가버렸지….”

시와 붓글씨에 능했다는 반명환 선생은 1991년 교통사고로 운명을 달리했다. 당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협상에 매진하던 반 총장은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고, 공동선언이 채택된 후에야 아버지 빈소가 있는 충주로 직행했다.

유치장에 갇혀 있는 교통사고 가해자를 돌려보낸 일도 반 총장의 인품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크고 작은 일화 중 하나다. 창고에 숨어든 도둑에게 “도둑이 되고 싶어 도둑이 됐겠나. 배가 고프니 그랬겠지” 하던 반명환 선생이나 “사고를 내고 싶어서 냈겠나. 피할 수 없어 그랬겠지” 하던 반기문 총장이나, 부자는 따뜻한 인품까지 꼭 닮아 있었다.

어머니에 대한 반 총장의 효심 또한 아버지를 닮은 것이라고 했다. “애들 아버지가 부모님한테 그렇게 잘하더니, 우리 아들도 똑같이 배웠어. 한 달에 서너 번은 꼭 전화해서 ‘어머니 건강조심하세요. 잡숫고 싶은 거 꼭 드세요.’ 신신당부를 한다고. 용돈도 풍족하게 주는데, 선물도 참 잘해줘. 특히 좋은 약 같은 걸 얼마나 많이 사다준다고. 내가 이렇게 건강한 건 다 새끼들 덕분이여. 나랑 같이 사는 우리딸은 오빠 한국 오기 전에 나 잘못되면 다 지 책임이라면서 고기며, 과일이며, 날마다 잘해줘. 내가 참 복이 많아.”

며느리 유순택 여사와 다정하게 손을 잡고있는 노모. / 조선일보 DB
인터뷰 내내 신현순 여사가 가장 많이 쓴 단어는 “착하다”였다. 그리고 착하디착한 아들보다 더 착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큰 며느리 유순택 여사라고 했다.

반 총장은 고등학교 3학년 때 ‘VISTA(Visit International Student to America) 프로그램’에 충청도 대표로 자동 선발되어 1등으로 시험을 마치고 다른 학생 세 명과 함께 미국에 다녀왔다. 백악관에서 케네디 대통령을 직접 만난 반기문은 그 일을 계기로 외교관의 꿈을 더욱 확고하게 키웠다고 한다.

당시 한국 대표로 선정된 반기문에게 이웃의 충주여고 학생들이 복주머니를 만들어 건넸는데, 외국에서 만난 친구들에게 기념선물로 나눠주라는 의미였다. 이때 완성된 복주머니를 대표로 전달한 사람이 당시 충주여고 학생회장이었던 유순택 여사였다.

“우리 며느리가 고등학교 때부터 집에 놀러오고 그랬어도 기문이 색싯감인 줄은 몰랐어. 다른 데서 자꾸 중신이 들어오는데 기문이가 싫다니까 분명 색시가 있구나 했었지. 나중에 기문이 친구한테 둘이 서로 좋아지내는 사이라는 걸 듣고서 내가 10월 동짓달에 바로 결혼시켜 버렸어. 겪어보니, 우리 아들도 착하지만 며느리는 더 착해.”

결혼 직전 유순택 여사의 어머니는 “남자가 해 지기 전에 집에 오는 것은 직업이 없거나 큰 병을 앓고 있을 때이니 반 서방이 늦게 들어오는 것에 대해 뭐라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아내의 내조 덕분에 반 총장은 업무에 매진할 수 있었고 승승장구했다.

반 총장은 유 여사와 슬하에 1남2녀를 두고 있다. 현재 아시아재단 사업부장으로 근무 중인 맏딸 선용 씨(41), 서울대 공대를 졸업하고 미국 UCLA 경영대학원 과정을 마친 뒤 현재 뉴욕 금융회사의 중동지점에서 근무하고 있는 아들 우현 씨(37), 유엔아동기금(UNICEF) 케냐사무소에서 국제기구초급전문가로 일하고 있는 막내 딸 현희 씨(36)다. 신 여사는 “아이들 모두 제 아비, 어미를 닮아 착하고 바르게 컸다”며 “늘 보고 싶다”고 전했다.

