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타쟁이의 최후(퍼온 글)

1. 차트는 과거의 거래 내역을 궤적화 시킨 그림에 불과하다. 만약 차트 분석이


가능하다면 단기 주식투자 대회에서 우승했다는 사람들은 몇 년간 차트 분석에


통달한 사람들이므로 분명 수년 이상 장기간 연속적으로 대회에서 우승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단기 주식투자 대회에서 수년 연속 우승한 사람은 본적이 없다.


대부분 단기 대회에서 우승 후 증권방송에서 강연 등으로 돈을 번다.


이유는 간단하다. 다시 우승할 확률이 지극히 낮다는 걸 그들 스스로가 알기 때문이다.


살다보면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은 불가능한 확률의 일도 매주 일어나는데


(복권의 경우, 각종 자동차 사건사고를 생각해보면 쉽다)


주식 대회에서도 우승한 사람들은 모두 승리-> 승리-> 승리-> 승리-> 승리-> 승리->.. 등으로


평생의 운이 한번에 다 따라와서 최고의 수익률을 내는 경우다.


그들 스스로도 그게 공부에 의한 필연적인 법칙에 의한 결과가 아니라



행운의 연속으로 이뤄진 결과란 걸 스스로가 잘 알고 있다.


만약 그것이 운이 아닌 필연적 필승 법칙이라면 세계의 각종 연금들은 각종 자산들을


그들에게 맡길 것이다. 단기간에 자금을 600% ~ 1000% 올려주는데 누가 돈을 맡기지 않으리?


하지만 어디에도 자산을 불려 달라며 그들에게 연금을 맡기는 곳은 없다.



만약 국가 재정을 그들에게 맡긴다면 대한민국은 재정적자든, 경상적자든

우려할 필요도 없이 세계에서 최고 부자 나라가 될 것이다. 하지만 세계 어느 나라도

나라의 재정을 그들에게 맡기지 않는다. 그런 수익률이 일관되게 계속 이어진다면

미국보다 더 큰 부자 나라가 될 수 있음에도 말이다.

그들은 한번 우승 후 "전문가"라는 명칭으로 책을 내고, 방송에서 주식 중개인으로 활약하며 돈을 번다.


방송에서 일부 솔직한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저는 신이 아닙니다. 제가 차트 분석해서 다 맞혔다면,


전 이미 빌딩 샀겠죠." 라고 솔직하게 차트분석의 한계를 인정하기도 하나 대부분의 전문가란 사람들은


사탕발림 말들로 목표가, 손절가 등의 의미 없는 기준 등을 제시하며 전문가 행세를 한다. 속지 말아야 한다.





2. 주식 시장에서 전문가는 따로 없다. 왜냐하면 시장은 분석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수십 년간 주식 시장에서 일정한 패턴이 있을 거라고 많은 사람들이 확신을 가지고 분석 연구하였지만,


그 어떠한 일정한 패턴도 없으며 마치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며 마치 정,신,병,자,처럼 항상 이해하기 힘든


행태를 띈다. 투자자가 시장을 계속해서 무한히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시장에 감정을 뺏기지 않아야 하고 (기쁨이든 공포든)


내가 이길 수 있는 상황이 올 때까지 몸을 깊숙이 숙이고 무한정 기다리는 방법뿐이다.





3. 증권사 방송은 마치 경마장의 장내 방송처럼 도박에 참여하라고


독려하는 도박 중개인에 불과하다. 그들의 목적은 어떻게든 시장 참여자들이


더 많은 거래를 하여 수수료를 챙기는데 목적이 있다. 절대 휘둘려서는 안된다.

또한 증시 관련 사이트의 메인 페이지에 가서 메인에 실린 글들이 어떻게 이렇게

예측이 정확한가 하며 놀래서도 안된다. 스포츠 뉴스도 이긴 팀의 뉴스를 처음 내보내고,

입시철 고등학교도 좋은 곳에 합격한 학생 순으로 합격 현수막을 적는다. 증권사 홈페이지

메인에 실린 각종 기사나 애널들의 글들은 수만명의 애널들이 쏟아낸 글중에 맞힌 것만 골라서

메인에 실은 것 뿐이다. 따라서 그 날 그 날 전부 다 맞힌 글들이 올라온다. 놀랄 필요가 없다.

또한 폐쇄형 유료 사이트는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만약 당신이 1000명의 사람에게 사기를 친다고 하자.

1000명을 각각 500으로 나눠써 A그룹에게는 어떤 주식이 내일 오릅니다, B그룹에게는 내일 내립니다..

다시 250명으로 나눠서.. 다시 125명으로 나눠서.. 다시 62명으로 나눠서..

이런식으로 4번 정도 연속으로 맞힌 마지막으로 남은 62명은 아마 당신을 주식의 신으로 알고

모든 걸 바치려 할거다. 추천주를 알려 주겠다는 유료 사이트도 이런 원리로 돌아간다. 당신은

어떠한 추천주를 받은 "특정 그룹"일 뿐이다. 그리고 그 사이트는 자신들의 수익률을 증명해줄 실제

증인들이 존재한다며 온갖 광고 문구들로 온 홈페이지를 치장한다. 그들에겐 사람이 많이 모이면 모일수록

좋은 일이다. 그룹이 많이 생기니까.


4. 손해를 보지 않는 것만으로도 수익률 상위에 링크된다.

증권사 투자대회의 결과표를 보면 모두 수익률 0%에서 시작하지만

대회가 끝날 때쯤엔 수익률 0%인 사람이 최종 순위의 최고 상위 20%,

아무리 낮아도 상위 45%에 포진해 있다. 대회 참가 신청만 해놓고 실제 거래를 하지 않은

수익률 0%의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전체 참가자의 딱 가운데 평균순위보다

더 높은 순위에 위치해 있다. 거의 모든 투자대회의 99%가 같은 결과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래를 하면 할수록 깡,통에 수렴하기 때문이다.

상위층에 랭크된 사람은 두 종류다.

단기의 경우>
테마주 도박, 옵션의 경우 콜/풋등의 2분의 1도박 등이 기가막히게 연달아 계속 맞아 운이 한번에 따른 자
(그리고 어느 순간에 이르러 더이상의 위험 행위를 중단하고 그 수익률을 유지한자),

장기의 경우>
버핏처럼 기업에 대한 탁월한 통찰력으로 오를 기업을 고른 후 자신이 승리할 때까지 무한정 기다린 자,
(무한정 기다리는게 전제 조건이 아니라 "기업에 대한 탁월한 통찰력"이 전제 조건..
하지만 대부분은 통찰력이 없다,)

를 제외하고는 시간이 지날수록 마치 벼랑 끝에 손목 힘 만으로 근근이 매달려 있는 사람들이

견디다 못해 폭포수 아래로 우수수 떨어지는 것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0%의 수익률 마저

지켜내지 못하고 결국 깡,통에 수렴하는 계좌를 보게 된다.


5. 투자는 기본이 30년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기간에 일확천금을 버는

요행수만을 바란다. 결국 자멸할 뿐이다. 부자가 되는 방법은 마음의 평정이다.

한번도 손실을 입지 않고 연간 7~12%씩만 꾸준히 수익을 내면 복리로

30년 후엔 1억이 20억~30억이 된다. 1억이란 원금에서 더이상 원금의 증가 없이 계산해도

저렇게 돈이 불어난다. 30년 동안 다른 수익원을 통해(직장월급 등) 저금을 통하여 원금이 계속

늘어나면 완주 종착역엔 20억~30억 보다 더 큰 돈이 모인다.

담담하고도 태연하게 긴 마라톤을 완주만 하면 된다.


6. 경제 성장과 주가 상승은 반드시 일치 하지 않는다.

중국 증시가 6000을 돌파하고 중국 경제 성장률이 10%를 손쉽게 연이어

돌파할 때 이런 경제 성장률이 20년은 넘게 이어진다고 전망하며 중국 증시도

매년 10%씩 상승할거라고  전망한 사람들이 있다. 말도 안되는 소리다.

만약 중국 증시가 매년 10%씩 상승한다면 20년 뒤엔 전 세계 자본의 90%가

중국 증시에 가있는 상황이 된다.

이런 식의 경제 성장률로 주가 상승을 따지면 우리나라 증시는 이미 종합주가지수

2000은 장난이고 10000을 돌파했어야 한다. 하지만 코스피 지수는 1989년에도

1000이었고 2009년 2월에도 1000이었다. 20년이 지났고 우리나라는 훨씬 더 성장했고

경제의 파이도 더 커졌지만 종합주가지수는 20년 전과 똑같다. 왜이럴까?

종합주가지수안에서 피,터,지,는 기업간의 전쟁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89년과 09년의 종합주가지수는 같은 1000이지만 살아남은 극히 일부 기업만을

제외하고는 상장 기업의 95%가 상,폐되어 물갈이 됐다.

KOSPI에 상장된 기업은 끊임없이 들어오고, 나가고를 반복하며 기업의 성장과 쇠퇴, 파산

그리고 신생 기업의 등장 다시 성장과 쇠퇴, 파산을 반복한다.

그리고 한 사업 분야의 파이가 커지면 경쟁 기업이 속속 몰려와 출혈 경쟁을 통해 이익을 나눠 가진다.

경제 성장과 주가 성장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 이유다.

하나의 1위 기업이 영원히 그 사업을 독점하고, 무한히 그 사업분야의 이익을 가져갈 수 있다면

주가지수도 경제성장과 같이 함께 올라가겠지만 불행히도 주가지수의 동행은

자국내 상위 1위 기업이 경쟁에서 끝까지 살아 남을지 안남을지 알수가 없어 미지수이며,

(1위 기업이 2위 기업에 추격 당하며 1위 기업의 시총이 감소, 2위 기업의 시총이 증가하는

상황일때도 종합 주가 지수는 정체하는 모습을 보인다)

심지어 한국처럼 IMF같은 위기 상황으로 인해 상위 시가총액 종목이

줄줄이 상,폐되고 시가총액이 낮은 신생 기업들로 다시 채워질 경우 허망하게도

종합주가지수는 몇십년전 원점으로 돌아가기까지 한다.

일본은 버블 붕괴 후 10년이 넘는 장기 불황으로 니케이 지수 10년 차트가 우하향을 그리고 있다.

따라서 무작정 장기 보유하는 것은 답이 아니다. 장기적으로 최고의 수익률을 얻는 방법은

버핏처럼 기업을 고르는 통찰력이 있어 30년 후에도 살아남을 개별기업만을 골라 투자하는 것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버핏처럼 기업을 고르는 통찰력이 없어 개별 기업에 대한 주식 투자는 매우 위험하며,

따라서 최선이자 최고의 대안은 KODEX200이다. 여기서 중간 매도 없는 무한한 장기 보유를 하느냐,

아니면 연간 단위의 수익률 관리를 하느냐 하는 갈림길에서는 시총 상위 기업의 무한한 장기 성장을 믿는다면

장기 보유, 아니라면 연간 수익률로 관리 해야 할 것이다.




7. PER, PBR같은 숫자 놀음에 현혹되지 않는다.


"과거"의 실적으로 "현재"의 주가가 저평가 되었나 고평가 되었나 평가하는 것은


무의미한, 짓이다. 왜냐하면 "미래"의 실적에 따라 PER, PBR은 언제든지 바뀌기 때문이다.


이리 튈지 저리 튈지 모르는 미래의 실적을 예측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며칠 후 나올 지난 분기 실적도 예측이 틀리는데, 2분기 이상의 미래 실적 예상은 신의 영역이다.


따라서 최고점에서 매수라는 최악의 매수 타이밍을 가정했을 때 실적이 Turn하지 않을 경우


물,타,기를 통해서도 영원히 원금을 찾지 못하게 될 수도 있으며, 심지어 실적의 끝없는 악화로 상장 폐지까지도 가능하다.





8. 회계 팀을 믿어선 안 된다. 특히 코스닥 기업의 회계 팀은 분식 회계 전문가들이다. 일부 대기업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개별 기업에 대한 투자는 돈으로 할 수 있는 투자 행위 중 가장 위험하다.





9. 영속 기업은 없다. 우리나라의 경우 1965년 10대 기업 중 30년 후 1995년 살아남은 기업이 하나도 없다.

1965년 100대 기업 중 30년 후 1995년 살아남은 기업은 16개 불과하다. 대기업 100개 중 16개만이 살아 남았다.

생존률 16%.. (미국 21%, 일본 22%) 그나마 대기업만을 표본으로 한 수치다. 중소기업까지 가면 초토화 된다.

코스닥에 상장됐던 전 세계를 휘어잡을 것 같았던 IT벤처기업들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속칭 우량주도 마찬가지다. 대한민국이 망,하기 전까진 절대 망,하지 않을 것 같았던


국내 5대 은행 한일은행, 상업은행, 제일은행, 서울은행, 조흥은행이 모두 망했다.


그 당시로 돌아가 사람들에게 한일은행이 혹시 망,할 것 같냐고 물어봤다면 모두 미,친,놈, 취급했을 것이다.


대우그룹도 마찬가지이며,우량주라는 기준은 현재에만 적용 될 뿐이다. 리스크를 제로에 가깝게


최소화하기 위해선 `그 어떤 경우에도 절대 상,폐되지 않는다`라는 절대적인 조건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10. IT/반도체, 굴뚝주, 금융주, 소비주, 제약주 중에 누가 랠리의 선두에 올지 예측 자체가 불가능하다.


세부적으로 업종을 나누면 더더욱 그렇다.


종합주가지수는 연중 최고치를 뚫고 있는데 본인이 산 종목은 소외되어 홀로 놀고 있을 수도 있다.


그저 시장만 추종하는 게 가장 이상적이다.





투자 (어기면 손목 자른다)





1. 주식에서 돈을 잃는 이유는 사람의 심리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공포, 환희)


심리 작용을 원천 배제해야 한다. 매월 15일에 기계처럼 자동 매수한다.


매수하면서 지금 시장이 비싸다, 싸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다.





2. 상폐의 위험이 없고, 무한히 보유해도 전혀 두려울 것이 없는


KODEX200만 매수한다. KODEX200은 코스피에 상장된 200개 기업의


주가를 단순 추종만 하는 상장 지수 인덱스 펀드로서, 만약 200개의 기업 중에


몇개의 기업이 대표 종목으로서 대표성을 잃고 쇠락할 경우 매년 심사를 통해


기업을 퇴출하고 새로운 신생 기업을 200에 추가한다.


따라서 KODEX200은 영원히 상폐될 위험이 없다.



또한 상장 지수 펀드인 KODEX200은 매도시 0.3%의 증권거래세가 없어서

단기적으로 매수와 매도를 반복해도 부담이 적다.

또한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서 투자금액을 모두 투입 했음에도 수익을 내지 못하고

있을 때 1년간 4차례 1, 4, 7, 10월 나뉘어서 배당금까지 주므로 (1년으로 치면 시가배당률 평균 2% 안팎)

평균 단가까지 올라가는데 느끼는 "기다리는 지루함(?!)"이 덜하다.

(일반 펀드는 수수료는 꼬박꼬박 챙겨가도, 배당금은 주지 않는다)

게다가 상,폐될 염려가 없으므로 흔히 일반 주식을 샀을 때 느끼는

"이 회사가 망,하면 어쩌지?"하는 공포가 거의 제로에 가깝다.

또한 1년 수수료가 0.35%에 불과해 기타 다른 펀드에 비해 월등히 수수료가 낮다.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펀드 중에서 1년 수수료가 가장 높은 게 2.84%인데

만약 거치식으로 20년간 장기 보유 할 경우 수수료 만으로도 원금의 -56.8%가 날아간다.

자산운용사에서 발표하는 어떤 펀드의 수익률은 펀드를 사는 고객 입장에서 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연간 수수료를 빼먹은 수익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기 투자의 목적으로

일반 뮤추얼 펀드를 사는 고객들은 3가지를 고려한다.

첫째, 펀드매니저가 20년 이상 계속 같은 펀드를 맡으며 일관적인 수익률을 올릴 수 있는가?

둘째, 단순 시장만 추종하는 KODEX200 수익률을 상회할 수 있는가?

셋째, 만약 20년 후 KODEX200의 수익률을 상회하더라도 수수료까지도 이길 수 있는가?

대부분의 펀드매니저는 장기적으로 봤을 때 결국은 자기 회사에서 매년 빼나가는 수수료와 싸움한다고 한다.

연간 -2.84%씩 무조건 손해를 확정하고 게임을 시작하기 때문에 펀드 매니저는 단순 시장만 추종하는

KODEX200을 따라가기만 해서는 수수료 때문에 무조건 지게 된다. 따라서 수많은 기업을 탐방하며 버핏같은

혜안으로 미래에도 살아 남을 기업을 찾느라 분주하다. 하지만 10년 후, 20년 후, 30년 후 KODEX200과 같은

단순 시장만 추종하는 인덱스 펀드의 수익률을 이기는 펀드는 아주 극소수에 불과하다.

펀드매니저는 수많은 기업 중 살아 남을 기업을 골라야 하고, 고객은 수많은 펀드 중 살아 남을 펀드를 골라야 한다.

배당은 커녕 수수료까지 내면서.

1983년부터 2003년까지 20년간 S&P 연간수익률 대비 뮤추얼펀드 (수수료 포함) 평균수익률 차이는

무려 -2.70%였다. 20년간 사고 팔고, 사고 팔고를 반복하며 수익률 관리를 하고 20년간 살아남을 기업을

고르고 난리 부르스를 떨었지만 그저 아무것도 안하고 단순히 시장을 추종 한것만도 못한 결과가 나온 것이다.

무츄얼 펀드가 시장 수익률을 이기지 못한 데는 대부분 펀드의 연 수수료 때문이었다.

수수료를 제외하면 시장 수익률을 이긴 펀드도 20년간 발생한 연 수수료 때문에 결국 시장수익률을 밑돌았다.

살아 남을 기업을 고르는 것이나, 살아 남을 펀드를 고르는 것이나 역시 같은 힘든 일이다.

최선이자 최고의 대안은 KODEX200 이다.

다른 종목은 아무리 좋게 보여도 절대로 매수하지 않는다.



무조건 KODEX200만 매수한다.


(참고 서적 - 존보글의 모든 주식을 소유하라)




3. 매수는 무조건 원금의 12분의 1로 쪼개서 한다.



나머지 여유 자금은 모두 CMA에 넣어 둔다.

거치식으로 한방에 전액을 투자하는 방식은 하락할 경우


빠져 나올 시간을 무한히 연장 시킨다. 따라서 위험성을 최소화해야 한다.

나는 현재 1억 5천만원이 원금이므로


1회 매수 1천2백만원, 2회 매수도 1천2백만원, 3회 매수도 1천2백만원..


이렇게 12회까지 가능하도록 반드시 12분의 1로 쪼개서 매수한다.





4. 매월 15일 기계적으로 매수를 하고 +4%가 되면 이익금을 기계적으로 매도한다.


그리고 즉시 다시 1회 금액부터 시작한다.





5. 매월 15일 매수 후에는 -10%가 되든 -20%가 되든 다음 달 15일이 될때까지


절대 추가 매수하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도 시장이 싸다, 비싸다 판단해서는 안된다.


나는 매월 15일 기계처럼 매수만 하면 된다.


15일 매수 후 +4%가 되면 매수 후 언제라도 매도한다. 그리고 즉시 1회 금액부터 다시 시작한다.


시장은 정신병자라서 내가 싸다, 비싸다 논하고 예측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며


그를 이기려면 심리 작용을 애초에 배제해야 한다.


6. 손절매도 반복하면 결국 깡,통에 수렴한다.

개인이 살아남지 못하는 이유는 파란불 일 때 공포를 느끼며 팔기 때문이다.

KODEX200은 상,폐 되지 않으므로 공포를 느낄 필요가 없다.

기다리면 결국 내가 이긴다.

by 하야니 | 2009/06/22 19:57 | Eye to the stock | 트랙백 | 덧글(0)

이글루 퍼온글)여수고래 36세 박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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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타족이냐구요? 저희도 운용철학이 있습니다."

여수고래패밀리가 만든 투자법인 굿웨일즈(Good Whales)의 박현상 사장(36).

대부분의 전업투자자들은 '주식투자는 가족에게 절대 권하지 않겠다'고 입을 모으지만 그는 주식투자를 가족, 그것도 처갓집에 전파해 패밀리라는 이름을 달고 활동하고 있다.

그의 패밀리는 증권사가 주최하는 투자대회에서 온갖 상들을 휩쓴 '상금킬러'다.

세간에는 단순한 '실전투자대회 다수 입상자' 정도로 알려졌지만 박 사장과 처갓집 식구들은 고객들의 돈을 대리해서 관리해 주는 엄연한 투자법인의 구성원이다.

여수고래패밀리의 일터는 전남 여수가 아닌 광주다.

기자가 찾아간 곳은 광주광역시 북구 용봉동에 있는 굿웨일즈 사무실. 박 사장을 비롯해 처남과 두 명의 처제 등 4명의 고래들은 이곳에서 빠른 손놀림으로 주식매매를 하고 있었다.

모니터 앞에서 오른손과 왼손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클릭하는 솜씨에서 '단기매매 고수'의 내공이 배어 나왔다.

여수고래패밀리인 박현상(36) 굿웨일즈 대표이사


주식시장이 끝나고 난 뒤 고래들은 이날의 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박 사장이 종목 선택을 제대로 하지 못한 둘째 처제를 질타하기도 한다.

"뭐야, 상한가 친 엔케이바이오. 그걸 왜 못잡았어!" (박 사장)

"다른 종목을 살피느라 미처 그 걸 잡지 못했어요. 또다른 종목들로 수익률을 맞출께요."(둘째 처제)

고래들은 1시간여의 회의를 마친 뒤 기자와 인터뷰를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의 엄격했던 박 사장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고 부드러운 형부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순간이다.

환한 미소로 처제들을 살갑게 대하더니 휴대폰을 꺼내들고 아내와 통화하면서 '인터뷰를 시작해 잠시 통화가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둘째 아이를 임신중인 아내가 행여라도 인터뷰중에 통화가 되지 않는 고래들을 걱정할까 미리 배려한 것이다.

60㎡ 남짓한 사무실의 한쪽 벽면에는 '실력, 겸손, 공존'이라는 단어가 써있는 액자가 걸려있다.

이들의 투자신념과 철학을 반영한 것이다.

사무실 한켠에 마련된 별도공간에는 각종 대회에서 받은 트로피와 상장들이 즐비했다.

박 사장이 2005년부터 최근까지 각종 실적 주식투자대회에서 5위권 안에 이름을 올린 횟수는 11회다.

처제인 김미영씨(29)는 5회, 정미씨(27)도 10회에 달하는 수상경력을 자랑한다.

처남인 성부씨(25)도 대학생투자대회까지 합치면 상위권에 일곱 차례나 이름을 올렸다.

여수고래패밀리라는 이름은 박 사장이 증권계좌 아이디를 '돈고래'로 사용한 데에서 비롯됐다. 처가 식구들까지 증권투자에 나서면서 처갓집인 '여수'를 따서 여수고래패밀리로 이름을 붙였다.

박 사장의 고향은 전남 진도지만 처가에 대한 애정은 남다르다.

박 사장이 1남3녀 중 장녀인 부인과 결혼할 당시 처갓집은 전업투자자인 박 사장을 큰 반대없이 사위로 매형으로 형부로 받아줬다.

처제인 미영씨와 정미씨, 처남 성부씨까지 모든 형제들이 박 사장을 믿고 전업투자에 뛰어들면서 처가식구들이 든든한 지원군이자 동업자가 된 것이다.

◆단기매매에서 돈을 벌기 위한 조건…타이밍과 손절매

박 사장은 지난해 5월18일 여수고래패밀리에서 고래라는 이름을 따서 '굿웨일즈'라는 투자법인을 세웠다.

자본금 5500만원으로 세운 이 법인에 입소문만으로도 고객이 몰려들었고 그들이 맡긴 돈만도 50억원을 넘어섰다.

굿웨일즈가 주문대리인으로서 고객 계좌를 관리하고 있다.

박 사장은 "이제는 굿웨일즈의 고유자산을 불리기보다 고객돈 관리에 대부분의 시간을 쏟고 있다"며
 
"주식과 현금의 비중은 6대 4를 기본으로 유지하되 비율을 탄력적으로 조정하고 주로 단기 매매로 수익을 올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단기 매매가 기본이지만 종목에 따라서는 단기의 주기는 차이가 난다.

하루, 일주일, 이주일 등으로 단위를 끊어서 매매할 종목들을 선택한다.

이렇다보니 하루에 거래하는 돈이 100억원을 넘나든다.

매매수수료만 하루 최대 1000만원을 내기도 한다.

박 사장은

단기적인 운용전략에서 '타이밍'과 '손절매'

등 두가지를 중시한다.

우선 기술적인 분석에 따라 매수타이밍을 잡는다.

주가가 1차 지지선을 형성한 뒤에 눌림목(단기조정 과정)이 발생하게 되는데  눌림목을 상향돌파할 때가 바로 '매수타이밍'이라고 박 사장은 설명한다.
 
하지만 그 다음에 차트가 꼬부라지면 곧바로 손절매에 들어간다.

다시말해 주가는 소폭의 등락을 거치면서 일정가격대를 유지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어느 순간 오르는 타이밍이 있으며 이 시기가 주식을 사야할 때라는 이야기다.

차트가 꼬부라질 때, 즉 손절매를 해야할 때의 원칙은 '칼같은 2%'다.

단기매매에 있어서 '2%룰'은 반드시 지키는 것이 고래들의 법칙이다.

다만 대형주의 경우에는 5%까지도 가능한데 이는 대형주의 특성상 기관이든 외국인이든 누군가는 '매수'할 여력이 남아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매매가 한창인 여수고래패밀리


가족과 더불어 전업투자자로서 행복해 보이는 박 사장도 불과 10년전에는 가족 때문에 눈물을 삼켰던 날이 많았다.

박 사장은 1973년 전남 진도에서 교육자 집안의 1남5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누나나 여동생과는 다르게 귀한 아들 대접을 받으며 곱게 자랐다.

청소년 시절 박 사장은 부모님 속 한 번 썩히지 않았다.

그러나 1999년 주식시장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서 부모님의 기대와는 다른 길을 걷게 됐다. 

당시 인터파크의 공모주를 청약했는데 배정을 받은 뒤 주가가 치솟는 것을 보면서 직접투자를 결심했다.

이듬 해인 2000년 그는 대학졸업을 앞두고 주식 직접투자에 빠져 등록금은 물론 아버지가 물려주신 집 한채와 1억5000만원의 현금까지 몽땅 날리게 됐다.

주식을 제대로 시작해 보려는 찰나에 IT(정보기술) 버블 붕괴를 만났기 때문이다.

"2000년 1월2일과 3일에는 주가가 조금 올랐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부터는 걷잡을 수없이 떨어지더군요.

당시 삼보컴퓨터 계열 IT주로 각광받던 KDS 주가는 순식간에 6만원에서 5000원까지 꼬꾸라졌습니다."

떨어지는 주가가 오르기를 기대하면서 미수금까지 동원해 물타기를 했지만 주가는 하락을 거듭했다.

결국 신용불량자가 되어버렸다.

절망에 빠져있던 박 사장을 구제해 준 것은 다름아닌 부모였다.

집안 재산을 날린 박 사장였지만 부모님은 미수금을 해결해줬고 박 사장을 신용불량자의 늪에서 건져줬다.

"아버지가 당시 당뇨 합병증으로 병원을 들락날락할 때 즈음이었습니다.

병상에 계신 아버지와 어머니의 도움으로 두 달여만에 신용불량자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신용불량자에서 벗어났지만 주식투자는 계속했습니다."

박 사장은 위기를 벗어난 뒤 2001년 결혼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병상에서 계속 치료를 받아야 했고 박 사장은 주식투자를 손에서 놓지 못했다.

오히려 몇 천만원이나 되는 아버님 병원비를 보며 '내가 주식으로 많이 버나 병원비가 더 많이 나오나 해보자'는 죽기살기 심정으로 주식투자에 매달리게 됐다.

박 사장이 병원비를 벌겠다며 주식투자에 매달리는 동안 아내는 병원에서 시아버지의 병수발을 들면서 신혼생활을 보냈다.

4년여를 병원에서 보낸 아버지는 2004년 결국 세상을 떠났다.

박 사장은 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보며 마음을 다져먹는다.

그는 아버지가 투병 중에 사용했던 휠체어에 앉아 매매를 시작했다.

오후 3시 주식시장이 끝난 뒤 휠체어를 만지면서 자신의 불효에 대한 자책감과 아버지에 대한 죄스러움에 눈물을 쏟아내곤 했다.

눈물과 후회 속에서도 그는 투자패턴을 분석하고 실패요인을 뜯어보면서 자신만의 매매기법을 만들어갔다.

◆사부(師父)이자 형부(兄夫)…처가에 주식투자를 전파하다

자신의 매매기법에 확신을 얻은 박 사장은 같은 해 광주 시내의 금융학원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이 즈음에 처제와 처남들에게 직접투자를 권하면서 '돈고래'는 '여수고래패밀리'로 덩치를 키우게 된다.