지난 14일 충북 음성에서 있었던 반기문 un 사무총장의 고향방문 행사 / 조선일보 DB
인터뷰 말미, 문득 ‘반기문 총장의 태생에 어떤 특별함이 숨어 있진 않을까?’ 하는 호기심이 들었다.
“꿈에 내가 어디를 막 가는데 길이 두 갈래로 나뉘더라고. 어느 한 길로 들어서니까 갑자기 하얀 도포를 입은 할아버지가 나타나서 다른 쪽 길로 가라지 않겠어? 그래 그 할아버지가 일러준 길로 걸어들어 갔는데 길마다 소나무가 다북다북하니 참 좋아. 한참을 가다 보니 조그만 오두막에서 우리 숙모가 나오데. 나한테 찹쌀떡 세 개를 주더라고. 그래서 내가 아들만 셋인가 봐.(웃음) 찹쌀떡을 받아들고 다시 걸어갔더니 이번엔 호두나무에 호두가 주렁주렁 열려 있어. 참 그 호두 좋구나 하면서 나무 가까이 가보니까, 그 아래 장끼 새끼가 푸드덕푸드덕 날아다니고 있는 거야. 그 꿈을 꾸고 나서 대번에 태기가 있더라고.”

두 시간의 인터뷰 끝에 “착한 끝은 있다”는 말과 “자식은 부모의 덕으로 커간다”는 말이 떠올랐다. 겸손함과 성실함, 상대를 먼저 살피는 배려는 반 총장이 부모님에게 받은 최고의 유산이었다. ‘생살을 깎아 먹여도 아깝지 않은 부모의 마음’을, 이날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권투선수 김주희(중앙선데이 퍼온글) Eye to the people

“복서는 눈 뜨고 펀치 맞죠, 난관 닥쳐도 눈 감지 마세요”

정영재의 스포츠 오디세이 <14> 스물여섯 챔프 김주희가 청춘에게 주는 글

"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딸 둘을 버리고 집을 나간 어머니, 치매로 걸핏하면 사고를 치는 아버지, 동생과 아버지 뒷바라지에 허리 펼 날이 없었던 언니…. 곰팡내 나는 지하 월셋방에는 햇볕 한 줌 들어오지 않았다. 300원짜리 크림빵을 훔쳐먹고는 자책감과 서러움에 제 뺨을 때리며 울었다.

편의점·주유소·호프집 등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하던 언니는 몰래 권투체육관을 다니고 있었다. 1999년 겨울, 언니 심부름으로 동생은 문래동 거인체육관을 찾는다. 그리고 권투라는 운명과 정문호 관장이라는 ‘새아버지’를 만난다.

김미나의 동생 김주희는 언니 대신에, 언니가 내준 회비로 권투를 배웠다. 권투가 너무나 좋아 죽을 만큼 훈련에 매달렸다. 주희는 선천적으로 몸이 약했다. 악성 빈혈이 있었고, 뼈는 쉽게 부러지는 ‘닭뼈’다. 희고 고운 피부는 몇 대만 맞으면 퉁퉁 부어올라 권투선수로서는 핸디캡이다.

김주희는 이 모든 역경을 넘어서 세계 정상에 있다. 고3이었던 2004년 12월 국제여자복싱협회(IFBA) 최연소 챔피언에 올랐다. 차근차근 챔피언 벨트를 수집했고, 지난 9일 여자국제복싱평의회(WIBC) 라이트플라이급 챔피언 결정전에서도 이겨 세계 여자프로복싱 5대 기구 통합 챔피언에 등극했다.

형편은 나아졌지만 아직 그가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는 줄어들지 않았다. 요양원에 모신 아버지는 풍까지 맞았다. 혈혈단신 미국으로 날아간 언니는 고된 노동 때문에 암에 걸려 수술을 받았다. 2006년 염증으로 오른쪽 엄지발가락(사진)을 잘라낸 그는 권투를 그만둬야 할지도 모를 벼랑 끝까지 몰렸다.

김주희는 왼손이 강하다. 약점만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강점이었다. [중앙포토]
그래도 김주희는 씩씩하다. 자신을 덮친 모진 운명을 향해 쉴 새 없이 펀치를 날린다.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지만 대학원(중부대 교육학과) 석사과정을 마치고 졸업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요즘은 기업체 특강 강사로도 인기 절정이다. ‘도전과 열정’을 주제로 담담하게 풀어내는 그의 이야기는 어떤 고담준론보다 울림이 크다. 지난달에는 책도 냈다. 자서전 할 수 있다, 믿는다, 괜찮다(다산북스)의 부제는 ‘스물여섯 챔피언 김주희의 청춘노트’다.

스포츠 오디세이가 지난 22일 거인체육관을 찾았다. 김주희의 왼쪽 눈은 아직 충혈되고 부기가 빠지지 않았다. 요즘 사는 얘기로 가볍게 몸을 푼 뒤 ‘본 게임’은 책 얘기로 했다. 밑줄 치며 읽었던 단락을 내놓으면 그가 차분하게 설명하는 식이었다. 스물여섯 김주희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청춘을 향해 조용조용 말을 풀어냈다. 하지만 그건 그의 온 삶과 체중이 실린 강펀치였다.
 
-기회가 찾아온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기적 같은 일이었으니까.(35p)
언니는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미국에 편도 비행기표만 들고 갔다. 우린 비빌 언덕도 없었다. 뭘 배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굉장한 기회다. 기회는 찾아왔을 때 만들어가야 한다. 언니가 어렵게 번 돈으로 배운 권투니까 열심히 해야 했다. 언제까지 다닐 수 없다는 불안감 속에서 정말 최선을 다했다.

-왼손을 재발견하고 나서는 누구에게도 고정된 단점이나 장점은 없다는 걸 깨달았다.(47p)
보통 오른손잡이에게 왼손은 잽을 던지는 선제 손이다. 난 빈혈·닭뼈·약한 피부 등 모든 게 핸디캡이었다. 그런데 관장님과 훈련을 하다가 왼손이 굉장히 강하다는 걸 알게 됐다. 생각해 보니 어릴 적 난 왼손잡이였다. 왼손이 강하니 상대가 압박을 받았다. 날 때부터 단점만 갖고 태어난 사람은 없다.

-헝그리 정신이란 배고픈 것이 아니라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것이다.(62p)
권투선수에게 헝그리 정신은 다운 당한 뒤 벌떡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누구나 위기에 처했을 때 극복해 나가는 방법이 있겠지만 권투선수는 본능적으로 일어나는 걸 배운다. 권투를 통해 어떤 어려움을 만나도 극복할 수 있다는 배포가 생겼다. 배추 장사를 한다고 해도 그 분야에서 톱이 될 자신 있다.

-두렵다고 눈을 감아버려서는 안 된다. 눈을 감는다고 벌어진 일을 피해가지는 못하니까. 아무리 무
섭더라도 눈 똑바로 뜨고 맞서야 하는 것이다.(71p)
권투선수는 펀치를 맞는 순간에도 눈을 뜨고 있어야 한다. 눈을 감는 순간 또 맞는다. 어려운 일을 만나면 눈 질끈 감아버린다고, 참는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다. 나도 힘든 일 있을 때 방에 틀어박혀 울고불고 아무한테도 못 털어놓고 꾹꾹 참아본 적도 있다. 포기하는 것보다 그나마 낫지만, 문제 해결 방법은 아니다. 눈 부릅뜨고 정면으로 맞서 치고 나가는 게 가장 현명하고 마음 편하다.