당시 미영씨는 서울에서 일반 회사에 다니고 있었고 정미씨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취업을 준비중이었다.

형부의 권유를 받아들여 각종 증권관련 자격증을 따고 여수고래패밀리로 합류했다.

전남대에 재학중이었던 처남 성부씨는 학원에서 매형의 강의를 듣고 대학생 투자대회에 참여하면서 주식시장에 발을 내딛게 됐다.

이들의 매매스타일은 비슷하다.

각자 관심있는 종목들이 조금 다를 뿐 매매하는 타이밍을 잡거나 손절매하는 방식은 같다.

처음에 사부로부터 전수받은 노하우를 그대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고 뭉치면 산다고 했던가.

트레이딩의 세계에서 함께하는 기쁨은 큰 수익률로 돌아왔다.

투자대회에서 개인참가전은 물론이고 단체참가전까지 휩쓸었다.

'돈고래' 또는 '후천성돈결핍증'이란 아이디로 각종 대회에 참가한 뒤 오늘날 '여수고래패밀리'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2007년 부상으로 받은 상품권을 이용해 홍콩과 중국으로 가족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패밀리들은 연습삼아 증권사 투자대회를 참여하기 시작했고 상위권에 들면서 종잣돈을 불리기 시작했다.

이들이 3위권에 들어 각종 상을 휩쓴 대회들만도 2006년에 6개, 2007년에는 5개, 2008년에는 10개에 달한다.

◆지난해 4분기에 원금손실…"전투적인 매매로 수익률 폭발할 것"

그렇지만 여수고래패밀리는 올해들어선 각종 투자대회에 전혀 참여하지 않고 있다.

외부활동도 최대한 자제한다는 방침이다. 이는 지난 4분기에 입은 손실을 복구하고 내실을 기하기 위해서다.

투자대회의 이점이 예전보다 상대적으로 많이 줄어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2008년 10월말에서 12월은 악몽같은 시간이었습니다.

계좌가 반토막이 나는데 처참한 심정이었죠.

하지만 이럴수록 '겸손'하자며 마음을 다져먹고 회사 구조조정을 단행했습니다."

박 사장은 2008년 5월 투자법인 굿웨일즈를 설립할 때만해도 자산운용사까지 사업을 확대할 요량이었다.

서울사무소는 파생상품을 주로 다루고 그 분야 전문가 2명을 영입했다.

광주사무소는 고객들의 돈을 받아 패밀리를 주축으로 현물매매에 나섰다.

대회에서 경험을 바탕으로 50억원의 고객돈을 크게 불리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지난해 10월 리먼 브러더스 파산으로 인한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좌절을 경험했다.

고객들의 자금은 큰 타격이 없었지만 고래패밀리 개인 계좌는 손실이 컸다.

중소형 종목들은 손절매를 했지만 금호산업, KB금융, 두산중공업 등 대형주에 투자했던 고래패밀리들의 자금은 반토막이 됐다.

박 사장은 자신이 관여할 수 없는 분야인 파생상품 부분을 정리하기로 결심했다.

지난해 12월말 서울사무소의 문을 닫고 광주사무소만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광주사무소에서도 패밀리를 제외한 직원들을 모두 내보냈다.

사업을 늘리기 전인 지난해 4월의 대형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 셈이다.

"시장이 우리에게 겸손하라고 충고해 준 것 같습니다.

고객들의 돈에서 손실을 보게된 뒤엔 더욱 전투적으로 매매에 매달렸습니다."

박 사장을 비롯한 패밀리들은 요즘 어느 때보다 전투력을 발휘하고 있다.

특히 3월부터 시장이 살아나기 시작하면서는 ‘선도주(先導株)’의 움직임을 잘 살폈다.

선도주란 주가지수 또는 업종지수의 움직임에 앞서서 이끌어 주는 종목을 말한다.

"업종별로 선도주가 오르기 시작하면 나머지 종목들은 따라 오르기 십상입니다.

여기에 주가가 저평가된 주식을 골라 ‘매수’에 들어갔습니다."

박 사장이 꼽은 선도주는 다음과 같다. 건설업종에서는 GS건설이나 대림산업이 선도주이며 금융주에서는 KB금융을 시작으로 하나금융지주, 신한금융지주의 순으로 주가가 움직인다.

중공업에서는 대우조선해양, 한진중공업, 삼성중공업 등이 앞서서 업종의 주가를 주도한다는 이야기다.

고래패밀리들은 지난 4분기에 입었던 손실을 70%까지 복구했다.
 
고객들의 돈은 최대한 안정성과 수익성을 동시에 잡으면서 매매하고 있다.

그러나 월등한 수익률을 올릴 때까지 실전투자대회 참여 등 외부활동을 자제한다는 방침은 아직까지 변함이 없다.

박 사장은 실전투자대회가 직접투자하는 것과 비교해 상대적인 장점이 떨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주식시장은 커지고 있고 개인투자자들의 저변도 확대되고 있는 반면, 실전투자대회의 상금이나 부상은 물가상승률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주식투자자들은 집을 사기위해 가족을 위해 등의 목적으로 주식투자를 합니다.
 
이러한 점을 헤아린다면 실전투자대회의 부상으로 단순히 상금뿐 아니라 '아파트'나 '가족해외여행권' 등을 내걸어야 맞지 않을까요? 상금도 몇 년동안 비슷한 수준인데 투자자들이 많이 몰려들 수 있는 수준으로 높여야 합니다."

각종 실전투자대회를 휩쓴 고수답게 대회에 대한 조언을 빼놓치 않았다.

상금의 수준을 높인다면 예전에 투자대회를 휩쓸었던 개미들까지도 다시 끌어모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실전투자대회는 '프로의 격전지'로 한단계 높은 투자대회로 주목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가족을 생각할 수 있는 부상들을 내놓는다면 투자자들이 단순하게 '돈이나 따자'는 개념에서 '나는 왜 주식투자를 하는가'의 목표의식도 생길 수 있다는 설명이다.

상을 타게 된 투자자라면 든든한 가족들의 후원까지 덤으로 받을 수 있는 계기도 마련될 수 있다고 박 사장은 주장했다.
(왼쪽부터) 여수고래패밀리인 김미영씨(29), 성부씨(25), 박현상(36)씨, 정미씨(27)


◆"말보다 수익률이 앞서는 트레이더 될터"

"말만 앞서는 전문가는 되고 싶지 않습니다.

실전에서 돈을 버는 모습을 보여준 뒤에 투자를 권하든 조언을 하든 해야겠지요."

박 사장이 2006년 모 증권사 실전투자대회에서 상위권에 입상을 하고 '부드러운 주식, 더러운 주식'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한적이 있다. 당시 주최 증권사의 리서치센터장도 강의에 나섰는데 그가 '하이닉스반도체'를 추천했다고 한다.

"하이닉스는 주식매매를 좀 한다하는 사람들이 느끼기에는 오를 만큼 오른 꼭지수준의 종목이었습니다.

그런데 증권사 리서치 센터장이라는 분이 하이닉스를 꼽더라구요.

이건 아니다 싶었죠. 꼭지종목을 추천하는 그 분이 과연 직접투자해서는 얼마를 벌 수 있을까요?

저는 그 날을 마지막으로 누구 앞에 나서서 강의는 하지 않습니다. 직접 수익률로 보여줄 뿐이죠."

박 사장이 당시에 꼽은 '더러운 주식'은 이른바 작전 내지 작업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 종목들이다.

보이지 않는 세력들은 교묘한 주가흐름으로 개인투자자들이 '매수'에 나서도록 유인하고 정작 팔려고 할때는 팔 수 없도록 한다.

결국 피보는 개미들은 시장에서 전사하고 계좌도 멍들게 되기 때문에 아예 가까이 하지 말라는 박 사장은 조언했다.

현재 박 사장을 비롯한 패밀리들이 주목하고 있는 테마는 환경이다. 환경관련 종목중에서도 테마는 순환되는데 일부 테마들이 소외받고 있다는 설명이다.

박 사장은 특히 바다에 적조현상이 발생할 것을 대비해 적조테마주를 주목하고 있다.

앤엘바이오는 적조테마 중 하나로 예상돼 매수했지만 바이오테마로 휩쓸려 너무 급등해 팔아치웠다고 한다. 

나머지 종목들에 대해서는 공개를 꺼렸지만 이들 종목중 하나는 주요 주주로 참여할 의향이 있다고 귀띔했다.

패밀리들은 지금 높은 수익률을 내는 것과 앞으로의 계획이 가장 큰 고민꺼리다.

사업을 키우기 위해 법인까지 설립했지만 1년도 안돼 실패를 겪었기 때문이다.

지금과 같은 규모로 사업을 유지하는 데 의미를 둘 것인지 아니면 예전 결심과 같이 사업을 키워갈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

"고민이 많이 됩니다만 사업을 키우기 위해 먼저 내실을 다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먼 훗날을 생각하면 이런 수준으로만 머물러서는 안되지요.

자본시장법 이후에 헤지펀드의 설립추이와 자산운용업계의 변화를 살펴보면서 사업확대를 살펴보겠습니다."

남들은 가족이라면 말린다는 주식투자를 가족이 함께 하기에 힘이 난다는 박 사장.

그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돈에 구애받지 않는 것'을 운용의 목표이자 인생의 목표로 삼고 있다.

그런 그도 처제들에게는 신랑감으로 

△주식을 하지 말 것과

△나(형부)보다 나이가 적을 것을 주문하곤 한다.

"주식투자의 과정은 어려운 과정입니다.

그 어려운 과정은 비정하고 인간적이지 못하죠. 돈을 잃은 만큼 자책감도 많이 듭니다.

힘든 짐을 지는 사람은 한 집에 하나면 족합니다."

박 사장의 마지막 한 마디에는 온갖 풍파를 겪으며 11년동안 주식투자를 해 온 고뇌와 역경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by 하야니 | 2009/06/11 00:20 | Eye to the stock | 트랙백 | 덧글(0)

퍼온글) 욕심을 버린 도예공의 마음

우크라이나의 옛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옛날 왕이 있었는데 그 왕에게는 대대로 물러내려오는 애지중지하는 황금으로 만든 그릇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왕이 실수로 그 그릇을 떨어뜨려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왕은 신하들을 불러 다시 완벽하게 붙여두지 않으면 모두 목숨을 각오하라고 명령을 하였지요.


신하들은 모두 모여 궁리를 하다가 깨진 그롯조각들을 가지고 가장 실력이 있다는 도예공을 찾아가서 이 그릇을 붙이지 못하면 우린 죽은목숨이니 제발 고쳐달라고 호소하지요.


도예공은 한참 생각하다가 1년의 시간을 달라고 했고 그후로 도예공은 오직 그릇 고치는데만 메달렸습니다.


손자가 걱정을 해도 듣지도 않고 말이죠. 그러다가 1년이 지났고 신하들이 다시 찾아왔습니다.


도예공은 완벽하게 말끔해진 황금그릇을 주고 신하들은 기쁜마음으로 왕에게 갖다줍니다. 왕은 너무나 기뻐서 그 도예공에게 많은 선물을 내리고 궁궐로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하지만 신하들이 도예공의 집에 도착했을때 도예공의 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도예공은 어디로 떠나간 후였습니다.


그 시간 도예공은 손자와 함께 먼 길을 나서고 있었습니다. 도예공의 손자가 도예공에서 왜 집을 떠나가야 하냐고 질문을 합니다.


도예공 왈, 만약 내가 떠나지않으면 왕이 많은 선물을 줄 것이고 궁궐로 불러서 더 좋은 도자기를 만들라고 할 것이다.


왕은 더 좋은 그릇, 더 좋은 그릇을 계속 요구할 것이고 결국 그 요구를 만족못할때가 되면 우리는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기에 욕심을 쫓아가면 파멸 뿐이다.


그러면서 도예공은 보자기를 여는데 깨진 도자기가 있었고 도예공은 그 깨진 도자기 조각들을 땅속에 깊숙이 묻고 새로운 그릇을 만들기 위하여 길을 떠났다.


도예공은 깨진 그릇은 붙여달라고 했을때 안된다고하면 신하들이 죽을 것이기에 결국 똑같은 새도자기를 만들어서 신하들을 살려주고 왕의 계속되는 요구가 있을 것을 알고 길을 떠난 것이다.


우리 인간은 깨진 그릇에 미련을 가지고 새 그릇을 깨진그릇을 붙인 것이라고 착각을 하고 더 좋은 그릇을 요구하는 욕심을 부리기도 합니다.


부동산도 그렇습니다.


부동산가격이 떨어졌을때는 한참 올랐던 시절의 시세에 미련을 가지고 하락하다가 거래가 되면 상승이 되었다고 즐거워하고 상승을 하게되면 계속 상승을 하게 될거라는 욕심을 부리게 됩니다.


반대로 한번 하락세가 되면 영원히 하락을 할것처럼 난리를 치고 불안해하고 굳이 팔지 않아도 됨에도 섣불리 팔아버리는 우를 범하기도 합니다.


현재 경제상황이 너무 좋지않기때문에 많은 분들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작년 11-12월보다 경제상황은 더욱 안좋아졌지만 많은 사람들의 반응은 불안에 떨면서 갈팡질팡하던 작년 11-12월보다는 많이 차분하고 안정적이며 경제극복을 위하여 조금씩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불황의 터널에 이미 진입을 하였고 빠르지는 않지만 앞으로 전진하고 있습니다.


터널밖에서 터널을 들어올때 갑자기 어두워지면서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고 불안감이 엄습하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앞이 보이면서 나름대로 적응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적응을 하면서 앞으로 가다보면 조금씩 밝은 빛을 보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는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고 밤이 있으면 낮이 있고 새벽이 있으면 아침이 있습니다.


결국 아침은 오고 해는 다시 뜰 것입니다.


하지만 그 해가 언제 뜨느냐는 단정짓기 어렵고 결국 미국금융시장과 부동산시장이 안정이 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분들이 지금 집을 헐값이라도 팔아야 할까요? 계속 보유해야 할까요? 기다리면 얼마나 더 오를까요? 궁금해 합니다.


결국에는 불황을 터널을 빠져나올 것이고 터널에 있는 동안 풀렸던 규제완화, 저금리, 주택공급급감 때문에 더욱 눈 부신 상황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꼭 찍어서 언제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고 미래의 불확실성은 항상 존재하기에 섣부른 욕심은 버리고 조금은 냉정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너무 무리한 대출로 도저히 버틸 수 없거나 일시적 2주택으로 1주택을 손해없이 팔아야할 상황이거나 적당한 이익을 보았고 더 좋은 곳으로 갈아타는 상황이라면 미련없이 정리하시기 바랍니다.


가지고 있으면 대박나겠지라는 욕심은 더욱 큰 욕심을 만들고 결국 화를 입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굳이 팔 필요도 없고 실거주 하고있는데 경제가 어려우니 팔고 전세 살아야하는게 아닌가 라는 불안감으로 큰 손해를 보더라도 팔려고 하는 분들은 그럴 필요 없습니다.


살면서 기다리면 분명 때는 오기 마련입니다. 어려운 질문일수록 답은 의외로 간단할 수 있습니다.


팔아야할 사람은 팔면 되고 팔 필요가 없는 분들은 안팔면 되고 살 사람은 사고 살 필요가 없는 사람은 안사면 됩니다.


주택이 있는 상황에서 지금 사두면 나중에 몇 배 오를꺼야라는 대박의 환상에 빠져 무리한 대출을 받아서 추가로 몇채씩 구입할 필요는 없고 불황의 터널에 진입한 마당에 불안감에 중간에서 내리면 영원히 어둠의 터널에서 벋어나지 못하는 낙오자가 될 수도 있기에 무리하게 급매물로 팔 필요도 없고 어차피 터널을 나올 것이기에 주택을 구입해야할 실수요자, 즉 차를 타야할 사람은 지금이라도 좋은 차를 타고 어둠에 적응하면서 터널의 끝을 기다리면 됩니다.


도예공이 왕의 선물에 눈이 멀어서 선물을 받고 궁궐로 갔다면 아마 돈의 노예가 되어 끊임없이 더 좋은 그릇을 만들기 위하여 고생하다가 최후를 맞이했을 것이고 또한 처음부터 못한다고 거절했다면 죄없는 신하들의 목숨은 날아갔을 것입니다.


살릴 수 있는 목숨은 살리고 무리한 욕심을 부리지 않고 왕의 선물을 뒤로하고 깨끗하게 떠나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도예공의 마음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by 하야니 | 2009/05/22 03:37 | Eye to the realty | 트랙백 | 덧글(0)

한경기사)3초의 승부사가 된 가출소년 `원형지정` 황호철



지천명(知天命)을 바라보는 미혼의 주식고수 원형지정(49·본명 황호철). 개인투자자들 사이에서 선망의 대상이자 가장 닮고 싶어하는 재야고수 중 한 명이다. 하루에 이메일 300통이 날아들고 자신을 '주군으로 삼고 싶다'는 전화가 100통 이상씩 걸려 올 정도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전형적인 슈퍼개미다.

2년간 430만원으로 시작해 300억원대의 자산가가 된 '주식투자의 귀재' 원형지정을 만나기 위해 지난 11일 오후 찾은 곳은 사무실이 아닌 방 네 개 짜리 서울 시내의 한 아파트였다. 여의도 증권가에 번듯한 사무실 하나쯤은 있을 것이란 생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일반인이면 평생 동안 꿈도 꾸지 못할 거액의 현금을 보유한 원형지정은 아이러니칼하게도 이렇게 별도의 사무실이 없었다. 평범한 아파트가 바로 '3초의 승부사' 원형지정의 일터였다. 방 두 개에는 마치 항공기 조종석 같이 컴퓨터 시스템으로 꾸며진 책상 다섯 개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식구는 출퇴근을 하는 문하생 3명과 함께 생활하는 제자 겸 비서 1명이 전부다.

편안한 옷차림으로 취재진을 맞은 황씨는 "4년전만 해도 남 보기에 그럴듯한 사무실을 차려놓고 일했습니다. 하지만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바로 집으로 옮겼죠. 불필요한 이동시간을 절약할 수 있고 쉬고 싶을 때 언제든지 잠을 청할 수 있어 지금도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라며 미소를 지었다.

조용히 독서를 하기에도 그만이고 스트레스에 찌들어 사는 전업투자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휴식도 인근에 있는 공원에서 해결할 수 있어 금상첨화라는 이야기다. 수없이 많은 부침을 통해 천당과 지옥을 오간 경험으로 이제는 나눔의 삶을 살겠다고 각오한 원형지정. 필명 '원형지정'(圓形之情)도 '모난 세상에서 둥글게 서로 돕고 살자'는 의미로 자신이 직접 지은 것이다.

훤칠한 키에 진한 쌍꺼풀이 돋보이는 호남형인 원형지정. 그는 주식투자에는 차갑고 냉정하지만 사람들에게는 더없이 포근하고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평판을 얻고 있다. 특히 대부분의 슈퍼개미들이 초야에 묻혀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하는 반면 원형지정은 1만명에 육박하는 적극적인 팬을 확보한 열린 사고를 하는 인물로도 유명하다. 자신의 1년 주식농사 결과를 인터넷 카페에 공개해 증권가에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2007년 2월부터 증권포털 팍스넷에 자신의 주식투자 실패담인 '똥파리 거지가 왕거미 귀족이 된 이야기'를 연재하며 개인투자자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현재도 자산 300억원 중 100억원 정도를 주식에 직접투자하고 있는 원형지정은 2009년 1분기에만 100%에 가까운 수익을 냈다고 귀띔했다.

◆ "주식에 미칠 자신 없으면 손도 대지 마라" 

숱한 실패 뒤 남겨진 단돈 430만원으로 단숨에 91억원을 벌어 기사회생한 전설적 인물 원형지정도 삶을 포기한 채 도박에 빠지기도 하고 술과 담배로 하루하루를 연명해야 하는 고통의 나날들을 보낸 경험이 있다.

원형지정은 순간 순간 잊지 말아야 하는 주식매매 철칙부터 나태해지는 자신을 추스르고 채찍질하기 위한 각오들을 적어놓고 수시로 들춰본다. 날선 각오들이 빽빽히 들어차 있다. 가장자리에는 손떼가 가득하고 너덜너덜 닳아 헤어진 곳도 많다.

그런 그가 불과 2년여만에 300억원대의 거부로 거듭난 바탕은 초인적인 집중력과 피나는 노력의 결과였다.

"절실하고 절박해야 합니다. 컴퓨터 모니터 저 넘어에 수십억원에서 수백억원의 현금을 쥔 최고의 주식전문가들이 포진해 있는 정글같은 주식시장에서 절실하게 성공을 꿈꾸며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 합니다"

원형지정이 주식 매매를 하는 책상 위에는 누렇게 색이 바랜 A4용지 수십장이 포개져 붙어 있다. 순간 순간 잊지 말아야 하는 매매 철칙부터 나태해지는 자신을 추스르고 채찍질 하기 위해 써놓은 날선 각오들이 빽빽히 들어차 있다. 얼마나 읽고 또 읽었는지 가장자리에는 손떼가 가득하고 너덜너덜 닳아 헤어진 곳도 많다.

그중 한 대목은 '거지되어 자살하고 싶지 않으면 꼭 지켜라'로 시작해 '주식을 해서 수익을 내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린다'로 끝을 맺는다.

<철칙 : 거지되어 자살하고 싶지 않으면 꼭 지켜라>

1. 매매 시 특히 인내심을 갖고 참고 또 참아서 매수하라.
2. 충동적이고 감정적인 매매는 절대 하지마라.
3. 종목분석을 철저히 하되 저가에 매수라. 특히 테마주는 언제 폭락할 지 모른다.
4. 추격매수를 절대 하지 말라.
5. 초단타 매매는 적은 금액으로 짧게, 작은 수익에 만족하라.
6. 잦은 매매는 삼가고 신중히 생각하며 경솔히 행동하지 마라.
7. 수익이 났을때 특히 조심히 매매하고 수익을 지켜라.
8. 어떠한 경우에도 좌절하지 말고, 공부하고 노력하라. 
9. 가급적 신용거래는 하지 말고 미수 쓸때는 상승 확인하고 하라.
10.탐욕을 부리지 말고 조급해 하지마라. 매매 시 한박자만 늦춰라.
11. 미친 듯 술에 취한 듯 얼토당토 않은 일을 저지를 수 있으니 조심하라. 
12. 차근차근 적은 금액으로 3일을 쌓아가라.
13. 참고 또 참아서 매매하라.
14. 주식은 타이밍의 예술이다. 매수는 신중히 매도는 번개같이
15. 주식을 해서 수익을 내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린다.

◆ 15살에 가출해 주식 고수가 되기까지

원형지정의 고향은 강원도 인제다. 중학교 재학시절 아버지와 어머니의 불화로 항상 불안했던 가정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서울로 쫒겨와 술집 종업원으로 이곳 저곳을 전전하며 밥벌이를 해야 했다.

"당시 술집 손님 중에 비싼 공짜술을 먹는 사람들이 있어 궁금하기도 해 물어봤더니 세무공무원이라는 거예요. 그렇다면 나도 세무공무원이 되어야겠구나라고 생각했죠" 

고등학교 졸업장은 간신히 받았지만 교과서를 달달 외워 2년제 국립세무대학에 무난히 입학할 수 있었다. 1984년 관악세무서에서 첫 공직생활을 시작해 1992년까지 순탄하게 살던 원형지정은 돈이 모이자 이를 당시 고려증권과 동서증권에 맡겼다 모두 날리고 말았다. 충격도 컸다.

"이때 평소 알고 지내던 한보그룹 이사 한분이 건설업을 한번 해보라는 거예요. 한보그룹 총수가 세무공무원 출신이어서 선배들이 그 그룹에 많이 포진해 있었거든요. 현직 세무공무원이 페이퍼 건설회사 50개를 만들어 한보그룹 하도급을 받아 재하청을 주는 방법으로 돈을 긁어 모으기 시작했죠. 지금 같으면 상상조차 할수 없는 일입니다. 곧바로 어머니의 반대를 무릎쓰고 세무서도 그만뒀습니다"

하지만 원형지정의 꿈 같은 시절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997년 IMF 구제금융 한파가 몰아치면서 한보그룹이 부도가 났고 원형지정의 건설사도 덩달아 무너지고 말았다.

"당시 제 개인통장에 400억원 정도 들어있었는데 전부 날아가 버렸습니다. 믿을 수가 없었죠. 더 참기 힘든 것은 그렇게 절친하게 지내던 친구며 사업상 만난 사람들이 모두 안면몰수를 해버리는 거였어요"

여인숙에 살면서 등산으로 소일을 하다 생활정보지에 난 부동산중개소의 구인광고를 보고 무작정 찾아 나섰다.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딴 뒤 경매업체에 취직했고 외환위기 여파로 쏟아지는 물건을 처리하는 것이 주임무였다.

건설업을 운영하며 직간접적인 실전 경험은 있어 자신감은 있었지만 이론이 부족해 수백권의 부동산 관련 서적을 탐독했다. 이때 서점에서 경매에 관한 책을 구입하던 중 주식 책이 눈에 띄어 한 20권 정도 사게된 것이 오늘날 원형지정을 전업투자자의 길로 이끈 단초다.

세무공무원 경험을 살려 부동산경매에서도 도사가 된 원형지정은 2년6개월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일에 몰두했다. 광고를 통해 개인고객도 유치해 나갔다. 수수료가 작은 일반주택이 아니라 남들이 하지않는 다가구주택, 술집이 끼어있는 건물, 유치권이나 지상권이 설정된 부동산 등 난이도가 높은 경매물건만 골라 재미를 보기 시작했다. 재개발, 재건축으로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이렇게 해서 2000년 퇴직 할때는 현금 83억원과 아파트 13채가 손에 쥐어졌다. 벌어놓은 돈도 있겠다 당시 주식시장이 활황이라고 해서 굿모닝증권(현 굿모닝신한증권)에 8억원, 동양증권에 4억원, 리딩투자증권에 3억원을 예치하고 투자를 의뢰했다. 그런데 2년 후에 원금 15억원이 11억원으로 줄어 있었다. 자산이 불어나기는 커녕 4억원을 날린 것이다.

"너무 화가 났습니다. 주식이 뭐길래 이렇게 돈을 날리나 싶어 2004년 1월 직접 해보자는 생각으로 전업투자자의 길로 나서게 된 겁니다. 쉬워 보였지만 막상 해보려니 눈앞이 캄캄했죠"

평소 책을 한번 잡으면 맨 뒷장의 저자이름까지 꼭 확인해야 직성이 풀릴 정도로 남다른 독서습관을 지닌 원형지정은 주식 관련책을 다시 탐독하기 시작했다. 주식 관련 책을 500여권을 독파했지만 그것은 이론일뿐 실전 매매에는 영 적용이 되지 않았다.

우량주만 사면 되는 줄 알고 삼성전자에 '올인'했다가 큰 손실을 본 적도 있다. 원형지정이 가치분석을 버리게 된 계기이자 뼈아프게 생각하는 실패 사례가 바로 당시 삼성전자 관련 매매다.

"전업투자를 시작할 때인 2004년 주위에서 삼성전자가 100만원이 가니, 120만원이 가니 하면서 바람을 잡았고, 증권사도 주가수익비율(PER) 상 저평가 돼 있다며 매수 보고서를 연일 냈습니다. 이를 믿고 50만~60만원대에 매수했고 신용으로 물량을 추가하며 버티기를 몇번 반복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주가는 39만원까지 곧두박질쳤고 41만원에 증권사 반대매매를 당하고 20억원을 날렸죠"

포기하지 않고 차트를 분석하고 새로운 매매기법 관련 책이 나오면 달달 외우는 등 더욱 주식 공부에 매달렸다. 급등구간 연구와 테마주 등에 눈을 뜨면서 2006년 초부터 조금씩 돈을 벌기 시작했다.

하지만 2006년 10월 폐암 1차 진단을 받으면서 평상심이 깨졌고 카지노와 홧김에 전재산을 옵션 투자에 쏟아부어 알거지 신세가 되고 말았다.

"주식은 가치, 수급, 심리 등 세가지 요소가 핵심입니다. 당시 저는 크나큰 실패를 경험하면서 주식투자는 매매기법도 펀더멘털도 아니고 결국 마음(심리)에 좌우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2008년말께 손실을 모두 회복하고 안정기에 접어들었을 때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았더니 의사가 깜짝 놀라더군요. 제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폐암 증상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거예요"

◆ "주식은 수급과 심리다"

본격적으로 주식에 입문한 2004년부터 안 해본 투자기법이 없는 원형지정이 집중적으로 지금의 부를 쌓은 구간은 대세 상승장과 대세 폭락장이 이어졌던 2007년과 2008년 딱 2년 간이다. 그 전에도 수십억원을 벌기도 했지만 이를 지키지 못해 깡통계좌의 경험을 네 번이나 맛봤다.