-상상할 수 없이 멋진 일들이 세상에는 많았고, 권투로도 그런 멋진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느꼈다.(92p)
모든 순간이 다 멋졌지만, 18세에 첫 세계챔피언이 된 순간(사진)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내가 뭐 대단하다고 TV에 나오고, 영화 찍고, 강의하고. 이렇게 강의할 날이 올 줄은 정말 몰랐다. 원고도 없다. 처음부터 제 얘기를 하는 것뿐인데 호응해 주시는 게 신기할 뿐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로 직업을 삼고 돈 버는 것은 굉장한 행운이고 좋은 일이다.

-무식한 자는 복종을 못하지만 지혜가 있는 자는 기꺼이 순종할 수 있다.(160p)
관장님은 권투선수 무식하다는 얘기를 가장 싫어하신다. 그래서 늘 “공부해라” “책 읽어라” 얘기하신다. 난 관장님 뜻을 잘 알고 죽으라면 죽는 시늉도 한다. 링에 올라가면 제정신이 아니다. 본능적으로 때리고 피한다. 10년 이상 함께한 관장님은 쟤가 왜 저런 제스처 하는지 안다. 그래서 지시를 내리고 작전을 바꾼다. 권투는 혼자 하는 게 아니라 팀워크다.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절대 ‘그만’이라고 말을 해서는 안 된다.(169p)
관장님은 내가 운동하다 쓰러져도 물을 뿌리며 “일어나” 하실 분이다. 그런데 내가 발가락 수술 이후 심각한 우울증 증세를 보이니까 정말 진심으로 그만두라고 하셨다. 수술 직후에 꼼짝도 할 수 없어 바지에 소변을 본 적도 있다. 그때 관장님이 병원에 찾아오셔서 맛있는 것 잔뜩 사주시고는 “주희야, 이제 그만하자. 이젠 네가 스무 살 예쁜 아가씨로 살았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난 “지금까지 관장님이 모두 옳았지만 지금 하신 말씀은 틀린 거예요. 정말 힘들었지만 권투 하면서 살 수 있었어요. 저보고 그만두라면 죽으라는 겁니다”라고 말씀 드렸다. 그리고 한 번만 더 링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울며 매달렸다.

-진짜로 걱정해야 하는 순간까지는 걱정하면 안 된다. 걱정과 싸우면 누구든 지게 돼 있다.(203p)
난 하루에도 수십 가지 걱정을 달고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몇 달 동안 극도의 긴장과 집중 속에 준비한 경기가 끝나면 난 가장 겸 주부로 돌아간다. 월세와 공과금을 내고, 밀린 빨래와 청소를 하고, 아빠가 또 사고친 건 없는지 챙기고, 대학원 리포트 내고, 스파링 준비하고…. 처음엔 걱정에 포위돼 살았지만 지금은 20분 이상 생각해서 그날 해결 안 나면 다음 날로 갖고 간다. 이미 벌어진 일은 받아들이고 어떻게 해결해 나갈 건지만 생각한다.

-‘밥도 못 먹는 처지에 대학은 무슨 대학! 분수껏 살아라’라고 한 사람들에게, 분수껏 살라는 말을 듣고 눈물 흘렸을 나 같은 아이들에게, 나는 증거가 될지도 모른다.(225p)
유복한 집안에서 자란 사람들이 성공할 확률이 높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 같은 사람이라고 탈선하라는 법은 없다. 편견을 갖고 계신 분들이 적지 않다. 자기 처지에 대해 원망하면 끝이 없다. 누구든 열심히 했을 때 기회가 있고, 도와주는 사람이 분명히 있다, 열심히 하다 보면 좋은 날이 온다는 증거가 되고 싶었다. 난 ‘권투선수의 체중 감량에 대한 연구’로 석사 논문을 준비 중이다. 박사 과정을 밟아 내 분야의 최연소 교수가 되는 게 꿈이다. 지금은 넉넉하지 않지만 앞으로 돈도 많이 번다면 어려운 환경에 있는 친구들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게 내 인생의 최종 목표다.
-비가 오는 날에는 근처의 쇼핑센터로 가서 카트를 제자리에 밀어놓고 100원을 번다.(241p)
체육관 가는 길에 문래동 홈플러스가 있다. 쇼핑센터 입구에 쇼핑객이 택시를 타면서 버려놓고 간 카트가 몇 개씩 있다. 그거 다 돈이다. 알아보는 사람도 있지만 신경 안 쓴다. 카트 제자리 꽂아두는 게 뭐 훔치는 건 아니니까. 10원짜리 하나가 없어서 배고파 본 적이 있기 때문에 아끼는 게 습관이 됐다. 그런데 언니는 내가 궁상 떤다고 가슴 아파한다. 하지만 난 내가 맞아가며 떳떳하게 번 돈 일부를 기부한다. 남들보다 힘도 세니까 고아원이나 양로원 같은 데 가서 청소도 하고 빨래도 한다.

-성적표, 증서, 시합 때 입었던 운동복, 심지어 빠진 발톱까지 하나하나 모았다.(246p)
관장님은 “네가 다음에 유명해질 것에 대비해서 너의 역사가 될 만한 것을 모아라”고 늘 말씀하셨다. 그래서 훈련하며 빠진 발톱까지 모았다.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 자신을 채찍질하기 위해서다.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내가 이렇게 좋았던 순간이 있지 않았나. 그 무대에 다시 오르는데 왜 그걸 두려워하나’라고 스스로를 다그치는 것이다.


남이섬 CEO 강우현(조선일보 퍼온글) Eye to the business

그의 상상력엔 남이섬 14만평도 좁다

'책벌레'와 '상상가'에게 빈 소주병을 주고 재활용을 주문한다. 병 속을 깨끗이 씻어 그 안에 기름을 담는 이는 책벌레다. 상상가가 피식 웃는다. 빈 소주병을 불에 녹인 다음 주둥이를 잡아당겨서 비튼다. 비췻빛 꽃병이다. 납작하게 누르고 뭉쳐도 본다. 비췻빛 타일, 보도블록, 샹들리에, 커튼, 심지어 크리스마스트리가 탄생한다.

삼류 유원지에 나뒹굴던 빈 소주병들이 그렇게 아름다운 '작품'으로 변신했다. 고성방가 난무하던 쓰레기 섬이 대한민국에 유례가 없는 생태문화관광지로 부활했다. 도깨비 방망이를 휘두른 상상가의 이름은 강우현(58). '우왕좌왕', '좌충우돌'을 모토로 삼고 사는 철없는 중년이다.

마흔아홉 살에 시작한 모험이었다. 교수 자리를 마다하고 접수한 문제투성이 섬이라 주위에선 혀를 찼다. 섬 주인에겐 두 가지만 요구했다. 월급 100원과 맘껏 상상하고 저지를 수 있는 자유. 10년 후. 27만명(2001년)이던 남이섬 관광객이 200만명(2010년)을 돌파했다. 1년 매출이 200억원대다. 삼성, 포스코, LG의 임직원들이 '경영수업'을 받으러 남이섬으로 몰려온다. "한 수 배우겠다"며 대통령도 오고 도지사도 온다. "재미나서 내 마음대로 한 것뿐인데 사람들이 창조 경영, 역발상 경영이라며 찾아오네요. 162명 중 157등이었던 낙제생을 찾아오네요. 하하!"

9월로 남이섬 CEO 취임 10년을 맞는 강우현을 만나러 갔다. 선착장엔 전에 없던 철탑이 솟아 있다. 25층 아파트 높이의 철탑에서 쇠줄을 타고 남이섬으로 날아서 들어오란다. 외마디 비명은, 반달 모양 14만평 섬의 풍광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고공(高空)에서 곧장 탄성으로 바뀌었다. 장난기 가득한 눈동자를 굴리며 강우현이 물었다. "배 타고 들어오는 것보다 100배는 재미나지요?"