원형지정이 투자에 성공한 비결은 수급을 읽는 감각적인 눈과 방대한 독서량으로 집약된다. 기업의 펀더멘털이나 가치를 분석하지 않고 어떻게 주식의 수급만으로 상승을 예상하고 투자를 결심하는 것일까?

"주식입문 초기에는 단타매매를 주로 했습니다. 종목 관련 보고서도 보고 거래량에도 관심을 가졌을 때입니다. 하지만 주식은 수급입니다. 팔고자 하는 사람과 사고자 하는 사람들의 심리와 그 강도를 읽어내는 것이 곧 성공투자의 지름길이지요. 그 구간을 짚어내는 것은 철저히 기술적 분석을 통해 얻어냅니다"

원형지정은 우선 주가의 흐름을 결정하는 6가지 요소인 가격, 시간, 거래량, 움직임, 멈춤, 속도 등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스캘퍼나 데이트레이더, 스윙투자, 중장기투자자 등 어느 누구라도 오래도록 승자의 위치에 있지 못한다고 강조한다.

 "평소의 속도가 아닌 급속도로 진행하며 가속하다 멈춤 현상이 오면 분할 매도로 대응해야 합니다. 멈춤 현상이 왔다는 것은 에너지 소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말하는 핵심이 바로 '매수절정' 구간이다. 상승 추세대 안에서 등락을 거듭하며 기존의 상승추세로 진행되던 주가가 어느 날 아주 강하게 상승 추세대 상단을 돌파하며 가파르게 상승하기 시작할 때, 이 구간이 매수절정 구간이라는 것.

"이 매수절정 구간을 관찰해 추세대 상단을 돌파하는 시점부터 시작해 통상적으로 마지막에 거래량이 터진 장대음봉이 나오는 음봉 몸통의 중간값까지 계산해 보니, 5거래일 안에 최하 50% 이상의 수익이 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원형지정이 목숨같이 중요시 여기고 활용하는 분석 지표는 바로 '볼린저 밴드'(Bollinger bands)와 'RSI'(상대강도지수)이다. 매수든 매도든 진입할 수 있는 구간을 확인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볼린저 밴드는 주가의 움직임을 밴드 내에서 판단하기 위해 고안된 채널지표이다.

 "제가 사용하는 기법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터득한 저만의 기술입니다. 결국 개인투자자들도 자신만의 전략과 기법을 만들어내야 승산이 있습니다. 자신만의 매매조건을 만드는 이유는 모든 구간에서 항상 진입하는 것이 아니라 확률이 높은 구간에서만 들어가서 이익을 내고 나오는 이기는 싸움을 하기 위함입니다"

2006년 10월 폐암 1차 진단을 받고 삶을 포기하려 했던 원형지정은 어렵게 모은 수십억원의 재산을 정선 카지노와 선물 양매도에 털어붓고 사채업자에게 쫒기는 신세가 되고 만다. 

"폐에 이상이 발견돼 암 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의사의 말에 넋을 잃고 말았지요. 당시 암 건진을 받으러 병원에 갔는데 환자들이 밀려 있어 검사 일정조차 잡을 수 없었죠. 해를 넘겨 1월에나 가능했습니다.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하루에 10갑 가까이 피워댄 담배가 주범이었을 겁니다"

억울했다. 폐암 생존률이 3년 이내라는 의사의 말에 더 절망했다. 죽을병에 걸렸다는 소문이 돌자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도 싸늘해졌다. 잠을 잘 수도 없었고 술로 밤을 지샜다.

"삶을 자포자기 한 상태에서 정선 카지노에 가서 이틀밤에 5억원을 잃기도 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과 이란 관계가 전쟁 상황으로까지 몰릴 수 있다는 뉴스에 주식시장이 폭락할 것이란 단순한 생각으로 홧김에 풋 옵션 외가에 양매수를 걸었다 가진 전재산은 물론 사채 원금만 50억원대로 늘어나 버렸죠"

자살을 결심하고 한강을 몇 번이나 다녀왔다. 사채를 끌어다 써 병원에 갈 수도 없었다. 이때 수중에 남은 돈이 430만원이었다.

한때 자신이 많은 도움을 줬던 주식 고수 친구에 빌붙다시피 하면서 공부를 시작했다. 그 친구는 '물을 먹여 줄 수는 없고 물 먹는 방법을 알려주겠다'고 말했고 그 기간도 정확히 일주일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2007년 주식시장이 상승장이었다고 쉽게 말합니다. 저는 당시 살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호랑이 등에 타고 '볼린저 밴드'와 'RSI', 'MACD' 지표를 보며 폭등 구간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때 저의 운명을 바꾼 종목이 바로 '삼호개발'입니다"

이동평균 수렴·확산지수(MACD)는 장기 이동평균선과 단기이동평균선 사이의 관계에서 추세변화의 신호를 찾으려는 진동자 지표다. 이 지표는 서로 멀어지면(diverge) 결국 다시 가까워진다(converge)는 성질을 이용해 두 이평선이 가장 멀어지는 시점을 찾는 것이다. 

2007년 2월 삼호개발이 급등하기 시작했다. 2800원부터 기본 물량을 보유하고 있었고 데이트레이딩을 병행하며 대주주 매도 공시가 나온 다음날 마지막 물량을 털어 1억4000만원을 만들었다. 매수절정 기법 전략을 활용해 성공한 것이다. 주식은 절박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교훈도 이때 얻었다.

"병원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친구들도 빨리 입원하라고 채근했죠. 하지만 한가하게 있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가장 절박한 시기었습니다. 사채업자들은 빚을 갚지 않으면 다리 잘라간다고 협박하고, 금융권에서는 하루에 100~200통 가까이 빚독촉 전화를 해댔습니다.

2006년 11월부터 2007년 1월까지 단 석달만에 50억원대 빚쟁이로 전락한 내모습이 믿겨지지 않고 그저 꿈만 같았죠. 이것을 회복하는데 2년이 걸린 겁니다"

◆ 공매도를 기다리는 고수

2007년 10월까지 대세상승기에 현물투자로 믿기지 않을 정도의 성적을 거둔 원형지정은 2008년 대세하락기에는 주식대차거래(공매도)를 이용해 그동안 벌었던 수익보다 더 많은 결실을 맺게 된다.

2007년 삼호개발로 재미를 본 원형지정은 같은해 6월말 금호산업의 챠트를 본 뒤 망설이지 않고 이른바 '몰빵'에 나섰다. 수급 분석을 마치고 매수해서 판 종목 중에 상승 시기를 정확히 맞추지 못했을뿐 안 오른 종목은 없었기때문에 자신감도 충만했다.

당시 금호산업 주식을 4만7000원에 17억원어치를 매수했다. 삼호개발로 번 돈을 모두 쏟아 붓고도 모자라 신용과 사채까지 동원해 '풀 베팅'했다.

"금호산업 주식을 사고나자 사흘연속 주가가 미끄러지기 시작했습니다. 신용거래를 한 증권사에서는 손실분을 입금하지 않으면 반대매매에 들어가겠다고 으름장을 놓기 시작했죠. 답답하기가 칼 쓴 춘양이 마음 같았습니다. 그런데 5일째 되던날 기적적으로 조금씩 오르기 시작했어요. 4만원짜리 주식이 보름만에 7만원까지 치솟았고 이 종목으로만 15억원을 챙길 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이 남해화학이다. 같은 해 10월 중순 9500원에 매수해 단기간에 최종 물량을 1만8000원에 매도해 원금을 제외하고 25억원을 벌었다. 하지만 절반의 성공이었다. 빌어쓴 사채 이자는 꼬박꼬박 늘어만 갔다. 일단 원금만 갚고 이자는 동결시켰다.

"기회는 다시 찾아왔습니다. 저는 2007년 11월부터 국내 주식시장을 비관적으로 봤습니다. 어쩌면 폭락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거죠. 그래서 대세하락기에 가장 유용한 투자기법인 공매도를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2008년 3월께 코스피 1350이 깨질 수 있다고 보고 주식대차거래에 손을 댔다. 주식대차거래는 특정 기관에서 일정 기간 주식을 빌렸다가 되갚는 것으로 빌린 주식을 판 뒤 나중에 매도가격보다 싼 값에 다시 주식을 사들여 갚는 매매기법이 활용된다. 주로 외국인들이 사용하는 투자법이어서 개인이 하기에는 관련 정보나 책도 턱없이 부족했을 때다.

하지만 2008년 내내 주식시장은 내리막길을 걸었고 10월에는 리먼 브러더스 파산 사태로 글로벌 금융위기와 함께 유례없는 주가 폭락사태가 발생했다.

"그때 제 인생 전부를 통틀어 가장 많은 돈을 벌었던 것 같습니다. 수천만원짜리 계좌에서 하루에 1억원 넘는 수익이 발생하기 시작했으니까요. 재기를 노린 2년이 20년 같이 길었지만 노력한 자에게는 반드시 보상이 따른 다는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됐습니다"

공매도는 주가 폭락을 부채질하는 주범으로 인식되면서 한국을 포함한 세계 주요 국가에서 즉각 제한조치가 취해져 현재는 금지되고 있다.

"지금은 공매도를 할 수 없게 돼 있지만 언젠가는 풀릴 수밖에 없을 겁니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국내 주식에 투자하면서 위험회피(헤지) 수단으로 공매도가 필요하다며 이를 강력히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때를 대비해 현금보유 비중을 계속 늘리고 있습니다"

◆ "노력하는 자에게 기회는 온다" 

원형지정이 다른 슈퍼개미들과 달리 단단한 내공을 소유한 실력파라는 근거는 그의 독서량에 있다. 지난 10년 간 3000여권의 책을 읽었고, 중요한 부분을 잊지 않기 위해 틈틈히 적어놓은 메모량만 16절지로 6000페이지에 달한다. 장이 끝나면 그날의 투자상황을 복기해 가며 매매일지를 정리하는 것도 그의 중요한 일과 중 하나다.

원형지정은 잠이 없다. 그의 수면시간은 많아야 하루 4시간 정도. 밤새 손에서 책이 떠나지 않는다. 취재진이 자택을 방문했을 때 원형지정은 '이사(李斯), 천하의 경영자'를 읽느라 정신이 없었다. 인터넷이 탄생시킨 중국 신세대 역사 스토리텔러 차오성이 쓴 이 책은 천하를 지배한 진시황의 재상 '이사'를 조명한 중국 역사서다. 

그는 현실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 픽션인 소설만 독서목록에서 제외할 뿐 주식 관련 서적은 물론 채근담, 역사서, 종교서 등 다양한 장르의 책들을 섭렵한다. 특히 심리가 무엇보다 중요한 주식판에서 평상심을 유지하기 위해 성경과 코란, 불경 등은 십여차례 이상 반복해 읽었다.

"'잠을 자면 꿈을 꾸지만 잠을 이기면 꿈을 이룬다'는 글귀를 무척 좋아합니다. 자면서 꾸는 꿈이 꿈이지만 시장에 갖는 희망도 한낱 꿈일수가 있습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자문자답해 봐야 합니다."

원형지정은 장이 시작되는 오전 9시부터 10시까지, 장 종료 직전인 오후 2시부터 2시50분까지 하루에 단 두번 컴퓨터 앞에서 매매 시기를 노린다. 그의 기준에 합당한 종목이 발견되면 망설이지 않고 1초에 판단하고, 1초에 매수하고, 나머지 1초 동안은 검증하고 쉰다는 '3초의 승부사' 기질은 이러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제도권 증권사 직원들을 저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수십억원에서 수백억원에 달하는 고객들의 돈을 맡아 운용하면서 무엇을 근거로 하느냐는 겁니다. 열심히 책을 읽고 공부하고 노력해야 하는데 그런 증권사 직원을 만나볼 수가 없었어요"

최근 원형지정의 중요한 일정 중 하나가 고향인 강원도에서 자신의 카페 회원들을 대상으로 투자강연회를 여는 것이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몰려드는 전업투자자들로 강연회는 연일 만원사례를 이루고 있다.

일부 카페 회원들은 '이제야 선생님 투자기법을 배워 수익을 올리기 시작했는데 이를 공개하면 어떡하느냐'며 이메일 항의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원형지정은 자신이 가진 노하우를 거의 완벽하게 공개한다. 나눔을 실천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다만 2%는 비밀의 영역이다. 그건 말이나 활자로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것.

"2011년쯤 능력있는 인재들을 키워 운용사와 '터틀 그룹'(Turtles Group)을 만들 계획입니다. 위탁매매가 아닌 제 개인 자산만을 운용할 겁니다. 강원도에서 여는 강연회는 함께 할 동지를 고르는 기나긴 여정이라고 생각해 투자도 많이 하고 있습니다"

터틀 그룹은 주식매매에 대한 능력이 천부적인 감각인지 아니면 후천적교육을 통한 학습인지를 놓고 오래전부터 계속된 논쟁에서 비롯된 것으로 전해진다. 1984년 미국의 리차드 데니스(Richard Dennis)가 주식 매매가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을 모집해 이들에게 자신의 매매원칙을 교육시킨 후 성공으로 이끌었는데 이들을 '터틀(Turtles)그룹'이라고 불렀다.

슈퍼개미를 꿈꾸는 개인투자자들에게 조언 한마디를 부탁하자 원형지정은 탐욕을 버릴 것과 공부하고 노력하라는 말을 남겼다.

"제가 벤츠를 타고 다닙니다. 한번은 큰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차는 거의 폐차 수준인데도 저는 멀쩡했어요. 그래서 사치를 경계하는 저도 차는 좋은 것을 탑니다. 그런데 제 강의를 들은 한 청년이 자신도 저와 같은 기법으로 단기간에 벤츠를 탈 정도로 돈을 벌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저는 말했습니다. 제가 지금의 위치에 있기까지는 수많은 책을 읽으며 연구했고 수 차례의 자살을 결심할 정도로 낭떠러지에 떨어져 봤기때문에 가능했다고 말이예요"

세무공무원에서 건설업체 사장, 전문 부동산경매업자, 그리고 재야 주식고수까지 그의 인생편력은 참 다양하다. 주식 이후에는 무슨 일을 하고 싶으냐는 질문에 원형지정은 망설임없이 자신은 오로지 '주식'밖에 없다고 말했다.

"제가 가정을 갖고 아들을 낳는다면 네 살때 부터 주식과 골프를 가르칠 겁니다. 주식은 자본주의 꽃이고 기업과 사회를 움직이는 핵심 동력이기 때문입니다. 노예가 아닌 자유인으로 살아가게 하는 지름길이기도 하고요. 또 금융을 모르면 세상을 모르는 것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현재 수익을 공개하고 인터넷 카페 회원들 모임에 수억원을 쓰는 이유에 대해서는 실패하고 비참한 삶은 사는 수많은 개미들에게 희망을 버리지 말 것과 철저히 준비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전해주기 싶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by 하야니 | 2009/05/19 06:51 | Eye to the stock | 트랙백 | 덧글(0)

포틀랜드 탐방(퍼온기사)



▲포틀랜드의 상징인 마운트 후드 정상의 3월초 모습. 암봉 왼쪽 아래로 체어리프트가 보이는 설원이 한여름에도 스키를 즐기는 팔머 빙하지대다. 마운트후드는 북미대륙 서부를 남북으로 1100km나 달리는 캐스케이드 산맥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산이다.



만년설 절벽슬로프 아찔… 피노누아 와인계곡 포근
 오리건 주라고 하면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이가 많다. 위치는 물론이고 단박에 떠오르는 것이 없어서다. 캘리포니아 북쪽을 보자. 바로 거기다. 캐나다와 접경인 워싱턴 주와 남쪽 캘리포니아 주 사이의 태평양변, ‘나이키’의 고향이고 프랑스 것을 누른 ‘피노누아’ 와인 산지다. 하지만 오리건이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나이키도 피노누아도 아니다. 자연과 사람이다. 훼손되지 않고 순수한. 오리건 사람들은 특별하다. 남한의 2.6배나 되는 넓은 땅(25만5026km²), 우리(남한)의 7.65%에 불과한 적은 인구(379만여 명)가 선사한 공간적 여유 덕분일까. 오리건의 관문 포틀랜드 국제공항에서다.
- [화보] 美 오리건 주, ‘스키’와 ‘와인’의 천국 
[화보] 설경이 아름다운 사호로 스키장 가는 길
- [화보] 日, 고원리조트에서 딥스노의 묘미 즐기기
[화보] 비밀스런 ‘미야코와스레 료칸’ 구경가기

 미국의 여타 국제공항에서 느껴온 위압감이나 딱딱함이 한결 덜하다. 그것이 내가 포틀랜드공항을 선호하는 이유다. 그 오리건을 2주 전 다녀왔다. 여행 주제는 ‘스키와 와인’이었다. 만년설산 마운트 후드(3428m)와 마운트 배첼러(2764m)에서 봄 스키를, 윌러멧계곡에서 오리건 피노누아 와인을 즐겼다. ‘스키와 와인의 만남’을 통해 새롭게 미국 밖으로 창을 낸 오리건의 멋지고 맛있는 여행현장으로 안내한다.

 미국을 동서로 나누는 기준. ‘백두대간 격’인 로키산맥(북미대륙 분수령)이다. 따라서 서부란 로키의 서쪽 땅이다. 19세기 중반 서부개척기. 40만 명이 서부로 이주했다. 땅을 찾아 혹은 금을 캐러. 초기 교통수단은 소가 끄는 왜건(포장마차)이었다. 그리고 길은 석 달간 2000km를 가야 할 만큼 멀고 험했다. 출발지는 중부 미주리 주의 세인트루이스, 그 끝은 포트 밴쿠버(컬럼비아 강 하구의 포틀랜드 부근). ‘오리건 테리토리’(오리건 워싱톤 아이다호 등 미국 ‘노스웨스트’ 세 주)라 불렸던 미지의 땅이다. 그 길이 ‘오리건 트레일’이다. 오리건 주는 이렇게 서부 역사와 더불어 세상에 태어났다.


 




아름다운 도시, 포틀랜드
 오리건의 중심도시는 포틀랜드다. 이곳은 내가 미국을 종단 횡단하며 다녀본 도시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고 손꼽는 곳이다. 그 아름다움의 기준은 외양이 아니다. ‘사람’이다. 포틀랜드는 ‘사람을 위해’ 설계되고 운영되는 도시다. 다운타운을 보자. 그 흔한 마천루 하나 없다. 30여 층 건물이 최고다. 도심의 차량홍수도 먼 얘기다. 걷는 이와 자전거 통행인이 더 많다. 도로를 누비는 건 차가 아니다. ‘맥스(Max)’라고 불리는 경전철과 ‘스트리트 카’라고 불리는 전차다. 그 전차도 다운타운 일정 구간만큼은 무료다.

 포틀랜드는 자전거 천국이다. 매일 6000명이 자전거로 출퇴근한단다. 이 수치는 미국 평균의 8배라고 한다. 자전거를 위한 도시설계는 혀를 내두를 정도다. 대표적인 곳이 윌러멧 강을 가로지르는 스틸브리지다. 그 다리는 강 양편 둔치에 마련한 자전거도로(산책로 겸용)와 연결돼 있다. 자전거는 다리를 건너 둔치로 막힘없이 달린다. 다리 통과를 위해 별도로 설치한 전용램프와 강상의 부교 덕분이다.

 포틀랜드 다운타운에서 패스트푸드점을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대신 커피숍은 곳곳에 보인다. 그런 점에서 포틀랜드 도심은 미국이 아니다. 아름드리 가로수가 우거진 거리의 도로 한가운데로 느릿느릿 전차가 다니고 고풍스런 석조건물마다 커피숍과 레스토랑이 자리 잡은 이 도시. 사진으로만 보면 영락없는 유럽이다.

 한밤중. 맥주 한잔이 생각나 거리의 바를 찾았다. 그런데 대뜸 신분증을 보잔다. 여권을 두고 왔다고 하자 대번에 ‘입장 불가’다. 다른 바도 마찬가지다. 바마다 입구에서 모든 사람의 나이를 확인한다. 오리건 주의 ‘21세 미만 음주 단속’은 이렇듯 철저했다. 제한연령이 30세인 곳도 있단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이런 도시의 밤거리가 험할 리 없다. 혹시 오리건 주로 자녀를 유학 보내신 분. 선택에 후회 없을 것으로 장담한다.



▲윌러멧 스키 리조트의 트리스킹

캐스케이드 산맥이 준 선물, ‘스키천국’ 오리건

 북미대륙에는 스키장이 많다. 그러나 빙하스키장은 손꼽을 정도다. 위슬러블랙컴(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주) 정도다. 그런데 마운트 후드가 그렇다. 마운트 후드는 포틀랜드, 아니 오리건의 랜드마크다.

 포틀랜드공항으로 하강하는 항공기 안. 마운트 후드의 설봉이 창밖으로 손을 뻗으면 잡힐 듯 가까이에 있다. 한여름에도 산정에 눈을 이고 있는 이 거산. 그 눈은 팔머 빙하를 덮은 만년설이다. 그리고 여름스키의 무대다.

 마운트 후드의 스키장은 다섯 개. 이날 나는 규모와 고도차가 최대 최고인 ‘팀버라인(Timberline)’을 찾았다. 여름스키를 타는 팔머 빙하의 스키장도 여기다. 추적추적 봄비가 내리던 날. 우리 일행은 차를 몰아 이 산을 향했다. 포틀랜드 도심에서 88km. 하지만 한 시간 반 이상 걸렸다. 해발 1800m의 스키하우스까지 오르는 산길이 눈에 덮여서다. 스키장 규모는 고도차(리프트 최정점과 최저점의 차이)로 가늠한다. 1125m. 위슬러블랙컴에 조금 모자란 수준이다.

 이 스키장에는 기념물이 있다. 해발 1829m 설원 기슭의 고풍스러운 호텔 ‘팀버라인 로지’다. 1937년 대공황 때 미연방은 뉴딜정책의 하나로 이곳을 개발했다. 로지는 그때 건축됐다. 팀버라인은 ‘수목생장한계선’을 뜻한다. 그 이름 그대로 로지 위 정상부는 숲으로 뒤덮인 아래와 달리 온통 흰 눈을 뒤집어쓴 빙하의 설원이다. 팔머 빙하의 슬로프(정점 2602m, 고도차 333m)로 데려다 주는 체어리프트가 스키어를 유혹하고 있다.


 



 






▲오리건 중부의 '하이 데저트'라고 불리는 건조기후대의 고원에 자리잡은 마운트 배첼러 스키장.



 다음 행선지는 마운트 배첼러 스키장. ‘하이 데저트’라고 불리는 건조기후대의 ‘센트럴 오리건’(오리건 중부) 중심 타운, 벤드(Bend)의 고원에 있다. 마운트 후드를 내려서자 고원지대가 펼쳐진다. 벤드로 가는 길의 이 도로(하이웨이 26호선)는 오리건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멋진 드라이브 코스였다. 오른쪽 차창 밖으로 흰 눈에 덮인 캐스케이드 산맥이 고원의 들판과 어울려 빚어내는 멋진 풍광 덕분이다. 그 하이라이트는 세 봉우리가 사이좋게 어울린 ‘스리 시스터스’. ‘마운트 배첼러’(총각 산)라는 이 특별한 이름이 인근한 이 세자매봉에서 왔음은 물론이다. 곧이어 벤드. 마운트 배첼러는 거기서 하이웨이 58호선으로 35km 거리다.

 해발 1737m 고원이 베이스인 마운트 배첼러 스키장. 산은 그 자체가 거대한 휴화산이다. 마운트 후드처럼 아래 3분의 1만 숲이 형성됐을 뿐 그 이상은 나무 한 그루 없는 광활한 설원. 최정점(2764m)은 백두산 최고봉(2750m)보다 높다. 고도차는 1027m로 마운트 후드에 비해 98m 짧다. 그러나 이 스키장은 원뿔형의 이 화산을 360도 모두 활용한다는 면에서 마운트 후드와 차별된다. 물론 산 뒷면(백 컨트리)은 최상급자에게나 권할 만한 코스다.

 벤드의 멋진 숙소 선리버 리조트에서 하루를 묵고 스키여행을 계속했다. 이번에 찾은 곳은 윌러멧 계곡 초입의 큰 고개인 윌러멧패스의 스키 리조트(해발 1560m). 마운트 후드 등 에 비해 규모는 작아도 다운힐 즐거움에서는 차이가 없었다. 이웃한 세 봉우리를 두루 섭렵하는 다양한 슬로프, 북미대륙 최고 경사라는 52도의 ‘절벽’형 슬로프, 나무 사이 깊은 눈밭을 헤치는 트리 런(Tree run) 덕분이다. 여기서 또 한 사람의 스키친구를 사귀었다. 1992년 미국국가대표 스키 팀 감독이고 현재 세계스키연맹(FIS)의 미국기술위원인 랜드 로저스였다. 이 스키장 소유자와 평생 지기인 그는 여기서 고객만족팀을 이끌고 있었다.



▲오리건 피노누아의 주산지인 윌러멧 계곡에 자리잡은 킹 에스테이트 와이너리(유진 소재) 모습. 부드러운 굴곡의 둔덕으로 형성된 계곡이 피노누아의 명산지인 프랑스 브루고뉴지방을 연상시킨다.





▲플로렌스의 태평양변에 발달한 거대한 해안사구의 모래언덕을 시속 60km를 질주하며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짜릿함을 선사하는 듄버기 투어 모습. 플로렌스는 하이웨이 101호선으로 달릴 수 있는 오리건 코스트의 대표적인 어촌관광지다.



천국으로 통하는 길, 101번 하이웨이를 타라, 아름다운 드라이브 도로, 오리건 코스트
 자동차여행을 좋아하는 분. 죽기 전 오리건 코스트(태평양변)의 하이웨이 101호선(현지에서는 ‘하이웨이 원오원’이라고 부름)만큼은 꼭 한 번 달려보시기를 권한다. 세상에 이보다 아름다운, 그리고 편안히 드라이브를 즐길 만한 해안도로가 또 있을까 싶다.

 그 시작은 플로렌스라는 어촌마을이다. 오리건 코스트에서도 아름답기로 이름난 타운으로 사이우슬로 강이 호수처럼 마을 배후를 장식한 멋진 곳이다. 어촌의 옛 모습은 올드타운에 잘 보존돼 있다. 묵은 곳은 고즈넉한 강 풍광을 발코니에서 즐길 수 있는 강변 모텔 리버하우스인. 그날 저녁은 왁자지껄 소란 피우며 맥주 잔 기울이는 선창주점 스타일의 펍에서 피시앤드칩스와 맥주로 식사를 들었다. 플로렌스에서는 그게 제격이다.

 플로렌스에서는 꼭 즐겨야 할 세 가지가 있다. 사구 드라이빙과 바다사자 동굴관람, 그리고 헤세타 등대 촬영이다. 플로렌스의 해안사구는 규모도 크지만 아름답기도 그지없는 자연의 경이, 그 자체다. 그 사구를 제대로 보자면 시랜드어드벤처에서 운행하는 듄버기 탑승(사구 주행용 사륜구동차)이 제격인데 롤러코스터 이상의 짜릿함을 맛본다.

 오리건 코스트는 미국에서 가장 멋진 등대사진을 촬영할 수 있는 곳 중 하나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19세기의 헤세타 등대. 헬기에서 내려다봐야 제격이지만 시라이언 케이브(바다사자 동굴)에서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 동굴은 태평양 해안의 절벽 아래 형성된 12층 건물 높이의 거대한 해식동굴로 바다사자가 새끼를 낳고 돌보는 천혜의 장소. 동굴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바다사자를 관찰한다. 헤세타 등대는 이 동굴의 반대편에 마련된 전망대에서 바라다 보인다.

 헤세타 등대를 지나 닿은 곳은 뉴포트. 플로렌스만큼 아름다운 어촌마을이다. 플로렌스와 다른 점이라면 이곳만큼은 아직도 수백 척의 고깃배가 드나드는 진짜 어촌이라는 사실. 그래서 마을에는 해산물 식당이 많다. 비치도 잘 발달해 해안에는 휴가용 주택도 많다.


▲오리건 피노누아의 주산지인 윌러멧 계곡의 스위트칙스 와이너리




▲오리건 피노누아의 주산지인 윌러멧 계곡의 던디에 자리잡은 랑에 와이너리의 와인. 백포도주는 피노그리, 적포도주가 피노누아다.



프랑스 와인 이긴 자부심…사랑방 같은 시음장, 하늘이 내린 선물, 오리건 피노누아 와인
 와인 러버라면 ‘저지먼트 오브 파리’라는 말을 알 것이다. 1976년 파리에서 열린 블라인드 테이스팅에서 미국 와인이 프랑스 와인을 이긴 ‘사건’을 말한다. 이때 출품된 것은 캘리포니아 레드와인. 오리건 피노누아도 비슷한 전기가 있었다. 1979년. 최초(1965년)로 윌러멧 계곡에 피노누아를 심은 데이비드 레트가 프랑스에서 열린 와인올림픽에서 예상을 뒤엎고 3등을 거머쥐었다. 피노누아라면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 것을 세계 최고로 쳤다. 그 때문에 자존심 상한 부르고뉴의 와인메이커 로베르토 드루엥은 이듬해 재경기를 요청했고 이번에는 레트가 2등으로 한 계단 더 올라섰다. 7년 후 드루엥은 윌러멧 계곡에 피노누아 포도밭을 일궜다.

 기자가 찾은 곳은 윌러멧 계곡의 중심도시인 유진 외곽의 시골. 부드러운 능선의 구릉이 펼쳐진 작은 계곡은 무척이나 낯익은 모습이었다.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을 생각나게 할 만큼. 윌러멧 계곡은 부르고뉴와 위도도 비슷하다. 재배하기 까다롭기로 이름난 피노누아가 오리건에서 멋진 와인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던 데는 이런 공통점도 작용했으리라.

 킹에스테이트는 오리건에서도 손꼽히는 고급 와인 메이커다. 피노누아 품종만큼은 100% 유기농으로 재배할 만큼 애착이 강하다. 와이너리가 한눈에 조망되는 언덕마루의 방문센터는 자체가 멋진 레스토랑이다. 식탁에 제공되는 야채와 과일 잼 대부분이 직접 유기농기법으로 재배한 것이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스위트칙스 와이너리는 킹에스테이트와는 분위기가 정반대로 아주 캐주얼했다. 목조건물의 시음장은 서부개척시대의 바처럼 꾸며졌다. 카우보이 차림의 뮤지션이 통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손님들은 음식을 가져와 이곳 와인을 곁들여 먹는다. 동네 사랑방같이 이용되는 편안한 공간이었다.

‘관문’ 포틀랜드 가려면 노스웨스트항공 편리
오리건의 관문인 포틀랜드로 가는 가장 빠르고 편한 루트는 노스웨스트항공(NWA)을 이용하는 것. 노스웨스트는 지난해 델타와 합병해 미국 최대 규모 항공사가 됐다. 규모만 최고가 아니라 서비스에서도 최고다. 지난해 10월 발간(미국 교통부 항공정책시행처)된 ‘항공여행 소비자 보고서’에 따르면 6개 분야 중 4개에서 1위다. 그것은 △정시출발도착률(각각 85.3%) △수화물처리 오류 최저 △소비자불만 신고 최저 △최고 정시운항률(비행 취소율 0.5%).

로리 로프그렌 전무(아시아태평양지역 고객 서비스 및 공항운영담당)는 “지난해 연평균 정시출발률 82.8%는 정시운항능력을 한 차원 끌어올린 주목할 만한 수치”이라면서 “이를 바탕으로 아시아 허브인 나리타공항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말했다.





여행정보
◇항공로=인천∼나리타∼포틀랜드. 이 노선은 노스웨스트항공( www.nwa.com/kr )이 매일 운항한다. 나리타(출발 오후 3시 25분)∼포틀랜드(도착 오전 7시 20분)는 10시간 30분 안팎 소요.

◇홈페이지
▽스키장 △www.timberlinelodge.com △www.mtbachelor.com △www.willamettepass.com ▽와이너리(유진) △www.kingestate.com △www.sweetcheekswinery.com △www.langewinery.com(던디) ▽숙소 △www.hotellucia.com △www.sunriver-resort.com △www.riverhouseflorence.com ▽어트랙션 △www.sealandadventures.com(플로렌스) △www.sealioncaves.com(플로렌스) △www.hecetalighthouse.com(플로렌스) ▽레스토랑 △www.theblacksmithrestaurant.com(벤드) △www.georgiesbeachsidegrill.com(뉴포트) ▽현지정보 △www.traveloregon.com △www.travelportland.com △www.mthoodterritory.com △www.visitcentraloregon.com △www.visitoregoncoast.com △www.visitlanecounty.org

by 하야니 | 2009/04/14 00:34 | Eye to the world | 트랙백 | 덧글(0)

아프간의 역사(퍼온글)

아프가니스탄 공화국(Islamic Republic of Afganistan).
북부 평원지대는 농업지대고, 힌두쿠시 산맥으로 구성된 중부 산악지대와 리게스탄 사막을 포함한 남서부 고원지대로 나뉘어져 있다. 여러 광물 자원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교통 환경이 불편하여 거의 개발되지 못했으며 북부 평원지대의 천연가스만 개발되어 있다. 현재는 대규모 양귀비 재배로 아편 수출이 이 나라의 주된 수입원이다. 척박한 환경 탓에 양귀비 이외의 작물 재배가 어려워 양귀비 재배를 근절할 방법이 없다. 오죽하면 이 나라의 양귀비 재배를 허용하고 모르핀 등 약품 제조로 유도하자는 의견까지 나오고 있겠는가.

국민의 절반 가량은 파슈툰 족(45%). 그외 타지크인(25%), 하자라인(10%), 우즈베크인(8%), 투르크멘인 등이 국민을 구성하고 있다. 공용어는 파슈투어고, 다리어가 1/3, 북부 지역에는 알타이어에 속하는 우즈베크어와 투르크멘어도 사용하고 있다. 국민의 85%는 수니파 이슬람교도이고 15%는 시아파 이슬람교도다.

아프가니스탄 지역은 BC 6세기에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지배 아래 있었다. BC 4세기에 알렉산드로스(알렉산더)가 이 땅을 점령했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셀레우코스 왕조가 일부를, 인도 북부의 마우리아 제국이 나머지 땅을 통치했다. 그 뒤에는 박트리아 왕국의 영토가 되었다. BC 2세기에는 인도 쿠샨 왕조의 카니슈카 왕에게 정복되었다. 불교가 전파되었고, 불교는 오랫동안 영향을 주었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나 현장의 대당서역기에도 이 곳의 불교 이야기가 나온다. 특히 바미얀 국의 신앙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는데, 이곳에 그 유명한 바미얀 석불이 있었다. 현장의 대당서역기에는 그 불상에 대해서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이 석상은 2001년 탈레반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후 에프탈 왕조와 사산조 페르시아의 지배 아래 있을 때 힌두교가 전파되었다고 한다. 힌도교는 불교의 전파와 더불어 서서히 전파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쿠샨 왕조의 예술 양식에도 힌두교적인 흔적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힌두교도들은 아직도 남아있다. 탈레반은 이들 힌두교도들도 극렬 탄압 중이다. 힌두교도들은 힌두교도라는 표식을 붙이고 다녀야 한다.

870년경 이슬람 사파르 왕조 시대에 이슬람이 전파되어 이슬람교를 믿게 되었다. 1219년에 몽골에게 점령되었고 몽골 제국이 붕괴된 후에는 인도 무굴 제국과 페르시아 사파위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1700년대 초에 와서 페르시아 군주 나데르 샤에 의해서 무굴 제국의 영향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나데르의 경호대장이었던 아흐마드 칸 아브달리가 아흐마드 샤 두라니라는 이름으로 아프가니스탄 지역을 차지하여 독자 왕국으로 탄생했다.

그러나 1722년 두라니가 죽은 후 부족들의 불화와 영국, 러시아의 음모로 왕국은 붕괴되어 버렸다. 영국은 이 지역을 식민지로 만들고 싶어했으나 끊임없는 항쟁을 통해 독립을 유지했다. 3차례의 전쟁이 있었다. (1839~1842, 1878~80, 1919) 

1919년 왕국으로 출발한 아프가니스탄은 1930년대부터 안정된 정치가 실시되었으나 1973년 국왕 외유 중에 국왕의 사촌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났고 그 반동 여파로 좌파 혁명이 일어나 군주제를 종식시켰다. 공화국이 탄생했다. 1977년 좌파정당 PDPA(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의 온건파 Parcham(파르캄)파와 급진파 Khalq(칼크)파는 1978년 정권을 잡자 곧 분열했다. 또한 맑시즘에 입각한 개혁 때문에 농촌에서는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1979년에 좌익 정권을 수호하기 위해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 파병을 실시했다. 반군은 PDPA 정권을 무력화시키며 게릴라 전을 감행해 소련 군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이 시기에 수백만 명의 국민들이 파키스탄과 이란으로 망명했다. 수렁에 빠진 소련 군은 1988년 5월부터 철군하기 시작했다. 이 전쟁의 여파로 소련은 해체되고 만다.

이후 아프가니스탄은 정권을 둘러싼 길고 긴 내전에 돌입한다.

아프가니스탄 내전 (1989년 ~ 1992년) - 소련군 철수 완료(1989) PDPA 정권과 무자헤딘 간의 내전 종식 (2백만 명의 사망자와 5백만 명의 난민 발생...)
아프가니스탄 내전 (1992년 ~ 1996년) - 무자헤딘 간의 내전 끝에 탈레반 집권
아프가니스탄 내전 (1996년 ~ 2001년) - 탈레반 정권 시기의 내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2001년) - 9.11 테러로 인한 미국의 침공으로 탈레반 정권 붕괴

탈레반이 나왔다. 탈레반은 1994년 10월, 2만 5000여 명의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아프가니스탄 남부 칸다하르에서 결성한 수니파 무장 이슬람 정치조직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들은 9.11 테러를 주도한 오사마 빈 라덴과 그의 조직 알 카에다를 옹호하고 있는데, 같은 조직은 아니다. 이들은 근본주의 이슬람교도로 인류문화유산인 바야마 불상을 파괴해버리거나 여성의 인권을 극도로 제한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고 있는 과격파다.

1992년 공산 정권으로부터 수도 카불을 탈환한 사람은 Ahmad Shah Massoud(아마드 샤 마수드) 장군이었다. 타지크인 출신으로 소련 항쟁에서 가장 탁월한 전략가로 평가받은 사람이다. 마수드 장군은 1973년 공산 정권 수립 후 1975년 파키스탄으로 망명했다가 이슬람에 대한 탄압이 극심해지자 1978년 고향 판지시르에 잠입하여 게릴라 전을 펼치기 시작한다. 이때 나이가 26.

소련 군은 이 탁월한 전략가에 의해 극심한 피해를 입고 대규모 작전을 통해 마수드 검거에 나서지만 그때마다 농락만 당하고 만다. 마수드가 북부동맹(정식 명칭은 아프가니스탄 구국 이슬람연합전선 United Islamic Front for the Salvation of Afghanistan, UIF)을 이끌며 아프가니스탄의 동북부에서 소련 군을 궁지에 몰아넣고 있을 때, 아프가니스탄 남부에는 이슬람 당이라는 조직이 미국의 지원 아래 성장하고 있었다.

이슬람당과 마수드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자생 게릴라 조직을 이끄는 마수드가 보기에는 미국의 지원을 업은 이슬람당도 외세이기는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이 이슬람당이 훗날의 탈레반을 탄생시키는 모체다.

마수드 장군은 국방장관이 되었다. 내전은 끝나지 않았다. 이 시기의 아프가니스탄의 정권은 하도 복잡해서 정리하기도 쉽지 않다. 이 혼란기에 무자헤딘 단체들은 지방 군벌화 하여 국민들을 괴롭히는 집단이 되었다. 이때 사우디아라비아의 갑부 오사마 빈 라덴이 아프가니스탄 정국에 개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4년 빈 라덴의 지원을 받아 결성된 탈레반은 산적떼나 다름없는 무자헤딘들을 격파하고 정국의 태풍으로 등장하게 된다.

빈 라덴은 소련 침공 시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가 소련 군과 싸웠기 때문에 그의 명성은 탈레반 결성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이 무렵 미국이 빈 라덴을 직접 지원했다는 말도 있으나, 이에 대해서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1991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미국이 쿠웨이트 탈환에 나서며 사우디 아라비아 안에 미군 기지가 들어섰을 때 오사마 빈 라덴은 미국을 비난하며 미국과의 밀월 관계를 끝냈다. 1991년 빈 라덴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아진 사우디 아라비아를 떠나 수단으로 이주했다. 1993년 빈 라덴은 소말리아에서 미군을 테러했으며, 미국은 수단에 있던 빈 라덴을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빈 라덴은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가 탈레반을 결성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들 탈레반의 목표는 오직 정권 장악에 있을 뿐이다. 그를 위해서는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들은 과격파 회교주의자로 비이성적인 집단에 불과하다. 빈 라덴이나 탈레반 지도자 오마르가 소련 군과 싸웠다고 해도 마수드 장군의 위업에 대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이 정권을 잡았을 때 행한 인권 침해는 끔찍한 수준이었다. 텔레비전 시청도 금지되었고, 여자들이 다니는 학교는 폐쇄되었으며, 원시적인 수준의 이슬람 형벌이 부활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타 종교에 대한 탄압도 극심하게 행해졌다.

강정구 교수는 탈레반을 우리나라의 임시정부와 비교했으나, 이는 말도 되지 않는 비교다. 탈레반은 1994년에 결성되었으며 소련 군과 싸운 집단도 아니다. (다만 탈레반의 지도자로 알려진 오마르는 소련 군과 싸운 인물이다. 그는 그 전쟁에서 한쪽 눈을 잃었다고 전해진다.) 더구나 이들은 민간인을 납치해서 자신들의 요구 조건을 관철하려는 파렴치한 집단이다. 김구 주석의 임시정부가 민간인 테러를 일삼았던가? 탈레반의 이런 행각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다.

마수드 장군이 훗날 탈레반을 비난한 말이 있다.

"여자와 아이들을 죽이는 것을 어찌 지하드라 부를 수 있는가?"

탈레반은 원래 그런 집단이었던 것이다. 탈레반의 입장에서 눈의 가시였던 마수드 장군은 9.11 테러 직전에 탈레반에 의해서 제거되었다. 자살 특공대가 알 자지라 방송사 기자로 위장한 뒤 카메라에 넣어둔 폭탄을 폭발시킨 것이다. 판지시르의 사자라 불렸던 아프가니스탄의 전쟁 영웅은 동족의 손에 의해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마스드 장군에 대해서 좋은 트랙백이 걸렸네요. ◆진짜 '이슬람 전사'를 아시나요?[클릭])

본래 학교선생님이 되는 것이 꿈이었던 마수드 장군은 많은 학교들을 건립했는데, 이또한 근본주의자들과 충돌하는 이유가 되었다. 그가 세운 학교는 남녀공학이어서 공격받은 것이라고 한다. 마수드 장군은 그런 반발을 코웃음쳤다고 한다.

"조국을 재건하려면 여자도 배워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라면서.

마수드 장군의 문제와 빈라덴과 탈레반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런 반론도 들어와 있다. 여러가지 자료로 보아 상당한 근거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아프가니스탄 문제에 대해 더 깊은 관심이 있는 분들은 들러보면 좋겠다.

CIA-마수드, 빈 라덴-탈리반 관계 [클릭] sonnet님의 포스팅에 링크

현재 아프가니스탄의 대통령인 Hamid Karzai(하미드 카르자이)는 1957년생으로 이후이 부족의 족장이기도 하다. 그는 인도 유학생 출신으로 소련 군과 맞서 싸웠으며, 초기에는 탈레반과 사이가 좋았으나 탈레반의 무분별한 원칙주의에 반발하게 되었다. 그 대가로 탈레반은 1999년에 그의 부친을 암살했다. 그는 탈레반과 투쟁에 나섰으며 2001년 미군의 지지 아래 과도정부의 수반에 오를 수 있었다. 당시 그의 입각은 임시방편의 얼굴마담에 불과한 것이라고 했으나 아직까지는 정치력을 발휘해 아직까지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by 하야니 | 2009/03/24 23:22 | Eye to the world | 트랙백 | 덧글(0)

이라크

미국·이라크 2011년 내 철군 합의

 

 미국과 이라크가 2011년 말까지 이라크에서 미군을 철수하기로 사실상 합의했다.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를 21일 방문한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은 누리 알말리키 총리와 호시야르 제바리 외무장관을 만나 ▶내년 6월까지 이라크 도시와 마을에서 미군을 철수하고 ▶2011년 12월 31일까지 미 전투병력을 완전 철수하는 것을 목표로 한 일정표(time table) 초안에 합의했다고 워싱턴 포스트(WP) 등 미 언론이 22일 보도했다.

제바리 장관은 라이스 장관과 회담한 뒤 공동 기자회견에서 이 같은 초안 내용을 공개했다. 라이스 장관도 “협상 초안은 아주 좋다”며 “미국과 이라크는 희망적인 일정표에 동의했다”고 말했다.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그동안 철군 시한을 정하는 것을 극력 반대해 왔다. 하지만 이라크 군경의 능력 향상으로 치안이 안정돼가는 데다 이라크 국민의 미군 철군 요구가 갈수록 높아지자 최근 입장을 완화했다.

이런 가운데 라이스 장관이 21일 이라크를 전격 방문, 알말리키 총리와 직접 담판을 벌여 철군 협상 타결의 돌파구가 열렸다. 철군안은 부시 대통령과 이라크 측의 알말리키 총리, 쿠르드족 자치정부 지도자의 승인을 거쳐 다음달 소집되는 이라크 의회에서 통과되면 최종 확정된다.

초안에 따르면 미군의 2011년 완전 철수는 시한(데드라인)이 아니라 이라크의 치안상황을 봐가며 결정하는 목표 시점으로 돼 있다. 또 미군이 완전 철수한 뒤에도 이라크군 훈련 등 지원 업무를 위해 미군 수만 명이 잔류하게 될 것으로 알려졌다. 이라크 측 협상대표인 모하마드 하무드는 “2011년 말에 이라크 군경의 능력을 재평가할 것”이라고 밝혀 철군 시점이 조건부임을 확인했다. 이와 함께 초안은 미국이 고용한 용역 인력의 범죄 관할권을 이라크에 넘기도록 합의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라크 주둔 미군의 범죄 관할권에 대해선 미국에 맡긴다는 주둔군 지위협정(SOFA)을 유지할 것을 주장하는 반면 이라크는 이에 반대하고 있다. 따라서 초안이 최종 합의되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릴 것으로 AP 통신은 전망했다.

현재 이라크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은 14만4000명에 달한다. 2003년 3월 이라크전을 개시한 이래 현재까지 미군 전사자는 4100명을 넘는다. 이런 가운데 미국과 이라크가 철군에 합의할 경우 미국 대선에도 상당한 파장이 예상된다. 버락 오바마 민주당 대선 후보는 “집권 후 16개월 안에 이라크에서 미군을 완전 철수시키겠다”는 조기 철군론을 공약 1호로 내세워 왔다. 반면 존 매케인 공화당 대선 후보는 “이라크 전쟁에서 이길 때까지 철군 시한을 정해선 안 된다”고 주장해 왔다. 미군 철군이 가시화될 경우 오바마는 “내 공약이 옳았다”며 철군 주장을 더욱 강하게 밀어붙일 것으로 전망된다. 매케인의 정책 변화는 불가피할 전망이다.

이라크 주둔 한국군의 철수 시기도 영향을 받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은 이라크전 직후인 2003년 4월 말 서희·제마부대 1진을 보냈고 이듬해 8월 아르빌 지역에 자이툰부대 3650명을 파병했다. 그 뒤 매년 감군을 계속해 현재는 650명이 남아 있다.  


by 하야니 | 2009/03/04 00:08 | 트랙백 | 덧글(0)

퍼온글)천리포수목원, 민병갈원장

목련의 계절 4월이면 목련과 관련하여 특별히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태안반도의 한 모퉁이에 수목원을 차려 지구상의 모든 목련을 모으려 했던 귀화 미국인 민병갈(閔丙渴)이다. 일제 패망후 미군 장교로 한국에 첫 발을 디뎠던 그는 57년간 한국에서 살며 세계적인 자연동산을 꾸며 놓고 지난해 4월8일 81세로 숨을 거두고 이 땅에 묻혔다. 그의 1주기를 맞는 올 4월은 나무를 자신의 분신처럼 사랑하며 자연보호에 헌신했던 한 이방인에 대한 추모의 정이 남다른 달이다.

민병갈은 광복 직후 우리나라 현대사의 격동기를 겪으며 역사의 현장에 서 있었던 특이한 경력을 갖고 있다. 한반도에 진주한 미군 24군단의 선발대 장교로 서울에 들어와 조선총독부의 통신시설을 장악했고, 미국 군정청 관리로 일하며 정부 수립 때까지 미국 대한정책의 일선 집행관 노릇을 했다. 서양인으로는 최초로 한국에 귀화한 그는 해안국립공원 태안반도에 대단위 수목원을 세워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목련동산을 일궈 놓았다.

민병갈과 한국의 운명적 만남

민병갈이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된 경위는 매우 극적이고 운명적이었다. 1945년 9월8일. 그날의 서해 바다는 유례 없는 대규모 선단에 놀랐는지 풍파조차 일지 않았다. 오키나와를 출발하여 어둠의 바다를 뚫고 들어온 미군 함대가 월미도 근처에 닻을 내린 시간은 새벽 다섯 시. 1886년 대동강의 셔먼호 사건 이후 59년 만에 미국 배로서는 처음으로 한국 연안에 정박한 순간이었다. 이날은 한국을 지배하던 일본이 미국에 항복한 지 23일째 되는 날로 인천 앞바다는 전승국의 함대가 위압적으로 들어차 긴장감이 감돌았다.

날은 밝았지만 연안 주민들은 아직 잠을 덜 깬 시간이었다. 그런데 난데없는 배들이 쏟아내는 소음에 잠을 깬 주민들은 해안으로 나와 보고는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들이 본 것은 육지로 몰려오는 수많은 미군 상륙정들이었다. 얼굴에 검댕이 칠을 하고 완전무장한 미군들은 무섭기만 했다.

그런데 한 상륙정에서 내리는 13명은 다른 군인들처럼 민첩하지 못했고 지휘 장교마저 군인답지 않게 어리숙해 보였다. 더욱 신기한 것은 장교 한 사람만 키가 큰 백인일 뿐 나머지 대원들은 한국인과 비슷한 동양인이라는 점이었다. 부두의 구경꾼들에게 흥미를 끈 이 부대는 일본계 미국인으로 편성된 ‘씨그’(CCIG, Civil Censorship Intelligence Grou p)라는 정보대였고, 지휘장교는 칼 밀러(Carl F. Miller)라는 24세의 풋내기 해군 중위였다.

밀러 중위가 이날 함상에서 처음 본 한국 땅은 월미도였다. 그리고 얼마 후 상륙정에 올라 인천항 부두로 들어오면서 그는 한국의 상쾌한 아침을 맛보았다. 해풍을 타고 코끝에 닿는 갯내음이 약간 비릿했지만 얼굴을 스치는 새벽 공기는 차가우면서도 신선했다.

막상 말로만 듣던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왔다 싶으니 긴장감보다 호기심이 앞섰다. 뒷날 민병갈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에 귀화한 그는 1980년 영문잡지 ‘아리랑’과의 인터뷰에서 “전투훈련을 한 번도 받지 않은 통역장교였던 나는 무거운 M1 소총과 허리에 매단 수류탄이 거추장스럽기만 했다”고 상륙 당시를 회고했다.

미군이 상륙한 인천항 도크에는 뜻밖에도 일본의 고위 관료들이 미군을 마중나와 있었다. 키가 작은 일본인들이 높은 모자에 흰 장갑을 낀 서양 귀족형 정장을 하고 뻣뻣이 서 있는 모습은 어색하기만 했다. 일본어 통역장교이기도 했던 밀러는 이들과 악수를 나누고 부대원들과 함께 열차에 올랐다. 이날 인천항에 들어온 미군의 일부는 월미도에 남고 주력부대는 경인 철도를 이용하여 용산까지 들어왔다. 밀러가 지휘하는 CCIG 부대는 중앙우체국을 장악하는 선발대 임무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가장 먼저 서울 중심가로 들어가야 했다.

열차가 부두 하역장을 출발하여 용산 역까지 오는 동안 밀러는 한국의 대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맑은 하늘, 야트막한 산, 한가로운 촌락 등 한국의 자연과 풍물이 정겹기만 했다. 용산에 도착한 미군 수송 열차는 주력 부대를 하차시킨 다음 밀러 일행 13명만 태운 채 서울역으로 진입했다. 그런데 플랫폼에서 트럭에 옮겨 탄 밀러 부대는 역 구내를 벗어나는 순간 예기치 않은 인파에 휘말리는 사태가 벌어졌다. 미군이 기차를 타고 온다는 소문을 듣고 수많은 시민들이 환영나와 있었던 것이다.

뜻밖의 군중에 포위돼 트럭이 움직일 수 없게 되자 밀러는 지휘관으로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길을 뚫어 보려고 일단 차에서 내렸으나 이번에는 그가 집중적인 환영 인물로 포위돼 더욱 난처해졌다. 군중들은 밀러를 사령관쯤으로 생각했는지 집중적으로 그를 에워싸고 태극기를 흔들며 환성을 터뜨렸다. 힘겹게 군중을 벗어난 밀러 부대는 중앙우체국에 도착해 성조기를 게양한 후 가까운 곳에 있던 조선호텔(지금의 웨스틴 조선호텔) 마당에 군막을 쳤다.

그날로부터 정확히 50년 뒤인 1995년 9월8일 저녁. 밀러는 조선호텔측이 베푼 ‘민병갈 선생 한국생활 50주년 축하 모임’에서 인사말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본의 아니게 한국민들의 대규모 환영을 받는 최초의 미군 지휘관이 됐습니다. 하지 사령관에게는 대단히 미안한 일이었지요. 사람들이 자꾸 내게로 몰려 와 계급장을 보이며 ‘나는 장군이 아니다’라고 일본 말로 외쳤지만 군중들은 막무가내였습니다. 할 수 없이 나는 대원들을 하차시켜 도보 행군으로 길을 열었지요. 내가 졸지에 미군 대표가 된 것이 우습고 당혹스러웠습니다. 미국이 한국을 위해 일본과 싸운 것도 아닌데 한국인들이 미군을 환영해 주는 것도 미안했습니다. 50년 전의 오늘은 내 생애에서 가장 긴 날이었습니다.”

이날 파티는 밀러 부대가 조선호텔 마당에서 야영한 첫 날의 50돌을 기념하여 호텔측이 밀러를 위해 특별히 마련한 자리였다. 마고자 등 전통 한복차림으로 파티장에 나온 밀러는 패기 넘치는 미군의 청년 장교에서 어느덧 백발이 성성한 74세의 한국 노인으로 변해 있었다.

당시 그는 민병갈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에 귀화한 지 16년째를 맞고 있었는데, 외모만 서양인일 뿐 의식주의 습성은 한국인과 다름없었다. 김치와 깍두기를 즐기는 식성이 그렇고, 기와집과 온돌을 좋아하는 습성이 또한 그러했다.

img2R밀러가 한국 땅을 처음 밟은 날은 1945년 9월8일이지만 한국 사람을 처음 만난 때는 그보다 4∼5개월 전이었다. 오키나와 미군사령부에서 통역장교로 있을 때 일본군 포로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상당수의 한국인을 만났던 것이다. 그들은 강제로 일본군에 끌려온 사람들이었는데, 밀러는 이들에게서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친밀한 인상을 받았다.

특히 그의 시선을 끈 포로는 종군위안부로 부산 지역에서 끌려온 앳된 여성들이었다. 가냘픈 체구, 순박한 얼굴, 겁먹은 표정들은 청년 장교에게 깊은 연민을 갖게 했다. 밀러는 이때 강력한 코리아에 대한 유혹을 느끼고 한국행을 지원하게 됐다. 원래 그는 일본 파견 CCIG 대장으로 편성됐었으나 한국에 가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동료 장교와 자리를 바꿔 인천행 전함을 타게 됐던 것이다.

조선호텔 마당의 차가운 군막에서 한국의 첫 밤을 보낸 밀러는 이튿날 지프에 올라 소공동과 명동 그리고 태평로 일대를 돌아봤다. 사무실로 쓸 만한 건물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는 점령군의 선발대 장교로서 일본 재산이라면 차지하지 못할 것이 없었다. 처음에는 접수한 중앙우체국 건물을 쓰려 했으나 가까운 곳에 그보다 훨씬 좋은 건물이 있음을 발견하고 생각을 바꿨다. 명동에 있던 호사스러운 공연장인 시공관(전 명동예술극장)이었다. 밀러는 이곳에 CCIG 본부를 차리고 10개월간 일본인의 통신물을 검열하고 그들의 재산을 관리하는 업무를 수행했다.

밀러가 처음 본 한국은 서양에 알려진 말 그대로 조용한 아침의 나라였다. 그는 지도를 들고 전차 길이 난 서울의 중심가부터 돌아봤다. 이때 그를 사로잡은 것은 흰 옷을 입은 한국인들의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미군 차가 오면 슬슬 비켜서며 신기한 듯 바라보는 행인들의 순박한 모습에서 그는 오키나와에서 받았던 코리안의 이미지가 결코 틀리지 않았음을 재확인했다. 그의 눈에 비친 한국인은 자연에 순응하면서 꾸밈없이 살아가는, 지구상에서 가장 착한 사람들이었다.