“이것도 내 작품!” 25층 높이의 철탑에서 강우현 사장이 쇠줄을 타고 남이섬으로 낙하하고 있다. 반달 모양 남이섬 풍광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재활용 은행잎

―10년 사이 스타가 되셨다.

"나는 그냥 53년생 강우현일 뿐이다. 영원히 53세이고 싶은 남자일 뿐이다.(웃음)"

―취임 10년을 맞은 소감은?

"날 잘 아는 사람들은 두 가지에 놀라워한다. 산만 한 내가 10년이 되도록 안 잘린 것, 매출이 한 번도 꺾인 적 없는 것."

―술병으로 트리 만들고, 고장 난 양변기로 화분 만들고, 죽은 나무엔 시를 쓴다. 쓰레기만 골라 섬을 단장한다.

"애당초 섬을 꾸미고 말고 할 돈이 없었다. 처음엔 돈 아끼려고 재활용, 지금은 습관이 되어 재활용한다."

―가을이면 온통 노란빛으로 물드는 '은행나무 길'도 재활용이라고 들었다.

"남이섬은 겨울이 일찍 온다. 은행잎도 빨리 떨어지고. 집이 서울 송파에 있는데 가을이면 거리에 은행잎이 천지여서, 구청장에게 물었다. 저 은행잎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고. 청소해 매립하는 데만 4000만원이 든단다. 옳거니, 전부 나 달라고 했다. 은행잎 200t을 남이섬에 뿌렸더니 연인들 뒹구는 은행나무 카펫이 됐다."

―'상상력'이 비결이라지만, 당신은 굉장한 현실주의자다.

"무지하게 현실적이지. 우리 어머니가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일 좀 그만하라'고 혀를 차셨지만 내게는 다 실현 가능한 일들뿐이었다. 나는 상상, 공상에서 멈춘 적이 없다."

―취임할 때 화제가 됐던 '월급 100원'도 결과적으로는 매우 실리적인 거래였다.

"월급은 100원만 달라고 했지만, 매출이 두 배 이상 오르면 수익금은 내가 다 갖겠다는 옵션을 걸었다. 그땐 누가 봐도 매출이 오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거래가 성사됐다.(웃음) 그만큼 뭘 해도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충만해 있었다."

―남이섬 사장이 되기 전에도 벌여놓은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본업인 그래픽 디자인에 동화도 쓰고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사람들의 모임'도 이끌고. 재생용지로 공책 만들어 나눠주는 환경운동까지 했더라.

"그래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거지. 그런데 그런 경험들이 지금 남이섬을 키워가는 데 엄청난 자양분이 됐다. 네트워크가 장난 아니다. 독에서 흘러나온 물이 흙에 스며들어 아무 데나 씨를 뿌려도 열매가 생기고 꽃이 핀다.(웃음)"

월급 100원 사장
내 맘대로 하는 조건으로 대학원장 자리 대신 택해
재미나서 한 것뿐인데 창조경영이라며 배우러 와

재활용으로 재탄생
술병 트리·양변기 화분… 서울서 버린 은행잎으로 명물 '은행나무 길' 만들어

직원 정년
80세경륜 넘치는 선배세대 조기퇴진은 어불성설
종신 직원 되면 죽을 때까지 月80만원

14만평짜리 캔버스

―유명대학 대학원장직을 제안받았다던데, 왜 남이섬을 선택했나.

"남이섬의 달빛, 별빛, 그리고 새벽 물안개를 보았다면 누구라도 이 섬에 매료당한다. 내가 섬을 좋아하니 주인장이 작업실을 하나 내주더라. 틈날 때마다 와서 그림을 그려 작업실 밖에 걸어두었더니 관광객들이 그 앞에만 모여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너가 찾아왔다. '디자이너가 남이섬 사장 하면 재미있지 않을까요?' 하더라. 아무것도 간섭받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수락했다."