한국에 살으리랐다

밀러 중위가 이끄는 CCIG 부대의 임무는 1946년 여름 10개월 만에 끝났다. 당초부터 군인 체질이 아니었던 밀러는 학업을 계속할 셈으로 이 해 8월 귀국하여 군복을 벗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에는 한국에 대한 미련이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고심 끝에 그는 대학원 진학을 포기하고 워싱턴에 있는 펜타곤(국방부)을 찾아가 서울 근무를 신청했다.

밀러는 주한 미군총사령부 사법부 정책고문관 발령을 받고 1947년 1월 다시 한국으로 왔다. 그의 한국 직장은 군정청 소속으로 주로 적산(敵産-일본인 재산)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그때 나이는 26세. 엄격한 군대 규율에서 벗어난 그는 자유로운 민간인 신분으로 본격적인 한국 수업에 들어갔다.

서울의 미 군정청에서 근무한 2년은 밀러에게 한국의 자연을 익히는 초등 과정의 수학 기간이었다. 그는 이미 군인 시절 10개월 간의 입문 과정을 마친 상태였다. 그가 군정청에서 일했던 1947∼48년은 극심한 경제난 속에 전승국의 신탁통치 여부를 놓고 국론이 분열되고, 좌우익이 첨예한 사상대립을 벌이는 등 사회 전체가 시끄러웠던 시기였다. 그런 혼란중에도 점령국 관리로서 거칠 것이 없었던 밀러는 여유만만하게 한국의 자연과 풍물을 즐겼다.

군인 시절 밀러가 최초로 즐긴 한국의 자연은 서울의 남산이었다. 근무지인 명동이나 숙소인 회현동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남산은 그에게는 알맞은 산책 코스였다. 틈만 나면 서울 시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남산에 올라 유서 깊은 고도(古都)의 전경을 조망했다. 그의 눈길에는 고궁보다 오밀조밀한 초가들에 더 호감이 갔다. 그를 최초로 사로잡은 한국의 자연은 북한산의 수려함이었다.

군정 시절에는 그의 산행 반경이 동쪽으로 치악산과 오대산까지, 남쪽으로는 속리산과 지리산까지 그리고 1948년 여름에는 멀리 한라산까지 이르렀다. 분단의 현장을 보고 싶었던 그는 38선을 두 차례나 찾아가 소련 보초병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는 러시아어를 할 줄 알았다.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군정청이 문을 닫게 되자 밀러는 다시 귀국해야 했다. 한동안 서울에 남아 있던 그는 적당한 일자리가 없어 일단 미국으로 돌아갔으나 마음은 여전히 한국에 있었다. 이번에는 국무부 관할의 해외원조 기관인 원조협조처(ECA:AID의 전신)에 취직해 1949년 7월, 세번째로 한국을 찾았다. 그러나 한국에서 살고 싶었던 그의 집념은 또 한번 제동이 걸렸다. 새 직장에서 근무한 지 1년도 안돼 6·25 전쟁이 터져 일본으로 피난을 떠났기 때문이다.

일본 체류 두 달 만에 전시 임시수도였던 부산으로 돌아온 밀러는 유엔군의 인천상륙 작전에 맞춰 위험한 북행(北行) 열차에 올랐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9월말,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열차 작전은 밀러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대장정이었다. 그것은 5년 전의 인천∼서울 열차작전과는 비교가 안 되는 전시 작전이었다. 영문잡지 ‘아리랑’에 실린 밀러의 2차 서울 장정 회고담은 그의 생애에서 1945년 9월의 인천 상륙에 이은 또 다른 하이라이트였다.

“1945년 인천에서의 서울 입성 작전은 한 시간 만에 끝났는데 1950년 부산에서의 서울 입성 작전은 나흘 반이 걸렸습니다. 일요일 아침 10시에 부산역을 출발해 목요일 오후 4시 영등포 역에 도착했으니까요. 열차 안에서는 야전식으로 끼니를 때우고 나무 의자에서 새우잠을 잤습니다. 영등포에서는 퇴각하지 못했던 북한군이 한밤중에 열차를 공격해 목숨을 잃을 뻔했지요. 그런데 전쟁 직후 한강 철교가 폭파돼 열차가 더 이상 갈 수 없었습니다. 나는 미군으로부터 지프 한 대를 구해 임시로 가설된 부교를 이용하여 간신히 한강을 건넜습니다.”

한국의 명산·명소를 모두 가 보고 싶었던 밀러의 집념은 6·25 전쟁중에도 멈추지 않았다. 1950년 11월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북진하자 그는 북한의 명산에 가 볼 욕심으로 눈보라를 맞으며 북쪽으로 차를 몰았으나 개성에서 더 이상 갈 수 없었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역전된 줄 몰랐던 그는 유엔군의 후퇴 행렬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에서 살고 싶었던 밀러에게는 시련이 끊이지 않았다. 간염 치료를 위해 일본과 미국을 오가는 동안 ECA가 대만으로 옮겨가 타이페이로 전근해야 할 형편에 놓이게 됐다. 1951년 두말 없이 사표를 던진 그는 유엔 군사원조단(UNCACK)으로 자리를 옮겨 한국생활을 계속했다. 얼마 후에는 한국은행의 미국인 고문을 보좌하는 임시직으로 있다 계약기간이 끝나 한국을 떠났다.

그리고 1953년 한국은행에 재취직하여 자리를 잡았다. 밀러는 한국에 머무르기 위해 7년 동안 여섯 군데의 근무처를 전전했던 것이다.

밀러는 1953년 한국은행에 취직하여 안정된 직장을 갖게 되면서부터 자연학습을 한국 친화 방식으로 바꾸었다. 미국 기관에서 근무한 7년은 대부분 자동차를 이용한 단독 답사였기 때문에 한국의 명소와 지리를 익히는 이상의 발전이 없었다. 한국의 자연과 풍물을 좀 더 알기 위해서는 여러 사람과 어울리면서 직접 몸으로 체험하는 현장주의가 바람직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한 장거리 탐사 여행이었다. 1950년대 중반 밀러는 혼자 배낭을 메고 청량리 버스정류장에 자주 나타났다.

한국은행 시절 초기에 밀러가 한국의 자연과 함께 탐닉한 또 하나는 한국의 풍물이었다. 일찍부터 한국적인 여유와 순박함에 심취했던 그의 눈에는 꾸밈없이 살아가는 한국인들이 이루어 놓은 생활문화가 또 다른 아름다움으로 떠올랐다. 토속적이며 인간적인 한국의 풍물들은 한국인에게서 그랬듯 친근하게 느껴졌다. 밀러와 50여 년간 친구로 지낸 서정호(徐正虎)는 그의 유별난 한국의 풍물 사랑을 이렇게 소개했다(서정호는 1945년 밀러가 부대장으로 있던 미군 CCIG 부대에서 일한 경력 때문에 밀러와 특별한 인연을 갖고 있다).

“한국전쟁이 휴전에 들어간 1953년 8월부터 한동안 미국에 가 있던 밀러가 이듬해 다시 나타났어요. 한국은행에서 다시 일하게 됐다며 북한에 소속돼 있던 설악산이 휴전선 이남으로 넘어왔다고 반가워하더군요. 그리고 강원도로 떠날 채비를 하는 것을 봤는데 며칠 후 한은 고문실을 방문한 나에게 대관령에서 서당 구경을 하고 왔다고 자랑했습니다. 망건 쓴 훈장과 댕기 딴 학생들의 모습을 한바탕 설명하며 대단한 발견을 한 듯한 표정이더군요.”

그러나 6·25 전쟁 직후의 대중교통은 극도로 열악하여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밀러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버스 여행의 문제는 화장실이었다. 밀러는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한 여행이 쉽지 않자 그가 오랫동안 관여했던 영국왕립 아세아학회(RAS:Royal Asiatic Society) 한국지부를 활용한 단체여행을 구상했다. RAS는 1823년 영국에서 발족한 유서 깊은 단체인데 한국지부(RAS-KB)는 구한말인 1900년 10월에 결성돼 있었으나 일제의 한국 병탄으로 소멸된 상태였다. 밀러는 군정청 근무 때 이 같은 사실을 알고 1947년 이 단체의 부활을 주도하여 회장직을 맡고 있었다. 회원들은 외교관·선교사 등 모두 외국인이었다.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한 한국의 자연과 풍물 탐사방법으로 밀러가 1950년대 중반에 기획한 ‘RAS투어’는 결과적으로 밀러 개인의 수익사업이 되고 말았다. 우리나라 단체관광의 시초가 된 RAS투어는 돈 많고 호기심 많은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수입이 짭짤했다. 초기의 교통편은 극도로 열악하여 열차를 개조해 쓰거나 미군 버스를 이용했다. 대사급이나 미군 장성이 끼어있는 제주도 관광 때는 해군에서 함정까지 지원했다. 1950년대말 울릉도에 갔을 때는 섬이 생긴 이래 처음으로 외국인 손님이 많이 왔다며 군수가 소를 잡아 주는 환대를 베풀었다.

RAS 관광단을 이끌고 전국의 명산대찰을 돌던 밀러는 사찰을 감싸고 자라는 다양한 나무들에게서 특별한 공식 하나를 발견했다. 그것은 아무리 헐벗은 산이라도 절이 있으면 그 주변에는 나무가 많다는 사실이었다.

‘절=숲의 법칙’은 밀러에게 중대한 암시로 떠올랐다. 그가 얼마 뒤 필생의 사업으로 시작한 수목원 사업은 이 공식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었다. 이때 그는 스님들로부터 사찰 주변에서 자라는 나무들에 대한 지식을 많이 얻었다. 뒷날 밀러는 우리나라의 산에 나무를 지켜주는 절이 많지 않았더라면 산림이 크게 황폐했을 것이라며 스님들의 자연 보전 공로를 높이 평가했다.

민병갈의 한국에 대한 열정

밀러는 직장을 옮겨다니면서도 한국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군정청 직원으로 있을 때 좀더 체계있는 학습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찾은 곳은 미 8군 도서관이었다. 그러나 그의 관심사였던 한국의 자연·문화·풍물에 관한 책은 드물고 역사·지리·정치에 관한 책이 대부분이어서 도움이 안 됐다. 대학 도서관을 몇 군데 찾아갔으나 읽을 만한 책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서울 뒷골목의 고서방을 찾는 일이었다.

군정청 시절 밀러가 한국에 관한 책을 많이 읽게 된 데는 서울 인사동에 있던 ‘통문관’의 역할이 컸다. 이 고서방의 주인 이겸로(李謙魯)와는 일본어 소통이 가능하여 큰 어려움 없이 책을 주문할 수 있었다. 인사동에서 산기(山氣) 선생으로 통하던 이겸로는 지금도 93세의 고령을 무릅쓰고 통문관 2층 사무실에 매일 출근하는 노익장을 보인다. 지난 1월 돋보기를 들고 고서와 서화를 정리하던 그는 56년 전에 본 밀러의 모습을 생생하게 이야기했다.

“군정 때 웬 젊은 미국인이 와서 더듬거리는 한국말로 영어로 쓴 한국 관련 책을 사겠다고 해요. 한국말이 잘 안 통하면 일본 말이 거침없이 나와 놀랐지요. 그때 나는 꽤 많은 책을 구해 주었지요. 그는 우리 가게의 단골이 됐는데, 나중에 하는 말이 6·25 전쟁 때 부산으로 옮겨 놨던 책들이 모두 불타 버렸대요. 역 창고에 불이 나 그랬다는데 참으로 아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밀러는 통문관을 통해 수집한 한국 관련 영문 책자를 빠짐없이 정독했다. 그 때 읽은 책 중 하나가 ‘하멜 표류기’였다. 이겸로에 따르면 밀러는 휴전 후에도 통문관에 자주 들러 고문서를 많이 사 갔다고 한다. 그가 수집한 책들 중에는 ‘조선 고지도’등 희귀본이 많았는데 식물 원예학에 관련된 서적을 제외한 5,000여 권의 장서는 모두 1986년 9월 이화여대 100주년기념도서관에 기증했다.

밀러가 서양인으로는 드물게 한자에 밝고 일본어를 잘 하게 된 데는 그럴 만한 교육적 배경이 있었다. 1921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에 있는 웨스트 피츠턴에서 태어난 그는 버크넬(Bucknell)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한 자연과학도였다. 외국어에 남다른 재능이 있던 그는 대학 시절 이미 러시아어와 독일어가 상당 수준에 올라 있었고 심심풀이로 한자를 익히기도 했다.

그런 그가 1944년 콜로라도 대학의 해군 정보학교 일본어 과정에 입교한 것은 징병에 걸리지 않으려는 편법이기도 했다. 그는 이곳에서 1년 동안 일본어만 사용해야 하는 밀폐교육을 마친 뒤 1945년 4월 오키나와 미군사령부의 통역장교로 배치됐다. 밀러의 한자 실력은 한자 투성이였던 1960년대의 한국 신문을 불편 없이 읽을 정도였다.

밀러가 한국 이름 민병갈을 갖게 된 시기는 1960년대 초반이었다. 한국 이름을 갖고 싶었던 그는 당시 가까이 지내던 민병도(閔丙燾) 한은 총재의 성이 자신의 성 ‘밀러’의 첫 발음과 비슷한 것에 착안하여 이를 따르기로 했다. 이름의 마지막 자 ‘갈’(渴)은 자신의 영어 이름 ‘칼’에서 따왔다.

그런데 그가 1979년 한국에 귀화하여 호적 신청을 할 때 본관(本貫)을 정해야 하는 서류상의 문제가 생겼다. 밀러는 자신의 미국 고향의 이름을 따 ‘펜실베이니아 민씨’로 하자고 제안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민병도의 본관인 여흥(驪興)을 따랐다. 그는 이듬해 문중 원로들을 천리포수목원에 초대하여 성대한 종친회를 베풀었다.

천리포와의 첫 인연

민병갈이 천리포에 수목원의 터전을 잡게 된 것은 지극히 우연이었다. 1950년대말 한국은행 고문직에 있었던 그는 여름철이 되면 직장 동료이자 한은 간부였던 송인상(宋仁相·전 재무부 장관)·장기영(張基榮·전 한국일보 사주) 등과 함께 만리포 해수욕장을 찾는 일이 많았다. 한국의 자연과 인심에 푹 빠져 있던 그에게는 해수욕보다 서해의 낙조가 더 큰 매력이었고, 현지 주민과 어울리는 것 또한 큰 즐거움이었다. 그때 이미 한국에 온 지 15년이 넘었던 그의 한국어 실력은 한국인 누구와도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없을 정도였다.

1962년 여름. 예년처럼 만리포 해수욕장을 찾은 민병갈은 이웃에 있는 천리포로 산책을 나섰다가 한 마을 노인으로부터 간절한 부탁 하나를 받았다. 전부터 안면이 있던 그는 과년한 딸의 혼수비용으로 돈이 필요하다며 자신의 야산 6,000평을 사달라고 조르는 것이었다. 민병갈은 처음에는 완곡하게 거절했으나 거듭 부탁하는 노인의 사정이 딱해 보여 돕는 셈치고 그의 야산을 사기로 했다. 만리포 근처에 별장을 갖고 싶었던 그에게는 당시의 화폐 단위로 평당 200환씩, 120만환은 큰 부담이 아니었다. 이렇듯 막연한 생각으로 산 이 땅은 뒷날 18만평 규모의 수목원으로 성장하는 바탕이 됐다.

미국인이 땅을 샀다는 소문이 돌자 많은 땅 주인들이 민병갈을 찾아와 자기 땅도 사달라고 졸랐다. 돈에 별로 구애받지 않던 민병갈은 이듬해부터 조금씩 땅을 사들여 1966년 말에는 소유지가 1만9,000평으로 늘어났다. 1970년에는 해안에서 300m쯤 떨어져 있는 ‘닭섬’이라는 무인도를 사들였다. 닭고기를 지독히 싫어했던 그는 섬 이름을 ‘낭새섬’으로 바꾸는 작명술도 발휘했다. 이 섬에 낭새라는 조류가 서식했던 점에 착안하여 이같이 이름을 지은 것이었다. 당시 국내법으로는 외국인이 땅을 살 수 없었기 때문에 양아들이나 한국인 친지 이름을 빌렸다.

img3L생각 밖으로 땅이 불어나자 민병갈은 천리포 땅에 본격적으로 나무를 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1960년대의 민병갈은 RAS투어와 증권 투자 등 돈벌이에 여념이 없었다. 1970년 식목철을 맞아 민병갈은 천리포에 아담한 자연동산을 꾸밀 생각으로 첫 작업에 들어갔다. 이때 심은 나무들은 재래종 중심의 방풍림과 정원수 정도였다. 그가 처음 사들인 땅은 해풍을 많이 탔기 때문에 바람막이로 천리포에서 많이 자생하는 곰솔을 심었다. 정원수는 주로 꽃나무를 택했다.

그로부터 9년 뒤 한국으로 귀화한 그는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천리포수목원의 초기 구상을 이렇게 회고했다.

“처음에는 2만평 정도의 자연농장을 꾸밀 생각이었습니다. 아담한 한옥을 짓고 주변에는 내가 좋아하는 꽃나무를 많이 심을 작정을 했지요.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나의 식물 지식은 거의 백지 상태여서 어떤 나무를 심어야 좋을지 몰라 사 둔 땅은 버려둔 채 나는 자연 답사에만 전념했습니다. 나무를 심기 시작한 초기에는 목련이나 장미 등 보기 좋은 꽃나무에 집착했는데, 내가 산 땅은 토질이 나빠 꽃나무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이때 민병갈이 천리포 전진기지로 삼은 천리포 집은 서울에서 실어온 낡은 기와집이었다. 남달리 한옥을 좋아했던 그는 서울에서도 기와집에 살고 있었는데 도시계획으로 헐리게 된 한옥 세 채를 천리포에 옮겨 놓았다. 당시 그의 소유지 안에 있던 초가는 지금까지 100년 넘게 보존돼 태안군의 명물로 남아 있다. 현재 천리포수목원에 있는 15채의 한옥은 민병갈의 취향에 따른 것으로, 다섯 채는 옮겨 지은 것이고 나머지는 직원용으로 신축한 것이다. 이들 한옥에는 후박집·목련집 등 나무 이름이 붙어 있다.

천리포에 일단 나무를 심기 시작했지만 난감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나무동산을 꾸밀 만한 조건이 못 되었다. 제대로 된 진입로도 없었고 전화는 물론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토양 조건이었다. 그가 사들인 야산은 척박한 토질에 일부는 황량한 모래밭이었다. 자갈밭을 헤치고 20cm 정도 파면 식목에 부적합한 모래흙이나 염분이 섞인 황토가 나오기 예사였다. 나무의 생장에 적합한 사질 양토가 부족했던 것이다.

강수량이 연평균 1,000mm밖에 안 되고 배수가 잘 안 되는 저지대라는 점도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 당장 급한 것은 식목용 용수 확보였는데 전기가 없으니 급수펌프를 가동시킬 수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울에서 발전기를 들여왔으나 지하수의 수맥을 제대로 찾아 파이프를 묻는 난제가 뒤따랐다. 천리포는 강수량이 적어 지하수 웅덩이가 많지 않았던 것이다. 농사 경험이 많은 인부들의 감각에 의존한 수맥 찾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중장비가 없던 시절이어서 삽과 괭이로 힘겹게 땅을 파내려가도 지하수가 나오지 않아 헛수고로 끝나기가 예사였다.

“절벽 위에 나무를 심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어요. 자갈 투성이의 땅을 파기도 힘들거니와 묘목에 줄 물이 있어야지요. 인부들이 물지게로 동네 우물에서 물을 퍼 날랐지만 쉽게 될 일이 아니었지요. 몇 십 그루를 심다 보면 해가 저물기 예사였어요. 그래도 민병갈 님은 그날 심을 나무의 수를 할당해 기어이 하루 분량을 채우도록 했습니다. 땅거미가 지면 광솔로 만든 횃불을 밝히며 나무를 심었지요.”

당시 인부로 일했던 박재길(朴在吉·천리포식당 주인)의 회고담이다. 천리포 토박이였던 그는 1971년 정식 직원으로 채용돼 11년간 재산관리인으로서 수목원 일을 도왔다. 그런데 천리포에 나무를 심은 첫 해 여름, 인부 몇 사람이 민병갈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 작은 사건이 일어났다. 근처의 학암포 앞바다에 있는 대뱅이섬에서 자생하는 야생 나무를 캐다 그가 거처하는 한옥 근처에 심은 것이다.

민병갈이 1970년 7월에 쓴 수목원 일지를 보면 인부들이 캐온 나무는 후박나무 일곱 그루, 동맥나무 다수(many), 참식나무 한 그루 등 세 가지로 적혀있다. 당시 민병갈은 후박나무 군락지를 훼손했다고 인부들을 크게 나무랐다.

그리고 자생목을 캐다 심는 것은 중대한 자연파괴라고 교육시키고 다시는 그런 일을 못하게 했다. 그런데 몇 해 후 대뱅이섬을 찾은 그는 후박나무들이 모두 목재나 한약재로 잘려 나간 것을 발견하고 더 많이 캐다 심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그가 역정을 냈던 일곱 그루는 그가 머물렀던 소나무집 옆에서 30년 넘게 자라며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1971년 7월 첫 주말. 만리포와 천리포를 잇는 해안에서 희한한 구경거리가 벌어졌다. 대형 미군 트럭 한 대가 물이 덜 빠진 바다를 헤쳐 나가는 보기 드문 장면이었다. 트럭에는 서울에서 가져온 묘목이 가득 실려 있었다. 당시 천리포에는 자동차 길이 나지 않았기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썰물로 수심이 낮아진 바다를 수송로로 이용한 것이다. 간만의 차가 심한 서해안은 썰물 때가 되면 물이 많이 빠져나가 갯벌을 육로로 활용할 수 있었다. 천리포 앞바다는 다행히 갯벌이 단단하여 트럭의 이동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천리포수목원에 대량의 묘목이 반입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미군 트럭에 실려온 나무들은 민병갈의 오랜 산행 친구였던 임업연구소 연구관 조무연(趙武衍·1987년 작고)의 배려로 서울 홍릉에 있던 임업연구소가 기증한 것이었고, 수송편은 민병갈의 교섭으로 미군 공병단에서 지원했다. 특히 이날 ‘나무 할아버지’로 이름났던 김이만(金二萬·1985년 작고)이 홍릉에서 내려와 직접 묘목의 자리를 잡아 주는 등 식목작업을 도와줬다. 이때 심은 재래종 나무들은 외국 수종이 대부분인 천리포수목원에서 ‘1세대 품목’으로 대접받으며 30여년간 잘 자라고 있다.

낭새섬 매입을 계기로 민병갈은 규모를 키워야겠다는 생각으로 주변 야산을 더 사들였다. 추가로 매입한 땅은 1975년까지 10만평이 넘어 소유지가 15만평으로 늘었다. 천리포수목원의 현재 규모 18만평은 1981년에 마무리된 것이다. 그후 불어난 땅은 2000년 2월에 매입한 4,800평뿐이다. 민병갈이 본격적으로 수목원을 구상한 시기는 10만평을 확보한 1970년대 초반이었다. 금요일 오후만 되면 어김없이 천리포로 내려왔던 그는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정자에서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담한 자연농원’을 꿈꾸며 나무를 심었던 민병갈은 나무 가족이 늘자 2년 만에 생각을 바꾸었다. 본격적인 수목원으로 규모를 키우기로 한 것이었다. 제대로 된 수목원 조성을 결심한 그는 전문가들과 함께 자연입지 조사를 한 결과 천리포 일대는 토양은 척박해도 기후 조건이 좋았다. 같은 위도보다 따뜻한 해양성 기후는 다양한 식물들이 자랄 수 있는 좋은 환경이었다. 촌로의 간청에 못 이겨 우연히 산 땅이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췄던 것은 민병갈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운명의 신은 그에게 일찍부터 수목원을 차리도록 점지해 주었던 셈이다.

끝없는 자연학습, 나무 공부

민병갈은 자연탐사와 RAS 관광여행을 하면서 어느 정도 나무에 관한 기초지식을 쌓았다. 미국에 잠시 가 있던 기간을 빼면 천리포에 땅을 마련할 때까지 그는 15년 넘게 한국의 자연을 익혔다. 그러나 그때까지 그가 갖고 있던 나무 지식은 사찰의 스님들로부터 배운 단편적인 것이어서 성에 차지 않았다.

좀더 나무를 알기 위해서는 믿을 만한 지도교사가 필요했다. 이때 그를 도와준 청년이 당시 서울대 임학과에 재학중이던 홍성각(洪性珏·건국대 교수)이었다. 1963년 가을 강원도 오대산에서 밀러를 만난 그는 이창복(李昌福) 서울대 임학과 교수와 조무연 홍릉 임업시험장 연구관을 소개했다. 사제 관계인 이들 세 사람은 그후 민병갈의 단골 산행 파트너이자 나무 선생님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민병갈은 이창복·조무연 등과 어울리면서 막연한 자연공부를 벗어나 확실한 나무공부를 하는 단계로 올라섰다. 그는 이때부터 대학이나 연구기관의 야생식물 탐사에 참여하는 등 현장학습을 하며 국내 식물학계와 지면을 넓혔다. 그러나 한국은행 근무, RAS 사업, 증권 투자 등 세 가지를 한꺼번에 하다 보니 그의 학습에는 큰 진전이 없었다. 실제로 민병갈의 본격적인 나무 공부는 RAS 사업에서 손을 떼고 수목원 조성을 결심한 1970년대 초반에 시작됐다.

민병갈은 천리포 땅이 15만평에 이르던 1975년께 나무공부 수준을 한 단계 더 높였다. 이때는 농원 수준이 아닌 본격적인 수목원으로 규모를 키우기로 결심한 시점이다. 이를 계기로 그가 해오던 현장학습 방법을 수목원 중심의 실용주의로 바꿨다. 식물 탐사에 나설 때는 수목원 직원과 동행했고, 나무를 관찰할 때도 생장환경 등 실제적인 것으로 관점을 모았다. 탐사 지역도 천리포와 자연환경이 비슷한 서해 남부나 남해안 지방을 우선 대상으로 삼고 씨앗 채집이 가능한 가을철을 많이 이용했다.

민병갈 생애에서 가장 기념비적인 식물 탐사는 수목원이 재단으로 출발하기 1년 전인 1978년 봄의 서부 남해안 야생식물 답사 여행이었다. 수목원 직원들과 함께 나선 이 탐사에서 그는 국내외 학계에 보고되지 않았던 감탕나무(Ilex)과의 새로운 식물을 발견하는 획기적 성과를 올렸다.

그가 발견한 신종(新種)은 감탕나무와 호랑가시나무의 자연 교잡(交雜)으로 생긴 것으로 몇 단계의 검증을 거친 결과 전세계적으로 완도에서만 자라는 희귀종이었다. 민병갈은 이 식물의 학명을 ‘Ilex x Wandoensis C. F. Miller’로 정하고 국제학회에 등록했다. 학명에 발견자와 서식지 이름이 들어간 것은 국제규약에 따른 것이다. 한국어 이름은 ‘완도호랑가시’로 정했다.

그후 완도호랑가시는 천리포수목원에서 배양돼 국제 종자교환 프로그램에 따라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완도호랑가시 발견에 크게 고무된 민병갈은 1979년 7월 천리포수목원 원장에 취임한 뒤 해외 학계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수목원의 국제화를 겨냥한 식물원예학 수업에 들어갔다. 수목원이 재단법인으로 출범한 1979년부터 시작된 그의 해외교류 학습은 89년 영국 왕립 원예협회(RHS) 공로메달을 받기까지 11년간 계속됐다. 이 시기는 그에게 나무 전문가로서 명망을 누리면서 수목원을 국제적 수준으로 끌어 올린 성공시대이기도 했다.

민병갈은 한서대·원광대에서 명예 원예학 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식물학자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식물 애호가 정도의 아마추어 수준은 아니며 적어도 원예 전문가 수준은 넘는다. 그가 식물 공부에 쏟은 시간과 정열 그리고 지식의 수준으로 보면 박사라고 해도 모자라지 않았다. 단지 정규 과정을 밟지 않았을 뿐이다. 특히 목련·호랑가시과 등 일부 수종에 관한 연구의 깊이와 독서량은 박사급 수준이라는 것이 주변 학자들의 이야기다.

민병갈은 생전에 입버릇처럼 ‘수목원은 영원한 미완성’이라는 말을 많이 했다. 그의 표현대로 그는 중병이 들어서도 수목원 육성에 정열을 쏟았다. 그의 집착은 배움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타고난 독서광이었던 민병갈은 전문서적 탐독에도 남다른 열성과 이해력을 보였다. 다년간 그의 나무 공부를 지도했던 이창복은 2001년 4월 한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그의 학습열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수많은 제자들을 가르쳤지만 민(閔)원장처럼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나의 저서 ‘대한식물도감’을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 책이 닳아 더 이상 글씨를 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화장실에 갈 때도 책을 들고 가는 것을 봤어요. 당시 40대인데도 젊은 학생들에 못지않은 학습 진도를 보이더군요. 전문서적인데도 읽는 속도와 이해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빨랐어요. 특히 기억력이 뛰어나 까다로운 식물 이름들을 거의 다 외우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민병갈의 비상한 기억력은 2002년 4월13일 그의 장례식에서 공식적으로 화제가 됐다. 그의 오랜 친구였던 미국인 도로 (루터교)목사는 추도사에서 “민 원장은 자신이 키우는 수천여 종의 식물 이름을 거의 다 기억했다. 그것도 한국어 속명, 영어 이름, 라틴어 학명 등 세 가지를 한꺼번에 줄줄 외웠다”고 밝혔다. 일본어 학습 1년만에 통역장교로 발탁될 만큼 어학의 귀재이기도 했던 그는 칠순이 넘어서도 새벽에 일어나 중국어 학습에 열을 올렸다.

국제화로 승부를 걸다

민병갈은 항상 책 속에서 살았다. 그의 서울 연희동 집 서재나 집무실 서가 그리고 수목원 서고에 쌓여 있는 수많은 책들은 그가 얼마나 열심히 식물원예학 관련 서적을 수집하고 읽었는지 잘 설명해 준다. 그는 외국 잡지나 학회지를 통해 항상 해외 식물학계의 출판 정보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영국 신문 ‘파이내셜타임스’의 원예(Gardening) 페이지를 통해 주간 단위로 해외 원예계 동향을 점검하기도 했다. 그는 생전에 세계 최고의 식물학 도서관을 천리포수목원 안에 설립하는 것이 꿈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천리포수목원 본부 건물 2층 사무실로 통하는 계단 입구 벽에는 국제 수목단체로부터 받은 두 개의 명예훈장이 걸려 있다. 하나는 국제수목학회(IDS, International Dendrology Society)가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Arboritum Distinguished for Merit)으로 지정한 기념패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호랑가시학회(HSA, Holly Society of America)가 공인 호랑가시수목원(Official Holly Arboritum)으로 지정한 인증패다.

IDS 기념패는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2000년 4월에 받은 것이고, HSA 인증패는 그보다 1년 전에 미국 이외의 수목원으로는 프랑스에 이어 두번째로 받은 것이다. 국제적 명망을 가진 이 두 개의 상패는 민병갈이 혼신의 힘을 쏟은 국제화 노력의 소산이다.

img4R민병갈은 일찍부터 ‘한국산 나무만으로는 안 된다’ 는 생각에서 해외로 눈을 돌렸다. 1970년대 초부터 그는 해마다 두세 차례 외국으로 나가 선진국 수목원을 견학하며 새 품종과 학술 정보를 수집했다. 유명 식물학자를 찾아가 자문을 구하고 때로는 학술단체의 식물 탐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수목원 직원을 외국 수목원에 파견하여 연수시킨 것도 해외교류 사업의 하나였다. 외국의 단골 교류 상대는 영국의 힐리어수목원과 미국의 롱우드가든이었다.

외국산 묘목과 종자는 1972년부터 들여왔다. 그 이듬해에는 유럽호랑가시 등 10여 종을 추가로 구입하여 외국산 나무의 적응력 키우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민병갈은 끊임없이 해외산 종자를 들여와 천리포수목원의 보유 수종을 늘렸다. 1982년까지 10년 동안 도입한 해외 식물은 60개국 1만1,600여 종에 이르렀다. 천리포수목원이 현재 보유한 수종이 국내산을 포함하여 모두 1만여 종임을 감안하면 수종 확대를 위한 그의 집념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이들 해외산 묘목과 씨앗 중 천리포의 기후와 토양에 적응하여 살아 남은 것은 그 절반도 되지 않았다.

천리포수목원의 야생식물 탐사는 1980년대 후반부터 국제적 수준으로 발전했다. 해외의 유명 수목원과 제휴해 국내 자생식물 합동탐사를 했는가 하면 외국 식물학자와 함께 해외식물 원정 탐사도 했다. 1984∼89년 세 차례 실시한 국내 자생 식물 합동탐사에는 미국 국립 수목원을 비롯하여 홀덴수목원·롱우드가든·모리스수목원 등 미국의 쟁쟁한 수목원 탐사팀이 참여했다.

1977년 초에는 강추위를 무릅쓰고 영국 학자와 일본 큐슈(九州) 남쪽에 있는 섬 아마미오시마(奄美大島)를 찾아 희귀 자생목 다이모포필라(Ilex daimorphophylla, 감탕나무과) 씨앗을 채집했다. 이때 가져온 몇 줌의 씨앗은 그후 영국에서 번식돼 전 세계적으로 보급돼 멸종을 면했다.

민병갈은 국내 자생식물 탐사에 해외 석학과 동행하기도 했다. 그 중 또 한 사람이 스웨덴의 세계적 육종학자 나첼루에스 토르(Natzelues Tor)다. 그는 예테보리대학 교수로 있던 1966년 한국의 자생식물 탐사를 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한국 식물을 많이 알았다. 민병갈은 1997년 그를 초청하여 울릉도 식물탐사를 했다.

이때 토르 교수는 자신이 배양한 희귀종 목련(Magnolia x Gotoeburgensis) 한 그루를 가져와 천리포수목원에 기증했다. 중국의 함박꽃과 일본의 목련을 교배시킨 이 목련은 전 세계적으로 스웨덴·영국·한국 등 세 나라에 각각 한 그루씩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민병갈은 1970년대 초반 한국과 국교가 없던 중공(中共)에서 중국의 자생식물 30여 종의 씨앗을 들여오는 모험까지 했다. 외형상으로는 미국을 경유한 간접수입이었지만 밀수와 다름없었다. 당시의 한 수목원 직원은 미국인 신분이었던 민원장이 미국 중앙정보국(CIA) 요원과의 친분을 이용해 비정상 루트를 통해 씨앗을 극비리에 도입한 것 같다고 추측했다.

서슬 퍼런 군사정권 시대에도 천리포에는 북한 나무 종자가 들어왔다. 1980년대 민병갈의 친구인 영국인 학자 한 사람이 북한 방문길에 가져온 것이었다. 그는 백두산 진달래의 씨앗을 받아와 그 일부를 민병갈에게 선물했다. 정보기관이 이 사실을 알고 수사 대상으로 삼았지만 크게 문제삼지는 않았다.

민병갈은 1990년대 중반부터 해외 수목원과의 개인적 친분 관계를 활용해 수목 관련 국제회의를 여러 차례 유치했다. 1997년 4월에는 88개 회원국 809개 수목원이 가입된 국제목련학회(MSI, Magnolia Society International) 연차총회를 서울에서 개최했고, 98년 5월에는 HSA 총회를 천리포수목원에서 개최하여 세계의 유력 수목원 관리자들에게 한국의 자연과 식물을 소개했다. HSA는 미국 수목원이 주축을 이룬 범세계적 학술친목 단체다. 민병갈은 1998년 4월 IDS 연차총회를 유치한 것을 매우 자랑스러워했다.

img5L민병갈이 수목원의 국제화를 위해 마지막 정열을 쏟은 사업은 종자목록(Index Seminum) 발행을 통한 다국간 종자 교류 프로그램에 적극 참여하는 일이었다. 천리포수목원은 1978년부터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98년까지 36개국 140개 기관과 교류 관계를 맺고 다양한 품종의 나무를 수집하는 성과를 거뒀다.

그런데 해외 학술팀과의 제휴나 종자 교환 사업 등 민병갈의 국제화 노력에 대해 곱지 않게 보는 시선도 있었다. 한국의 귀중한 토종식물을 해외로 유출한다는 문제가 있는가 하면, 그 일부는 변종으로 배양돼 한국으로 역수출돼 국익을 해친다는 것이었다. 1997년 한 공영 TV가 천리포수목원의 종자 교환 사업을 유전자원 유출이라고 문제삼자 민병갈은 ‘우물안 개구리’라는 말로 불쾌감을 나타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원로 식물학자 이창복은 2000년 4월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의 토종 식물 씨앗을 외국에 보내 번식시키는 일은 격려의 대상이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식물학자 입장에서도 종자 유출 논리에 찬성할 수 없습니다. 더 많은 토종 식물을 내보내야 하고 더 많은 외국 희귀 식물을 들여와야 해요. 그래야 우리나라도 식물 선진국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자생식물을 세계에 가장 많이 소개한 사람은 바로 민병갈입니다. 세계 식물지도에 한국이 편입된 것은 전적으로 민원장의 공로입니다. 국가간 종자 교환은 멸종 위기에 처한 자생식물 보존을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내가 좋아” 평생을 나무에 바친 집념과 열정

천리포수목원에는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두 개의 간판 수종(樹種)이 있다. 450여 종의 목련(mag nolia)과 370여 종의 호랑가시(Ilex)가 그것이다. 수집된 종류는 둘 다 세계 최대 규모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천리포수목원에서는 목련이 4월의 꽃이 아니다. 그 찬란한 빛의 향연은 4월에 절정을 이루지만, 봄이 지나고 겨울이 와도 이곳에서는 목련의 우아한 꽃무리가 질 날이 없다. 세계 각지에서 들여온 온갖 진귀한 품종들이 교대로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태산목의 교배종인 리틀 잼은 여름부터 초겨울까지 꽃이 핀다.

크리스마스 장식용으로 인기 있는 호랑가시 또한 천리포의 명물이다. 전 세계적으로 400여 종이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민병갈은 그 중 90%이상을 천리포에 모아 놓았다. 호랑가시는 4속(屬)으로 이뤄진 감탕나무과의 대표적인 속이다. 주로 난대성 기후에서 자라며 상록 및 낙엽성 두 가지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종은 대팻집나무·꽝꽝나무·호랑가시나무·먼나무·감탕나무 등 5가지로 알려졌으나 민병갈이 1978년 완도호랑가시를 발견하여 그 종류가 늘었다.

민병갈이 80세의 고령으로 중환이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정부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국가 차원의 서훈이 있어야 한다는 의견이 청와대와 산림청 일각에서 제기됐다. 그런데 정부가 중량급 훈장을 수여하기로 결정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그 상훈의 성격이 문제였다. 그가 받은 것은 뜻밖에도 금탑산업훈장이었다. 서양인으로는 최초로 귀화하여 한국의 자연보호에 헌신했고, 국제적 수목원을 육성한 공로만으로도 민병갈은 문화훈장의 대상이었다. 더구나 그는 한국의 식물을 세계에 알려 세계 식물지도에 한국을 편입시키는 학술적 공헌도 했다. 그런데 정부는 그를 조림사업가로 착각했던 모양이다.

2002년 3월11일 민병갈은 병약한 몸으로 청와대를 찾아가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금탑훈장을 목에 걸어준 김대통령은 잠시 민병갈과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당시 김대통령은 차남 김홍업의 비리 문제로 심기가 매우 불편한 때문이었는지 별 말이 없었다.

훈장 수여식에 배석했던 미국인 의사 인요한의 말에 따르면 김대통령이 수목원을 차린 동기를 묻자 민병갈의 답변은 “내가 좋아서”라는 한 마디였다고 한다. 그는 그 이상 할 말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의 짧은 말은 평생을 바쳐 나무를 사랑하고 키운 그의 집념과 열정을 가장 의미심장하게 함축한 말이었다.

민병갈은 2002년 3월 미국 프리덤 재단(Freedo ms Foundation)으로부터 평화와 자유 그리고 민주주의 실현에 헌신한 공로로 2002년도 미국 우정의 메달 수상자로 결정됐다. 그러나 그는 시상일을 19일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프리덤 재단은 4월27일 필라델피아의 래디슨 호텔에서 개최된 시상식에 고인의 여동생 준 맥데이드(June MacDade)를 초청하여 대리 수상하도록 했다.

나무는 민병갈에게 하나의 신앙이었다. 나무를 하나의 생명체로 보고 그 자체를 존엄의 대상으로 삼았다. 만년에 그는 원불교 신도가 됐지만 그의 마음 속에 신앙처럼 항상 자리잡고 있는 것은 나무였다. 그는 꿈을 꾸어도 나무 꿈을 꾸는 희귀한 나무광이었다. 1980년대 수목원 직원으로 일했던 노일승은 천리포수목원의 원장 숙소에서 한밤중에 민원장이 우는 목소리로 잠을 깨우는 바람에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빨리 정자집에 가 봐. 회화나무가 상처를 입었대.”
“회화나무가 밤중에 왜 다치죠?”
“꿈에 나타나 아프다고 울었어.”

자연은 생산자, 인간은 파괴자, 동물은 소비자

어처구니 없던 노일승은 민원장을 달래 잠자리에 들게 했다. 그런데 문제의 회화나무는 그로부터 10여 년 후 두 차례 큰 재난을 당했다. 2001년 여름 태풍 프라피룬을 맞아 뿌리가 드러날 만큼 몸통이 휘는 피해를 입더니 얼마 뒤에는 정자집의 화재로 불에 그슬렸다. 집안에 심으면 고명한 선비가 나온다 하여 우리나라에서는 물론 서양에서도 학자나무(Scholar Tree)로 사랑받는 이 나무는 민병갈에게 특별한 사연이 있었다. 그가 한국은행 재직 때 은행 뜰에서 자라고 있던 회화나무의 작은 가지 하나를 가져와 접붙여 키운 것이기 때문이다. 천리포수목원에서 하나뿐인 이 나무는 민원장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민원장은 나무가 아프다는 꿈을 꾸고 눈물을 흘릴 만큼 마음이 여렸지만 나무를 보호하는 데는 무섭게 엄격했다. 그는 사무실 안에서 두 사람만 눈에 띄어도 수목원 직원은 항상 나무와 함께 있어야 한다고 소리치며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어떤 구실로든 나무를 훼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수목원 직원들은 나무의 모양을 위해 가지를 친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한번은 한 직원이 지나는 사람을 거추장스럽게 하는 통행로의 나뭇가지 하나를 잘라 냈다가 현장에서 해고당했다. 이튿날 민원장은 가지를 잃은 나무를 찾아가 “나무야,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천리포수목원에서는 조경이라는 정원 개념이 통하지 않는다. 어떤 나무든 있는 그대로, 자라는 그대로 놔둬야 한다는 것이 민병갈의 지론이었다. 그래서 수목원 조성 초기에 무계획적으로 심어진 나무들은 옮겨지는 일이 없이 비좁게 자라는 경우가 많다. 나무가 무성해지면 간벌해야 하는 데도 민원장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가위질로 나무의 모양을 내는 일본식 정원 가꾸기를 아주 싫어했다. 그가 해외 학회지에 기고한 글을 보면 자연상태로 나무를 키우는 한국식 정원이 가장 이상적이라는 주장이 자주 눈에 띈다. 나무는 나무(Tree is Tree)라는 것이다. 그는 “천리포수목원은 나무를 위한 수목원이지 사람을 위한 수목원이 아니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그래서 18만평의 수목원에 철책을 치고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했다.

민병갈의 나무지상주의는 천리포수목원의 비인간화 문제를 낳기도 했다. 일곱 군데로 흩어진 경내를 철망으로 에워싸는 바람에 마을 사람들의 통행을 어렵게 했다. 말년에는 본원 옆으로 지나는 도로 포장을 반대하여 주민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개발이라는 말을 가장 싫어했던 그는 ‘자연은 생산자, 인간은 파괴자, 동물은 소비자’라는 독특한 철학을 갖고 있었다.

민병갈은 나무뿐만 아니라 생태계 보호에도 각별히 신경썼다. 수목원의 본원 안에는 2,000여 평의 연못과 1,000여 평의 논이 있는데 민원장이 정성을 다해 생태계를 보존한 곳이다. 나무에 줄 물을 담아두기 위해 만든 이 연못은 시간이 흐르면서 철새들의 낙원으로 바뀌었다. 민병갈은 뜻밖에 이곳을 찾아든 흰뺨검둥오리·청호반새·해오라기 등 물새 보호에 어버이 같은 정성을 쏟았다. 특히 흰뺨검둥오리가 새끼를 치면 수목원 직원들에게 연못 금족령을 내리고 큰 소리도 내지 못하게 했다. 어미가 새끼들을 데리고 나들이를 나설 때면 망원경으로 오리 가족을 관찰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수련과 창포가 아름답게 떠 있는 연못은 철새들만의 낙원이 아니다. 그 밑에는 온갖 민물고기들이 서식한다. 이들 물고기는 철새들의 먹이만 안 된다면 천수를 다할 때까지 살 수 있다. 사람의 손을 타지 않기 때문이다. 몇 해 전에는 홍수가 나서 물이 넘치는 바람에 수많은 민물장어들이 논으로 흘러들어갔다. 수목원 직원들은 탐스럽게 자란 이들 장어를 보고 군침을 삼켰지만 민원장의 엄명에 따라 모두 연못으로 되돌려보냈다.

본부 건물과 큰 연못 사이에는 대여섯 마지기의 논이 있는데, 민병갈은 이 논을 문접옥답으로 생각하고 1970년대부터 농부 출신을 고용하여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짓도록 했다. 이곳에 농약이나 비료를 쓰는 것은 상상도 못한다. 그래서 소출은 많지 않지만 민병갈은 그 이상의 소득을 챙겼다. 여름이면 그가 좋아하는 개구리 울음 소리를 즐길 수 있고, 수확기에 들어서면 메뚜기 떼를 구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못과 논 사이의 작은 농로에는 민병갈이 만들어 놓은 두 개의 명물이 지금도 남아 있다. 하나는 돌로 조각한 개구리상이고, 또 하나는 연못의 오리들이 새끼와 함께 논으로 나들이하도록 만들어준 오리길이다. 민병갈은 여름 밤에 혼자 논두렁에 나와 개구리 울음 소리를 듣는 것을 즐겼다. 그는 “죽으면 개구리가 되고 싶다”고 할 만큼 개구리를 좋아했다.

천리포수목원에서는 송충이도 해충 취급을 받지 않는다. 민원장이 산새들의 먹이라고 잡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경내의 오솔길 산책중 어쩌다 거미줄이라도 건드리게 되면 민병갈은 깜짝 놀라 ‘미안하다’는 사과의 말을 하고 길을 돌아갔다. 그가 거처하는 수목원의 후박집 추녀에는 작은 새장 하나가 걸려 있다. 집 주인이 해외여행길에 사와 달아놓은 것이다. 민병갈은 서울에서 내려올 때마다 새장에 먹이를 넣어주는 일을 잊지 않았다.

죽어서는 나무의 거름이 되고파

민병갈은 인간과 인간이 꾸민 생활양식도 생태계의 한 부분으로 생각한 것 같다. 촌로(村老) 등 한국인의 원초적인 모습을 좋아하고 초가 등 한국의 옛스러운 풍물을 사랑하는 것이 이를 말해 준다. 한번은 충남 주포에 ‘ ’씨라는 희귀한 성(姓)을 가진 문중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직접 찾아가 집안 내력을 묻는 등 큰 관심을 보였다. 그가 남달리 초가를 좋아하여 수목원 경내에 있던 폐가를 보존하고 해마다 지붕을 가는 이유도 알고 보면 인간의 생활 양식을 생태계의 한 부분으로 보는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민병갈은 자신이 죽어서도 생태계의 한 부분으로 남기를 바랐다. 1991년 가을 필자는 ‘중앙경제신문’을 위한 인터뷰에서 그와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당시 그는 70세였다.

― 돌아가시면 한국에 묻히시겠습니까.
“묻히다니요? 땅이 아까워요. 그럴 땅이 있으면 나무를 심어야지요.”
― 아니면 화장을 원하시나요?
“물론이죠. 그러나 뼈도 묻어서는 안 돼요.”
― 그러면 뼛가루가 천리포 앞바다에 뿌려지기를 바라시겠네요?
“그것도 안 돼요. 나무의 거름으로 써야지요.”

농담인 줄 알았으나 민병갈은 웃지도 않고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11년 뒤 세상을 떠난 그는 자신의 뜻대로 화장이 안 되고 천리포수목원 경내에 매장됐다. 그의 양자 등 주변사람들이 원했기 때문이다.

민병갈은 말년에 들어 “한국과 한국인이 변했다”고 씁쓸해했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가 ‘소란한 대낮의 나라’로 바뀐 것이 서글펐던 것이다. 공손하고 어질기만 했던 한국 남성은 공공장소에서 무례하고 시끄러운 언행을 일삼는가 하면, 차분하고 다소곳했던 한국 여성은 대중 앞에서 수다를 떨고 흐트러진 자세를 보이는 것이 그에게는 실망스럽기만 했다. 어쩌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젊은 여성이 단정하지 못한 차림으로 껌을 씹는 모습을 보면 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img6R팔순에 접어든 민병갈은 심신이 쇠약해졌는지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애정이 옛날 같지 않았다. 타고난 보수적 기질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그의 의식 세계는 변하는 시대의 흐름을 타지 않고 항상 멈춰 있었다. 1950∼60년대 칼 밀러의 가슴에 새겨진 순박한 한국인의 인상이 2000년대 민병갈의 뇌리에 그대로 이어진 것은 그를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민병갈이라면 돈 많은 서양인으로 해안에 거대한 정원을 꾸며 놓고 자연을 즐기며 유유자적하게 살다 간 행복한 부르주아로 생각한다. 그러나 10년 넘게 그를 가까이에서 보며 그의 주변사람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그는 마지막까지 치열한 인생을 살았던 의지의 인간이었다. 그는 당초부터 자기 생전에 이룰 수 없는 ‘영원한 미완성’을 시작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고, 그 미완성 작품을 이 땅에 남겨 놓았다. 화가 전창운(全昌雲)은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이 좋다고 눌러앉아 살다 말년에 이르면 수집품들을 고스란히 본국으로 챙겨간다면서 ‘민선생은 가져갈 수 없는 것만 수집한 큰어른’이었다고 고인을 추모했다.

재단법인 천리포수목원은 민병갈 사망후 후임 이사장에 문국현(文國鉉) 유한킴벌리 사장을 추대하고 후원회와 산림청의 도움을 받아 고인의 ‘영원한 미완성 사업’을 잇는 삽질을 오늘도 계속하고 있다. 
 

by 하야니 | 2009/02/26 23:31 | Eye to the realty | 트랙백 | 덧글(0)

퍼온글)이라크 전 어떻게 볼 것인가?

장기화된 이라크 전에 따른 미군의 변화


0. 들어가기에 앞서


최근 미군이 치루고 있는 이라크전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지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2008년 4월 초, 이라크 남부의 바스라에서 이라크 정부군과 마흐디 민병대가 정면충돌한 것이죠. 마흐디 민병대는 친미 정부에 반대하는 저항 세력 중 하나로 시아파 종교 지도자인 알 사드르를 리더로 하는 무장 단체입니다. 이들 병력은 무려 1만 6천명으로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니죠. 이에 이라크 정규군은 3만 명을 동원하여 이들의 주둔지인 바스라를 공격한 겁니다.




[바스라 시내를 행군하고 있는 마흐디 민병대]



사실 이 공격은 미국이 깔아 놓은 멍석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라크 군이 성공적으로 저항 세력을 분쇄할 수 있다는 것을 만천하에 알린 다음, ‘자, 우리 애가 이렇게 많이 컸어요. 그러니 전 집으로 돌아갈 거예요. 그럼 여러분 안녕’ 하려는 속셈이었죠. 이라크 철군을 위한 하나의 포석이었던  겁니다. 이런 명분을 위해 미군은 항공지원을 제외한 일체의 도움을 주지 않을 작정이었습니다.



      
[승리의 알 사드르]                [지못미 탈라바니(이라크 대통령)]



결과는? 대실패. 정부군은 민병대를 제압하지 못한 체 휴전 협정을 맺어야 했습니다. 마흐디 민병대는 별다른 피해도 입지도 않았으며 무기 등 장비도 대부분 보전한 체 성공적으로 바스라를 빠져나갔습니다. 심지어 일이 영 아니게 돌아가자 미군이 직접 개입했음에도 대세를 뒤집진 못했죠. 이 사건은 이라크 정부의 위신을 맨틀 층까지 파고들게 만들었으며 알 사드르를 일약 스타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덤으로 미국은 발을 빼기가 더더욱 뻘줌해져 버렸고요.



      
[미군도 나름대론 열심히 했지만....: 마흐디 민병대 용의자들을 구속하고 있는 미군]



2003년 3월 20일 시작된 이라크전은 공식적으론 2003년 5월 1일 끝났습니다. 중동에선 그래도 한 딱가리 한다는 이라크 정도의 군사적 강국을 상대로 불과 두 달도 안 돼 수도까지 쓸어버리곤 통치권을 꿀꺽 해버린 것이죠. 이때만 해도 미국은 장밋빛 꿈을 꿀 수 있었습니다. 이제 뒤처리만 적절히 하면 중동은 팍스 아메리카나의 기치 아래에서 재편성 될 것이며 이는 미국에게 정치, 경제, 군사 면에서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후 이라크 장악에 있어 미국은 두면 안 될 거의 모든 악수를 두어 버렸고, 끝없는 게릴라전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그리곤 5년 뒤, 여전히 미국은 ‘뒤처리’ 중이며 앞이 보이지 않은 상황에서 힘겹게 버티고 있는 중입니다.




[항공모함 에이브럼 링컨에 착함한 부시 대통령. 이때만 해도 길어봤자 3년 정도면 뒤처리가 끝날 것이라 여겼음]



이런 장기간의 전쟁이 미국에게 여러 가지(그것도 별로 좋지 않은 면으로) 영향을 끼쳤음은 분명합니다. 이 글에서는 그 중에서도 특히 군사적인 면, 즉 미군 자체와 그 시스템이 어떤 영향을 받아 어떻게 변모했는지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인명 피해의 증가와 그에 따른 병력운용의 심난함


2008년 4월, 이라크의 미군 전사자는 4000명을 넘겼습니다. 2차 걸프전에서의 전사자가 105명(그 중 1/3은 사고나 아군 오발이었습니다)이라는 것을 고려해보면 전사자들은 거의 대부분이 정식 전쟁이 아닌 종전 선언 후  비정규전 와중에 희생된 이들 입니다. 여기다 부상자수는 29만 여명. 그 중 절반이 불구 등 중상입니다.




[도버 공군기지에 운구 된 이라크 전 전사자들]



이런 숫자로만 보면 어느 정도 피해인지 잘 감이 안 올 수가 있습니다. 막연히 많다....라고는 해도 이 정도 피해가 미군에겐 어느 정도로 부담을 주고 있을까요? 우선 다음 표를 보세요. 베트남전에서 미군의 인명 피해와 종전 후 이라크에서 미군의 피해를 비교해 놓은 것입니다.







일단 전사자 숫자만 보면 이라크 전은 베트남전에 비해선 피해가 훨씬 적은 듯합니다. 하지만  주둔군의 숫자와 주둔 기간을 볼 때 그렇게 단정 지을 순 없죠. 병력이나 기간 모두 이라크전이 베트남에 비해 1/3에 불과하니까요. 거기다 베트남은 이라크에 비교하면 정규전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이라크전은 거의 대부분 게릴라에 의해 당한 겁니다.

진짜 주목해야 할 것은 부상자 숫자입니다. 훨씬 적은 기간과 병력에 저 강도 전투에도 불구하고 부상병 숫자가 베트남전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전 같으면 전사했을 경우도 방탄복이나 의료장비 등의 발달로 부상에 그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베트남 전 같으면 전사자로 들어갔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것들을 종합해서 볼 때, 이라크의 인명 손실은 베트남에 미치지 못한다고 보긴 힘듭니다.




[베트남전 전사자들]



베트남전과의 비교를 떠나서 4천명의 전사자와 29만 명의 부상자라는 손실은 미군에게 병력 부족이라는 압박을 가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대단히 심각하게요. 현재 미군의 현역병 숫자는 52만 명입니다. 주 방위군과 예비군까지 합해도 100만 밖엔 되질 않아요. 그런데 작년에 부시 행정부가 무리에 무리를 거듭해서 이라크 주둔 병력을 나름대로는 크게 늘렸습니다. 그게 16만 명입니다. 이 숫자는 말아먹고 있는 전황을 호전시키기에는 대단히 부족한 병력이면서 동시에 미군에겐 감당하기 힘든 병력편중이기도 합니다. 미군이 운영해야 할 해외 기지가 한두 군데가 아니며 아프가니스탄전도 수행하고 있는 데다 북한이나 이란 등을 상대로 한 전면전의 가능성을 대비해 가용병력을 확보해 두어야 하는데 현역병 중 1/3을 하나의 전장에 때려 박아 놓고 있으니 곤란하다는 것이죠. 장래 있을지도 모르는 돌발 상황에 미국이 대처할 수 있는 여지를 군사적 면에서 크게 까먹고 들어가는 겁니다.