―열에 아홉은 빚투성이 섬 대신 교수 자리를 선택한다.

"내 입장에선 14만평짜리 캔버스를 공짜로 얻는 셈이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사장 되고 나서 처음 한 일이 청소였다.

"흥청대는 유원지 이미지에서 벗어나야 하니까. 음식 가격 내리고, 술집은 섬 밖으로 내보냈다. 술판, 스피커 고성이 사라지니 남이섬에 고요가 찾아왔다. 전깃줄은 땅속에 묻고, 알록달록한 천막은 치우고, 폐품은 재활용하니 남이섬에 자연색이 돌아오더라. 밤 10시면 무조건 불을 껐다. 별빛과 달빛이 살아났다. 나무에 농약을 안 치니 벌레가 생겼고, 벌레가 생기니 새들이 날아왔다. 새똥에 묻어온 씨앗에서 야생화가 피어났다."

―고생도 많이 했다. 섬에서 쫓겨난 상인들의 공갈협박에 시달렸고, 보복성 고소고발로 경찰서도 번질나게 드나들고.

"60번도 넘는다.(웃음) 한번은 밤 10시 넘어 배를 타고 섬을 나오는데 괴한들이 달려들어 나를 강물에 빠뜨리더라. 그 후론 어떤 일을 당해도 겁 안 난다. 당하고만 있을 수 없어서 라면 두 박스 분량으로 우리도 그들의 죄를 고발했다. 5년 만에 평화의 시대가 왔지. 재밌는 게, 고소고발로 전과가 수십 건인 나한테 대검찰청에서 남이섬 성공 스토리로 특강해달라는 요청이 온다."

사진=채승우 기자
'겨울연가' 그 후…

―한류의 원조 '겨울연가' 덕을 많이 봤다.

"취임한 그해 11월 윤석호 감독이 남이섬으로 답사를 왔다. 직원이 드라마 촬영 견적비를 200만원 잡아 제시했다기에 내가 깜짝 놀라 윤 감독에게 달려갔다. 촬영료라니! 언제든 와서 찍고 가시라고 했다. 제작발표회도 남이섬에서 해주면 통돼지 잡아드리겠다 약속했지. 운이 좋게도 그해 남이섬에 눈이 펑펑 쏟아졌고, 제작발표회 날 눈 덮인 남이섬이 전국에 생중계됐다."

―외국인 관람객도 1년에 20만명이나 된다더라. '겨울연가' 특수가 아직도 이어지는 걸까.

"드라마의 영향력은 길어야 3년이다. 한번 꺾이면 롤러코스터다. '겨울연가' 너머의 무엇을 팔아야 했다. 그래서 시작한 게 '세계책나라축제' '세계청소년공연축제' 같은 국제문화 행사다. 유니세프, 환경운동 단체들의 활동 터전을 섬 안에 만들어주고, 국내외 예술가들이 창작활동 할 수 있게 방갈로를 예술가의 집으로 꾸몄다. 봄 축제 때는 국내의 외국인 근로자들이 맘껏 놀고 쉬다 가라고 차편, 배편, 음료와 식사를 공짜로 제공한다. 세계 최고 아동문학상인 한스 안데르센상 공식스폰서 자격도 일본 닛산자동차를 제치고 우리 남이섬이 따냈다. 세계화가 살길이다."

―직원 100명 중에는 전직 교장, 대기업 임원, 공무원, 화가도 있다더라. 정년 80세라는 고용방식으로 화제가 됐다.

"사오정, 오륙도라는 말로 경륜 있는 선배 세대의 조기 퇴진을 당연시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우리는 직원을 뽑을 때 나이, 학력, 경력을 묻지 않는다. 정직하고 부지런해야 한다는 것이 최우선 자격이다."