[한국에서 이라크로 차출된 2사단 2여단 소속 미군들]



더 나쁜 것은 장기간의 해외 파병이 전력부족을 가져오며 그대로 군의 사기와 인력운영의 건전성을 말아먹고 있다는 점입니다. 16만 명의 이라크 주둔병 중 실 전투 병력은 몇이나 될까요? 놀라지 마세요. 불과 2만 여명입니다. 나머지 병력은 이들이 싸울 수 있도록  행정, 군수, 보급 등 후방 지원을 하는 병력입니다. 물론 그들도 수송 중 공격을 당하는 등 전투를 완전히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비전투병과도 안심할 수는 없다 : RPG-7에 한방 먹은 수송트럭]



그래도 정면으로 이라크 민병대와 싸우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2만 여명의 전투병과 병력입니다. 그리고 미군이 입는 피해의 대부분은 전투병과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즉, 이라크 전은 사실상 2 만 명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 피해도 이들이 다 뒤집어쓰고 있다는 것이죠. 덕분에 미군은 현재 이들 전투병력을 충원 하느라 머리에 쥐가 날 지경입니다. 그렇다고 행정병을 전투병과로 차출할 수는 없습니다. 군에 행정 병력은 장식이 아닙니다. 이들이 없으면 미군은 총도 한방 못 쏘고 전멸입니다. 행정병을 전투병으로 만든다 해도 어차피 다시 행정병을 뽑아야 합니다. 거기다 애시 당초 행정 쪽으로 지원한 병력이 전투병으로서 얼마나 잘 싸울 수 있을 까요? 새로 신병을 받는 것도 문제입니다. 장기간의 이라크 전 때문에 미군의 인기가 바닥에 떨어져, 안 그래도 부족한 신병이 더더욱 가물어버렸습니다. 이라크에 보내기 위한 신병 모집률은 목표치의 30%를 밑도는 것이 현실입니다.




[간지 작살! 미 공군 모병 광고]



이런 상황에서 미군이 택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병력 돌려쓰기죠. 윗돌 빼서 밑에 돌 괴는 겁니다. 이라크 전 초기만 해도 대부분의 전투 병과는 1년간 이라크에서 복무하면 그 이후로는 다시 이라크에 가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지금은 사정이 다릅니다. 1년간 복무한 후 그 다음 1년은 비전투지역에서 확실히 복무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엔? 십중팔구 이라크에 갑니다. 대부분 2번은 파견되며 심지어 3번째로 파견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아요. 용케 이라크를 피했다 쳐도 마찬가지로 짜증나는 곳인 아프가니스탄이 환영해 줍니다.




[Welcome to Afghanistan!]



생각해 보세요. 4년, 혹은 5년간의 의무 복무 기간 중 전사나 불구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이라크에서 적어도 2년, 재수 없으면 3년간 목숨 걸고 전투를 해야 한다니, 이처럼 밥맛 떨어지는 시츄에이션이 어디 또 있을까요? 당연히 이들의 사기는 바닥을 쳤습니다. 그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예가 바로 탈영병의 증가입니다. 현재 이라크 전 이후 미군의 탈영병은 4700 여명에 달하고 있습니다. 베트남 전의 9만 명을 생각하면 비교적 적은 숫자이긴 합니다. 아무래도 지원병인 만큼 징집병 보다 훨씬 탈영을 덜하지요. 하지만 2003년 당시 미군의 탈영병 숫자가 1000명도 체 안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불과 몇 년 만에 5배 가까이 숫자가 늘어난 것이니까요. 모병제 국가에서 이런 현상은 굉장히 심각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쓴 웃음을 지을 수밖엔 없는 것이 미군도 이런 탈영병들을 매몰차게 혼내 줄 순 없다는 겁니다. 안 그래도 병력이 부족한 판에 이런 친구들이라도 얼레고 달래서 다시 군으로 돌려보내야 하는 겁니다. 체포된 탈영병이 실형을 사는 비율은 고작 6%, 나머지는 징계 정도만 받고 다시 군에 복귀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미군은 전통적으로 타군에 비해 탈영에 관대했음 : 2차 대전 중 미군에서 탈영을 이유로 유일하게 군법재판으로 사형에 처해진 슬로빅 일병]



정리하면, 미군은 현재 병력의 상당 부분을 이라크에 주둔시키고 있으며 전투가 장기화되면서 병력의 피해가 커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최전선을 담당하는 전투병과의 인력부족이 감당하기 힘들만큼 커져 운용에 무리가 발생했으며 그로 인해 전투원의 사기가 바닥에 떨어지고 있지요. 거기다 이런 사정이 밖으로 전부 알려지면서 군 지원자(특히 전투병과지원자)는 점점 줄어만 들고 있으니 새로운 병력 충원도 여의치 않은 상황입니다. 아직까진 간신히 버티고 있지만 전쟁이 더욱 장기화되고 지금과 같은 문제가 감당할 수 있는 선을 넘을 경우 미군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2. 돈 문제, 그리고 프로젝트 학살


전쟁 시작 전 럼스펠드 국방부 장관은 전쟁 비용이 600억 달러를 넘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백악관 경제담당 보좌관 래리 린지는 적어도 2000억 달러는 들 것이라고 추정했고 이런 ‘헛소리’를 한 대가로 린지 보좌관은 내쫓겼습니다.




[뭐,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



‘불필요하게 비관적인’ 린지 보좌관의 의견보다도 상황은 훨씬 비관적입니다. 2007년도 말까지 미국이 이라크에 꼴아 박은 돈은 총 4천 7백억 달러입니다. 2007년도 미국의 국방비가 4500억 달러이며 1700억 달러가 이라크 와 아프가니스탄에 투입되었죠(기본예산에 700억 달러, 추경 예산으로 1000억 달러). 2008년도 미국의 국방 예산은 기본 예산이 5177억 달러입니다. 작년보다 10% 이상 증가했으며 여기에 부시 대통령이 추경 예산으로 전쟁비용 1900억 달러를 요구했지만 의회는 우선 700억 달러만 승인하고 나머지 액수에 대해선 전쟁 진행 상황을 보아 그때그때 승인한다는 조건을 달았습니다(그리고 5월 17일, 1625억 달러의 이라크 전비 지출을 내용으로 하는 법안이 하원에서 부결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다 돈 : 대당 30만 달러로 한번 계산해 보시라]



이러한 미국의 국방 예산은 물가 상승률을 고려해 봐도 1951년 이후 최대 규모이며 911 이후 매년 10%씩 꾸준히 증가해 온 결과입니다. GDP의 4%를 훌쩍 뛰어 넘은 것이죠(4% 돌파 자체는 2006년도). 거기다 이라크 전과 아프가니스탄 전을 합한 전비가 (물가 상승률을 고려한)베트남 전을 능가하게 되었습니다.




[베트남 하늘을 수놓는 돈 덩어리들 : 사진은 기관포가 없는 전투기로 유명한 F-4J 팬텀]



미국의 1년 예산은 3조 달러. 전쟁 비용을 1500억 달러라고 놓고 봐도 예산의 5%에 기본 국방 예산에 대비하면 1/3입니다. 현재 미 연방정부의 재정 적자가  2008년도 상반기에만 3천110억 달러로 사상 최대치를 찍은 상태입니다. 이라크 전을 비롯한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하는 비용이 미국에 쎄리는 압박이 능히 상상이 되실 겁니다.




[경기를 부양한답시고 고소득층에 대한 감세로 세수를 축소한 주제에 전비를 흩뿌리고 다니는 얼간이]



이렇게 전쟁이 장기화되고 그에 따른 전비가 미친 듯이 증가한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예산 투입의 우선순위가 평상시와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당장 전쟁에 필요한 부분은 크게 증액시키는 반면, 전쟁에 별 도움이 안 될 것 같은 곳은 과감하게 잘라 버리는 것이죠.




[OICW : 20mm 지능형 고폭탄 발사기와 5.56mm 소총을 합친다는 야심찬 삽질. 대당 가격은 5만 달러를 까마득히 넘어갔고 결국 취소됨]


<코만치 : 스텔스 헬기로 2004년에 양산될 계획이었으나 예산 문제로 취소]


[크루세이더 자주포 : 그냥 팔라딘 쓰자며 취소]


[차세대 보병 계획 : 전장에서 각 보병이 수집한 데이터를 다른 병사 및 지휘부에 디지털로 상호 실시간 피드백 시킨다는 야심찬 계획. 일단 보류 판정이지만 사실상 취소]
----> 정정 : 랜드 워리어 시스템 프로젝트는 재개되어 2007년 초 실전 테스트에 들어감. 지금까지 일선 병사들의 사용 소감은 '별로'라고



[차세대 소총으로 채용이 거의 결정되었던 XM-8. ‘돈 없다능. 그냥 M4 쓰자능’ 하며 취소]


[차세대 지원화기인 XM-307 자동 유탄 발사기. 이게 취소됨으로서 중기관총과 유탄 기관총을 대체하려는 계획이 어그러진 데다 차기 전투차량 시스템인 FCS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음]



문제는 당장 전쟁에 도움이 되지 않는 부분의 상당수가 미군의 미래에 치르게 될 지도 모르는 전쟁에 도움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입니다. 2003년 이후 미군은 예산상의 이유를 들어 수많은 프로젝트들을 취소해 버렸습니다. 그 중엔 솔직히 진작 돈줄을 끊어 버렸어야 했던 것들도 제법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만 적지 않은 숫자가 ‘괜찮을까? 괜찮을까?’ 하는 읊조림이 튀어 나오게 만듭니다. 어떤 면에서 미군은 미래의 강군을 현재의 이라크 전 수행(그것도 열매도 알맹이도 없는 무익한)과 바꾸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나는 살아 남았다능 ㅋㅋㅋ]



3. 전쟁 교리의 변화


대부분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미군은 기본적으로 정규전을 중심으로 편성되어 있습니다. 특히 육군의 경우 대규모의 야전에서 승리하는 것을 목표로 상정해 놓고 있지요. 즉, 상대도 이쪽과 마찬가지로 정규군이고 적과 아군의 구분이 비교적 명확한 상황에서 대규모 병력을 투입하며, 전술, 전략적으로 유리한 지점을 적으로부터 빼앗거나 지키기 위해 싸웁니다. 미국 입장에선 러시아나 중국 등 자신과 동등한 국가와 정면으로 맞붙어 싸우는데 최적화 되어 있다는 겁니다. 흔히 미군의 상징처럼 되어 있는 첨단 무기와 압도적인 화력은 이러한 전면전에서 빛을 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 화려한 궤적을 1차, 2차 걸프전에서 유감없이 보았습니다.




[이것이 정진정명 미국의 힘이다! : 키티호크 항공모함과 미 제 7 함대]



이라크 전에서 미군이 겪고 있는 상황은 정규전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게릴라전! 적은 정규군도 아니고 정면에서 덤벼오지도 않습니다. 싸움도 야전에서 있는 병력을 총 동원하는 전투가 아니라 소수의 병력을 통해 미군의 취약한 부분을 기습한 다음 재빨리 도망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점입가경으로 적 게릴라와 이라크 민간인을 쉽사리 구분할 수도 있는 상황도 못됩니다. 미군이 기지를 거점으로 삼아 패트롤을 나가면 그 순간은 이라크 정부의 실효적 지배하라고 할 순 있지만 미군이 떠나는 순간 다시 게릴라가 날뜁니다. 더더구나 미국의 정치적 삽질로 이라크 민중이 친미 정권에 마음이 완전히 떠나 있는 상황에서 말 그대로 미국은 ‘인민의 바다’ 한 가운데에서 허우적 거리는 지경입니다.




[숨진 전우를 위해 기도하다]



이지경이면 미국의 압도적인 무력은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미군은 이라크 민중을 돕기 위해 왔습니다. 그런데 게릴라 몇 명 잡는답시고 막강한 공군력으로 민가를 쓸어  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미군은 스스로가 가진 정밀 폭탄의 위력을 너무 믿었고 자주 오폭을 일으켰으며 그 때마다 정치적으로 계속 곤란한 상황에 몰려갔습니다. 소련하고 싸움을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온갖 병기로 소련군을 도륙해도, 그 와중에 민간인 피해가 발생한다 할  지라도 정치적 입장은 훨씬 낫습니다. 막강한 적대국과 국운을 걸고 싸우는 것과 석유 때문에 꼭두각시 정부 놀이 하느라 벌이는 게릴라전은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겁니다. 이런 이유로 그렇게 좋아하는 공군도 마음대로 못 부르고 스스로의 능력을 크게 억제하면서 싸우게 되었습니다. 숫제 포 차 떼고 장기 두는 꼴이죠.




[스마트 폭탄의 하나인 JDAM BLU-109]



결국 미군의 힘의 원천인 공군력과 해군력을 충분히 활용할 수 없는 상황에선 육군의 역할이 클 수밖에는 없습니다. 근데, 아뿔싸. 육군도 게릴라전에는 별 준비가 안 되어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 좀 죽어도 대범하게 무시할 수 있는 정치적 상황에서 싸우는데 적합하다고나 할까요. 이게 무슨 소리냐면 2차 대전처럼 막대한 인명 피해가 나도 반전 여론 등에 크게 시달리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개인의 인명을 보호하는 장비 확충에 신경을 덜 썼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완전히 손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라크 전 이전에도 미군은 전투 병력에게 전원 방탄조끼가 지급되었으며 짚차의 일종인 험비도 나름 수류탄이나 권총탄은 막을 수 있을 정도의 장갑을 두르고 있었습니다.




[전쟁 초기 험비. 머지않아 AK 소총한테 장갑이 치즈처럼 무력하다는 것이 드러남. 강화형 험비가 지급되기까지 한동안 일선 병사들은 고철더미를 뒤져가며 차체를 보강해야 했음]



근데, 이라크 전에선 그 정도론 어림도 없었습니다. 집집마다 AK 소총이 갖추어져 있는 이라크에서 미군은 어디서 날아오는지도 모르는 총탄에 맞아 하나 둘 씩 쓰러져 갔습니다. 방탄조끼가 비록 몸통은 보호하지만 머리는 보호하지 못하며 어깨나 허벅지 팔 등에 맞아도 출혈 과다로 죽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게다가 RPG-7등의 로켓에다 IED(Improvised Explosive Device - 사제폭탄)같은 폭발물이 횡횡하니 하루가 다르게 전사자와 부상자가 속출했고 애시 당초 정치적 명분이 시원치 않았던 이라크 전에 대한 반전 여론이 크게 들고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IED로 박살이 난 험비]



이런 사정으로 미군도 개인의 생존율을 높이기 위한 여러 가지 방안을 강구합니다. 방탄조끼 안엔 AK를 막을 수 있는 방탄 패널을 반드시 집어넣도록 하며, 사타구니나 허벅지, 목, 어깨까지 커버할 수 있도록 개조했습니다. 험비도 장갑과 공격력을 크게 증가 시켰죠. 럼스펠드 장관이 잘난 척 하면서 도입한 Midium Army 개념도 수정하여, 진작 퇴출시키려 했던, 크고 무거운 브래들리 보병 전투차량(IFV)도 다시 불러 들였고, 장갑이 약한 스트라이커 같은 IFV는 RPG를 막기 위해 닭장차로 개조해야 했습니다. 거기다 IED나 지뢰 등살에 못 견뎌 MRAP(Mine Resistant Ambush Protected) 장갑차를 대량으로 도입했죠.




[이라크전에 도입된 인터셉터 방탄복]


[시가전에 특화된 중장갑 험비. AK를 막을 수 있으며 특히 전사율이 높은 기관총 사수를 보호하기 위해 방탄 총탑을 설치. 위에 덮은 철사그물은 수류탄을 밖으로 흘러내리게 하기 위한 것]


[M2A2 브래들리 보병 전투차 : RPG가 동네 참새마냥 날아다니는 상황에선 중장갑의 보병 전투차는 필수]


[언론의 발표와는 달리 C-130 수송기를 통한 수송성을 강화 시켰을 뿐 첨단하고는 거리가 먼 스트라이커 IFV, 외부 패널이 없으면 RPG 한방에 날아감]



여기에 보병들의 무기도 시가전에 걸맞게 여러 가지 변화를 겪었습니다. 사방이 트인 사막이나 초원과는 달리 시야가 제한되며 어디서 적이 튀어 나올지 모르는 시가전에서 M4로만 버티는 것은 버거웠던 겁니다. 이는 산탄총의 도입 확대와 유탄발사기의 강화, 저격전에 대비한 분대내 저격수 도입(Designated Marksman)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6연발 반자동 산탄총 비넬리 M4. 여기에 폭발 탄두를 집어넣은 산탄의 도입으로 시가전에서 톡톡히 효과를 보고 있다고 함]


[M4 등 소총에 장착하는 단축형 산탄총, XM-26. 탄창에는 5발이 들어가며 외양과는 다르게 반자동이 아닌 수동식임. 총에서 분리해 따로 사용할 수도 있음]


[M203을 대체하고 있는 유탄 발사기, XM-320. 마찬가지로 총에서 분리, 따로 사용 가능]


[남아프리카 공화국 MGL-140을 개량한 M-32 6연장 유탄발사기. 미 해병대 채용]


[M14을 들고 있는 분대 내 저격수(DM)]



이렇듯 첨단 무기의 활용이 정치적 이유로 제한된 상황에서 미군은 군의 운영을 대게릴라전에 맞게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변화가 사실 처음은 아닙니다. 바로 베트남 전에서 똑같이 벌어졌습니다. 게릴라 병력을 상대로 정규군으로 밀고 나가다가 큰 피해를 입은 뒤 뒤늦게 게릴라전에 맞게 교리와 장비를 변화시키는 것 말입니다. 근데 베트남 전이 끝나고 미군은 그러한 교훈을 까맣게 잊어버린 다음 이라크 전에서 부랴부랴 다시 되살리고 있는 형편입니다. 뭐, 원래 삽질은 반복되는 법입니다만.....




[베트남 전에서 운용되었던 강화형 M113 APC. 사방의 공격에 대응할 수 있도록 기관총 숫자를 늘렸으며 사수 보호를 위해 방탄패널 등을 추가로 설치]



4. 장비 도입 절차의 변화


미군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 있으신 분들은 종종 이런 설명에 익숙하실 겁니다. ‘이 레이저 사이트는 병사가 자비로 구입한 것이다’ ‘저격용 스코프는 지급된 물건이 시원치 않아서 제가 직접 구입했죠’. ‘특수부대원이 들고 있는 권총은 직접 구입한 것임’ 아니 세상에 군대 장비를 지급받는 것을 써야지 어떻게 자기 돈 주고 사서 쓰남?  군대 개그로 유명한 부모님께 총 값 부처 달라는 편지가 현실이 되는 요지경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병사들에게 인기 있는 스트라이크 나이프. 물론 자기 돈 주고 사서 써야 한다]



사실 미군은, 특히 특수부대의 경우 장비를 자기 돈으로 직접 사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려저 있습니다. 권총, 방탄조끼, 파우치, 도트 사이트, 조준경, 나이프, 개머리판, 전투화, 장갑, 군복, 라이트, 포어그립, 보호경 등등..... 하지만 이러한 ‘상식’과는 다르게 미군의 장비 규정은 의외로 까다롭습니다. 군대는 군대인지라 함부로 개인이 돈 주고 사서 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특수부대는 그나마 재량권이 부여되지만 정규병의 경우엔 짤 없습니다. 규정상 자비로 구입이 허가된 것만 구입이 가능하며 그것도 중대장 등 일선 지휘관의 승인을 일일이 받아야 합니다.




[야전 군인들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슈어파이어제 라이트. 매우 뛰어난 성능을 자랑하는 대신 무지 비쌈]



그런데 2001년 아프가니스탄 전이 시작되면서 이러한 장비 규정이 완화되기 시작했으며 이라크전을 겪으면서 그 정도가 심화되고 있습니다. 전쟁이 격화되고 정규전 중심 부대가 대 게릴라전에 적합하도록 빠르게 변화하는 상황에서 일선에서 이거 사 주세요, 저거 사 주세요 하고 닦달하는 장비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정통적인 방식대로 업자들의 입찰을 받아 심사한 후 선정하고 어쩌고 했다가는 1년 가까이 지나야 병사들 손에 들어갑니다. 이러면 전쟁 못하죠. 따라서 일선 병사들의 장비 구입의 재량권을  확대시켜 주고, 중대나 대대에 자체 예산을 배정해 독자적으로 장비를 구입할 수 있도록 방침이 바뀐 것이죠. 방탄복 같은 경우 개인이 자비로 구입했으면 군에서 비용을 보상해주는 경우도 있고요.




[근데 인수 받은 총에 달려 있으니 신경 안 쓰고 그냥 쓰는 사람도 많음 : 사진은 본문과 상관없는 여군들]



이렇듯 급변하는 전쟁 양상에 대응하기 위해 보병의 장비 도입 절차가 대단히 간소화되었고 일선 부대에 많은 재량권이 주어졌습니다. 덕분에 최전방에서 빠르고 간편하게 필요한 장비를 확충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비판도 있는 것이 입찰을 통한 것이 아니기에 비용이 너무 많이 들고, 충분한 성능 검토가 없기에 구입한 장비가 문제를 일으키는 등의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 상황에서 미군은 이런 ‘사소한’ 문제에 신경을 쓰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5. 기갑 전력의 왜곡


현재 미군에게 있어 가장 골치 아픈 것은 IED(사제폭탄)입니다. 지뢰, 로켓탄, 포탄, 수류탄, 다이나마이트 등등 이라크에서 소똥처럼 흔한 폭발물을 핸드폰이나 리모콘 등과 결합해서 매우 간단(진짜 간단한가요? 최소한 전 못 만듭니다)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 특징이죠. 미군이나 상대 파벌이 자주 다니는 길목에 쟁여 놓았다가 목표가 접근하면 멀리서 원격 조작으로 꽝!




[바그다드에서 발견된 IED]


  
미군의 인명 피해 중 낮게 잡아도 40% 이상이 IED에 당한 것일 정도이며 명실 공히 전사 원인 NO.1을 찍고 있습니다. 사제폭단이라고 하니 위력이 허접할 것 같지만 폭약무게가 40킬로그램인 것은 기본이고 400킬로에 육박하는 IED도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판국입니다. 이러니 맨 몸으로 접근할 때는 물론이고 험비나 심지어 장갑차 안에 있어도 안전을 장담하지 못하는 판국이 되어버린 겁니다.  




[IED에 당한 험비]



IED의 심각성을 잘 알고 있는 미군은 대처 방안을 강구합니다. 처음에는 IED의 폭발력을 단단한 장갑으로 때우려 들었습니다. 험비나 장갑차의 바닥 장갑을 강화시킨 것이죠. 그 결과는? 직접 보시죠.




[현실은 시궁창]



밑 부분이 단단해지니 폭발이 장갑차 안으로 파고들지는 못하지만 그 충격으로 차체가 뒤집어져 버린 겁니다.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 쇼크로 사망하거나 목이 부러져 버리고요. 이렇게 IED에 대한 피해는 커지는데 마땅한 답이 없는 미군에게 구원의 손길을 보내온 곳이 있었습니다. 그 주인공은 바로 남아프리카 공화국! 이들은 오랫동안 반정부 게릴라들을 상대하다보니 1980년대에 이미 지뢰나 IED 등의 폭발물에 잘 버티는 장갑차를 개발해 놓았습니다. 바로 MRAP(Mine Resistant Ambush Protected), 대 지뢰 매복 차량이 그것입니다.




[미군이 운용중인 남아프리카공화국제 MRAP, RG-33]



MRAP의 원리는 간단합니다. 지뢰를 막는 데에는 장갑의 두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폭발력을 어떤 방향으로 흘려보낼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병사들이 들어가는 차체는 높게 유지하고 바닥은 V자로 뾰족하게 만듭니다. 그러면 폭발력이 양옆으로 빠져나가 위력이 크게 줄어드는 것입니다. 비록 바퀴나 서스펜션은 파괴되어도 병사들은 무사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IED에 공격당한 MRAP. 일단 병사들이 탑승한 부분은 무사함]



실제로 MRAP가 IED에 상당히 쓸모가 있다는 것이 밝혀지자 미군은 매우 적극적으로 MRAP를 사들이기 시작합니다. 2007년 한해 동안 무려 6400대를 조달했으며 그것으로도 부족하며 끊임없이 추가 주문을 하고 있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자체의 조달량으론 진작에 택도 없어지자 미국 내에서 라이센스 생산을 하고 있으며 다른 미국 병기회사들도 앞 다투어 뛰어들고 있는 판국입니다. 현재 2010년까지 약 17000대의 MRAP를 도입할 예정인데 한 대에 50만 달러짜리니 매년 30억 달러를 MRAP에만 때려 박는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이러니 FCS(차세대 전투차량 프로젝트)는 말 할것도 없고 다른 비MRAP 차량의 생산배치 순위도 뒤로 밀려버리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돈이 없거든요.




[폭발 테스트 중인 미국 포스 프로텍션사의 쿠거]



문제는 MRAP가 대IED 성능을 제외하곤 전체적으로 시원치 않은 장갑차라는 점입니다. 폭발물 대응에 특화시킨 터라 애당초 장갑이나 무장이 빈약한데다 차체가 높아 기동력도 떨어집니다. 장갑이나 무장을 추가시키려 해도 무게 중심이 높아 쉽사리 무게를 증가시킬 수도 없지요. 즉, 무장이나 숫자가 빈약한 게릴라를 상대하는데 적합하지 정규군을 상대로 전면전을 벌이기엔 애로사항이 꽃피는 물건이란 소리입니다. 지금이야 쓸모 있지만 향후 이라크 전이 종료된 다음엔 애물단지가 될 공산이 커요.




[트랜스포머에도 출연했던 미 포스 프로텍션사의 버팔로 H]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니 많은 이들이 MRAP에 올인하는 미군의 행태에 우려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에 대한 마땅한 해법이 없다는 겁니다. 당장 병사들이 IED에 무더기로 죽어나가고 있는 판에 미군 입장에선 MRAP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거든요(IED를 탐지하는 꿀벌 개발에 천만 달러를 쏟아 부었지만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10년 후 기갑편제가 어떻게 망가지던 당장 이라크 전부터 해쳐 나가고 봐야 하니까요. 이는 미군이 게릴라전에 대응하느라 구조가 변화되는 과정에서 생기는 부작용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6. 아웃소싱의 확대


미군은 전통적으로 아웃소싱을 활발히 하는 부대입니다.  급식이나, 수송, 군수, 보급품 관리, 건설 등등을 민간에 맡기고 있는 것이죠.  다만 직접 전투와 관련된 부분은 어디까지나 직접 군이 하며 이를 뒤받쳐 줄 병참 부분에만 아웃소싱을 해 왔습니다.




[남북전쟁 당시 군마의 관리도 민간업체가 했음]



그런데 1차 걸프전과 보스니아 사태 파병 이후 이러한 아웃소싱의 규모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쿠웨이트에 설치한 미군의 대규모 물류기지에 있는 무기나 보급품 관리에 민간업체와 수억 달러의 계약을 체결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발칸반도 같은 경우 군인 9000명을 지원하기 위해 민간업체 직원 12000명이 고용되었을 뿐 아니라 군비의 10%를 민간업체가 가져갔습니다. 2차 걸프전의 경우 5200명의 직원이 미군을 지원했죠. 아웃소싱 영역도 신병훈련에 모병, 공항이나 관제탑 관리, 공중급유까지 확장되어 왔습니다.




[비교적 신생 PMC인 미국 KBR의 로고. 이 회사의 모회사는 딕 체니 부통령이 한 때 CEO 였던 곳으로 당시 발칸에 주둔중인 미군 기지의 병참 업무를 독점 30억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음]



군의 아웃소싱은 사실 장점이 많습니다. 미군처럼 모병제인 상황에선 병사들의 인건비가 비싸며, 일일이 모든 영역을 다 커버하기 위해 하나하나 부서를 만들고 인력과 장비를 배치하는 것은 시간과 돈이 많이 들 뿐만 아니라 이들을 관리하는 것도 보통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미국은 세계 방방 곳곳에 기지를 두고 있는데 그 중 규모가 작은 부대의 경우에는 아무래도 외주를 주는 것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이런 이유로 아웃소싱의 영역은 여러 방면으로 확장되고 규모도 매우 커졌습니다. 현재 미군은 병사 10명당 1명꼴로 민간직원과 계약하고 있죠.




[전통적인 PMC인 MPRI 소속 직원이 보스니아 군인들을 훈련시키는 모습]



그리고 2차 이라크 전이 종전되고 미군의 이라크 주둔이 장기화되자, 이라크는 곧 전쟁관련 민간업체의 천국으로 변합니다. 여기서는 기존 미군에선 쉽게 찾아 볼 수 없었던 아웃소싱이 눈에 띄게 되었습니다. 바로 전투요원입니다. 노골적으로 말하지만 ‘용병’이죠. PMC(Personal Military Company)에 소속된 전투요원들은 많은 경우 특수부대 등의 군 경력자고 현지 진출한 민간 업체에서 경호 목적으로 고용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미군과도 직접 계약하여 전투 활동도 하는 모양입니다. 그린존 방어나 공병대의 보호에 PMC가 직접 관여하고 있으며 이라크 요인 경호나 이라크 치안 유지에 투입되고 있습니다.




[PMC 소속 전투요원들의 보편적 군장. 미 특수부대 출신의 경우 연봉이 10만 달러가 넘어간다고]



흔히 PMC 하면 용병회사 쯤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 전투업무는 PMC의 영역 중 일부에 불과하며 수송, 보급, 급식, 훈련 등 다양한 군 관련 업무를 맡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전투업무 중 군사훈련 분야에서는 일찍부터 PMC가 미 정부에 고용되어 왔습니다. 특히 특수부대 같은 경우는 민간이 운용하는 군사 훈련소에 파견되어 훈련을 받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죠. 하지만 이라크 전에서 이들은 민간회사 뿐 아니라 미 정부에도 고용되어 각종 전투 활동에 직접 종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현재 이라크 내에서 직간접적으로 PMC에 고용되어 있는 직원의 숫자는 10만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PMC는 어디까지나 민간업체이기에 여기에 소속된 직원들도 모두 민간인입니다. 따라서 이라크 전에 있어서 미군법의 적용을 받지 않습니다. 거기다 이라크 정부와 미 정부간의 조약상 이들은 이라크 법률에도 치외 법권의 지위를 누리고 있습니다. 이 덕에 현재 이라크에서 PMC에 소속된 전투요원들의 민간인에 대한 불법행위가 빈번하게 자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중 유명한 것으로 2007년 블랙워터사 소속 직원들이 바그다드 시내에서 민간인 17명을 무차별 사살한 것을 들 수 있죠.




[아마도 가장 유명할 PMC, 블랙워터사의 직원들]



이런 저런 사건이 빈발하자 ‘미 정부는 PMC에 대한 관리를 하긴 하는 거냐’하는 비난 여론이 거세졌습니다. 거기다 PMC가 엄청난 돈을 받아먹지만 돈값만큼 제구실을 못한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고요. 하지만 미 정부로서는 PMC를 관리하는 것도 쉽지는 않습니다. 우선 수많은 업체가 우후죽순처럼 이라크 현지에 고용되어 일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제대로 장악하지도 못한 이라크 현지에서 이들을 감시하고 재제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죠. 그렇다고 PMC의 군사 활동을 금지했다가는 현지 민간기업체의 경호를 이라크 정부군이나 미군이 떠맡아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노릇입니다. 이런 가운데 당장의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각종 문제점들은 애써 무시하고 있는 것이 현재 미 정부의 태도입니다.


7. 정리


지금까지 이라크 사태에 의해 미군이 받은 영향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았습니다. 조금 뻥을 치자면 2차 이라크 전은 미국의 세계정복 계획의 일환이었습니다. 이라크에 안정적인 친미 정권을 세워 중동을 미국의 영향력 아래 놓는데 성공할 경우 이라크 자체의 석유 뿐 아니라 흑해의 석유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습니다. 거기다 이를 바탕으로 카스피 해나 카자흐스탄까지 미국의 영향력이 미칠 경우 중국과 러시아, 양 대국의 턱밑에 비수를 들이밀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중동과 흑해 바로 위가 러시아이며 동쪽 카자흐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을 넘어가면 중국이 있음]



그러나 흑해의 석유는 생각보다 경제적 가치가 크지 않은 것이 드러났으며 이라크 자체 유전도 북쪽은 쿠르드 족, 남부는 시아파 민병대 때문에 시원치 않은 상황입니다. 이라크에 안정적인 친미정권은 커녕 그 반동으로 이슬람 원리주의가 중동을 휩쓸 빌미만 주었죠. 설상가상으로 게릴라전에 발목이 잡혀 매년 막대한 돈과 인력을 낭비하고 있고요.




[이라크전 반대 시위]



이런 문제로 미군이 여러모로 한계에 온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아직까진 결정적으로 망가진 지경은 아니며 조속한 시일 내에 이라크에서 철군할 경우 충분히 만회할 수 있는 상황으로 보입니다. 물론 정치권이 이라크 전을 어떻게 끌고 갈지는 별개의 문제이긴 합니다만. 중요한 것은 한미군사동맹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 상황에서 미군이 겪는 어려움이 우리나라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 문제가 장래 한국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그 점은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의 몫으로 남겨 두겠습니다.




[전쟁이 악인 이유 : 미군에게 살해당한 이라크 민간인. 2005년 11월 어느 날, 미 해병대 소속 병사들이 비무장 이라크 민간인 15명을 일방적으로 쏴 죽임. 이 중 7명은 여성, 3명은 아동이었음]

by 하야니 | 2009/02/26 23:12 | 트랙백 | 덧글(0)

퍼온글)애플신화

아이팟, 맥북, 아이맥으로 대변되는 애플컴퓨터사는 다른 글로벌 IT기업들과 마찬가지로 국내 소비자들 사이에 크게 알려지지 못한 기업 중 하나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애플에 대해 아이팟을 제작하는 MP3전문 기업으로 오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윈도를 만든 빌게이츠의 마이크로소프트와 함께 해온 PC 산업의 중심 기업인 것에 대해 좀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스티브 워즈니악과 스티브 잡스, 이 두 사람의 이름으로 시작돼는 애플의 역사는 MS의 역사만큼이나 PC산업에 많은 영향을 끼쳤고 굉장한 변화를 이끌어 왔다. 혹자는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PC의 기본 개념을 정립한 기업으로 애플을 언급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애플이라는 기업이 과거의 PC산업에 끼친 영향은 무엇이었으며 미래의 PC산업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애플의 시작
애플은 1976년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 로널드 웨인의 세 사람에 의해 창립되었다. 서로의 생각과 기술을 바탕으로 새로운 컴퓨터 시스템을 만들기를 원했었고 결국 애플 1 을 탄생시키게 되었다.

그들이 만들어낸 애플 1은 산업계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고 시장에서의 반응도 냉담했었다. 주변의 지인들과 상인들을 설득하여 조금씩 판매량을 늘려가던 애플 1은 미국의 유력한 전자 부품 판매 회사인 ‘크래머 일렉트로닉스(Cramer Electronics)’의 눈에 띄게 되어 주문 판매를 시작하게 되었다.


최초의 애플 컴퓨터인 애플 1의 시장 진입이 이루어진 후 그들은 바로 신제품 개발에 착수했고 보다 향상된 성능과 키보드 일체형의 모습을 가진 좀 더 완전한 형태의 애플 II를 개발하게 되었다.

개발 직후인 1977년 3월, 미 서부 해안 컴퓨터 전시회(West Coast Computer Faire)에서 처음 소개된 애플 II는 다른 경쟁사의 PC들 보다 고가였지만 곧 시장을 선도하는 상품이 되었으며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 붐을 이루어 이후 컴퓨터 시대를 본격적으로 여는 시발점이 되었다.


애플 II는 흑백의 문자로만 이루어져 있던 PC사용 환경을 컬러 그래픽으로 장식하기 시작했으며 오픈 아키텍처의 적용으로 높은 완성도를 통해 사용자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게 되었다. 당시 개발된 스프레드시트 등의 프로그램들이 애플 II의 활용도를 높여주는 역할을 했고 개인용 PC로 개발되었던 애플 II가 업무용 시장으로 그 영역을 확대하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애플 II의 성공과 함께 다양한 후속기종을 내놓게 되었고 이와 함께 더욱 완성도 높은 소프트웨어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PC산업의 규모는 점차 확대되며 유능한 소프트웨어 및 하드웨어 개발자들의 등장에 촉진제가 되었다.


80년대 초반 애플은 교육용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어린이도 쉽게 다룰수 있는 컴퓨터 언어인 로고(LOGO)와 같은 소프트웨어와 교육용 콘텐츠로 세계의 여러 학교에서 환영 받았다. 이러한 교육 시장으로의 진출은 캘리포니아 주 소재의 학교마다 하나씩 애플 II 컴퓨터와 소프트웨어를 지원한 데에서 시작되었다. 교육 시장에서 애플의 확고한 선점은 가정용 시장에서도 큰 힘이 되었고 개인용 컴퓨터 시장을 선도하는 위치에 이르렀다.

하지만 당시 업무용 컴퓨터 시장이 큰 수익성을 가질 거라 예상했던 IBM과 MS는 서로간의 공조체제를 구축하여 새로운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데 막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경쟁 속에서 애플은 고전을 면치 못했고 결국 1980년 5월 애플 Ⅲ를 선보였지만 냉각팬 과열과 같은 기기적 결함 등의 문제로 수천 대의 컴퓨터를 리콜해야 하는 상황이 오는 등 시장에서의 상황이 계속 악화 되어갔다.

이 상황에서 IBM은 중대형 컴퓨터로 쌓아 올린 역사와 전통에 의한 신뢰감을 배경으로 한 IBM PC의 기치 아래 다른 협력사들에게 개방적인 하드웨어를 생산했고 MS의 MS-DOS를 번들로 제공한 16비트 개인용 컴퓨터를 시장에 선보였다.

결국 개인용 컴퓨터 시장에서 애플의 시장 점유율은 급속도로 떨어지게 되었고 시장공략에 실패하기에 이른다. 결국 MS와의 경쟁에서 밀려난 애플은 다른 전술을 구사했는데 독자적 시스템을 통해 새로운 PC 환경을 구축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폐쇄적인 하드웨어 정책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당시 스티브 잡스는 제록스사와 함께 진행된 프로젝트를 통해 미래의 컴퓨터에는 GUI (Graphic User Interface :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애플의 차세대 PC 프로젝트였던 애플 LISA에 이를 적용하기로 했다. 애플 LISA는 1983년 GUI가 적용된 최초의 개인 컴퓨터로 시장에 등장했지만 9,995달러에 달하는 높은 가격과 제한적인 소프트웨어 때문에 상업적인 실패를 맛봐야만 했고 이로 인해 스티브 잡스는 경영 내분으로 그룹에서 밀려났고 제프 라스킨이 추진하던 보다 저가의 컴퓨터 프로젝트인 매킨토시로 대체되었다.


■애플의 중심 프로젝트 매킨토시
1984년 애플은 매킨토시(Macintosh : 이하 MAC)를 발표했다. 매킨토시는 슈퍼볼 경기 중계방송에서 방영된 유명한 텔레비전 광고를 통해 알려졌다. ‘1984’로 알려진 이 광고는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것이다. 150여만 달러를 들인 이 광고는 리들리 스콧이 감독을 맡았고 슈퍼 볼 XVIII 기간이던 1984년 1월 22일에 방송되었다.

광고를 통해 애플은 IBM PC가 빅브라더이고 매킨토시는 바로 그 빅 브라더를 타도하는 영웅이라는 것을 말하려고 했다. 사실상 이때부터 IBM계열의 PC와 애플 MAC의 대립적 경쟁 구도가 시작 되었다.

1985년 스티브 잡스가 영입했던 존 스컬리는 스티브 잡스와의 내분 끝에 잡스를 애플에서 몰아내고 최고경영자에 취임한다. 1985년, 친 스컬리 경향을 갖게된 애플의 이사회는 스티브 잡스로부터 주요 업무를 박탈했다. 잡스는 후에 애플에서 퇴사하고 넥스트 사를 창업하게 된다.

이후 매킨토시는 인쇄프로세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성공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훌륭한 인쇄 품질의 레이저라이터와 페이지메이커의 출시는 매킨토시의 구세주 역할을 한 것이다. 레이저라이터는 합리적인 가격으로 출시된 최초의 레이저 프린터여서 훌륭한 출력 품질을 만들 수 있었고 WYSIWYG형 전자 출판 소프트웨어인 페이지메이커는 본격적인 전자 출판용 솔루션이었다.

이런 시스템의 등장과 함께 매킨토시는 본격적인 전자출판의 시대를 열었다. 이후 전자출판 시장이 확장됨에 따라 애플의 매킨토시는 DTP(DeskTop Publishing)의 주축을 담당하게 되었고 인쇄 및 디자인 관련 업무의 80%이상을 매킨토시가 점유하기에 이른다. 이 시스템은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으며 Quark Xpress와 어도비의 그래픽 소프트웨어를 통한 DTP 솔루션이 인기를 끌고 있다.

동시대인 1985년 MS는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기반으로 하는 윈도 1.0을 발표했지만 매킨토시의 OS 시스템에는 위협적인 대상이 못되었다. 하지만 이후 윈도 3.1와 95의 등장으로 상대적으로 고가였던 매킨토시의 저렴한 대안으로 떠오르며 PC 시장에서 패권을 쥐게 되며 그래픽 솔루션 및 전문작업에는 매킨토시가, 일반 개인 사용자들에게는 IBM호환 PC가 자리를 잡는 모양새를 갖춰가기 시작했다.

1991년에 애플은 MAC OS에 대한 대대적인 개선 작업을 벌여 시스템 7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다. 속도가 느리고 많은 컴퓨터 자원이 필요하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컬러 인터페이스 기반의 다양하고 강력한 네트워크 호환성등 차세대 컴퓨터 운영체제의 발전에 큰 전기를 마련했다.

당시의 경쟁제품인 OS/2나 윈도, 아미가 등에 비해 훨씬 발전된 형태인 시스템 7은 애플이 2001년 후속 운영체제인 MAC OS X를 내놓기 전까지 애플이 발매한 모든 컴퓨터의 기반이 되었다.

한편 MS 윈도의 지속적인 발전으로 사람들은 더 저렴하고 보편적이며 실용적이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고, 운영체제 시장에서의 점유율 차이가 점점 벌어졌다. 특히 업무용 시장에서의 MS 제품의 성공과 저렴한 가격의 컴퓨터와 주변기기, 그리고 점점 더 늘어나는 지원 소프트웨어들로 인해 많은 고객들이 ‘윈텔(윈도+인텔)’ 진영으로 돌아섰고 MS에 대한 시장 점유율 싸움에서 다시 우위를 찾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1990년대 후반 애플은 자사의 운영체제의 멀티태스킹 능력과 메모리 점유에 대한 개선을 추진했지만 내린 결론은 차라리 새로운 운영체제를 채택하여 매킨토시에 맞게 만드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었다. 결국 애플은 Be의 BeOS, 넥스트의 넥스트스텝, MS의 윈도 NT를 고려하기 시작했다. 최종적으로 애플은 넥스트스텝을 채택했고 이는 훗날 맥 오에스 텐의 기반이 된다.

이런 결정에 따라 1997년 2월 7일 애플은 넥스트 사와 넥스트스텝 운영 체제에 대한 인수를 마쳤다. 덕분에 스티브 잡스는 다시 애플로 돌아오고 CEO였던 길 아멜리오는 저조한 실적과 위기 상황으로 경영을 몰아간 책임을 지고 최고 경영자에서 물러났다. 이 때 스티브 잡스는 임시 최고경영자의 자격으로 다시 애플의 경영을 맡게 되었고 다시 재정비와 부흥을 이끌게 되었다.

스티브 잡스는 먼저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1997년 맥월드 엑스포에서 MS와 파트너십을 체결한다고 발표했다. MS는 향후 5년간 계약 관계를 유지하며 매킨토시용 MS 오피스를 발매하고 애플에 대하여 1억 5,000만 달러의 투자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MS의 웹브라우저인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매킨토시에 번들로 탑재한다고 밝혔다.

MS 회장 빌 게이츠는 스크린상으로 밝힌 메시지에서, MS가 향후 매킨토시용으로 발매할 소프트웨어의 로드맵을 밝히고 애플의 성공을 위해서 도움이 될 것에 대해 기쁘게 생각한다는 요지의 메시지를 보냈다. 스크린을 통해 화상이 나온 뒤 스티브 잡스는 MS와의 필요 없는 경쟁보다는 애플을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을 주장했다. (당시 MS는 반독점 소송 진행 중이었다.)

1997년 11월 10일 애플은 새로운 인터넷 시대에 맞추어 온라인 스토어를 발표했다. 이 사이트는 넥스트를 인수하면서 같이 가지고 온 웹오브젝트 응용 프로그램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이 새로운 온라인 직거래 상점은 애플의 새로운 생산 전략에 따라 새롭게 개편되었고 파워피씨 G3을 탑재한 새로운 컴퓨터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Think Different, Apple's Design

1998년 애플은 초창기 매킨토시 128K의 디자인으로 회귀하여 모니터와 본체를 일체화한 디자인의 새로운 컴퓨터 아이맥을 선보였다. 아이맥을 디자인한 팀은 훗날 아이팟을 디자인한 조나단 아이브가 이끌고 있었다.

투명한 플라스틱 소재를 베이스로 채택하여 매우 혁신적인 디자인을 선보였다. 아이맥은 시장에서 대단히 새로운 평가를 받으며 발매 첫달에만 거의 80만 대가 판매되어 애플 위기 회복의 전기가 되었다. 아이맥 덕분에 애플은 1993년 이래 처음으로 흑자를 기록하게 된다.

애플은 데스크톱 PC에서의 성공을 기반으로 제품 디자인에 대한 전략을 꾸준히 수립해 왔다. 애플은 보다 나은 디자인의 제품을 만들기 위해 폴리카보네이트 재질의 흰색 일반사용자용 아이맥과 아이북을 출시하고 교육 시장을 겨냥한 일체형 컴퓨터인 이맥(eMac)을 출시했다.

당시 조개북으로 불리던 아이북의 초기 모델은 아이맥과 패밀리룩을 형성하며 새로운 PC 디자인의 이정표를 제시했다. 한편 전문가용 매킨토시 컴퓨터들은 금속 재질의 외장을 사용했다. 이후 2001년 티타늄 파워북을 시작 금속 재질의 제품들이 대거 등장하며 2003년에는 파워맥 G5가, 2004년에는 시네마 디스플레이가 출시되었다.

아이맥을 비롯한 새로운 애플 제품이 성공을 거둠에 따라 수익 또한 상승했다. 컴퓨터 관련 언론들은 애플의 발표에 대하여 귀를 기울였고 애플의 기술진이 다음에는 어떤 프로젝트를 내어 놓을지에 대한 공론이 활성화되었다. 애플이 어떤 새로운 것을 선보이면 사람들은 이것을 ‘새로운 표준’이라고 불렀다.

■OS X의 등장

2001년 애플은 차세대 매킨토시용 운영 체제인 맥 오에스 텐을 발표했다. 넥스트의 오픈스텝과 BSD 유닉스에 기반을 두어서 매킨토시 운영체제를 다시 재설계한 운영체제이다. 일반 사용자와 전문 사용자 모두를 위해 유닉스의 장점인 안정성과 신뢰성 그리고 높은 보안성을 가지는 한편 매킨토시의 전통적인 사용하기 쉽고 간편한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결합하였다.

또한 애플은 클래식 운영 체제에서 쉽게 오에스 텐으로 이주할 수 있도록 에뮬레이션을 통해 클래식 운영 체제 환경에서 사용하던 응용 프로그램을 계속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개발자들은 카본 API을 이용하여 기존의 클래식 운영 체제용 소프트웨어를 맥 오에스 텐에 맞게 재컴파일하여 쉽게 맥 오에스 텐용 소프트웨어를 개발할 수 있었다.

2002년 애플은 낫씽리얼(Nothing Real)과 그 회사의 디지털 콤포지트 프로그램인 셰이크(Shake)를 인수했다. 같은 해에 애플은 Emagic을 사들여서 전문가급 음악 제작 프로그램인 로직(Logic)으로 발매했다. 이로 인해 애플의 전문 음악가용 소프트웨어에 대한 지원이 강화되었다.

한편 일반 사용자용 음악 제작 프로그램인 개러지밴드(Garage Band)를 개발해 발매했다. 이 소프트웨어는 2002년 아이포토가 출시됨에 따라 애플의 전문가용 패키지와 일반사용자용 솔루션인 아이라이프에 합쳐져서 매킨토시 컴퓨터의 소프트웨어 지원에 큰 힘이 되었다.

여기에 오피스 사용자들을 위한 아이워크의 등장은 업무용 PC로써의 매킨토시의 역할을 확대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기존 MS진영의 오피스 프로그램군인 MS 워드, 엑셀, 파워포인트를 사용하기 위해 많은 오픈오피스 프로젝트에 기대왔던 매킨토시 유저들은 아이워크의 등장에 환호했다.

먼저 발매했던 MS의 MAC용 오피스의 완성도도 훌륭했지만 OS X를 기반으로 새롭게 등장한 오피스 프로그램인 아이워크의 유저들은 점차 늘어만 갔다. 특히 파워포인트와 같은 역할을 하던 키노트는 프레젠테이션의 집중도를 높이는 다양한 이펙트로 더욱 큰 사랑을 받았다.

한편 애플은 매크로미디어로부터 동영상 편집 소프트웨어인 파이널 컷 프로를 구매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일반 가정용 시장을 겨냥한 아이무비, 전문가를 위한 파이널 컷 프로가 1999년에 출시되었다. 파이널 컷 프로는 현재 가장 성공적인 비디오 편집 프로그램의 하나가 되었다.

또한 애플은 Astarte 사의 DVDirector 프로그램을 구매하여 일반용과 전문가용으로 각각 iDVD와 DVD 스튜디오 프로를 출시해 영상 편집 분야에도 진출하는 등 멀티미디어 전문 하드웨어로써의 입지를 더욱 두텁게 했다.

■최초의 인텔 베이스 맥 컴퓨터, 아이맥

애플 CEO 스티브 잡스는 2005년 6월 6일 키노트에서 애플이 2006년부터 인텔 프로세서를 탑재한 매킨토시를 만들 것이라고 공식적으로 밝혔고 2006년 1월 10일 애플은 인텔 프로세서를 장착한 최초의 매킨토시를 선보였다. 이 때 선보인 기종은 맥북 프로와 아이맥이었다. 두 컴퓨터 모두 인텔 코어 듀오 칩셋을 탑재하고 있었으며 더 빠른 속도와 향상된 성능을 선보였다.

2월 이후, 애플은 인텔 프로세서를 탑재한 맥 미니를 출시했다. 맥 미니는 코어 듀오 프로세서와 코어 솔로 프로세서(싱글 코어)를 장착하고 미디어 솔루션인 프론트로(DVD, 음악 파일, 동영상 파일, 이미지 파일을 손쉽게 볼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소개하여 가전시장으로의 진출의도를 내보였다.

2006년 8월 7일 WWDC에서 파워맥을 대체하는 맥 프로, 인텔 프로세서를 탑재한 Xserve를 발표함으로써 애플은 종전에 예고했던 것 보다 더 빨리 인텔 CPU기반으로의 이전을 완료했다. 4월 5일에는 애플에서 인텔맥에 윈도 XP 등 다른 운영체제을 설치할 수 있게 도와주는 부트캠프 소프트웨어를 발표하였다.

현재 인텔 프로세서 기반 매킨토시는 공식적으로 맥 오에스 텐, MS 윈도와 리눅스를 가상 환경을 거치지 않고 모두 구동할 수 있는 유일한 컴퓨터이다. 맥 오에스 텐인 10.5 버전 레오파드(Leopard)에는 부트캠프를 패키지로 기본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인텔 칩셋을 적용한 애플의 전략은 성공적이었고 PC시장에서의 점유율을 높이는데 큰 기여를 했다. 특히 윈도 시스템에 젖어있던 수많은 PC유저들이 MAC으로 좀 더 쉽게 스위칭 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을 정도로 부트캠프의 역할은 굉장했다. 실제로 MAX OS X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애플의 하드웨어 디자인에 매료돼 제품을 구매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결과적으로 MAC OS의 매력에 대한 호기심에 스위칭하는 유저들도 늘어가고 있다.

애플은 인텔 칩셋을 적용한 포터블 라인업을 강화하며 맥북 시리즈의 출시와 함께 시장에서 좋은 위치를 선점하게 된다. 맥북의 판매량은 이전 아이북과 파워북의 판매량을 갈아치우며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고 전문가급의 맥북 프로 시리즈의 판매량도 늘어났다. 스티브 잡스는 2008년 맥월드에서 세계에게 가장 얇은 노트북인 맥북 에어를 공개하며 하드웨어 개발 능력을 과시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아이팟, 세계 MP3시장을 장악

2001년 9월 23일 애플은 휴대용 음악 재생기인 아이팟을 발표했고 11월 10일에 정식 발매했다. 곧이어 온라인 음악 판매 서비스인 아이튠즈 뮤직 스토어(iTunes Music Store)가 열렸고 아이팟과 연동되는 음악 파일들을 한곡당 99센트에 판매했다. 이 서비스는 정식으로 음반사와의 계약을 통해 합법적인 디지털 음악을 공급하는 시장의 1인자가 되었고 2006년 9월에는 15억 곡 다운로드라는 기록을 세웠다.

아이팟은 액정표시장치, 내장 배터리, 대용량 메모리와 클릭휠 방식의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매킨토시와 같은 편리하면서도 간결하게끔 만들고 이를 컴퓨터에 설치한 소프트웨어인 아이튠즈을 통해 음악과 기타 데이터들을 관리하고 동기화시키는 제품이다.

애플은 이를 기반으로 점점 사용자 경험을 더욱더 확장하여 컬러 디스플레이를 채용하고 사진 및 비디오를 플레이할 수 있도록 하였다. 특히 음반회사들과 할리우드 영화사, 방송사들과의 관계를 통하여 음반, 영화, 텔레비전 쇼 등을 아이튠즈 뮤직 스토어를 통해 판매하고 있다. 또한 팟캐스팅라 불리는 손수제작물(UCC)인 개인 방송들을 쉽게 구독할 수 있는데 대부분 무료이어서 사용자들의 편의를 대폭적으로 향상 시키고 있다.

■아이팟의 최종 진화, 아이폰/아이팟 터치

2007년 1월 9일 최고경영자인 스티브 잡스는 맥월드 샌프란시스코에서 사호를 애플컴퓨터에서 애플로 개명한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동시에 아이팟의 최종 진화 형태인 아이폰과 아이팟 터치를 선보였다. 모든 기능을 터치스크린으로 작동하는 스마트 폰의 형태를 띤 아이폰의 등장은 모바일 폰 시장의 흐름을 뒤흔든 일대 사건이었다.

아이폰은 맥 오에스 텐 기반으로 기본적인 음성 통화에 2세대 무선통신 기술인 GSM 방식, 무선 데이터 통신에 2.5세대 무선통신 방식인 GPRS/EDGE와 Wi-Fi를 사용하여 통신이 가능하고  PUSH 방식의 IMAP 이메일, 인스턴트 메신저 형식의 SMS, 사파리, 향상된 음성메시지, Wi-Fi (IEEE802.11b/g), 블루투스 등의 기능을 탑재한 손안의 컴퓨터를 표방하고 나섰다.

또한 구글과 제휴하여 아이폰에 맞춰 특별히 제작된 구글 맵 기능을 사용하면 지도와, 지역 정보, 위성사진들을 아이폰에서 볼 수 있다. 자신의 위치를 찾을 수도 있는데 GPS와는 달리 근처의 무선 기지국과 무선랜 시설을 인식하여 자기 위치를 추적할 수 있다.

스티브 잡스는 이 기능을 설명하면서 근처의 스타벅스 커피점을 검색해 커피를 주문하는 전화를 하기도 했다. 그 외 유튜브 동영상을 아이팟에서 볼 수 있는 H.264 포맷으로 변환하여 볼 수 있다. 이처럼 차세대 PDA또는 스마트 폰이라 불리우는 아이폰/아이팟 터치는 2세대 제품을 출시하며 더욱 큰 인기를 얻고 있으며 전 세계의 모바일 폰, MP4플레이어 제조사들의 경쟁과 도전을 끊임없이 받고 있다.

■iTMS의 컨텐츠 시장 장악능력

애플은 하드웨어 제조에서 그치지 않고 더욱 발전적인 형태의 소프트웨어와 콘텐츠 사업을 이어나갔다. 2007년 WWDC에서 아이폰과 함께 발표한 TV와 컴퓨터, 아이팟을 연결하는 셋톱박스인 애플 TV를 시장에 내놓으며 또 다른 도전을 예고했다. 이는 애플이 앞으로 컴퓨터시장이나 휴대용 음악기기와 판매시장 뿐 아니라 가정용 전자기기와 휴대폰 시장으로 그 사업영역을 대폭 확장하는 비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미 음원 콘텐츠를 서비스하던 아이튠즈 뮤직스토어(iTMS)에서는 애플 TV 및 MAC에서 감상할 수 있는 유료 영상 콘텐츠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비디오와 DVD대여점의 역할을 온라인으로 옮겨온 것이다. 훨씬 이전부터 온라인 콘텐츠 제공 업체들이 이러한 방식의 서비스를 기획하고 시도해 왔으나 성공을 이루지 못한데 반해 애플은 전용 하드웨어의 공급으로 기반을 다지고 통합 소프트웨어인 iTMS의 도입으로 성공적인 서비스를 시작할 수 있었다.

iTMS의 확대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아이폰과 아이팟 터치 어플리케이션의 공급 창구로써 역할을 추가하기 위해 어플리케이션 스토어(AppStore : Application Store)를 오픈하기에 이른다. 관련 SDK를 통해 누구든 어플리케이션을 제작하여 판매할 수 있는 역할을 하는 AppStore는 수백만건에 달하는 전무후무한 콘텐츠 다운로드 기록을 세우며 새로운 온라인 사업 아이템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by 하야니 | 2009/02/22 09:50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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