―남이섬엔 언제까지 있을 건가.

"딱 10년만 하려고 했는데 '조폭' 같은 우리 직원들이 다리를 잡고 안 놔준다. 내가 섬에 있으면 일이 많아져서 싫지만, 없으면 불안하단다.(웃음)"

―직원들을 혹사시키나 보다.

"남이섬은 온종일 행사고 1년 내내 축제니까. 행사도 외부에 용역을 주지 않고 직원들이 전쟁 치르듯 치열하게 한다. 직접 기획하면 엄청난 상상력이 동원되고 그 경험이 개인의 역량 개발로 이어진다."

책 읽지 말고 놀아라

―어릴 땐 산만하고 엉뚱한 게 공부 못하는 아이의 전형이었다.

"배운 게 많고 책에서 읽은 게 너무 많으면 상상할 수 없다. 빈 술병을 기름병 정도로 쓰는 게 책벌레들의 한계다. 술병을 녹여서 굴려보고 눌러보면 장난감도 만들고 조명등도 만들 수 있다. 나는 책읽기 대신 많이 보고 만지고 경험했다. 장난도 많이 쳤지. 유치해져야 상상할 수 있다."

―용의주도한 스타일은 아니다.

"투석문로(投石問路). 먼저 돌을 던져놓고 길을 묻는다.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야 한다는 말이 제일 싫다. 뒤도 잘 안 돌아본다. 돌아본다고 그 발자국을 도로 밟을 수도 없잖은가. 차라리 새로운 발자국을 내는 게 낫지."

―남이섬으로 낙하하는'집 와이어(zip wire)'는 강우현의 '상상+추진력'의 산물이다.

"나는 아이디어가 생각나면 일단 그림으로 그린다. 2001년 남이섬에 들어와서 저 쇠줄을 그렸더랬다. 배 대신 공중에 줄을 매어 타고 들어오면 얼마나 재미날까, 하면서. 실제로 그런 기구가 해외에 있더라. 완전 무동력이다."

―2010년 집 와이어를 개시하던 날 김문수 경기도지사, 이광재 전 강원도지사도 왔다.

"남이섬에 쇠줄 타고 들어오라고 홍보해야 하는데, 두 도지사 얼굴이 떠올랐다. 남이섬은 행정구역상 강원도 춘천이지만 지리적으로는 경기도 가평에 가까우니 두 도에 걸쳐 있는 셈이다. 두 분 다 참석 가능하다는 말을 전해 듣고 보도자료 안 뿌렸다. 방송카메라들이 안 따라오고 배기겠나. 내가 헤드라인은 좀 뽑을 줄 안다.(웃음)"

성공은 실패의 아버지

―집무실 천장에 매달린 '도깨비 방망이'는 무엇에 쓰는 물건인가.

"잘나갈 때 자만하지 말라고 뚝딱! 잘 안될 때 걱정하지 말라고 뚝딱!"

―낙천적이시다.

"안 되는 일 돌아보면서 불평할 시간이 내게는 없다. 할 수 있겠다 싶으면, '아닐 불(不)' 자는 다 빼고 뛰어든다. 성공 여부는 내가 정하는 거다."

―솔직히 남이섬이 '작품'으로서 완성도가 있는 섬은 아니다. 재미난 재활용 섬일 뿐이지.

"예술? 너나 하라고 하세요."

―남이섬의 성공 비결은?

"시동을 걸되 거꾸로 거는 것. 성공은 실패의 아버지! 웃음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성공했다고 느끼는 바로 그 순간이 위기다."

―앞으로 계획하고 있는 '장난'은?

"남이섬 컨셉트를 가지고 산과 골짜기로 들어갈 거다. 돈 안 되는 일만 벌이는 괴짜들, 발명가들의 창조 밸리를 만들 거다. 헬기 타고 답사하러 다닌다고 내가 요즘 바쁘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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